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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핵심 갈등구조는 ‘합리와 비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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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은 기존의 관점으로는 정당이나 사회운동 세력 그 어디와도 연결되지 않는 대중들이 촛불시위에 모여드는 현상을 해석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솔직해지자. 촛불시위에 온 이들 중에 많은 수가 '반MB와 노무현 지지'를 외쳤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촛불이 조금만 급진적으로 변하면 그에 반발하였고, 시위현장에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다. 초기 여중생의 참여, 시위의 독특하고 발랄함 등 몇 가지 특이한 사례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것 아닌가. 

 

촛불시위에 대한 인상은 이쯤으로 하고, 김정훈 교수의 책에 대해 말해보자. 제목이 <87년 체제를 넘어서>라고 되어 있지만, 과연 87년 체제가 무엇인지, 지금과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성격을 비합리성으로 가득찬 ‘조폭국가’라고 정의하였지만, 이게 정치학적으로 엄밀한 규정인지 의문이다. 그는 위기의 대안을 정당정치, 계급정치, 시민사회운동 등의 복원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합리성, 합리적 진보정당 등을 언급하는데, 한국사회에서 정당정치, 계급정치가 복원될 만큼 언제 제대로 해본 적이라도 있는가.

 

김정훈 교수는 합리성을 '말 바꾸기가 아닌 일관성 있는 논리, 소수에 대한 특혜가 아닌 평등한 기회 제공, 일방적이지 않고 토론이 가능한 소통 등'이라고 표현한다. 역시나 말그대로 상식이라는 것을 바꾼 것에 다름 아니다. 상식, 합리성이라는 용어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어떠한 계급이 말하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가 평소에 써온 글에 비추어보면 87년 체제를 넘어서자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최소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수준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문득 그는 왜 진보세력에게만 합리성, 상식을 요구할까, 최근 지방선거에서 유시민, 한명숙으로의 무작정 단일화를 외치는 이들은 배제되는 걸까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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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핵심 갈등구조는 ‘합리와 비합리’”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0-04-28 오후 09:50:13)
기존 체제 논쟁 ‘촛불’ ‘4대강’ 해석 못해
합리적 주체·자발적 네트워크가 새 동력
진보세력과 접합…운동 위기 극복해야
‘87년 체제를 넘어서’ 쓴 김정훈 교수 
 
김정훈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기존 관점과는 색다른 갈등구조를 제시한다. 정치사회학 전공자이자 시민사회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아 온 그는 최근에 펴낸 <87년 체제를 넘어서>에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구조는 ‘합리와 비합리’라고 풀이한다. 우리 사회에는 보수,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이념이 표현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존재하며, 그것은 ‘비합리성’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양극화의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이지만, 미국 쇠고기 수입, 4대강 살리기, 제2롯데월드, 용산참사 등의 문제는 합리와 비합리의 문제다. 
 
26일 만난 김 교수는 “기존의 사회체제 논쟁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짚고자 책을 썼다”고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뤄졌지만 사회 양극화의 심화에서 나타나듯 실질적 민주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복합적인 민주주의의 위기로서 ‘정치의 실패’를 지적한 87년 체제론이나 신자유주의의 심화로 ‘경제의 실패’를 지적한 97년 체제론 모두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사회문화적 민주화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기존의 관점으로는 정당이나 사회운동 세력 그 어디와도 연결되지 않는 대중들이 촛불시위에 모여드는 현상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87년을 ‘현대성의 출발’로 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김 교수는 87년 체제를 분석하며 ‘식민-탈식민’의 접근 방식에 집중한다. 그가 보는 우리 사회의 특징은 ‘식민적 근대화’다. 근대화는 각 사회 영역들이 자율화되고 스스로의 준거논리를 만드는 ‘분화’를 특징으로 하는데, 식민적 근대화에서는 분화뿐 아니라 권위주의 지배 체제가 통치를 위해 분화를 가로막는 ‘탈분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도 관치경제가 앞서는 등의 현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때문에 권위주의 지배 체제가 후퇴한 87년 민주화는, 가로막혔던 각 영역의 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현대성의 출발’로 본다.
 
여기서 현대성의 핵심 개념인 ‘합리성’이 등장한다. 87년 뒤로 꾸준한 민주화의 효과로 반공주의·권위주의 등 식민적 근대의 영향이 줄어들면서 합리성이 형성됐고, 정보화의 효과에 따라 강화되어왔다는 것이다. 이때 합리성은 자발적 네트워크에 기대 토론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연고주의 네트워크에 기대 사익을 추구하는 전근대적인 ‘생존적 합리성’과 구분된다. 특히 이런 합리성은 정치·경제 분야보다 민주화가 더 활발히 진행되었던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 김 교수의 논지다.
 
합리성이 갈등구조의 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앞세웠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이어지면서부터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성격을 ‘조폭국가’로 정의한다. ‘고소영’, ‘강부자’로 나타나는 기득권집단의 연고주의 네트워크가 사익과 경제적 합리성을 내세워 다시금 사회 각 영역에 권위적으로 개입하는 ‘탈분화’를 벌인다. 여기에서 비합리성이 전면에 드러난다.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정책, 날마다 말을 바꾸는 행태, 원칙 없는 기득권 감싸기 등은 진보-보수의 갈등으로만 볼 수 없는, 합리-비합리의 갈등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풀이다. 촛불시위가 문제 삼은 것은 정권의 보수성이 아니라 비합리성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익을 앞세운 비합리적 주체들의 연고주의 네트워크는 굳건한 반면, 자발적 네트워크에 기댄 합리적 주체들은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보세력 역시 계급 또는 민족 지상주의, 소통 없는 정파 갈등, 조직 이기주의 등 전근대성과 연고적 네트워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운동권 동창회’라는 바깥으로부터의 조소나, 대중이 공감하지 못하는 구호 등이 이를 보여준다. 김 교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도 야당·사회운동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위기의 대안을 정당정치, 계급정치, 시민사회운동 등의 복원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대신 ‘진보세력과 합리적 주체의 접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정당과 사회운동이 자발적 네트워크와 만나 ‘합리적 진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세력이 추상적인 정치이념을 거두고 일반 시민들이 합의할 수 있는 합리성에만 기대더라도 ‘합리적 진보정당’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과연 무엇을 합리성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실체가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아주 단순한 것’으로 정의한다. 말 바꾸기가 아닌 일관성 있는 논리, 소수에 대한 특혜가 아닌 평등한 기회 제공, 일방적이지 않고 토론이 가능한 소통 등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에서만 출발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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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9 20:30 2010/05/2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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