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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사회보고서 -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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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대안사회팀에서 토론끝에 작성한 대안사회보고서 중 민주주의에 관한 부분이다. 2005년도에 토론하여 2006년 4월에 나온 것이다.

자치민주주의에 관한 것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살펴보았는데, 장석준 동지가 정리한 때문인지 매끄럽게 잘 쓰여졌다.

줄여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다. 



1. 민주주의를 다시 본다


1.1 민주주의는 ‘수단’이 아니라 ‘목표’다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이해해선 안 된다. 민주주의의 말뜻부터 살펴보자. 民主주의, 즉 民(인민·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라는 이야기다. 영어로는 Democracy. 그리스말의 Demos(인민·민중)와 Kratia(통치)가 합쳐진 것이다. 민중이 통치하는 사회라는 말이다. 신도 아니고, 왕도 아니며, 부유한 자도, 유식한 자도 아니다. 나, 너, 우리, 이런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말 안에 사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의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민중이 스스로 통치한다는데 과연 그 민중이란 어떠한 사람들인가, 민중의 자치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민중의 자치를 위해서는 민중 자신이 어떻게 단련되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 들어가는 게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속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가 어떤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사상․운동들이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 혹은 ‘수단’이라 해야 맞는 게 아닐까.


여기서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민주주의에 이 정도의 가치를 부여하는 게 과연 온당한 걸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 행복의 꿈은 사람들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 어떤 특정 집단의 꿈을 다른 이들에게 무작정 강요할 수 없다. ... 그래서 이제 모든 현대인의 공통의 신념은 민주주의다. 현대 사회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근거는 민주주의다. 이 때 민주주의란 단순히 선거나 의회, 표현의 자유 등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와 능력을 지니며 행복의 교향악을 합주하는 남녀 시민들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저마다의 능력을 갖고 동등하게 공동체 생활에 참여한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너’와 ‘우리’를 위한 제안을 내놓으며 서로 설득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틀 짜고 수놓는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공산당 선언」)라는 맑스, 엥겔스의 말만큼 위의 이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사례도 없을 것이다. ... 민주주의 시민 공동체에서는 남을 지배하는 자나 어떤 지식․신앙․이념을 독점하는 자 혹은 남보다 더 많은 부를 누리는 자가 인생의 보람을 느끼거나 존경받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의 삶에 뭔가를 제안하거나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가장 존중받을 것이다.


1.2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전에 ‘운동’이다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민주주의는 ‘제도’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시대의 민주주의든 그것을 보장할 특정한 제도들을 수반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헌법이 있고, 선거제도와 선출직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있으며, 지방자치제도가 있다. 또 언론의 자유가 있고,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있으며, 요즘에는 인터넷도 민주주의의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이 아무리 갖춰져도 소수 자본가와 엘리트들의 독재는 충분히 가능하다. 다수의 대중이 이러한 과두 세력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숱하게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전에 ‘운동’이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대중운동이다. 대중의 권리는 대중들 스스로 그것을 청구할 때만 보장된다. 대중의 자치는 대중들 스스로 그것을 행사할 때만 실체를 갖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법조문들을 갖추고 이러저러한 제도들을 외국에서 수입해와도 대중이 그것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욕구가 없고 그럴 의지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모든 민주적 제도는 민중 투쟁의 산물로 쟁취될 때만 오랫동안 실제 민중의 무기로서 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민중 투쟁이 폭발할 때만 화석 같던 제도들, 죽어 있는 것만 같던 법조문들도 어느새 생명을 되찾아 민·주·주·의, 이 네 글자를 실감나게 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 시민 공동체는 항상 혁명 운동의 절정기에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고대 아테네의 놀라운 직접민주주의도 이 도시의 시민들이 귀족·부자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 꽃핀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하게 1894년 동학농민혁명 와중에 각 고을에 설치된 집강소는 마을 수준에서 농민들의 자치 능력을 보여줬다.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도청 앞 집회는 민주주의가 정부의 상투적 선전 문구가 아니라 해방의 감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등장한 민주노동조합들에서는 조합원들이 직선으로 집행부를 뽑았고 다시 그 집행부를 소환해 불신임할 수도 있었다. 파업 투쟁을 거듭하면서, 한국사회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앞선 민주주의를 선보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결코 진화론의 도식을 따르지 않는다. 민중 투쟁은 패배했을 때만이 아니라 승리하고 나서도 잊혀질 수 있다. 대중의 민주적 역량도 단순히 축적되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쉽게 쇠퇴하거나 해체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사회 교과서와 법전, 국회 의사록만으로 세월을 이기고 세대를 이어 전승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재확인되고 재음미되어야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대중운동을 통해 육체와 영혼을 부여받아야 하고, 다시 대중운동을 통해 매번 부활해야 한다.


1.3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마지막으로 재검토해야 할 상식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다. 현실사회주의가 관료 독재로 전락하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 사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동어 반복이다. 원래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운동의 일부, 혹은 그것의 가장 앞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또 다른 현실을 대입해봐야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자본주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원칙적인 표현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해야만 민주주의가 보장된다고 말한다. 실제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도 같다. 서유럽에서 산업자본주의가 등장하고 그것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등장과 확산이 민주주의 운동의 폭발을 수반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곧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토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성장․확산이 민주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자본주의의 확산은 항상 전통적 사회 질서의 붕괴․해체를 낳는다. 전통 신분사회의 붕괴는 민주적 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 만이다. 신흥 자본주의가 곧바로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 민주주의 운동이 폭발하는 이유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생활 그리고 이들의 이상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게 자본주의의 성장·확산과 민주주의 운동의 발전이 거의 함께 이뤄지는 두 번째 이유다. 전통 사회에서 막 벗어난 대중은 새로운 불만의 대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심어줘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싸우려면 민주주의라는 무기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시 성장이 관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 관계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심화·확대를 가로막으며 그것의 한계로 작용한다. 근대 세계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민주주의 세계운동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가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의 심화․확대를 제약하는가?


첫째, 정치적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축소하거나 형식화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례들에서부터 드러난다. 장사치에서 출발한 부르주아지가 승리한 것은 도시의 하층 시민·농민들 같은 민중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왜 부르주아지와 함께 싸웠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부르주아지가 내건 민주주의의 약속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처음에는 민중들에게도 선거권을 약속했다. 하지만 승리한 부르주아지는 일정 액수 이상의 재산세를 납부하는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인정했다. 그렇게 해서 의회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유물이 되었다. 이름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원초적 형태다.


물론 노동계급은 참정권을 요구하며 계속 싸웠다. 100년 넘는 투쟁 끝에 지난 세기 초가 되어서야 겨우 보통선거권이 도입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제 정치적 민주주의의 제약 요건은 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보통선거권을 인정한 뒤에는 과거보다 훨씬 교묘한 구조적 장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존 부르주아 정당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민중 세력에게 극히 불리한 선거제도나 정당제도가 유지된다. 또한 의원이 민중의 대표라면서도 의원들이 민중의 의사에 반해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게다가 주류 언론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부르주아 기관들이 원군 역할을 한다. 이들은 항상 자신들의 ‘여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선출직 공직자들이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거스르지 않는 방향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받쳐준다. 


이 때문에 노동자·민중 세력은 보통선거권의 도입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민주주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이제는 민주주의 자체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민중운동은 항상 대의민주제의 굳은 틀을 깨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민중 참여와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려 한다. 선출직 공직의 범위를 엘리트들의 전유물인 고위 관직이나 사법부 등으로 확대하려 한다. 일단 선출된 공직자라 하더라도 시민들의 의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소환하여 불신임할 수 있는 권리(소환권)를 요구한다. 또한 주요 정책과 예산안은 민중이 직접 참여해서 기획·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가와 보수정치인들로서는 결코 잠자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무엄한 도전이다. 거리 집회에서 외쳐지는 구호가 일상 정치에 곧바로 반영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결국은 자본주의의 골간이 위협받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두 번째, 민주주의는 결코 경제 영역으로는 확대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 회사 로비에서 더 이상 출입 금지다. 애당초 우리가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즐겨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그나마 민주주의가 허용된 예외 구역이 ‘정치’ 영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 소위 ‘경제’ 영역에 감히 민주주의의 ‘민’자도 들이밀어선 안 된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요체는 ‘1인 1표’다. 시민 누구나 일정 연령이 되면 동등하게 한 표씩의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공장에서도 통용되는가? 사장을 선거로 뽑기도 하지만, 그 투표권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소위 주주라고 불리는 소유권자들만이 투표권을 지니며, 그것도 1인 1표가 아니라 ‘1주 1표’다. 실제 공장을 돌리고 회사를 움직이는 것은 노동자들이지만,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대주주들이다. 경제 영역의 핵심인 생산 현장이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공장 담벼락을 넘고 회사 문을 나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거기에서는 ‘1원 1표’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동등한 권리의 확인은 허망하기만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 영역은 자본가계급의 독재가 관철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권리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 경계만은 허물 수 없다. ... 당연히 노동자․민중들은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요구 중의 일부가 자본주의 세계의 몇몇 나라들에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시민들이 살아가는 데 가장 절실한 문제들, 의료, 보육, 교육, 주택, 노후 생활 등에 대해서는 1원 1표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조치들이 단행됐다. 그게 바로 복지국가다. 이나마 이뤄진 것도 민중 투쟁의 성과였다. 하지만 노동자․민중운동이 공장 안의 근본 문제, 즉 1주 1표의 부조리까지 문제삼고 나서면 그 때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1970년대에 복지국가의 일부(영국, 스웨덴 등)에서 자본가들의 소유 독재에 손을 대려 한 몇 가지 시도들은 모두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일단 진보세력 쪽의 기세가 수그러들자 자본가계급의 역사적 반격이 시작됐다. 복지국가라는 양보조차 다시 빼앗을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공세의 시작이었다.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충돌하는 이 두 지점에서 자본주의라는 한계를 넘어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확대·심화를 추구하려는 이념·운동이다. 즉 사회주의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역사적 한계선을 넘어서려는,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원칙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출발점(알파)이고 그 지향점(오메가)이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 운동에는 수많은 과오와 한계가 있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의 분출로 나타났던 혁명(10월 혁명)이 가장 반민주적인 체제로 귀결된 뼈아픈 경험도 했다. 그래서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길고 거추장스러운 간판까지 필요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전 지구 위에 신자유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지금, 인류의 상황은 다시 사회주의가 시작된 그 상황으로 회귀했다.


자본주의(그 벌거벗은 얼굴인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축소하며 와해시킨다. 민주주의는 이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한계들을 과감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넘어서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분출시키고 이를 경제 영역으로까지 확대할 역사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운동이다.


- N. 우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홍기빈 옮김, 개마고원, 2004: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2.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 역사 속의 다양한 민주주의‘들’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다양한 민주주의‘들’이 있다. 역사 속의 수많은 민주주의 운동들이 저마다의 특징과 사상·제도들을 낳았고, 이것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서로 경합·투쟁하고 있다. 그 중에는 민주주의 자체의 발전을 위해 이제는 무대에서 빨리 사라져야 할 유령이나 좀비도 있다. 반면에 먼 옛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처음 등장했으면서도 지금까지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전통들도 있다.


- D.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 이정식 옮김, 인간사랑, 1993: 절판 상태.

- 한국정치연구회 사상분과 편, 『현대민주주의론』 1,2, 창작과비평사, 1992.


2.1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 사상이다.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내세운 이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후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새로운 적 노동계급과 싸우거나 타협하는 가운데 그 내용이 좀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 골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원조 자유주의는 본래 만인의 평등을 믿지 않았다. 시민으로서 민주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일정 액수 이상의 세금을 내는 남성들뿐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20세기 초 보통선거권이 도입되고 나서야 헌법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까 아직 지구상에서 사라진 지 채 100년이 안 됐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상식 속에서는 이 관념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시민을 납세자와 사회복지 수혜자로 나누고 전자를 ‘일등 시민’, 후자를 ‘이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대처나 레이건 식의 사고가 그 대표적인 예다.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오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들은 국왕·귀족과의 투쟁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이 쟁취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원리들을 들 수 있다.  


첫째,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 초기 자본가들이 가장 바라던 것은 국왕과 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돈벌이를 하는 것이었고, 구체제에 대항할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의 직접 간섭을 받지 않는 다양한 사회 활동 영역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사기업, 각종 협회, 사교 서클, 언론, 교회 등등. 이들을 흔히 ‘시민’사회(당시 ‘시민’은 곧 부르주아지였다)라 부른다. 시민사회에서는 현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도 자유롭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양심․사상의 자유, 언론․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다.   


둘째, 대의제. 적어도 헌법에는 이제 이렇게 씌어 있다, 주권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그래서 시민들이 투표로 위정자를 뽑는다. 복수의 정당이 있고 이들이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며 다수당이 집권당이 된다. 그런데 일단 한 번 의원에 당선되거나 여당이 되면, 임기 동안은 그 권한을 완전히 보장받아야 한다. 이번 선거와 다음 번 선거 사이에 주권은 시민들 자신이 아니라 선출직 공직자들에 의해 행사된다. 장사에 여념이 없어서 미처 정치까지 돌볼 시간이 없는 자본가들에게는 그게 편했다.


셋째, 국가 내의 권력 분립, 소위 ‘3권 분립’. 이건 부르주아지가 건설한 새로운 권력 기관들이 국왕․귀족의 전유물이던 국가 안에 들어와 그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나타난 원리다. 뿌리가 다르고 사연이 다른 기관들, 즉 관료기구와 의회․사법기관이 국가 기관이라는 이름으로 공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 권력을 나누고 그 영역을 확실히 해야 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 중 일부는 여전히 유효하다. 부르주아지가 한때 체제의 도전자일 때 들고 나왔던 논리들은 지금 그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바꾸려는 세력에게도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양심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같은 기본권들,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 복수의 정당들이 서로 경쟁하며 집권이 보장되는 대의제의 기본 규칙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리들이 자본가계급의 세상에서 지배의 논리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똑바로 보아야 한다. 한 예로, 대의제의 원칙을 보자. 선거권이 확대돼 노동자도, 여성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자, 대의제의 원칙은 새삼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투표일 이외 나머지 364일은 세상 이치(자본가들 혹은 ‘시장’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를 잘 아는 신사들이 투표일의 약속이나 지금 창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아우성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들이 터득한 그 이치에 따라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선출직 공직자들은 이제 민중의 대표라는 것보다는 선거라는 요란한 행사를 거쳐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엘리트라는 점이 더욱 강조된다.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국민소환제를 공약으로 내세우자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공격하며, 국회의원을 ‘군중의 힘과 거리의 구호’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군중’을 무서워하고 ‘거리’를 혐오하는 이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이 시대에 군중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들, 즉 기득권 세력의 낡은 무기가 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 얼굴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작 양심․사상의 자유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악법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전통에서 정작 계승해야 할 것은 번거롭게 여기고, 그 가장 시대착오적인 대목들에서 힘을 얻는 게 바로 우리 시대의 ‘자유민주주의’ 추종자들이다.


2.2 급진 민주주의 혹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당시부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구별되며 이와 투쟁하던 또 다른 민주주의 사상․운동이 존재했다. 이것은 비록 왕정과 싸우는 데는 부르주아지와 협력했지만 부르주아 계급이 만들려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꿈꿨던 하층 민중의 사상이며 운동이었다. 그 대표적인 운동들로는, 청교도 혁명 때의 급진파(‘수평파’라 불렸다), 미국 건국 초기에 토마스 제퍼슨 등이 대변했던 소농 민주주의,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자코뱅파(M. 로베스피에르 등)를 들 수 있다. 이념적 대변자로는 톰 페인과 장 자크 루소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공화주의자들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받아들인 보통선거권이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이 모든 시민의 참정권을 강조한 이유는 평등의 이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에게 정치란 단지 번거로운 세상사 중 하나에 불과한 게 아니다. 공동체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참여해 일리 있는 의견을 내고 토론과 설득의 고단한 작업을 거쳐 공동의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만큼이나 멋있고 뜻깊은 일은 없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런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서 공화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여기고, 이러한 민주주의 시민 공동체가 현대에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의 본령이 시민 공동체라는 이상에 있다는 걸 분명히 한 것은 공화주의자들의 공(功)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주권은 누구에게 주거나 빌려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권자인 시민들 자신이어야 한다. 투표일만이 아니라 1년 365일 항상 그래야 한다. 그래서 되도록 모든 결정이 시민 총회에서 결정될 수 있는 소규모 사회가 바람직하다. 어쩔 수 없이 공직자들을 뽑아 일을 맡긴다 하더라도, 중요한 사안은 역시 총투표로 결정해야 한다. 또한 공직자가 다수 대중의 뜻에 어긋날 때에는 그 권한을 박탈하고 선거를 새로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 대의제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민중들이 직접 참여하는 게 더 민주적이라는 생각은 바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루소의 고향인 스위스에서는 지금도 중요한 정책들을 국민투표로 결정한다. 미국의 작은 동네·마을에서는 여전히 주민 총회(town meeting)를 소집해 대소사를 논한다. 사실은 현대 민주공화국의 헌법이 보통선거권을 못 박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로 크게 수정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이 시대 민중들의 상식이다. 2004년 1월, 16대 국회가 다수 대중의 뜻과 상관없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을 때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을 뜨겁게 달군 것은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여부가 아니라 국회가 민의와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데 대한 생래적인 반감이었다.


하지만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그 첫 탄생 때부터 커다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가 무럭무럭 크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새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민 중의 누구는 자본가가 되어 다른 시민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쥐고 나머지 대다수의 시민은 그 자본가들에게 고용돼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시민의 자격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한다는 공화주의의 이상은 점점 더 무력한 이상주의로만 다가왔다. 자본주의가 낳는 시민들 내부의 불평등에 대한 처방이 없으면 시민 공동체의 이상은 백일몽에 불과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인 1790년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한 대목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러한 약점을 잘 보여준다. 재산의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리의 본질적인 평등’을 회복하겠다는 것 ― 이것이 곧 공화주의자들의 위대함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였다.  

그래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영광과 좌절로부터 민주주의 운동의 또 다른 흐름이, 자본주의를 직시하며 그에 맞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을 새롭게 추진할 세력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운동이다. 


2.3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그 배반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 쟁취되어야 한다”(맑스, 「국제노동자협회 임시규약」). 이것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다. 해방은 민중들 자신의 손으로 쟁취해야 한다. 다수 대중이 스스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뽑아낼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다수 대중의 동의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것(다수자 혁명), 항상 대중이 직접 참여하고 주도해야 한다는 것(민중 자치), 국가나 정당의 역할은 대중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비하면 부차적이어야 한다는 것(국가의 사멸) 등등.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부과하는 한계들의 극복, 즉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경제 영역으로의 민주주의의 확대이다. 여기서는 그 역사적 실례를 살펴보자.


1871년 프랑스 파리의 노동자들은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 코뮌’을 수립했다. 비록 파리라는 한 도시에 고립되기는 했지만(우리의 광주 항쟁과 비슷했다), 그래도 3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참으로 놀라운 실험들을 펼쳤다. 당시 런던에 망명해 있던 맑스는 ꡔ프랑스의 내전ꡕ이라는 저서를 통해 파리 코뮌을 높이 평가했다. 어떤 이론가의 지침이나 계획이 아니라 순전히 파리 노동자들의 창의력만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모범을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파리 코뮌은 우선 기존 대의제와 관료제를 뛰어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파리 코뮌의 대의원들은 구 단위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되었다. 당시는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아직 보통선거가 실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코뮌이 입법기관이면서 동시에 행정기관이었다는 점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립이라는 미명 아래 비선출직 관료들이 국가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선출직 공직자들이 주도권을 쥐었다. 게다가 지역구민들은 대의원들을 소환하고 불신임할 수 있었다. 기존의 경찰과 상비군은 폐지됐고, 코뮌이 직접 치안 업무를 관장했다. 사법부도 선출직으로 바뀌었고, 역시 소환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공직자들은 노동자 임금만큼만 봉급으로 받았다. 공직자들이 무슨 특권층이 아니라 공직 ‘노동자’임을, 민중의 한 명임을 철저히 확인한 것이다.    


또한 코뮌은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으로 확대하려 했다. 우선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앞장섰다. 제빵공 직인들의 야간 잔업을 철폐했고, 고용주들이 임금 삭감을 위협하며 노동자들을 옥죄던 관행에도 벌금형을 물렸다. 더 나아가, 코뮌 봉기 후 자본가들이 버리고 떠난 공장들을 노동자 협동조합이 인수했다. 물론 은행도 공공의 통제를 받았다. 비록 초보적 수준에서나마 자본가들의 소유 독재를 넘어서 경제 생활에서도 민중 자치가 이뤄지는 사회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이보다 더 생생히 전개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양대 줄기는 이 이상과 원칙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우선 개혁적 사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의 흐름부터 보자. 사회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수준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공공복지의 확충 외에는 사회적 소유의 확대나 노동자 자주관리의 촉진 같이 자본의 독재에 도전하는 적극적 조치도 없었다. 물론 적어도 스스로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발전 수준을 되돌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대의제의 좁은 울타리를 감히 넘어서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수많은 위험한 독버섯들이 자라났고 역사의 절호의 기회들을 놓쳤으며 미래의 야만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때로는 파시즘의 등장을 속절없이 지켜보기만 했고, 요즘은 신자유주의 공세에 멍석을 깔아주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비록 서유럽 몇몇 나라에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복지국가와 대중의 관계는 전통적인 관료기구와 대중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연히 대중의 불만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고, 바로 이 점을 주목한 게 신우파, 즉 신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관료주의’에 맞서 시장의 ‘자유’를 위해 떨쳐 일어서자고 선동했고, 이는 상당히 먹혀들었다. 복지국가의 전성기에 참신한 민주주의 실험들을 벌였더라면, 상황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우파정당들보다도 더 순진하게 의회정치의 틀만을 고집한 탓에 신우파의 반격에 대응하기도 힘에 부쳤다. 반면에 대처나 레이건 같은 신우파 정치가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보다 훨씬 능란하게 의사당 안과 밖을 넘나들며 대중정치의 화려한 기술들을 구사했다.


10월 혁명과 함께 시작된 현실사회주의의 한 세기는 더욱 비극적이었다. 이 사례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혁명이 시작될 당시의 그 위대한 희망과 놀랍던 가능성 때문이다. 이 때 러시아의 도시 노동자·민중이 보여준 민주주의 수준은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것이었다.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는 파리 코뮌의 적자였다. 한데, 20년 후 러시아의 현실은 그 정반대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일당독재, 더 나아가 개인독재가 등장했다. 


고전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저작 어디를 찾아봐도 ‘일당독재를 해야 한다’는 말은 없다. 10월 혁명의 현장에서도 일당독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0월 혁명은 과거 국가기구의 계승자인 임시정부를 대신해 새로운 대의기구인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볼셰비키당’)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당시 혁명에 찬동한 정당은 볼셰비키당만이 아니었다. 소비에트에만 해도 볼셰비키당 외에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파가 있었고 또 다른 좌파정당인 사회주의혁명당이 있었다.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소비에트가 직접 권력을 쥐는 데 동의한 것은 이중 볼셰비키당과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였다. 멘셰비키당 내 일부인 국제파도 초기에는 소비에트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안에는 부르주아 정당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복수의 정당들이 존재한 것이다. 즉, 다당제다. 더구나 혁명 후 첫 번째 정부는 볼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 좌파의 연립정부였다. 


그런데 왜 일당독재 체제가 된 것일까? 우선 제헌의회 문제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제헌의회를 소집해서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선포했다. 혁명정부도 제헌의회 소집 계획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농촌에서는 10월 혁명의 여파가 미처 닿기도 전에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그래서 다음 해 초 제헌의회를 소집해놓고 보니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정당들이 혁명 지지 정당들보다 의석이 더 많았다. 혁명정부는 곧 제헌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것은 불가피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한다 해도,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새로운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곧바로 재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한데, 혁명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헌의회는 결코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 


‘제헌의회’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 10월 혁명의 훨씬 전에 선출·구성되었고, 새로운 사회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라진 과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볼셰비키]은 지체 없이 새로운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해야만 했었다. (중략)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 트로츠키는 10월에 소집된 ‘제헌의회’가 부적합하다는 특수한 사실로부터, 혁명과정에서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인민대중의 대의체는 무엇이든 간에 부적합하다는 식의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두레, 1989, 77~78쪽. 


소비에트가 새로운 대의기구로서 제 역할을 다하면 굳이 제헌의회를 거치지 않아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높은 수준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들의 활동이 하나 둘 금지됐다. 이 대목에서는 볼셰비키당만을 탓하기 힘들다. 공동 여당인 사회혁명당 좌파는 볼셰비키당이 독일과의 혁명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며 쿠데타를 시도하는가 하면 레닌의 암살을 기도했다. 멘셰비키당과 아나키스트들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정이 이러니 일종의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야당 활동의 금지는 어디까지나 ‘임시적’ 조치였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다. 1921년에 내전은 일단 끝났지만, 오랜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 사회는 너무도 피폐해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민중 사이에서 생활고 해결을 내세우며 봉기가 일어났다. 볼셰비키당 안에도 노동자반대파라는 의견그룹이 등장해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바로 이 때 볼셰비키당은 10차 당대회를 통해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만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 이제는 당 안의 분파 활동까지 당분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도 ‘당분간’이라는 게 강조됐다. 당 내 분파 활동의 금지가 어떤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 활동의 자유는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 소비에트 내의 다당제는 복구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아무리 뛰어난 장점을 가진 대의기구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당이 하나 뿐인 상황에서는 결코 제대로 된 대의기구가 될 수 없다. 소비에트 대의원들이 다 볼셰비키당(이후 소련 공산당) 소속이면, 당대회나 중앙위원회에서 모든 걸 결정하면 되지 굳이 소비에트 회의를 열 필요가 없다. 결국 볼셰비키당 일당 체제 아래서 소비에트는 자본주의 국가의 의회들보다도 못한 허수아비 대의기구로 전락해버렸다.


한편 이제 볼셰비키당 안에는 서로 경쟁하는 의견그룹들(분파)조차 존재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당대회나 중앙위원회조차 점점 더 거수기에 가까워졌다. 자연히 당권은 일부 당 관료들에게 집중되었고, 그 정점에 바로 당 사무총장(‘서기장’) 요제프 스탈린이 있었다. 그런데 당권은 곧 군 지휘권을 포함한 일체의 국가 권력을 의미했다. 결국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가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 것이다. 이 상황을 영속화하는 교리가 바로 일당독재였다. 일당독재는 관료독재를 보장했고, 최악의 경우 개인독재의 수준으로까지 추락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에 벌써 이러한 결과를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예언했다.



일반적 대중선거로 창출된 대의기구 대신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노동하는 대중의 유일한 대의체로서 소비에트를 내세웠다. 그러나 전반적인 국내의 정치활동을 억압함에 따라, 소비에트 내의 생활은 점점 더 기형화될 것이다. 보통선거, 언론 결사의 자유, 여론을 끌어들이기 위한 자유로운 투쟁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모든 공공기관 내의 생활은 파괴되고, 단지 관료제만이 판을 치는 껍데기뿐인 정치활동만이 유지된다. 공공생활은 점차 동면에 들어가고,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무한한 경험을 지닌 소수 당 지도자들만이 명령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그 중에서도 몇몇 탁월한 당 지도자가 전권을 행사할 것이며, 노동계급 엘리트들은 가끔씩 회의에 초대되어 당 지도자의 연설에 박수를 치고, 이미 결론 내려진 제안을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들러리가 될 뿐이다 ― 이 때 밑으로부터는 파벌이 생긴다. 확실히 이러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한 줌밖에 안 되는 정치가들의 독재일 뿐이며, 부르주아적 의미 또는 자코뱅적 의미에서 독재일 뿐이다(소비에트 의회 소집 기일은 3개월에서 6개월로 연기함!). 우리는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즉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하게 공공생활의 유혈화―암살과 저격 등―를 초래하게 된다.

- 로자 룩셈부르크, 위의 책, 91~92쪽


이러한 정치 질서를 사회주의의 정치 교과서인 양 떠받들던 체제들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대부분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것도 무슨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민중 자신의 궐기로 무너지고 말았다. 일당독재가 애당초 사회주의 운동의 원칙도 아니고 더구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은 이제 더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도 없는 진리다.


이게 현실사회주의의 정치 체제에 대한 최종 평가라면, 그럼 경제 체제의 경우는 어떨까? 그래도 사회주의인데, 이 영역에서만은 좀 성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치’와 ‘경제’는 본래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당=국가’에 집중돼 있는데, 경제 영역에서만 민주주의가 꽃필 수는 없었다. 기업이 국가 소유가 되고 시장 대신 계획이 경제 활동을 지배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생산 현장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국유화도, 경제 계획도 원래 경제 영역에서 민중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들이다. 만약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한다면, 이러한 조치들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한데 현실사회주의에서 국가 소유는 관료 권력의 토대 구실만 했고 계획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대신해 노동자들을 쥐고 흔드는 ‘보이는 주먹’ 역할을 했다.


사실 현실사회주의의 경제 체제를 평가하려면, 바람직한 탈자본주의 경제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다음의 교훈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는 그 경제 체제 면에서도 민주주의의 확대․심화라는 애초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최소한의 정치적 민주주의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주의의 전진은 불가능하다는 것.


- K. 맑스, 「프랑스의 내전」: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박종철출판사)에 수록.

- R.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룩셈부르크주의』(풀무질)에 수록.

- J.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서찬석 옮김, 책갈피, 2005: 러시아 10월 혁명의 생생한 기록. 


2.4 현대 민주주의의 상황 - 민주주의의 ‘위기’


보통선거권의 도입이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고, 그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보통선거권 도입 이후라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누적적으로 발전해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위기에 노출돼 왔다. 그리고 그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에 있다.


자본가계급의 항구적 욕망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영역을 최소 면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보통선거 실시 이후 이는 무엇보다도 의회를 비롯한 선출직 공직의 권한을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고 관료기구의 재량권을 넓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법과 정책, 토론과 감사의 대상에서 면제되는 소위 ‘전문’ 영역들이 늘어난다. 금융, 외교, 안보, 비밀정보, 과학기술 등등. 또한 지식 엘리트들과 주류 언론이 좌우를 막론한 모든 정당들에게 결코 넘어서 안 될 정책적 한계선을 강요한다. 정당들이 이 한계선 안에 머무는 한, ‘선거’는 진정한 ‘선택’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항상 어떤 보다 근본적인 선택지는 투표용지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비록 민주주의 제도는 늘 그렇듯이 존재하더라도, ‘정치’라 불릴만한 것은 차츰 사라진다.


대의정치라는 유일한 통로가 점차 무능을 노출할 때 대중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땅히 더 큰 희망으로 그 절망을 압도해야 할 진보 세력조차 위와 같은 게임의 법칙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파시즘은 최신형의 극우 선동 정치다. 파시즘이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인 근본 이유는 이것이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실패를 터전 삼아, 그것을 공격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정치’랄 만한 게 사라진 세상에서 파시즘만은 화끈한 ‘정치’를 보여준다. 파시즘은 우선 민주주의 운동의 모든 형식을 적극 활용한다. 대중정당, 민중의 조직화, 언론의 활용, 가두시위와 집회 등 좌파 운동의 전통적 수단들을 채용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성 민주주의의 아픈 곳을 정면 공격한다. 시민사회 안에 이미 존재하는 분열과 증오를 확대시켜 유대인이나 이주 노동자 등 특정 소수 집단을 모든 악의 원흉으로 손가락질하게 만든다.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들이 보편성․연대성인데, 자본주의 아래서 이런 것들은 허깨비에 불과함을 잔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 파시즘이 대중의 지지를 얻었던 것은 진보 세력이 이 정도로 적극적인 자신들의 ‘정치’를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대중의 불만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 불만은 이번에도 자본주의 틀 안의 민주주의가 보이는 기만과 무능 앞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런데도 대다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선배보다 더 노골적으로 자본가계급의 게임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책 한계선 안에 당을 가두는 것을 ‘현대화’니 ‘제3의 길’이니 ‘신중도’니 하는 말로 치장한다. 이것은 그 동안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수준에 갇혀 있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이제는 사회주의의 마지막 잔재조차 완전히 벗어 던지고 자신들이 자유주의 가족의 일부임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좌파들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모두 신자유주의 A형, B형, C형만 제시하는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투표소 안의 ‘선택’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회의하게 된다. 이 때 다시 고개를 들이미는 게 파시즘이다.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더욱 거세고 진보 세력이 유럽에 비해 훨씬 미약한 한국사회에서 파시즘은 어쩌면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다. 21세기 민주주의의 이 ‘위기’ 앞에서 진보 세력의 과제는 무엇인가? 진정한 선택의 제시, 상투적이지 않은 결단,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정치 행위, 이런 것들이다.


3. 대안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


3.1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는다: 다당제, 시민사회의 자율성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운동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재확인하고 지난 세기의 그 실패와 비극에 대해 철저히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성찰에는 과거 민주주의 운동의 전통들 중 앞으로도 계승해야 할 인류의 자산은 무엇인지 짚어보는 것도 포함된다. 여기서는 그 전통들 중에서도 다당제나 언론·표현의 자유, 시민사회의 자율성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들에 대해 짚어보겠다. 


특히, 다당제, 즉 복수의 정당들이 결성돼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고 어느 정당이나 선거를 통해 집권당이 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다당제는 각종 민주주의 제도가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지금과 같은 의회든 아니면 코뮌이나 소비에트 같은 새로운 형식의 대의기구든, 그 안에 복수의 정당이나 그룹이 존재해 서로 경쟁하지 않는 한,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항상 관료기구의 거수기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민중들이 정치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며 다양한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지 않는다면, 직접민주주의도 쉽게 겉껍데기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다당제는 시민사회의 활력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정치 영역에서 다원주의가 막혀 있는데, 시민사회 안에서만 다양한 견해가 꽃필 수는 없다. 국가와 구별되는 대중 조직들이 존재하다가도 결국은 ‘당=국가’에 흡수돼 버리고 만다. 여기에는 노동계급의 조직들, 즉 노동조합 등도 포함된다. 하나의 집권당만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시민사회의 여러 의견 차이가 당 내 분파들 사이의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집권당으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고 결국은 그 당의 폭발을 낳고 만다.


복수의 정당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상적으로 숱한 정치적 논란과 투쟁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집권당의 교체에 따라 국가 정책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비록 좀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정치 생활에 뛰어들어 스스로 세상을 바꿔 가는 게 가장 견고한 방도다. 반대 의견을 배제하고 법령과 지침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면, 그 속도는 빠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작 대중의 생활과는 따로 놀기 마련이고 역사 속에 뿌리내리기도 힘들다. 다당제를 보장하여 대의기구가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고 시민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 모든 사례를 통해 볼 때 민주적 제도의 ‘성가신 메커니즘’이란 것이 이른바 대중의 살아있는 운동이라든가 끝없는 대중적 압력과 같은 강력한 교정도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제도가 민주화되면 될수록, 대중의 정치적 생명의 맥박은 더욱 생생하고 강력해지며 ―비록 선거인 명단, 엄격한 정당의 기치 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당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직접적이고 더욱 완전해진다. 확실히 모든 민주적 제도도 모든 다른 제도와 공통되는 나름대로의 한계와 결점과 문제가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레닌이 발견한 바와 같은 민주주의를 완전히 제거하는 식의 처방은 치료될 수 있는 질병 그 자체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처방은 모든 사회제도의 선천적 결점을 유일하게 치료할 수 있는 바로 그 살아있는 원천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원천이란 인민대중의 활동적이며 자유롭고 활력에 찬 정치활동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위의 책, 80~81쪽.


위 인용문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 대상이 된 트로츠키도 이후 혁명의 변질을 목격하고 난 뒤에는 생각이 바뀐다. 뒤늦게나마 다당제, 비밀투표 등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계급은 내부 구성이 이질적이다.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대에 의해서 찢겨져 있으며 경향, 그룹, 정당 등이 그 내부에서 진행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약간의 유보조항을 덧붙일 경우 “당이 계급의 일부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계급은 많은 구성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미래를 바라보는 진보적인 부분과 과거를 회상하는 반동적인 부분이 있다. 따라서 똑같은 계급이 여러 개의 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

- 레온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 267~268쪽.


관료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회복시키고 노동조합을 부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트로츠키, 위의 책, 287쪽.


그럼 대안 사회에서 정치적 다원주의가 허용되는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의 극복에 동의한다는 이념적 범위 안에서만 정당 활동의 자유를 인정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 범위를 벗어나는 우파 정치세력은? 그들의 정치 활동은? 이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한다면 역사가 뒤로 후퇴할 텐데, 이런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가? ― 그렇다. 바로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까지 받아들이는 게 정치적 다원주의의 핵심이다.  


친정부 인물만을 위한, 일당의 당원만을 위한 자유는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전혀 자유가 아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유다. ‘정의’라는 개념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는 정의에 입각할 때만이 비로소 온전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어떤 특권이 된다면 자유의 효용성은 없어지고 만다. 

- 로자 룩셈부르크, 위의 책, 88쪽.


20세기의 혁명 중 이러한 길을 걸은 유일한 사례가 바로 1979년의 니카라과 혁명이다.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승리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은 FSLN 외의 다른 정당들에게도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했고, 여기에는 우파정당도 포함되었다. 1984년에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실시했고, 여기서 FSLN 후보가 65%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1990년 2월의 대선에서는 우파 후보가 승리했다. 당연히 정권은 우파에게 넘어갔다. 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온 데는 미국의 간섭 탓이 컸다. 미국이 극우 게릴라들을 지원하여 계속 무력 간섭을 했기 때문에 니카라과 사회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그래서 민중들도 좀 ‘편한’ 삶 쪽을 선택한 것이다.


선거로 권력을 내준 FSLN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니카라과의 역사는 일보 후퇴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이름을 내세운 정당이 노동자․민중의 궐기 앞에 무너지고 만 소련·동유럽의 경우만큼 처참한 후퇴는 결코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니카라과의 후퇴는 차라리 미래의 가장 확실한 전진을 위한 일시적 퇴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니카라과 혁명 세력이 비록 당분간은 권력에서 멀어졌을지 몰라도, 이들이 뿌려놓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견실히 자라는 한, 민중들은 언제고 다시 이들과 손을 맞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 될 것은 1990년 선거 당시 FSLN이 선거에 져서 권력을 내놓기는 했지만 이게 그림의 전부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거로 쉽게 바뀔 수 없는 보다 깊숙한 수준에서는 혁명세력의 주도권이 의연히 유지됐다. 군대나 경찰 같은 핵심 국가기구에 FSLN의 영향력이 지속됐고, 사회 전반에 걸쳐 튼튼한 좌파 지지층이 버티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니카라과 사회에 뿌리내린 진보 세력의 ‘헤게모니’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파가 선거에 승리했다고 해서 쉽사리 최악의 반혁명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우파와 좌파 사이의 서로 밀고 밀리는 기나긴 진지전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사례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교훈을 던져준다. 이 도시에서는 지난 80년대 말부터 노동자당 시정부의 주도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시 예산안을 짜는 참여예산제가 실시됐다. 참여예산제는 한 번도 조례로 입법화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확고히 자리잡았다. 참여예산제의 주창자인 노동자당은 불행히도 2004년 지방선거에서 포르투 알레그레의 시장직을 상실했다. 시장 자리는 십 수년만에 처음으로 노동자당 아닌 다른 당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새 시장의 첫 번째 공약은 ‘참여예산제 만큼은 건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약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지켜지고 있다. 참여예산제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당장의 선거 결과만으로 이것을 쉽게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대중들 사이에 너무도 당연한 상식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것,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따라서 돌이키기도 힘든 수많은 진지들을 건설하는 것, 그래서 누가 집권당이냐는 사실만으로는 대세를 거스르기 힘들게 만드는 것, 이것이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를 전진시키는 방식이어야 한다.  


- L. 뜨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1995: 10월 혁명 지도자의 스탈린주의 비판.

- E. 만델, 『페레스트로이카를 넘어』, 차혁 옮김, 태백, 1990: 트로츠키의 입장을 이어받아 구 소련 체제를 비판한 책.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

- 『제4인터내셔널 12차 대회 결의안』, 논장, 1990: 이 중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

- 이범준 외, 『사회주의 실험: 쿠바와 니카라과』, 인간사랑, 1992: 절판 상태.

- 강문구, 『포위된 혁명: 니카라과 혁명 10년사의 현대적 조명』, 나라사랑, 1993: 절판 상태.


3.2 민주주의의 미래를 일군다: 자주관리․자치


하지만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운동이 되살려야 할 가장 소중한 전통은 뭐니뭐니해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분출했던 역사적 경험들이다. 1871년 프랑스의 파리 코뮌; 1894년 동학농민혁명 중의 집강소; 1917년 러시아의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1918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등장한 노동자․병사 평의회(독일어로는 ‘레테’); 1919년~1920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산업지대를 휩쓴 공장평의회와 자주관리 생산;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와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 1956년 헝가리 혁명 중의 노동자평의회; 1972년 칠레의 인민연합 정부와 자본가 세력이 맞붙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산업코르돈과 지역자치지도부;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민중 자치의 시도들 등등.


이들 경험은 시간의 선후로 보면 우리의 ‘과거’에 속하지만, 그 의의는 오히려 ‘미래’ 쪽을 향한다. 위의 사건들 속에서 당시의 노동자․민중이 시도한 생산 현장의 노동자 자주관리, 전 사회적 수준의 민중 자치는 바로 지금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이상이기도 하다. 과거의 민주주의가 의회를 건설하고 시장을 확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 속에서 등장했다면, 이제 새 시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주관리와 자치를 추구하는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운동을 통해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자주관리․자치의 실현은 단지 역사의 우연한 폭발을 기다리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찌어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진보 세력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면 실질적인 권력 중심으로 부상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먼 미래에 벌어질 꿈 같은 일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지금부터 그 싹을 키워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첫째,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기존 사회의 태 안에 이미 그 맹아가 존재한다는 점을 잘 봐야 한다. 1919~1920년의 이탈리아 공장평의회는 노사간의 일상 교섭을 위해 존재하던 내부위원회 제도가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A. 그람시를 비롯한 이탈리아 사회당의 젊은 운동가들이 일찍부터 내부위원회에 주목하여 이를 노동자 자주관리 기관으로 발전시키려 한 노력의 결과였다. 우리도 단순히 자주관리․자치가 필요하다는 추상적 주장에 머물 게 아니라 이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대안 사회의 싹을 찾아내야 한다. 때로는 진보 세력이 의식적으로 그 싹을 만들 수도 있다. 참여예산제가 좋은 사례다.


둘째, 미래의 민주주의는 일정한 견습 기간을 거쳐야 한다. 새로 등장한 자주관리․자치 조직들이 기존의 대의기구나 관료기구가 담당하던 기능들을 갑자기 모두 떠맡게 된다면, 커다란 혼란이 나타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민주적 제도들을 그 인큐베이터로 적극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당한 기간 동안은 민주화된 대의기구들이 민중 자치 조직들과 서로 협력과 긴장의 관계를 맺으면서 공존해야 할 것이다. 사실 파리 코뮌이나 평의회도 일종의 대의기구였지 그것 자체가 곧바로 직접민주주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들 새로운 대의기구는 기존의 의회에 비해 대중의 직접 참여에 적극적으로 열려 있다는 결정적 차이점을 갖고 있었다. 혹자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대립시키고 일체의 대의제를 불신하거나 직접민주주의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런 논리는 현실에 들어맞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한 입장도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민중 자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하도록 민주적인 대의제와 일상 생활의 대중 참여나 대중운동을 서로 결합시킬 최적의 방식이 무엇인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이로부터 세 번째 과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는 하나의 ‘체제’(system)로서 작동할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민중 자치가 실현되려면,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조직들이 필요할 것이고, 이들이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며, 경제·사회적 대안과도 직결된다.


마지막으로 제시할 과제는 바로 대중들 자신의 훈련이다. 자주관리·자치의 성패는 대중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 사회의 주요 쟁점들을 숙고하고 토론하며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성숙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정보와 지식을 개방하고 적절히 다루는 능력; 모든 진지한 토론의 전제인 인간의 존엄성이나 보편성에 대한 감각 혹은 윤리적 공감의 능력;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를 머리를 맞대고 끈기 있게 숙고하는 능력; 자기 집착이나 감정적 충돌 없이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의견을 제시하며 설득하는 능력 등등.


이런 능력들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훈련되어야 한다. 당이 바로 그 장이 되어야 하고, 노동조합이 그 장이 되어야 하며, 지방자치제를 비롯한 모든 민주적 제도들이 그 장이 되어야 한다. 당 사업을 기획하든 노동조합 활동을 설계하든 항상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당과 대중운동이 그 안에 대안 사회의 모습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맥락에서다.


- R. 스위프트, 『민주주의』, 서복경 옮김, 이소출판사, 2004: 대안 민주주의의 방향을 짧지만 명쾌하게 밝힌 책. 강력 추천.

- A. 그람시,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 김현우·장석준 옮김, 갈무리, 2001: 공장평의회에 대한 그람시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 김기원,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귀속기업체의 처리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중심으로』, 푸른산, 1990: 해방 공간의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을 소개한 책.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

- C. 하먼,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김형주 옮김, 갈무리, 1994: 이 중 특히 제9장 “1956년: 헝가리혁명”.

- M. 그레 외,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5: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참여예산제 경험을 정리한 책.

- 가라타니 고진, 『일본 정신의 기원: 언어, 국가, 대의제 그리고 통화』, 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3: 이 중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기쿠치 칸의 <투표>” 


3.3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그 새로운 과제 - 대안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적 능력의 구축 


우리는 6월 항쟁의 위대성뿐만 아니라 그 한계 또한 똑바로 봐야 한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들은 바로 이 6월 항쟁의 한계와 직결된다. 역사적 경험이야말로 대중의 학교이고, 따라서 6월 항쟁이라는 대대적 수업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은 곧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 실천에서도 고스란히 공백과 약점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상식이다. 그 해 6월의 거리에서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를 외쳤다. ‘직선제 개헌’을 외친 입장에서만 보면 6월 항쟁은 확실히 민중의 승리였다. 6·29 항복 선언과 함께 군부 세력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으니까, 그래서 새 헌법이 만들어지고 제6공화국이 수립됐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새 헌법은 제헌의회의 소집 없이 군부독재정당과 보수야당 사이의 밀실 담합으로 만들어졌다. 반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룬 브라질에서는 제헌의회를 소집해 대중의 관심과 사회 세력들 간의 논쟁 속에 새 헌법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헌적 ‘사건’(6월 항쟁)과 함께 시작되기는 했으나, 그에 마땅한 제헌적 ‘토론’은 거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단지 헌법 내용에만 반영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상식이 특정한 형태로 고정되고 그 민주적 행위 양태가 어떤 틀 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6월 항쟁 이후 대중의 상식 속에서 ‘민주화’란 다른 무엇보다도 최고 집행 책임자를 직선으로 뽑는 것이었다. 일종의 ‘직선제형 민주주의’라고나 할까. 직선제형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민주적 행위는 주로 직선 지도부에게 막중한 정치적 과제를 지우고 그 책임을 철저히 따져 묻는 양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대중들 스스로 토론과 숙고를 통해 골치 아픈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나가고 공동의 책임을 떠 안는 행위 양태로 보완되지 않으면, 직선 지도부에 대한 과도하고 수동적인 기대와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일시적인 분노의 표출 정도로 협소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초기에는 대의원들의 활발한 활동, 조합원들의 분임 토론, 대중투쟁의 활력 등을 통해 이러한 위험을 예방할 수 있었지만, 이런 요소들이 하나 둘 눈앞에서 사라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직선 간부직을 차지하기 위한 직업적 활동가들의 경쟁만이 치열해지고, 대중은 선거 시기 외에는 참여의 의욕을 보이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실감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노동조합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사회 곳곳에서 비슷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유독 노동조합들에서 직선제형 민주주의의 한계와 변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민주노조가 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앞선 실험장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민주적 행위가 항상 좁은 틀에 갇힌 채로 나타난다는 것은 곧 대중의 역량이 성장하는 데 뭔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선출직 공직자들에 대한 기대와 분노가 대중의 참여를 폭발시키곤 하니까 겉으로만 보면 아주 선진적인 민주 사회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분노는 대개 일회적인 축제나 분규로 끝나 버린다. 일단 투쟁의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나면 예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되풀이되다 보면 누구든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한계는 민주화가 극히 제한된 영역에 그쳤다는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 군부 독재의 청산은 군부 독재를 경험한 나라들 중에서는 가장 철저하게 이뤄진 편이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민주화는 그 진행 속도가 너무나 더디다. 정당이나 고위 관료, 사법부, 언론, 대학 등은 여전히 민주화의 예외 지대로 남아 있다. 일상 생활의 민주화는 사실 시작의 시작 단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에서 가상 공간이 그토록 활성화된 원인은 실제의 일상 생활 공간에서는 아직 초보적 수준의 시민적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 가상 공간에서조차 진지한 토론과 숙고는 소수의 미덕으로만 남아 있다.


특히 이른바 경제 영역은 민주화의 ‘절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의 칼날을 가장 안전하게 피한 세력은 자본가들이었다. 자본은 더욱 오만해지는 반면, 기업단위 노동조합들은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좌절과 자괴감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형편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 어느 곳보다 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에 목말라 하지만, 막상 그것을 추진할 주체는 지극히 취약한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 운동의 제2막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 두 번째 막의 주제는 대안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적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고전적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사회 발전의 경제적 측면에 주목했기 때문에 대안 사회 건설의 전제 조건으로 주로 ‘생산력’의 발전을 들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배웠다, 대안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생산력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보다 광범한 ‘사회적 능력’의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을. 즉,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다수 대중의 인식·행위 능력이 성숙해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때로 사회 변혁의 주체적 요소에 대한 강조(가령, 로자 룩셈부르크)로 나타나기도 했고, 혹은 ‘문화혁명’의 구상(레닌, 「협동조합론」)이나 ‘대항헤게모니’ 개념(그람시, 『옥중수고』)을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민주화의 제1막의 한계와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대중의 역량 자체가 퇴보하거나 해체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대중의 역량을 의식적으로 배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중의 역량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몇몇 형식적인 민주적 제도를 확보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단 대중조직을 발전시키고 나서 진짜 싸움은 그 다음에 한다는 식일 수도 없다. 사회적 능력은 무슨 계몽이나 추상적 선전 혹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 활동의 연속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중들 스스로 참여하는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을 촉발시키는 게 지금 진보 세력의 관건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소위 ‘진보적 민주주의’ 수준의 과제들에 노동자·민중운동의 목표를 맞춰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의 이상·원칙과 직결된 과제들을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경제 영역의 철저한 민주화를 외쳐야 하는 것이다.


또 한 번의 87년이 있어야 한다. 또 한 번의 대규모 학습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업의 담벼락을 넘고 노동계급 안의 모든 차별을 짓밟으며 제2기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이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겉껍데기 민주화나 지역 연고가 아니라 평등과 연대·평화의 의지로 똘똘 뭉친 한 덩어리(블록)의 민중이 등장해야 한다. 이번에는 대중 스스로 밑바닥으로부터의 토론을 통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결의들을 만들어내는 게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이번에는 다름 아닌 ‘경제’가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어야 한다.


-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5: 특히 “개정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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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9 15:31 2006/08/1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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