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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심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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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현. 2009.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화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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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공학-인문학 수평적 통섭 못하면 미래는 재앙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8-12 오후 06:21:03)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쓴 심광현 교수
한예종서 ‘통섭사업’ 주도로 중징계 처분 요구받아
기술 위주 통섭, 인간 무력해진 ‘디스토피아’ 예고
“불통공화국…예술통해 학문간 대등한 통섭 가능” 
 
지난봄 계간 <문화과학>이 ‘지엔알(GNR·생명공학 나노 로봇) 시대의 도래와 문화변동’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뤘을 때 독자들은 당혹스러웠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벼랑에 내몰리고 용산 학살이 야기한 사회적 분노가 정치적 임계점을 향해 치닫던 상황이었으니, 유전학·나노기술·로봇공학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의 긴박함을 외면한 ‘먹물들의 한담’쯤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너무 ‘앞선’ 주제가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술결정론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고요. 하지만 눈앞의 사태에 매몰돼 사회의 심층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심광현 교수의 문제의식은 최근 그가 펴낸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도르노 미학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영상이론을 가르쳐온 그가 ‘유비쿼터스’라는 기술공학적 주제로 책을 쓴 것이 의아할 법도 하지만, 그는 4년 전 프리고진의 복잡계 과학의 사유에서 인류 문명의 돌파구를 모색한 <프랙탈>(현실문화연구)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 교수가 <유비쿼터스…>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엔알 혁명에서 탈근대 문화정치, 학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핵심 주제를 꼽으라면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이다. 지엔알 혁명이 가속화하는 유비쿼터스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연과학과 기술공학, 인문사회과학, 예술 간의 접속과 소통을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지엔알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혁명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백 개의 분과학문과 전공지식들로 세분화됐던 지식들을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을 매개로 하나의 통합적 지식으로 융합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본다.
 
문제는 지금 논의되고 있는 지식의 통·융합이 대단히 위계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등이 주도하는 ‘통섭’ 담론이 대표적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과 제자인 최재천 교수는 모든 지식의 대통합을 강조하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물론 예술까지도 자연과학적(사회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심리현상도 인과관계가 있고, 이걸 찾아내면 사회도 인간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끔찍한 결정론입니까.”
 
심 교수는 이런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담론에는 예술을 과학자들에 의해 언젠가 정복될 ‘처녀림’으로 간주하는 근대 과학기술 제국주의의 오만한 전제가 함축돼 있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수직적 통섭론이 신자유주의적 권력관계와 결합되는 상황이다.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자본과 국가권력이 독점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라크전에서 선보인 무인공격 시스템 등에서도 드러났지만,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계-기계(M2M) 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와 같은 묵시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첨단 과학기술이 민주적 사회관계와 결합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지식과 지식 간의 수평적(비환원주의적) 통섭이다. 수평적 통섭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이유를 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평적으로 통섭하려면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걸 시작하기가 어려워요. 전문가일수록 자기 영역이 아닌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의 전문성이 뭡니까. 자기도 모르는 것을 떠드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에 손 내밀고, 이질적인 것을 섞고, 실험하고, 상상력을 제공하고…. 통섭의 촉매제이자 예인선 역할로는 예술이 제격인 셈이죠.”
 
심 교수는 이처럼 예술이 매개하는 수평적 통섭을 자신이 가르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유-에이티(U-AT) 통섭교육사업’을 통해 실천하려고 했지만, 상급기관인 문화부의 반대로 좌절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장관의 사업 중단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문화부로부터 ‘중징계’(파면·해임·정직) 처분 요구까지 받았다. “장관이 통섭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요. 자기가 아는 예술은 기악·발레·연극·회화 등 장르적으로 전문화된 것인데, 여기에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거지요. 모르면 토론을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누르고 (인력과 예산을) 자릅니다. 이건 예술과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지시가 그런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불통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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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식에 수평적 가치 부여하는 통섭이 중요, 작금의 통섭은 단기 성과 위주 기술공학에 치중" (한국, 유상호 기자, 2009/08/11 02:43:19)
'통섭' 관련 책 낸 심광현 한예종 교수
 
최근 통섭(consilience)이라는 말을 듣고 쓰는 일이 잦아졌다. 통섭은 19세기 과학사학자 윌리엄 휴얼이 '더불어 넘나들다'는 뜻으로 만든 개념어인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학문 간 대통합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21세기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정보처리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연구 방법의 혁신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학자들의 오랜 꿈으로 남아있던 지식의 대통합이 가능한 미래로 다가왔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이론의 소통과 융합은 이제 세계적으로 거스르기 힘든 대세로 인식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과는 별개로, 한국에서는 정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갈등으로 통섭이 쟁점이 됐다. 한예종이 추진하던 'U-AT 통섭교육사업'이 정부의 반대로 좌초하면서 황지우 전 총장을 비롯한 한예종 교수 등이 경질되는 사태를 빚은 것이다. 한예종 미래준비교육단장으로 이 사업을 준비했던 심광현(52) 영상이론과 교수가 마침 통섭의 방향을 제시하는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 발행)를 펴냈다. 정부의 중징계 처분을 기다리고 있기도 한 심 교수는 인터뷰에서 "비환원주의적이며 수평적인 통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유비쿼터스는 기술적ㆍ도구적 측면이 강한 반면 통섭은 학문 담론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둘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가.
"유비쿼터스는 SF영화 속에서 가능하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센서가 부착된 안경, 옷 등의 등장으로 일상이 컴퓨터의 제어 대상이 됐다. 생체칩을 삽입해 내장의 박동 상태를 컴퓨터로 관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적ㆍ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것들이 컴퓨터를 매개로 통합되는 것이다.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뇌과학이 철학과 맞물리고, 사회생물학에 윤리학이 스며들고 있다. 하기 싫어도 통섭이 돼 가는 것이다."
 
- '제3공간의 출현'이라고 표현한 유비쿼터스의 사회상은 유토피아적 측면과 디스토피아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제1차 정보화 혁명도 양면성을 갖고 있다. 정보화ㆍ자동화가 신자유주의와 맞물리면서 고용 축소, 금융세계화, 양극화 등을 낳았다. 유비쿼터스 혁명도 제1차 정보화 혁명과 마찬가지로 자본과 권력의 필요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그런데 유비쿼터스 혁명은 종래의 양극화 위험에 더해 '통제'와 '인간 배제'라는 가공할 위험성까지 안고 있다. 통섭 담론은 사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기술 본위의 환원주의적 융복합 흐름이 갖고 있는 이런 측면에 대한 비판도 포괄해야 한다."
 
- 환원주의적 통섭과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리고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어떻게 가능한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리적 인과 법칙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사회과학과 인문학뿐 아니라 예술의 원리도 종국엔 자연과학으로 통합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통섭의 관점은 유비쿼터스의 디스토피아를 막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킬 것이다. 반대로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모든 지식과 경험체계에 수평적 가치를 부여한다. '기술과학에 의한 사회의 구성'뿐 아니라 '사회에 의한 기술과학의 재구성'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올바른 통섭의 방향은, 비트겐슈타인의 설명 구조를 빌리자면, 부분적인 유사성이 중첩된 '가족적 유사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치 각기 고유한 색채와 모양을 지닌 다섯 원이 부분적으로 겹쳐 하나를 이루는 오륜기와 같은 구조일 것이다."
 
- 통섭의 '엔진' 역할을 철학이나 자연과학이 아니라 예술에서 찾는 이유는.
"칸트의 철학체계에 빗대 설명하자면 제1비판서(순수이성비판)의 주제는 자연과학, 제2비판서(실천이성비판)의 주제는 사회과학으로 분화ㆍ발전했다. 그 둘의 직접적인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제3비판서(판단력비판)의 주제인 아름다움은 둘을 포괄할 가능성이 크다. 예술은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 이질적인 것들을 접속해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상상력을 생명으로 삼기 때문이다."
 
- 통섭의 관점에서 현 정부의 교육정책, 학문정책을 평가하자면.
"지금 진행 중인 통섭은 철저히 기술공학 중심의 환원주의적 통섭이다. 더구나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만한 것에만 치중돼 있다. 카이스트의 통섭 대학원은 놔두면서 한예종의 통섭 교육을 없애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균형적으로 융합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낡은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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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의 도래'를 바라만 볼 것인가"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2009-08-30 오후 2:51:05)
[화제의 책]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사실 우리는 이미 어느새 유비쿼터스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며 교통카드를 찍고, 무선인터넷을 활용하고,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통해 동영상과 TV를 즐기며, 네비게이션에 의존해 길을 찾는 일은 이제 '신기한 무엇'이 아니다. 정부는 지난해 '유비쿼터스도시의건설등에관한법률'을 제정하면서, 이런 흐름을 더욱 촉진하고 나섰다. 경기도 파주 동탄, 인천 송도 등 신도시 사업에서는 유비쿼터스 도시를 추진 중이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근 펴낸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 펴냄)에서 바로 이런 '환상'과 '욕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다가오는 시대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유비쿼터스는 '소외와 절망의 공간'이 될 수도, '참여와 희망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역시 SF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디스토피아가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다.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도시의 삶은 또 다시 대대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그동안 물리적 공간(제1의 공간)과 구별되는 사이버공간(제2의 공간)을 만드는데 집중했던 디지털 기술이 이 두 공간을 새롭게 연결하는 '제2의 정보화' 단계로 발전하면서, 소위 '유비쿼터스' 공간이라는 제3의 공간을 출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심광현 교수는 유비쿼터스 도시를 발달 단계 중 '제3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도시는 그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소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발달해왔다"며 "이런 측면에서 교통과 통신은 도시의 규모와 범위, 생산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철도와 자동차의 보급이 근대도시의 물리적 형태 변화를 야기했다면 전기와 전화는 도시의 외관을 바꾸고, 도시 내부의 소통을 확대해갔다"며 앞서 일어난 도시의 변화를 설명한 뒤 유비쿼터스를 두고 '현재 도시가 겪고 있는 거대한 변화'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신도시 개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2009년 한국의 유비쿼터스는 국가 권력과 자본이 주도하는 전형적인 '톱-다운'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대중들이 유비쿼터스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몇몇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에서 세운 '유비쿼터스 체험관' 정도다. 학계에서도 유비쿼터스는 도시개발과 공학 정도에서나 연구될 뿐,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비평 대상은 거의 되지 못하고 있다.
 
심 교수는 "톱-다운 방식의 청사진과 다른 하나는 학문간 융복합을 통해 지능화된 공간운동 기술시스템을 구축해가는 '바텀-업' 방식의 흐름"이라며 "그러나 중간 방식의 흐름이 부재한 상황에서 바텀-업의 연구는 톱-다운의 시장적 전략과 계획, 즉 축적전략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는 수십 년간 작동해온 선진국의 거대과학기술 체제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심광현 교수는 "대개는 이런 변화를 방송, 통신융합 관련 법제와 기구 재편, 언론미디어정책의 변화 정도로 인지하고 있고, 관련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만 논란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하지만 유비쿼터스 기술의 상용화가 미치는 변화는 훨씬 심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체험한 유비쿼터스의 영향 중 하나로 지난해 촛불 집회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당시 출현한 진보신당의 '칼라TV'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생중계 방송은 촛불 집회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거대한 흐름으로 만들었다. 컴퓨터를 통해 생중계를 지켜보던 누리꾼들은 경찰에 진압되는 장면을 보다 뛰쳐나와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다시 휴대폰이나 촬영 기기를 통해 현장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심광현 교수는 "촛불 집회는 누구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유비쿼터스 공간의 문화, 정치적 잠재력을 적극 활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30년 동안 정보기술의 발전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 세계화를 촉진하고 새로운 산업의 창출과 노동의 유연화 및 구조 조정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자본과 국가는 새로운 유비쿼터스 공간을 자본 축적과 노동 착취를 위한 정치경제적 선택과 집중, 감시와 추적의 메커니즘으로 구축함으로서 새로운 통제와 질서의 공간으로 재전유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5년 유비쿼터스 도시의 전면화를 거쳐 2025년 로봇군대의 가동으로, 그리고 2035~40년 인간을 능가하는 사이보그의 출현으로 나아가도록 설계된 자본의 새로운 전략적 로드맵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진행 중인 새로운 과학기술혁명의 '비판적 전회'를 포함하는 과학 기술-사회과학-인문학-예술 간의 새로운 통섭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경고에 이어 심 교수는 '디스토피아'를 피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학문간 융복합을 의미하는 '통섭'이다. 최근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집중적인 '타격 대상'이 된 통섭 교육 사업의 단장을 맡기도 했던 심광현 교수는 예술과 학문, 사회를 수평적으로 이어주는 통섭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그것이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는 능동적인 진보의 자세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새 술을 담기 위해서는 낡은 부대를 수술하고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듯이 새로운 사회적 진보를 위해서는 그간의 연구와 실천의 방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일부터 착수해야 한다"며 "분과학문 체제라는 낡은 부대를 해체해 학문적 제도의 안과 밖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의 수평적 통섭이라는 새 부대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심 교수는 "그것은 오랫동안 단절돼 있던 이론과 실천, 대학과 사회, 지식인과 대중,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에 선순환적인 연결 구조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 전제"라고 설명했다.
 
"21세기의 과학기술혁명과 더불어 다가오는 유비쿼터스 시대. 이 열린 가능성을 오직 인구의 10%에게만 허용하며 자연을 유린하는 반민주적 반생태적 통제사회로 나아가려는 흐름을 거슬러 자연과 인간의 공진화를 촉진하는 민주적 생태적 문화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어떻게 삼을 것인가의 여부는 오직 사방으로 두 팔을 활짝 벌려 손을 잡고 함께 도약해 나가는 우리의 능동적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너무 난해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이 '이론서'로 분류돼 있긴 하지만 유비쿼터스 시대에 생소한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이 테마에 접근해 볼 것을 권하기엔 책의 내용이 너무 낯설다. 유비쿼터스를 대할 때 '매혹적인 환상'은 가깝게, '경계의 필요성'은 멀게 느끼는 대다수를 위한 배려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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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냄과 어울림 (프레시안, 이철승 중국 형양사범대 객좌교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010-01-23 오전 9:20:40)
[철학자의 서재] 심광현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비록 (신)자유주의가 사회계약설에 입각하여 최소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의 제정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법은 개인의 더 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최대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 의식을 통한 평등한 공동체 사회 건설의 측면에 미흡한 편이다. 특히 최근에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에 막대한 자본력이 투입됨으로 인해 고급 정보의 독점 현상인 정보 불평등 문제와 지적 재산권의 강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기심을 근거로 하는 사적 소유 문제가 오늘날도 여전히 사회적 갈등 문제를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공자에 의하면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이루기 위해 배타적 경쟁이나 획일화의 방법보다 서로의 특성을 인정함과 아울러 잘 발휘하여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어울림의 태도가 중요하다. 전통 사회에 형성된 이러한 어울림 사상은 다원적인 사유가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심광현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 생산과 문화 정치>를 통해 새롭게 복원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21세기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편재하는 인터넷과 방송과 통신망 등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유전공학(G)과 나노(N)와 로봇공학(R) 등이 발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P2P)에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P2M)를 거쳐 기계와 기계의 관계(M2M)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시기는 근대에 형성된 분과 학문들의 따로 따로 연구가 힘을 잃는다. 각 분과 학문의 연구자들이 자기 분야 연구에만 머물러 있거나, 자기 분야 중심주의의 시각으로 다른 분야 학문을 포섭하고자 하는 태도는 닫힌 사고의 반영이다. 그러한 연구 태도는 문자 중심의 선형적인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통시적 자세이기에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을 실제적으로 고찰하는 면에 제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와 맥루언의 견해처럼 사유의 총체성으로서 비선형적인 역사의식과 청각과 촉각을 중심으로 하는 복합감각의 결합에 의한 공시적 사고의 지식사회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는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공학 등이 융합되거나 복합되어야 한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는 중심을 가정하는 환원주의적인 수직적 통섭(統攝)이 아니라, 차이들에서 시작하여 차이들로 되돌아옴과 아울러 서로 끌어 주며 함께 도약하는 비환원주의적인 수평적 통섭(通攝)이 필요하다.
 
특히 저자는 예술과 인문학과 과학기술 사이에 통섭이 필요함을 지적하면서 들뢰즈가 지적한 감각(예술)과 개념(철학)과 기능(과학) 등의 의미를 차용하여, "개념이 통속적 견해로 함몰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창조적 감각의 견인이 필요하며, 반대로 감각이 카오스로 함몰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는 창조적 개념의 견인이 필요"하고, "예술과 철학은 감각과 개념의 창조를 통해 카오스/무한을 향해 가속하며, 반대로 과학은 기능의 창조를 통해 코스모스로 감속한다"고 지적한다. 곧 처음부터 강한 결합의 형태인 융합이나 통합을 이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학제 간 교류와 복합 등의 약한 결합을 포함하는 다층적인 통섭이 중요하다.
 
이 시대에는 두뇌와 몸과 미디어 사회 사이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여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지라도, 창작자의 감각과 두뇌와 몸과 행위와 반성적 종합을 하는 회로들의 순환적 연결망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자기조직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직관과 상상력과 시각적 패턴 인식 및 패턴 구성 등의 과학적 시각화가 과학적 창조성의 증진에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첨단 과학기술 혁명을 등에 입은 지식기반 사회가 우리에게 항상 밝은 미소만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회는 커뮤니케이션과 지식 생산의 차원에서 문명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생산 관계의 내용에 따라 인간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특히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소수는 그들의 의지에 따라 다수의 민중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을 분석하면서 지적한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비록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무형 자산인 지식이 무한히 공급됨으로 인해 공급이 유한하다는 자본주의의 전제와 충돌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했을지라도, 지식과 정보의 독점과 통제로 인해 발생되는 소외에 대한 염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과학기술 혁명을 토대로 하는 문명의 방향에 대해 인문학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소망의 현실화는 자연의 변화와 같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가능하다. 곧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공 지능이 자연 지능을 능가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가 예측되는 상황에서 소외 문제를 극복하려면 "과학기술적인 집단지성을 자본의 종속으로부터 해방하여 그 힘을 민주적으로 사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정치적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통제사회와 문화사회의 두 얼굴을 함축하고 있는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기술결정론 아니면 기술거부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윌리엄스가 말한 표의체계로서의 문화 개념과 맥루언이 말한 감각의 확장으로서 미디어 개념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생산 관계를 의미하는 통시적 표의 체계의 지양과 대안적 생산 관계를 의미하는 공시적 표의 체계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유비쿼터스 시대로 불리는 21세기에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바람직한 욕망의 방향은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이기심을 반영하는 사적 소유의 확대를 위한 배타적인 경쟁의 추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따뜻하게 배려함과 아울러 즐겁게 어울리는 평화로운 관계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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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04:30 2010/01/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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