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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베르나르 마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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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돈만 숭배하다 자멸할 것인가 (경향, 김재중 기자, 2010-01-08-17:29:08)
ㆍ자본주의 사악한 작동원리 해체…예술·우정 등 삶의 질을 높여라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베르나르 마리스|창비|조홍식 옮김. 1만7000원
 
케인스(1883∼1946)가 프로이트(1856~1939)를 숭배했다니? 두 사람 모두 천재적인 사상가이지만 한 사람은 경제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신분석학자인데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이 있었던가? 혹시 케인스에게 동성애적 취향이 있었기 때문에 성적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의 정신세계에 접근했던 프로이트와 연관됐던 것은 아닐까? 프랑스 파리8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서문에서 ‘자본주의라는 모험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자멸을 택한 것일까?’라고 묻고 ‘케인스와 슘페터처럼 프로이트에 심취했던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고 답함으로써 야릇한 날개를 펼치려던 상상을 접게 만든다.
 
그렇다고 독자의 궁금증을 바로 해결해 주진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든 자본주의의 사악한 작동원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뻔뻔함, 인간의 합리성과 완전자율경쟁시장이라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사기성을 철학적 해학으로 가득찬 현란한 문제로 헤집으며 뜸을 들인다. 프랑스어 원서가 ‘거꾸로 보는 경제 설명서(Antimanuel d’Economie)’ 정도의 평범한 제목을 달고 있으므로 저자를 탓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케인스는 프로이트의 어떤 점을 숭배했던 것일까. 책에 따르면 케인스는 버지니아 울프 등이 참여한 ‘블룸스버리(Bloomsbury)’라는 예술가·지식인 그룹에 몸담았다. 이 그룹은 프로이트가 내놓은 파격적인 이론에 심취해 있었고 그의 저작을 영어권 국가에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케인스의 저작에서는 ‘콤플렉스’ ‘리비도’ ‘우울’과 같은 프로이트식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프로이트에 대해 “풍부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놀랍고도 확고부동한 가설을 제시했다”고 극찬한 케인스. 우리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케인스가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얘기를 자주 접한다. 케인스주의자를 자처하는 폴 크루그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만능주의’와 ‘합리적 인간’이라는 주술을 반복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여전히 경제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인간 행동은 ‘야성적 충동’에서 기인한다고 말한 케인스는 그들에게 적이다.
 
케인스는 ‘좋은 삶’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쌓아두기 위한 대상으로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구역질 나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혐오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먹고 사는 사람 가운데 이 병에 걸려 있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돈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숭배하는가? 다시 말해 먹고 살 만큼 돈이 있는 사람조차도 돈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라는 책에서 동식물이나 물건에 대한 숭배는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을 부정하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은 바로 죽음이다. 케인스는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인간에게 불멸의 환상을 심어준 것이 바로 돈이라는 통찰을 프로이트로부터 건져 올렸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사악한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스스로 돈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불안의 정신(경제)분석학’은 이자율에 대한 설명으로도 이어진다. 이자율은 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일 뿐더러 일반인들의 경제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이자율의 변동은 저축·투자·투기심리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이 미래의 소비나 쾌락을 포기하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공포나 집단적 불확실성에 대한 가격에 다름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원리에 대한 심대한 견해차를 내포한다. ‘인간의 이성 바로 아래에 두려움과 광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케인스의 설명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 최고의 가정을 송두리째 깨부수기 때문이다.
 
저자가 케인스와 프로이트를 중심축으로 펼쳐보이려 한 것은 자본주의와 인류의 음울한 미래다.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면 자본주의는 죽음과 파괴에 대한 본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체감하고 있는 환경 대재앙과 인간성 파괴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현금을 계산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류의 모습은 이러한 염세적 전망을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 없게 만든다.
 
탈출구는 없는가. 케인스는 무의미하고 침울한 축적에 대한 해결책은 미적인 것, 즉 예술·아름다움·우정·포도주와 같은 삶의 질이 우선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 역시 경제학이 풀어야 하는 것은 복잡한 수학공식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불행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기술적 진보가 인류의 영생을 보장할 것이란 환상에서 벗어나 성장이 아닌 절약,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경제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탈출구 치고는 순진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재앙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구나 현대의 최첨단 자본주의가 대공황을 연상시키는 금융위기와 함께 악마적 심연을 드러내고 있는 이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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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똥덩어리 (한겨레21 2010.01.15 제794호, 구둘래 기자)
[출판] 죽음과 항문기가 등장하는 반자본주의 에세이,
베르나르 마리스의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인간은 사실 서른 살이 넘으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최선은 적당한 시기에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괴테) “삶의 유용함은 그 길이가 아니라 용도에 있다. 즉 요절한 사람이 외려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몽테뉴)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창비 펴냄)를 지은 베르나르 마리스는 프랑스 파리8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저널리스트다. 그가 지은 이 책은 경제서다. 그런데 ‘시간과 죽음’이 책의 맨 처음에 등장한다. 어떻게 경제는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인간이 평균적으로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명은 자본주의의 승리의 지표처럼 보인다. 기대수명의 상승은 1살 미만 영아사망률의 급격한 감소 덕분이다. 어린아이들이 더 이상 죽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를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된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이상한 제안 속으로 녹아들어간 결과다. 그렇게 하여 얻어걸린 것이 긴 수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단언한다. “이는 파우스트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위 죽음에 대한 승리와 자신의 노동 및 공포를 맞바꾼 것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삶이 피곤하고 즐거움은 적고 고통이 가득하여 죽음이 오히려 구원으로 여겨진다면 긴 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은 ‘질병’으로 치환되었고, 연장된 7.5년의 시간은 질병에 시달리며 죽음과 결전을 치르는 오만한 시간이 되었다.
 
저자가 경제라는 2차원 평면에 시간이라는 3차원 축을 하나 더해 얻어낸 것은 입체적 인간의 삶이다. 저자는 입체적으로 또박또박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반박을 해나간다. 예를 들면 특허권이라는 문제가 있다. 의약품의 특허권을 거대 자본이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그 엄청난 가격을 지불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죽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저작권도 비슷하다. 특허권과 저작권은 ‘지적재산권’으로 묶인다. “아이디어는 특허를 받을 수 없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만이 특허가 가능하다”라는 논리에 따라 특허권에서 밀려난 아이디어를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저작권이다. 버터 자르는 실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수준에서는 특허가 되지 않는데, 이 아이디어를 글로 적어놓고는 자본의 힘을 빌려 보호하는 것이 저작권이다.
 
저작권이 자본주의 시스템 내로 들어가자, 저작자마저도 권리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생겨난다. 노벨의학상 수상자 해럴드 바머스가 논문 출판 6개월 뒤 온라인에 자료를 공개하라고 출판사에 요구하자 출판사는 거절했다. ‘도서관 죽돌이’로 지내는 학자들은 학술지에 거의 무상으로 논문을 제공하고, 이 논문은 학술지로 묶여 도서관만 살 수 있는 비싼 가격에 팔린다. 2000년 프랑스에서 출판사들은 도서관이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며 책 대여세를 물리려 했다. 공공재에 ‘소유권’을 부여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자본주의로서는 더 눈이 벌게서 새로운 ‘권리’를 찾아헤맬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운명이다.
 
경제학에서 출발해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책 제목의 ‘케인즈와 프로이트’ 결합에서 분명해진다. 1920년대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을 준비하던 시기, 프로이트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의 책에는 콤플렉스, 리비도, 우울 같은 프로이트 용어가 가득하다. 프로이트의 돈에 대한 성찰은 케인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금과 화폐는 모두 ‘항문적’(발음대로 쓴 것 아님)이다. 비약하자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학문이 아니라 항문이다. 여기 다시 죽음도 등장한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물신이란 삶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인 죽음까지도 부정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죽는 것도 모르고 똥물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가련한 자본주의 시민에게는 어떤 구제가 있는 것일까. 비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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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8 01:30 2010/06/0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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