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서평만으로 보면 흥미로운 책인 듯...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지음 | 이창신 옮김, 김영사 | 404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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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BOOK] 남의 불행으로 돈 버는 것, 어디까지 용납할까 (중앙, 김성희 기자, 2010.05.29 00:45)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지음 | 이창신 옮김, 김영사 | 404쪽, 1만5000원
정의(正義)의 의미와 그 실천적 방법을 다룬 이 정치철학 책은 흥미로운 실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 논쟁은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 즉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미덕 추구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높은 가격을 노려 물건의 공급이 늘어나면 사회 전체의 행복이 커지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규제 반대론, 가격 부담을 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고통을 감안하면 사회 전체의 행복은 상쇄되며 생필품에 높은 값을 매기는 것은 자발적 교환이 아니라 강탈에 가깝다는 반대론의 논거는 나름 논리가 있다고 지은이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혹은 좋은 공동체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다.
지은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까지 대표적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그 설명방식이 독특하다. 구제금융은 정당한가,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등을 실제 도덕적 딜레마와 연결해 이야기를 풀어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정의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지은이의 결론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共利)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며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재치 번뜩이는 강의 (세계, 정승욱 선임기자, 2010.05.28 (금) 17:37)
이 책은 20여년간 하버드대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는 샌델 교수의 강의 제목 ’정의(Justice)’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센델 교수는 실제 수업에서 누구나 빠지는 도덕적 딜레마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흥미롭고 도발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하버드 정치철학과 교수 마커스 밀러는 “이런 강의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 공세 속에서 도덕적 딜레마를 깊이 고민하도록 하는 수업은 흔치않다. 학생들은 열정적인 토론의 주인으로 참여한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수업은 처음이다”고 격찬했다.
샌델은 “도덕적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대화를 통해 노력해서 얻는 것이다. 자기 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샌델은 ‘최대 행복 원칙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대리인 고용하기’, ‘중요한 것은 동기다’ 등 10개 강의 제목을 설정한다. 이를 통해 추상적이어서 어렵게만 느껴졌던 정치철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실제 사실들과 연관시켜 명쾌하게 설명한다. 재치가 번뜩이는 사례와 저자의 명석한 설명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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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낯선 답에 당황하지 말라 (한국, 송용창기자, 2010/05/28 22:12:57)
"내가 죽든 말든, 내 자유다"라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을 향해, '합의된 식인(食人)'이란 실화를 예로 들며 "자기 몸을 음식물로 바치는 것도 정당하냐"는 섬뜩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예사다. '당신이 어떤 견해를 가졌든, 당신을 멋지게 유인해… 기존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다'는 책 뒷면에 실린 추천사가 의례적인 허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식 질문으로 독자를 '논쟁의 정글'로 이끄는 저자는 마이클 샌델(57) 하버드대 교수.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가 하버드대에서 20여년 간 강의한 '정의(justice)' 수업을 토대로 지난해 출간한 책이다. 원제는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신(神)을 끌어오지 않는 이상, '무엇이 올바르냐'는 질문만큼 포괄적이고 어려운 질문도 없다. 시장에 대한 규제, 누진세 적용 등 경제학의 오랜 논쟁부터 낙태, 동성혼, 소수집단 우대정책 등 모두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깔려 있는 사회 전반에 걸친 이슈들에 대해, 이 책은 그 뿌리를 파고든다. 결국 그 바탕에 놓인 근현대의 핵심 사상들과 한판 씨름판을 벌이는 셈인데, 주요 대결 상대는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로버트 노직이나 밀턴 프리드먼 등의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의 자장 내에서도 보편적 인권을 정립한 임마누엘 칸트, 평등을 옹호한 존 롤스 등이다.
책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난감한 질문.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 기관사인데, 철로에 다섯 명의 인부가 있고 비상철로에는 인부가 한 명 있다면?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리겠다는 선택은 정당해 보인다. 질문을 바꿔 당신이 이탈한 전차를 구경하는 목격자인데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옆에서 함께 구경하는 덩치 큰 사람을 선로로 밀어 전차를 멈추게 하는 것은 어떨까? 똑 같이 한 명을 희생해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인데, 두 번째 상황은 어딘지 꺼림칙하다.
저자의 이 질문은 실은 정당성의 근거를 '쾌락과 고통의 비교량'에서 찾는 공리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두 번째 상황에서도 한 명과 다섯 명의 생명을 비교하는 논리가 가능하느냐는 추궁이다. 공리주의적 사고는 현대 기업과 정부에서 비용ㆍ편익 분석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고, 심지어 인간 수명도 돈으로 환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담배가 노인을 조기에 사망시켜 정부의 예산절감 효과(연간 1억 4,000만 달러의 수익)가 크다는 어이없는 분석을 내놓아 물의를 빚기도 했다. 공리주의자들의 사고에서 빠져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 자유인 것이다.
두번째 상대는 자유지상주의자. 예컨대 마이클 조던에게 누진세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자유지상주의는 '노동 결과에 대한 강탈'이라며 펄쩍 뛴다. 자유시장 옹호론의 핵심을 '경제적 효율성'보다는 '자기 소유'와 '선택의 자유'로 파악하는 저자가 이들에게 던지는 까다로운 질문은'국방의 의무'이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부자는 강제 징집되는 대신 시장에서 대리인을 구해도 상관없고, 전쟁도 '민영화'로 귀결된다. 저자는 또 장기매매, 안락사, 대리모 등의 이슈를 들이밀면서 이들 사안에 내재해 있는 보수적 시장자유주의자들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파고든다.
다음 라운드 대상은 칸트와 롤스인데, 저자는 이들에겐 다소 조심스럽다. 칸트는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에서, 롤스는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뤄지는 '가언합의'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다. 이들의 사상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정의의 객관적 근거를 찾는다는 점에서 근현대 정치철학의 정점이다. 저자는 그러나 이 대목에서 "좋은 삶(미덕)이 무엇이냐"는, 자유주의가 포기한 질문을 던지며 자유주의의 선을 넘는다. '좋은 삶'이란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단지 좋은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만을 강조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전통이다.
험난한 논쟁의 여정 뒤에 도달하는 목적지는 다소 낯설고 당혹스럽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까지 끌어들이며, 주관적인 가치 문제를 정의론에 끼워 넣는다. 낙태 문제의 경우 자유주의자들은 가치판단은 보류한 채 단지 '선택의 자유'란 측면에서 지지하지만, 태아를 어디까지 인간으로 볼 것이냐는 가치판단이 이미 전제돼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즉 올바름에 대한 모든 판단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에 미덕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해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것.
이런 논의에서 보듯 저자는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체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로 꼽힌다. "좋은 삶을 생각해보지 않고 정의를 고민하기란 불가능하다."(336쪽) 저자의 결론이 불편하더라도 이 책의 매력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논리적 공박의 여행 과정에서 독자는 이미 저자를 반격할 수 있는 또 다른 논리를 훈련받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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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소통’으로 푼 ‘정의’의 딜레마 (경향, 김재중 기자, 2010-05-28-17:37:59)
ㆍ공리·자유주의의 장단점 검토
ㆍ현대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 역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는 서양 정치철학의 유구한 역사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기둥들이다. 정치철학자들은 고래로 각자가 선택한 기둥에 올라서서 자신들이 그리는 ‘인간 본성에 기반한 이상적인 사회’의 조직 및 작동 원리를 이론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애썼다. 정치철학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사변적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일상적 선택, 국가와 사회의 미래설계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발간된 2권의 책은 암울한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에 숨막혀 하는 한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를 근원에서부터 생각할 수 있도록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 대학교 교수(57)의 실제 강의를 정리한 이 책은 7000명이 채 안되는 하버드대 학부생 가운데 1000명이 그의 수업에 몰려든다는 명성답게 첫장부터 여러가지 딜레마적 상황을 제시, 보는 이를 솔깃하게 만든다. 답변을 이리저리 궁리해보지만 샌델은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서양 정치철학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행복의 극대화, 자유, 미덕의 추구 등 3가지로 압축된다. 흔히 공리주의로 불리는 행복의 극대화는 말 그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정의의 척도다. 공리주의는 그러나 개인의 권리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의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시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이 입장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무엇도 정의에 반한다는 자유방임주의와 공평한 기회에서 오는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평등주의로 나뉘어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전자가 하이예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사상이라면 후자는 롤스로 대표되는 시장개입주의적 시각이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논리와 장단점을 검토한 샌델은 논의를 정의와 미덕, 즉 정의와 공동선의 관계로 이끌어간다. 그가 보기에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행복의 극대화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공동체가 필요하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의식과 희생·봉사·연대,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인식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현대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를 역설한다.
샌델이 이 책의 여러곳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시장과 국가의 관계, 낙태, 소수자우대정책, 동성애, 부유층에 대한 중과세, 사형제 등 무엇이 정의인가를 둘러싸고 이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들을 일상적으로 접한다. 그는 이런 주제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돌아보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게 만든다.
샌델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우리 안에 정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혼재돼 있고 때로는 모순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유방임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나 마약 등 문화적 문제에 대해서는 법을 통한 규제에 찬성한다. 반대로 복지정책을 지지하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동성애, 출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 등에 대해 자유지상주의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 이 책은 샌델이 서 있는 공동체주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정의에 대한 다양한 사상과 이 사상들이 현실에서 만들어낸 복잡한 변주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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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충돌할때…‘공동선’을 고민하라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05-28 오후 08:15:52)
20년 지속된 하버드 명강의 엮어
숱한 ‘도덕적 딜레마’ 해결 지침서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57·미국 하버드대 교수)은 존 롤스(1921~2002) 이후 영어권 정치철학계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다. 27살에 하버드대 교수가 된 샌델은 29살 때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펴내 명성을 얻었다. 샌델은 이 책에서 롤스의 평등적 자유주의에 대응하여 ‘공동체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후 샌델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마이클 월저, 찰스 테일러와 더불어 공동체주의 4대 이론가로 알려졌다.
2009년에 출간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지난 20여년 동안 수천명의 학생들과 함께했던 ‘정의’ 강의를 바탕으로 삼아 쓴 책이다. 통상의 정치철학서와 달리, 수많은 구체적인 사례를 실감나게 제시함으로써 ‘정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설득력 있는 사례들로 무장한 정치철학 입문서이자 샌델 자신의 견해를 비교적 분명하게 논증한 정치철학 이론서가 됐다.
철학적 고민은 둘 이상의 원칙이 서로 충돌할 때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샌델의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딜레마를 다룬다. 샌델이 여기서 정의를 둘러싼 딜레마적 요소로 제시하는 것이 ‘행복’과 ‘자유’와 ‘미덕’이다.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냐, 개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냐, 아니면 공동체의 미덕을 장려하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냐. 행복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공동체의 미덕이 훼손될 수 있다. 이 딜레마적 상황을 살필 때 샌델이 먼저 검토하는 것이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되는데, 전체의 행복이 최대치가 되게 하는 것을 정의로 간주한다. 벤담은 이런 생각을 1780년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서 피력했는데, 5년 뒤 이마누엘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1785)에서 벤담의 사상을 맹비판했다.
벤담의 논리는 전체의 행복을 위해 소수 개인들을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정의다. 칸트는 인간이란 이성을 사용해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입각해 행위할 수 있는 존재다. 자기가 세운 원칙을 자기가 지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200년 뒤 롤스는 칸트의 이 주장에 입각해 ‘평등적 자유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샌델은 칸트와 롤스의 자유이론이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긴 하지만, ‘무엇이 좋은 삶이냐’에 대한 대답을 괄호로 묶어 놓은 채, 모든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정의의 일반적 원칙만 이야기한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으로 눈을 돌린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좋은 삶이라는 미덕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치는 시민들에게 무엇이 좋은 삶인지 터득하게 해주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계발하게 만드는 것, 곧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미덕을 장려함으로써 좋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정의다.
샌델은 오늘날 정의의 이론이 공동선의 정치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샌델이 보기에 196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이런 공동선을 외쳤으나, 그가 암살당한 뒤 진보파가 이 문제를 놓아버렸다. 그랬던 것이 2008년 대선에서야 버락 오바마와 함께 공동선의 문제가 진보적 의제로 부활했다. 샌델은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의 진보 정치가 시민의 도덕적·정치적 신념을 존중한다면서 그 신념의 내용을 외면하고 모른 척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에서 나온 존중은 가짜이기 십상이다.” 샌델은 좋은 삶을 다 같이 고민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이라면서 정치가 개인들의 도덕적 판단과 실천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는 것이 결국에 공동선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 찬 기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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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최고 인기강의 샌델 교수,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다 (조선, 이한우 기자, 2010.05.29 03:09)
허리케인 때 바가지요금은 정당? 동성혼은 허용? 일부다처는 안돼?
다양한 질문들, 세가지 시각으로 조명
줄기차게 정의와 올바름, 정당함, 공정함을 캐묻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들이 정의를 묻는 것은 정의(正義)의 정의(定義)가 궁금해서라기보다 사회가 보다 정의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공동체주의자'라고 부른다. '덕의 상실'(이진우 옮김, 문예)의 알래스데어 맥킨타이어, '마르스의 두 얼굴'(권영근 등 옮김, 연경문화)의 마이클 월저, '불안한 현대사회'(송영배 옮김, 이학사)의 찰스 테일러, 그리고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정치철학)가 그들이다. 맥킨타이어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덕성(virtue) 회복을 통해, 월저가 '정의로운 전쟁은 과연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통해, 테일러가 이기심과 허무주의에 빠진 현대사회의 '그릇된' 지적 문화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통해 정의 회복을 꿈꾸었다면, 샌델은 우리를 곧장 다양한 쟁점들이 부딪치고 있는 일상현실 속으로 밀어넣는다.
본격적인 질문던지기가 시작된다. 먼저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한 질문던지기다. 신체적 손상이 아니라 정신적 손상, 즉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은 참전군인은 '상이군인훈장'을 받을 자격이 없는가? 금융위기의 '주범'들이 거액의 상여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가? 가정(假定)의 질문은 더 곤혹스럽다. 국가가 결혼에 개입하는 것은 정당한가? 동성애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결혼의 다양화가 그 이유라면 일부다처(一夫多妻)나 일처다부(一妻多夫)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그렇다고 이 책이 마구잡이식 질문집은 아니다. 분배의 불평등, 교도소의 민간운영, 소수집단 우대 정책, 징병이냐 고용이냐를 둘러싼 병역논쟁 등 다양한 쟁점들을 공리주의적 시각과 자유주의적 시각으로 정리한 다음 조심스럽게 자신의 공동체주의적 주장을 암시한다. 그리고 전체 10장 중에서 2장이 벤덤과 밀의 공리주의, 5장이 칸트의 동기주의, 6장이 롤스의 자유주의, 8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성 강조로 구성돼 있는 점에서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은 도덕이나 종교로부터 독립을 내세우는 정치에 비판적이다. 그가 공리주의나 자유주의 정의론에 비판적인 이유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功利)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시민들이 도덕이나 종교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좋은(정의로운)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생기게 마련인 이견(異見)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꿔야 한다.
이제 샌델을 포함한 공동체주의자들의 약점을 지적할 차례다. '당신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덕성이란 무엇인가?' 덕성의 내용이 공허하다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강점은 분명하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즉 정의의 정의(定義)를 향한 지적 모험을 감행하도록 강력하게 유혹한다는 것이다.
"'뉴올리언스 비극'은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증명한다"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 2005-09-05 오후 4:13:35)
美 철학자 마이클 샌델 "연대가 무너진 곳에 비극이 온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발생한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미국 문명의 위기'를 상징하기보다는 지난 20여 년간 계속된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한국철학회가 주최하는 다산기념철학강좌 9번째 강사로 초청돼 우리나라를 찾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정치학)는 5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부시 정부의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뉴올리언스 비극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샌델 교수는 "미국 내에서는 행정부가 늑장 대응을 했고 이렇게 늑장 대응을 하면서 흑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뉴올리언스의 하층 계층이 큰 피해를 입고 있어서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며 "큰 피해를 입은 희생자가 가난한 흑인에 집중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십만 명에 이르는 재난 피해자 중에는 부유층을 포함한 중산층 이상도 많기 때문에 행정부가 인종 차별 같은 이유로 의도적으로 늑장 대응을 했다는 것은 무리한 비판"이라고 지적했다.
샌델 교수는 오히려 지난 20여 년 가까이 미국 정부가 추진해 오고 우리나라도 따라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중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우리는 뉴올리언스에서 허리케인이라는 자연의 재앙이 곧 인간의 재앙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며 "이 인간의 재앙의 직접적인 계기는 허리케인이었지만, 그 근원에는 하층 계급 특히 흑인 계층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부시 정부의 신자유주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샌델 교수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연대하기 위해서는 교육, 의료, 복지 서비스 등 삶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 계층, 인종을 초월해서 평등하게 제공돼야 한다"며 "가난한 사람들,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것들까지 제공받지 못한다면 연대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약 미국이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처럼 삶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 빈부,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공급되는 사회였다면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샌델 교수는 "미국은 지난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교육, 의료, 복지 분야에서 정부의 책임을 감소하고 시장에게 모든 것을 맡겨 왔으며 그 결과 이번 비극이 초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 사회 구성원들이 연대하기 위한 미국 사회의 토대가 근본부터 무너졌고 그것이 이번 뉴올리언스의 비극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샌델 교수는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폭격은 그 곳이 테러리스트들의 근거지였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이 있었다"며 "하지만 이라크 침략의 경우에는 부시 행정부가 내세운 이유는 다 거짓이거나 설득력이 없음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샌델 교수는 "이렇게 불합리한 이유와 비현실적 목적을 위해서 수많은 생명과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전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참담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시 행정부에 비판적인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교롭게도 2002년부터 부시 행정부의 생명윤리 정책을 자문하는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샌델 교수는 "인간 배아 연구에 대한 연방 정부의 지원 여부 등을 결정하는 위원회 표결에서 인간 복제, 유전자 조작은 반대했지만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 연구는 부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하지만 그런 부분적 연구를 위해서는 강력한 법·제도적 규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에서는 샌델 교수의 주장보다도 더 엄격하게 배아 연구에 대한 연방 정부의 지원이 전면 금지됐다. 샌델 교수는 "내가 소속돼 있는 하버드대에서도 기업의 지원을 받아 줄기세포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법적 규제 때문에 공공의 지원을 받는 실험실이 아닌 별도의 실험실을 따로 마련해 연구를 하는 실정"이라고 미국 분위기를 소개했다. 그는 "한국의 경우에는 별다른 법·제도적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황우석 교수의 성과에 지지를 보내는 분위기인 것 같다"며 "황 교수의 연구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라도 생명윤리를 고려한 구체적인 법·제도를 만들고 그 통제 하에서 연구가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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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희생자는 '용병'!"…이 말에 왜 '분노'하는가?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 2010-06-05 오전 7:29:05)
[화제의 책]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천안함 침몰로 목숨을 잃은 46명 장병을 떠올려보자. 그들 중 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 군인의 길을 선택하고 나서 이번 참사로 숨졌다. 그들은 정말로 군인으로서의 적성을 살리고자 '자유롭게' 이 길을 선택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목숨을 건 공동체 수호를 그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은 옳은가? 이런 질문에 머리가 혼란스럽다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를 읽어야 한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정의(Justice)>)를 고스란히 글로 옮긴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높이는 통찰로 가득하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겨냥하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가장 득세하는 입장은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게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징병제를 놓고 침묵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들의 생각대로라면, 군대 역시 시장에 맡길 때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노동시장에서 병사를 모집하면 간단하지 않겠는가? 필요한 군인 수와 자질을 고려해 적절한 급여와 복지 수준을 정한다. 누구도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강요받아서는 안 되며, 군에 복무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조건을 고려하고 나서 다른 일보다 병역이 나은지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117쪽)
사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생각은 낯설지 않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모병제를 옹호하는 이들이 얼른 떠올리는 논리가 바로 이런 것일 테니까. 더구나 우리는 천안함 침몰로 숨진 나이 어린 직업 군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이런 식으로 시장에 의존해 군인을 모으는 중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방식은 정의로운가?
샌델은 두 가지 반박을 소개한다. 우선 그런 직업 군인 중 다수는 '어쩔 수 없이'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적어도 미국은 그렇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한 미국의 의원 찰스 랭글의 인터뷰를 보면, 2004년 뉴욕에서 군대를 자원한 이들의 70퍼센트가 저소득층 출신이었다. 한국은 다른가? 샌델은 또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시장에 의존해 모은 군인이 '용병'과 뭐가 다른가? 당장 발끈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미국의 현실은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샌델이 인용하는 미국의 역사학자 케네스 데이비스의 얘기를 들어보자.
"오늘날 미군은 용병의 색채가 짙다." "군 복무에는 어떤 식으로든 눈곱만큼도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미국인이 같은 국민인 소외 계층 사람을 고용해 가장 위험한 일을 시켜놓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눈 하나 꿈쩍 않고 자기 일을 계속한다." (124쪽, 125쪽)
사실 중요한 업무의 대부분을 직업 군인에 의존하는 한국 군대의 모습도 이런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군대 근처도 안 가본 대통령이 전쟁 운운하는 동안, 정작 자신도 모르게 용병으로 전락한 이들이 목숨을 건 '업무' 수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서해에서 영문도 모르게 목숨을 잃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현실을 두고도 우리는 왜 '신성한' 국방의 의무 운운하며 진실을 외면할까? 실제로는 헐값에 고용한 용병과 다를 바 없는 직업 군인을 놓고, 왜 그것을 "용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할까? 공동체를 지키는 일을 돈을 주고 고용한 이들에게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판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는 징병제와 모병제를 둘러싼 이 짧은 얘기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벤담, 밀, 칸트, 하이에크, 롤스 등이 수천 년에 걸쳐 토론했던 온갖 철학적 쟁점을 끄집어낸다. 이들의 사상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는 벌써 몇 가지 논점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위대한 철학자와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고담준론을 위한 따분한 책이라고 딱지를 붙이면 오산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가로지르며 첨예한 갈등을 낳는 온갖 문제를 놓고, 샌델의 안내를 받으며 철학자들과 씨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장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 때의 희열은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읽는 것 못지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을 비롯한 당대의 논객들이 어떤 입장에서 저런 주장을 펼치는지 간파할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덧붙여, 그들이 얼마나 중구난방으로 상황에 따라서 입장을 바꾸는지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낯 뜨거워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고.
예를 들어 볼까? 평소에 시장을 예찬하던 이들이 군대를 시장에 맡기는 것을 꺼린다면 그는 군대 문제를 놓고는 다른 입장에 근거하는 셈이다. 평소 개인이 선택할 자유를 강조하던 이들이라면 식민지 시대의 만행을 사죄하는 데 인색한 일본 정부와 국민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일(식민 지배)을 놓고, 왜 앞 세대를 대신해 사죄해야 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는 단순히 정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입장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의 가치는 크게 반감되었으리라. 샌델은 거장답게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기존의 입장-자유지상주의자, 도덕적 개인주의자 등-을 검토하면서, 특정한 입장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평소에 시장을 그렇게 예찬하던 이들도 (속내야 어떻든 간에) 군대에서 복무하는 일은 공동체에 속한 시민의 의무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관념으로 돌아간다. 개인의 자유를 목소리 높이던 이들도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사죄하라고 일본에게 촉구하면서, 역사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행복(이익), 자유에만 근거해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불충분하다. 샌델은 '미덕'을 그 대안으로 내놓는다. 그가 말하는 미덕은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 서로 부대끼면서 오랫동안 만들어온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합의이다. 그와 입장이 비슷한 철학자 매킨타이어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311, 312쪽)
<정의란 무엇인가>의 이런 결론은 한국 사회에 어떤 함의를 던질까? 2005년 9월 샌델이 한국을 찾았을 때, 그는 적지 않은 반론을 받았다. 지연, 학연 등 사적인 관계망에 의존한 기득권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의 주장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옹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 보면, 그런 반론이 오해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좋은 삶의 모습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각의 새로운 경험과 그에 바탕을 둔 상호 간의 토론을 통해서 늘 새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와 그 구성원이 자유, 평등, 우애에 기반을 둔 좋은 삶을 지향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미덕으로 개인의 삶에 각인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샌델이 곳곳에서 "나는 나, 너는 너!" 식의 사고를 비판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 간의 대화를 촉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토론이야말로 새로운 좋은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가 20여 년 동안 새로운 공동체를 이끌 대학생을 상대로 <정의> 수업을 진행한 것도, 또 이것을 책으로 다시 쓴 것도 바로 이런 토론의 물꼬를 트기 위함일 것이다.
샌델은 책 말미에 좋은 삶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고민했던 미국의 대통령 후보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3월 18일 했던 연설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그는 이 연설을 하고 나서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암살당했지만, 그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고민에 답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 국민총생산은 한 해 8000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 그리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미국 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총생산에는 우리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 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학이나 용기도, 우리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왜 자랑스러운가를 제외하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363~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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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서 소외된 ‘정의’ 한국도 미국처럼 시민들은 ‘갈증’을 느꼈다 (경향, 김재중 기자, 2010-08-19 21:29:46)
ㆍ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 방한
“정의,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윤리적, 정신적 이상을 갖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공동의 이상을 합의하고 사람들의 권리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제 대답은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런 가치들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불일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첫번째 단계인 것이죠. 건전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도덕적 논쟁, 공공의 논의를 통해 시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공동체주의는 기회의 평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시민의식, 공동선에 기반을 둔 분배의 정의, 민주적 참여를 강조한다. 샌델 교수는 “공동체주의는 빈부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공동의 시민의식을 갖는 것이, 공동의 목적을 갖는 너무 어려워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부가 시장을 어느 정도 제약해서 응집력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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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몰입사회, 사람들은 도덕에 목마르다”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0-08-19 오후 08:10:00)
서점가 돌풍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 마이클 샌델 한국강연
“정치는 경제에만 매달릴 뿐 ‘공동선’이 무엇인지 잊어
다른 주장들이 논의될 때 정의로운 사회로 갈수 있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경제가 정치를 밀어냈고, 사람들은 정치가 다루지 못하고 있는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가치들에 큰 갈증을 느끼고 있다.”
샌델은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좋은 삶’에 대한 가치를 따지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공공의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이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정치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공정 사회’라는 개념을 ‘좋은 사회’라는 또다른 개념과 대비시켰다. “공정 사회는 재화를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이지만, 좋은 사회는 재화에 어떤 가치를 매길 것이냐는 문제”라는 것이다. 곧 기존 정치가 공정 사회에 대한 논의에 그쳤다면, 새로운 정치는 좋은 사회에 대한 논의를 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동체주의가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자유주의가 더 유효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청중의 질문에 그는 “내가 속한 영미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너무 강해서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무비판적으로 위계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한다”고 답했다. “가치에 대한 공공 논의에 끝이 없으면, 사회에 혼란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토론에 종점이 없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정의”라며 “도덕적 가치에 대한 논의 없이, 경영하고 관리하려 드는 정치로는 그 어떤 민주주의 사회도 존속할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경제논리가 정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덕적·윤리적 가치에 대한 갈증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민주적인 삶의 가치, 공동체, 연대성, 신뢰, 시민애 등은 줄어드는 가치가 아니라 근육처럼 쓰면 쓸수록 크고 강해진다”며 도덕적 가치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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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 비판 1 :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 . . (티스토리 블로거 marxpino, 2010/08/0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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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이 싱거운 까닭 (미디어스, 2010년 09월 03일 (금) 09:18:42 안태호 객원기자)
반향 없는 열풍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정의 열풍’이란 말이 아깝잖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 세달 만에 30만부를 훌쩍 넘겨 독자들의 손에 쥐어졌다. 지난 달 열린 내한 강연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 ‘마이클 잭슨도 아닌데...’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며칠 책을 들고 다녔더니 주변인들의 반응도 뜨겁다. 만나는 이들마다 한 마디씩 거들지 않고는 못 참겠다는 듯 코멘트를 날린다. ‘아, 그 책 읽어야 하는데’, ‘우리 사무실 지금 그 책 읽느라 난리예요~. 난리가 터지긴 한 모양이다.
혹자는 이번 신드롬의 원인으로 여전히 국내에 먹히는 ‘하버드 프리미엄’을 떠올리거나 대형출판사의 영악한 마케팅 전략을 꼽는다. 물론, 그럴 것이다. 거기에 입소문이 들불처럼 번져나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도래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MB가 여름휴가 길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들고 갔지만, 출판사가 이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을 것 같지는 않다.
‘20년 명강의’라는 말에 걸맞게 책 자체는 매우 흥미롭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공동체주의 등의 정의론을 이도저도 선택하기 힘든 딜레마적 상황들을 예로 들며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사고실험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알려주지 않지만, 적어도 정의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궁금해지는 것은 한국인들이 도대체 왜 지금, 정의에 탐닉하냐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개의 한국인들에게 정의란 배워서 알게 되는 무엇이 아니다. 지금이야 아이들의 만화영화에서조차 정의의 사도와 악당이 무 자르듯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어지간한 세상경험과 생활감각으로 정의와 불의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길거리 시시비비에 중재자로 나서는 사람들의 수만 헤아려도 정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일상 감각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세상이다. 단위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생활감각으로는 도무지 정의와 불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날이면 날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준들이 횡행하는 게 현실 아닌가.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은 이,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한 사회적 정의에 대한 갈급함을 우회적으로 드러내주는 징후에 불과하다. 사실, 정의란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정의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면 목구멍 저 안쪽에 이물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초등학교 시절 눈이 시도록 바라봐야 했던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아이러니한 간판 덕분인지, 고종석이 ‘한국어에 대한 모독’이라 칭했던 민정당이라는 이름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의-불의의 이분법은 종종 거칠고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정의’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끔찍살스런 만행들은 역사에 얼마나 촘촘히 박혀있던가.
그러나 과연, 사회적 정의에 대한 갈구가 정의 신드롬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이 신드롬이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듯한데, 쉽지 않아 보인다. 30만 명이 책을 봤다고 하지만, 사실 ‘신드롬이 됐다’는 것 이상의 반향을 확인하지 못했다. 책이 출간된 지 이제 겨우 세달 남짓이지만 이후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인문서가 종합 베스트셀러 일위에 오르고 30만명이라는 독자가 인문학에 대한 기초체력을 연마한 것은 소중하고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샌델의 책이 한국 현실에 몇 가지 시사점을 주지만, 결론으로 내세우는 이야기는 조금 싱겁게 느껴진다. 정치학을 전공한 한 지인은 ‘샌델의 입장은 한국에 딱 맞아떨어지는 안전한 이론이다’고 진단했다. 샌델이 말하는 공동선과 미덕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에서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상상력은 찾아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주의의 덕목들(시민적 미덕, 애국주의, 자기희생, 이웃에 대한 배려)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어휘들이기도 한 것 아닌가 말이다. 자유주의 입장에서 본 공동체주의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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