달군님의 [Alix Dobkin] 에 관련된 글.
덧글로 쓰고 싶었지만 너무 길어서...
몇군데 빠진 곳이 있는데, 도저히 못알아 듣겠어...혹시 들리면 추가해주삼.
(?) 해둔곳이 모르겠는 부분.
지명이 많이 나오고 특정지역 사투리도 있어서 꽤 듣기 힘들었음.
검색이 안되던걸...Alix Dobkin 홈페이지 하나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만) 들었어염...^^
제목 : Lesbian Code
She's a B.D Baby Dyke
She's a P.D possible probable (Dyke)
She's a D.D yes she's a Definite Dyke
She's a P.O.U Positively One of Us
She's got high L.P(Lesbian Potential) good potential
suffering from P.L.T Pre-Lesbian Tension
too terrible thing to watch
She's wanna be a D.O.T What if
she could be a Dyke Of Today
she could be a Dyke Of Tomorrow.
Oh then to be a D.I.T a Dyke In Training
or an F.D.A a Future Dyke of America
She will be a Betty
a friend of Dorothy
She will be our kind
That's O.K
Lesbian Code
Is she Lithuanian? (?)
Is she Lebanese? Well she's gifted.
She's Lesbysian Lesbonic and I happen to know she's a Vegetarian.
She's a member of the team.
She's a member of the lodge of the family
She's a member of the church of the club of the committee
and She sings in the choir
Is she a Lima bean from Kentucky
or she's a green new bean or she refried
Is she a canned bean in the closet
or Is she now with a man Oh!
then she's a has-been
She's a Fresbian in Fresno in lancing 48912
she lives in Dyke heights
she's an arkansas earth Dike motor city Dike
It goes to the pagoda with the chinese
you bet
she colors outside the lines in Charlotte
Lesbian code
Is she an Aussie Dyke
Check it out
What do you recon
She's a likely one spottle(?)
got to be
oh She looks a bit sus(pect)
She must be of the faith
I'll put in on Leiboy(?)
She's a lesbian from New Zealand
She's come from (?) of Kiwi fruit
you can spot the bus driver spot the camp girl
she's on the bike
campy as a row of tents
She's a how is your mother over in Dublin
She's an whatever you're having in Belfast in Cork
She's a choir girl a Lass
Gothic (?)
She drinks a Tipperary water
Lesbian code
she's the church of England she's ginger
She's got dutch boy fingers
She's a M.O.T a Member Of the Tribe
She's a gold stock on her I.D card
She shops at Tescos a sister of the inclination
She's elite in Scotland a high (?)
She's all right
That's a hundreds points
she's a carpenter from Bristol
Is she a bus driver from Nottingham
Is she a motor Dyke Is she a veggie dyke
Does She live in the Dykoria
then She's a Fresbian in Fresno
in lancing 48912
She lives in Dike heights
sort of like 2 O 4 O
Dyke hard
she's an arkansas earth Dike motor city Dike
It goes to the pagoda with the chinese
you bet
she colors outside the lines in Charlotte
Lesbian code
Lesbian code
she's a lemon she's a lasso
Lesbian
She's a big one
she's a bowler
she wears sensible shoes
Lesbian code
D.L.N.D.R
Dyke to the Left and Dyke to the Right
Lesbian code
It goes from Israel
She's like that
Lesbian code
Here's the non verbal non verbal(^^;;)
Lesbian code
어제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급하게 읽었다.
굳이 급할 것도 없었는데, 굶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대충 끼니를 때우듯,
급하게 읽어치웠다.
요새 아마도 나는 많이 변한 듯 싶은데,
그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독서였다.
흔히 영화속에서 진부하게 그려지듯이,
책을 펼치면 책속의 세상으로 완전히 빠져들어가서 마지막 단어가 나올때까지
현실의 공기로 숨쉬지 못하곤 하던 내가
가장 아끼는 책들로 분류해놓은 곳에서 꺼내든 책을
무슨 패스트푸드라도 먹듯이 허겁지겁 대충 여기저기 흘리며 씹지도 않고 삼켰던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때, 나는 좀 놀랐다.
심지어 눈물 한방울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책을 읽을때 고의적으로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특히 좋아하는 책일수록, 소설이라면 더더욱
내 감정의 흐름을 미리 예상하지 못하는 즐거움을 위해서
좋아하게 된 책은 일부러 잊어버리고 한참 있다 한번씩 다시 읽는다.
격한 감정의 변동이 있었던 책이었다는 분류기준에 의해 모여있는 열권 남짓한 책들은
내 삶의 치료제이고 안식처이고 흥분제이고 연인이다.
눈물을 흘려야 할 곳이 어디었더라...
논리적으로 글의 내용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이제 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내용을 기억하게 될것이다.
.
.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눈물은 언제나 자기연민이다.
남의 고통을 자기것으로 느낄때나 남의 아픔에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나, 느끼지 못하게 된거야?
아니, 넌 아직도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어.
그냥, 너는 난장이들로부터 그만큼 멀어진거야.
그런 삶을 잊어버린거야.
이렇게 빨리 잊을 수도 있어?
그럼.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일종의 자기방어기제일 뿐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는 것이 좋아.
고양이 목덜미의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일단 행복해 한다.
판단은 뒤로 미루고, 고양이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는 왜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할까?
나는 왜 인간의 냄새보다 고양이 응가구멍냄새, 배냄새, 목덜미 냄새를 좋아할까?
나는 왜 고양이 아기를 낳고 싶은가?
등등의 행복한 고민에 빠져든다.
오늘도 하루.
낯설다.
낯설다...
어디에 있어도 낯설다.
누구와 있어도 낯설다.
언듯, 나와 비슷한 종류일거라 생각되는 하나, 혹은 둘을 만나지만
함께 있으면서 조금씩 낯설어진다.
처음부터 실망은 하지 않았다.
같아지려고 해보지 않았으니까.
어제는 이상한 곳에 가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구걸을 하고 말았다.
같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돈을 벌게 해달라고.
오래간만에 죽고 싶었다.
한동안 죽음을 잊고 살았다.
내곁에 죽음이 없는 것처럼.
죽음만이 유일하게 익숙하다.
웰빙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과
부자아빠와 치즈를 옮기는 쥐들의 시대에,
혹은
긍정과 자신감과 스타일의 시대에
이 구시대적, 시대착오적 발상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걸까?
이 실존주의적, 사치스러운 고민은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병들게 하는걸까?
나를 죽게 내버려두어줘요.
왜 생명은 소중한 것으로 추앙받아야 하는데?
왜 인간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오해되어야 하는데?
구질구질하고 혐오스럽고, 자기합리화의 고질병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거나
혹은 속에서부터 늙은 냄새가 날정도로 늙은 어린애들 따위
인권같은건 없었으면 좋겠어.
다 같이 죽어서 거름이나 되면 좋겠어.
살기위해 저지르는 끔찍한 일들을 좀 봐.
만면에 배부른 척 미소를 띄고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노동이라고
발밑에 피바다를 붉은 카펫으로 가리면 아무도 보지 못하고...
삶을 내세워, 아이들을 내세워
구더기 가득한 오물덩어리를 살짝 가리는거 우웩...
싫어.
미안, 나는 죽고 싶은데
너희들이 나를 붙잡잖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다.
한 사람의 삶, 한 단어, 한 이미지는
진실한 하나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사실은 옳은 것일까?
나는 언제나 그 지점이 마음에 걸려왔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의 기호로부터 다른 의미를,
심지어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조차 끊임없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걸까.
헛갈려서는 안된다.
도덕의 잣대로 현실을 평가하면서 스스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사실에 대해 도덕적 개입을 하는 것이 옳지않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그것이 사실을 지키는 길인양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
사실이 무엇인가도 결코 알 수 없으면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리하여 결국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 역시 위험하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대해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근본적 분리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은
그 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은 인간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가 놀랍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고(사실 이부분은 좀 믿기 힘들지만)
노예가 인간이 되었고 흑인이 인간이 되었고 여성이 인간이 되었고
이제 백인과 남성을 인간으로 만든 후
모두가 더더욱 인간이 되면
서로가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어서
SF 소설에 가끔 등장하는 나와 타인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
어쩌면 그것이 '인간'화의 궁극인 것일까?
나는 점을 보지 않는데, 그닥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닥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시 맞으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이 사실은 심리적인 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기타등등
하여간 그닥 돈을 들일 마음이 안든다.
하지만, SF 소설은 읽는데,
그들이야말로 진정 예언자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언은 꽤나 현실적으로 대개 이루어져 왔다.
성경이나 노스트라다무스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어쩌면, 그들의 상상력이
우리의 상상력보다 조금 빠를 뿐 비슷한 수준의 것이기 때문인 것일까?
우리가 다른 상상을 하면
'인간화'의 과정도 달라지고
예언자들의 상상도 달라져서
세상이 달라질까?
야옹.
윌리엄깁슨은 뉴로맨서의 세상이 지금 현재의 세상보다 더 무서운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점이 바로 무서운 점이다.
세상이 그냥 지금처럼 계속 무서운 것.
무섭지 않은 세상을 상상해야지.
할 수 있는게 그것 뿐이다.
"미제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우다가 숨진 혁명가가 술이나 여성 속옷 광고에 모델이 된 꼴은 비극이다"
언듯 공감이 갈 듯 하지만
솔직히 굉장한 시대착오적이고 초라한 사고방식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2006년 8월,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자본주의는 '운동'을 이윤의 도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이윤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미지를 이윤의 도구로 삼은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기획자들, 디자이너들, 작가들이다.
그들은
'혁명'을 비하하거나 게바라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 게바라의 강하게 반전된 얼굴 이미지가 너무 멋져서,
단지 멋진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그 이미지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면 멋지다고 느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철없음을 탓할 것인가? 도덕에 대한 무감각을 탓할 것인가?
고래부터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도덕을 무시하고 아름다움을 지지해왔다.
그들은 진보진영만의 도덕을 따라주지도, 자본의 도덕만을 따라주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룰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체 게바라의 반전된 얼굴이미지가 특별히 너무 아름답고 멋진 이유는 무엇일까?
모자에 붙은 별과 잘생긴 게바라의 얼굴이 너무 잘어울려서?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조가 조화로워서?
다른 누구도 아닌 게바라의 얼굴이 정말 멋진 이유는,
위에 적은 내용들도 포함되겠지만,
무엇보다, 뜬금없게도, 게바라가 정말 멋진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게바라의 아름다움은 진보진영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의미를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붉은 바탕에 놓여진 게바라의 반전된 검은 얼굴에서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막연하게 느끼게 된다.
게바라는 그런 삶의 상징이며,
기표만 남은 것같은 이 시대에도, 잡히지 않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개개인에게 조금씩 다른 어떤 기의(의미)로 그 상징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술병이나 스타벅스 잔에서, 심지어 여성속옷에서(여성속옷이 어때서?)
게바라의 얼굴을 발견하는게 가슴 아픈 이유는,
그들이 자기연민에 빠지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이 게바라의 얼굴을 상품광고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슴아픈 이유는
더이상 그들이 게바라의 의미를 자기것으로 만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의 상징인 게바라의 얼굴 이미지가 자본주의에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게 된것은,
자본주의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진보진영의 잘못이다.
자본주의가 이전 운동의 성과를 너무 쉽게 무시한다고,
진보진영에서 징징대는 것은 진보진영 스스로에 대한 모욕이다.
대체 누구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게바라의 얼굴은 아름답다.
나는 그의 얼굴을 곳곳에서 보는 것이 좋다.
자본론이 드라마에 언급되는 것은 웃기다.
이해도 못하면서 중얼대는 것이 그냥 재밌다.
게바라 본인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기분이 많이 나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그의 아내에게도 많이 미안하다.
그녀의 투쟁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모욕하지 않는 길은
이미지를 사용한다고 자본에게 징징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대항하는 다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언젠가는 다른 세상의 술병과 내 속옷에서 게바라를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아 글에 빈곳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이 빈곳을 메우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겠구나....
그래서, 귀찮아서 그냥 두기로 했다.
될대로 되라지 췟, 퉤!
생각해보니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자본과 상품과 그 내부의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들을 구분하지 않고
통째로 묶어 '자본'이라 지칭하는 것이 기분나쁘다.
자본주의 내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고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는데,
그들이 세계를 변혁하기 보다 사사로운 자신의 노동,
그 누군가가 그렇게 숭고하다 했던 그 노동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해
무시하거나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칼을 품고 글을 쓴다.
활동가가 된다는 건 사실 정말 행복한 일이다.
삶과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자신이 택하는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활동가의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지만 가장 자기중심적인,
가장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강경한,
그런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
.
.
지식노동자이던 아빠는 실직하고나서
월남전에서 다친 오른손때문에 육체노동도 못한다.
주유소에서 주유기를 왼손으로 다루다가 왼손까지 망가졌다.
택시운전을 하려고 나갔다가 하루종일 일을 한뒤
장애인은 안써준다고 돈도 못받고 쫓겨나고
아파트 수위같은 건 꿈도 못꾼다.
작은 봉다리도 무거워서 아무것도 안들고 다니는 아빠가
한달에 10만원이라도 벌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역시 답이 없다.
보증금 300에서 월세가 매달 30씩 깎이는 방에 혼자 사는 아빠가
뭘 먹고 어떻게 사는지 나는 잘 모른다.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을 담보로 대출을 하도 많이 받아
이자랑 원금떼면 실제 나오는 돈은 거의 없을텐데.
국민연금은 연금을 못내서 못받는다.
돈때문에, 아빠가 활동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못받는 거보다는 적은 활동비라도 받으면
내가 훨씬 덜 힘들테니까.
좀 더 진지하게는,
당시 25살에 고등학교 중퇴였던 동생의 경우
긴장하거나 불안할때 보이는 틱증세가 심해서
사회생활이 안되고 교육도 제대로 못받아서 사고의 수준이 초등학교 수준이고...
그래서 동생을 활동가로 만들고 싶었다.
내가 활동을 하면서 누렸던 문화적, 정서적 풍부함과
삶의 기쁨들을 동생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남들과 함께 사는 기쁨이 어떤 건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세상에 활동가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사니까.
그들을 어떻게 하면 활동가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체계적인 활동교육이나, 새롭고 조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운동사회에
그들을 편입시킬 수 있을까?
내가 동생에게 활동가의 삶을 경험해보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때 처음 머리에 떠오른 것은
'동생이 단체에 짐이 되고 귀찮은 존재가 되겠구나...'하는 것이었다.
활동할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들의 공간.
문화적이고 지적이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는 지 아는,
경제적 자립이 가능한 사람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나는 이 공간에 들어오려다 튕겨나간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전업활동의 여건이 되지 않아 자원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엔
자신이 한 노동에 대해 금전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지지조차 받지 못하는 것도 많이 보았다.
닫힌 공간,
삶의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꿈조차 꾸기 힘든 공간.
아직까지는 그런 곳이 활동가들의 공간이라는 느낌이다.
동생에게 매달 적지 않은 일정량의 돈을 보내는데,
그 돈이 항상 모자라서
동생은 또 전화를 한다.
나에게는 많은 돈인데,
동생에게는 택도 없는 돈이다.
알바를 하려는데 핸드폰이 고장나고
몇달째 요금을 못내
연락을 받을 수가 없어서 일을 놓친다고...
20만원만 빌려달라는 걸 정말 돈이 없어서 못보냈다.
전화를 하면
'고객의 사정으로 착신이 안된다'는 안내가 흐르고
동생에게는 그 후로 연락이 없다.
밥은 먹고 있을까?
알바는 구했을까?
처음부터 무리였지만,
고등학교 중퇴에 경미하지만 눈에띄는 정신질환까지 가진
동생을 꼭 대학에 다니게 하고 싶었다.
사실은, 어떻게든 대학이라도 졸업시켜야
내가 평생 짊어질 짐이 덜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화할 돈도 없어 전화를 못하는 건지
무소식이 희소식인지...
오늘 월세랑 아주 적은 생활비를 부치는 날인데
한동안 일을 안해서
내 통장에 잔고가 없다.
현금서비스도 다 받았는데...
쩝...
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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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영어 잘하는구나. 신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