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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는 어떤 맥락에서 얘기되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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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종이편지와 로자 파크스의 진실 (참세상, 권영숙(사회학 연구자) 2011.10.27 17:19)
[칼럼] "누가 로자 파크스를 말하는가"

 

YTN이 투표 직후의 투표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무슨 조사에서 박근혜의 영향력보다 안철수의 영향력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각각 추가적으로 19%, 26%의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거다. 언론에서 박근혜가 나경원 후보에게 전달한 수첩과 안철수가 박원순 후보에게 전달한 거나 진배없는 종이편지를 비교했는데, 아마 아무리 별 볼 일 없다 하더라도 그 내용만은 수첩에 더 많이 적혔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첩의 컨텐츠는 수첩공주님과 양파녀밖에 모르지만, 안철수가 쓴 편지의 컨텐츠는 사방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그 만큼 선거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박원순 후보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는 대신 투표를 호소하기만 했는데도 큰 반응을 이끌어낸 걸 보면 안철수의 정치력이나 감을 무시해선 안될 것 같다.
 
이처럼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서 나름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되는, 안철수의 종이편지와 그에 언급된 로자 파크스에 대해 참세상에 글이 실렸다. 사실 로자 파크스라는 사람, 안철수의 편지에서 처음 들었다. 귀동냥한 적도 없다니, 이리 무식할 수가... 
  

암튼, 글의 맥락으로 봐서 글쓴이는 페이스북에 존재하는 공개그룹인 '진숙85기금'( http://www.facebook.com/groups/JINSUK85fund )에 이장규 선배가 쓴 글, "닥치고 투표 어쩌고 하지만 아래 삼화고속 같은 버스 노동자나 병원의 간병인 등 격일 24시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근무일엔 투표하러 갈 시간 자체가 없다. 투표율 높이는 게 그리 중요하다면 이들의 노동시간부터 줄여놓고 닥치고 투표 어쩌고 떠들어라"라고 한 걸 옹호하면서 로자 파크스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자라고 얘기한다.
 
(참고로, 여기저기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들에 엄청난 글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감당이 안되는 것도 있지만, 접근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더라. 이번 보선에서 세대간에 지지성향에서 많은 차이가 난 것도 어쩌면 이러한 새로운 정보 및 토론공간의 활용도와도 관계있지 않을까. 분위기에서 차이가 있었으니 말이다. 박원순 선본의 SNS 중심의 선거운동의 공과를 떠나, 세대별 활용매체와 투표성향의 관계를 분석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사실 심재옥 동지가 얘기하듯이, 밤낮없이 일하느라 투표 못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요구한지 오래되었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건 노동자들의 정치참여가 기득권층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투표 '못하는' 사람들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기업에 대한 규제, 협조, 유화책 등을 다양하게 제시했을 텐데, 여전히 이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다. 나꼼수 등이 불러일으킨 '닥치고 투표'의 흐름은 정치혐오나 무관심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맥락을 다 덮어 버리고 개인의 의지문제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안철수의 편지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보선이 끝나자마자 홍준표나 전여옥 등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 것에 대한 반응이 다음 총선에서 표로서 심판하자는 얘기가 트위터에 심심치않게 나온다. 각종 선거의 부정적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선거나 투표는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정치활동의 성과를 확인하는 장이거나 아니면 여러 활동 중의 하나로서 활용될 수 있는 공간일 뿐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투표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고...
 
가끔씩 치뤄지는 선거가 같은 시기의 대부분의 쟁점들을 삼켜버리는 걸 보면, 이를 무시한 채 현장투쟁에 집중하자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선거와 투표만이 정치의 전부라고 오도되는 것 또한 문제다. 기존의 진보정당운동내지 그 안에서 활동해왔던 전진을 비롯한 정치조직들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도 이러한 오해와 왜곡을 없애기는커녕 이를 조장하는 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몇 개월간의 상당히 많은 쟁점들은 총선, 대선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계속 표로서 심판하자는 말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냥 이대로 두고 봐야할까.
 
에고, 참세상 칼럼에 대해 코멘트만 달려고 했는데, 또 글이 수습되지 않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구나. 여기서 중지.
 
추가. 몰랐는데, 오늘 보니 장귀연씨가 이와 유사한 논지의 칼럼을 썼더라. 그래서 추가. 로자가 로자를 다루니 조금 거시기하네.ㅋㅋ
 
[세상 읽기] 로자 파크스와 세상을 바꾸는 길 (한겨레,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교수, 20111027 19:19)

투표에 참여하는 게 다가 아니다
불복종·직접행동을 할 권리도 있다
로자 파크스가 한 것도 그것이다

보궐선거를 이틀 앞둔 24일 안철수씨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를 방문해 편지를 건넸다. 언론에 공개된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955년 12월1일 목요일이었습니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퇴근길 버스에 올랐습니다.”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불씨를 지핀 로자 파크스의 일화를 소개하며 시작한 편지는 선거 참여를 간곡히 당부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안철수씨가 든 사례는 정확히 걸맞은 것이 아니다. 로자 파크스는 투표를 한 게 아니었다. 인종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시 조례에 따를 것을 요구받자 “싫어요”라고 대답했고, ‘당연히도’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법을 잘 지키는 ‘착한’ 시민이었고 흑인 참정권 시행을 기다려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을 바꾸자고 마음먹었다면, 민권운동의 불을 댕기지 못했을 것이고 흑인들의 투표권도 절로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 파크스의 행동은 오히려 시민불복종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투표장에서 대표를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시민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했다. 소로는 반문한다. “당신이 선거로 대표자에게 나랏일을 결정할 권리를 위임했다고 해서 당신의 양심도 위임한 것인가?” 그는 법과 정부의 정책 결정을 따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게 양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고 <시민불복종>이란 책을 썼다. 이는 저항권의 정신과도 이어진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라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가졌다고 전제한 뒤, 이를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언제든지 폐지하고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정부를 조직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제 자문해보자. 글자 그대로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나라인가? 월가 점거 시위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금융자본주의라고 일컬을 만큼 이윤은 금융적 이익을 따라 순환하고,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을 위해 투자되지 않는다. “1%에 저항하는 99%”라는 시위 구호처럼 소수 자산가들에겐 유리하지만 스스로 일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에는 몹시 불리한 구조다. 그리고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각종 노동과 복지 지표들에서 단연 미국과 더불어 수위를 다투고 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그리하여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거부했던 분리정책은 반세기가 넘어 태평양을 건넌 나라에서 다시 실현된다. 통근버스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자리가 분리되어 있는 회사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그렇기에 로자 파크스를 언급한 안철수씨의 편지가 곧이어, 이번 선거가 부자와 빈자의 대립도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아니며 이념과 정파를 넘어선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규정한 건 더 생뚱맞다. 대립과 갈등보다 화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화합이 이루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소로가 말했듯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미국 독립선언문이 규정하듯 인민의 행복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의의가 없다.
선거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투표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올바르지 않은 법과 정책에 불복종하거나 직접행동을 할 권리도 있다. 로자 파크스가 한 것도 그것이며, 실은 선거란 제도도 수많은 혁명과 시위, 파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당신의 양심에 비춰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투표 외에도 많은 참여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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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8 05:02 2011/10/2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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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변환된 투쟁조건 2011/10/28 05:48

    1.편지는 연합선본의 지지계층의 이탈과 기권에 대한 투표율의 전략적 고민이것이다.
    연합선본은 이념적 경향성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부류도 있고 정책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부류도 있다.
    지지층의 연대의 표심의 표본에서 로자 파크스가 가지는 인권적 함의보다
    여당과 야권연대의 1:1구도에서 표심은 안철수도 연합의 표심의 한 부류인 것이다.이것을 이념이나 가치로 심판론에서 기권과 이탈의 소극적 의지를 제대로 표심을 조직할수는 없다

    결국 연합군의 다름속에서 차이의 표심의 표본의 조직화에 대한 전략적 고민을 이해할수 있는 부문이다.

    2.선거는 노동운동이나 진보정치운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선거는 계급투쟁의 정치의 조건에서 여러 전술이 구사될수 있다고 본다.
    독자든 연합이든 보이코드든 민주주주의 상태에 따라서 대응은 다를수 있다.
    군사독재 처럼 자본독재가 사회영역의 헤게모니나 국가권력을 주도할때
    대중조직운동들의 주체적 조건을 보면 범대위등 민중연대등 선거투쟁의 국면은 연합전술의 중요함을 말할수 있다.

    3.선거결과 연합전술이 자본독재의 정치권력에 파열구를 내었다.
    말하자면 자본의 이전처럼 일방적인 탄압의 권력은 약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계급 민중연대의 투쟁조건은 한 호흡 할수 있는 객관적 상태인데 과학적 대응이 더욱 중요해 했고 그것은 연합군 진영의 정치이해가 심화된다 할수 있다.이것이 참여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가 정치개혁이나 변혁의 과학적 운동의 수준을 말하는 질적 변화의 위치에 처해졌.선거연합에서 국가권력을 바라보며 정치나 사회개혁방향이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참여정부때 처럼 노동운동 진보정치운동이 제대로 성찰한다면
    서울시장의 선거결과는 그동안의 자본운동에 수세적인 것을 공세로 전환하는 고민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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