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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1999). 작은 풍요"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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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1999). 작은 풍요: 삶의 자율성 회복을 통한 기업과 사회의 재구성. 서울: 이후.
 
강수돌 교수의 이 책은 1999년에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읽어볼 만한 함의가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중에 써먹을 만한 부분을 타이핑했다. 하루 내내 걸렸네.
내가 잘 몰랐던 지식을 알려주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좀더 치열한 인식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쏠쏠하다.
  
o 오늘날 우리 사회는 크게 세 가지의 열병을 앓고 있다. 첫째는 실업문제를 비롯한 고용 위기라는 열병이고, 둘째는 스트레스나 산업재해 등으로 나타나는 노동 소외라는 열병이며, 셋째는 주변의 생활환경에 대한 파괴를 포함한 인간의 생활방식, 사고방식 자체의 위기로 나타나는 생태계 파괴라는 열병이다(강수돌, 1999: 8).
  
o 경쟁을 핵으로 하는 기존의 시장 중심적인 길도 아니요, 훌륭한 당이나 국가가 위에서 주도하는 계획 중심적인 길도 아닌, 진정한 자율․자치의 길이야말로 참된 ‘제3의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강수돌, 1999: 11).
→ 말은 쉬운데, 그게 제대로 될까? 


Ⅰ. 문제의 뿌리
  
1. 경제 위기는 삶의 위기!
 
o '국가부도'니 '제2의 국치'니 하는 말들로 우리를 괴롭혔던, 그러나 이제는 정리해고나 대량실업, 가정파탄과 인간성 파괴라는 극한 상황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IMF 시대’를 과연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나? 우리가 보건대 'IMF 시대'란 축적 위기에 처한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와 세계 자본의 내적 필요가 '외환위기'를 매개로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개방화·탈규제화·민영화·유연·합리화 등을 주요 축으로 하는 IMF식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한국 자본은 상대적으로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국가를 등에 업고 매우 효율적으로 몸을 불려왔다(재벌-국가 복합체). 그것이 관치금융이고 정경유착이며 문어발 경영이나 재벌 공룡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이 과정은 국가의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힘이 강해지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축적의 조건들을 과감하게 정비해 나가는 ‘기회’가 필요했다. 흔히 ‘위기를 기회로’라는 구호와 함께 고비용-저효율의 구조를 과감히 뜯어 고치자라는 주장이나, 아니면 비효율적인 기업의 M&A나 과잉 노동력에 대한 군살빼기식 정리해고가 별다른 규제도 받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한국 자본의 필요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음으로 세계 자본의 필요라는 측면을 보자.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과 관련해서는 한마디로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이 현재 세계 자본의 움직임 뒤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생산적 자본의 이윤율을 경향적으로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실물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를 가속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화란 한편으로 생산적 실물자본의 탈국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이요, 다른 편으로는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분리된 금융자본이 천문학적 차익을 노리면서 투기자본화, 카지노자본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과 한국의 경제 위기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와 관련해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세계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미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세계화’ 전략을 추진해 왔다. 이들 입장에서는 한국과 같은 나라가 더 이상 보호주의적 장벽의 공고화나 국가 및 노조의 자본 운동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 같은 것을 하지 않기를 바라왔다. 게다가 공공 부문의 비효율성을 깨뜨린다는 명분 아래 공기업 등의 민영화 및 이를 통한 자유로운 투자 유치를 바랐다. 또 재벌 기업들도 정경유착이나 내부거래 등으로 밀실 경영을 하기보다는, 그리하여 세계 자본에게는 언제나 ‘블랙박스’로 남아있기 보다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기를 바라왔다. 그래야만 세계 자본이 자유롭게 더 많은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 자본의 개방화 압력과 탈규제화 압력 등이 역설적이게도 그간 세계 자본과 권위적 국가의 힘으로 급성장한 한국 자본에게는 치명타로 작용, 마침내 경제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둘째, 대개 초국적 기업이나 세계 금융자본으로 표현되는 세계 자본은 지구 전체를 무대로 운동하면서 자기 몸을 불려나가는데, 만일 한국에서 1997년 말 ‘모라토리엄’ 상태가 실제 현실이 된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멸망’한다면 세계 자본으로서는 더 이상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이야말로 세계적 모델’이라면서 다른 후진국들에게 열심히 벤치마킹하라고 선전할 명분을 잃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 이상 한국에서 단물을 빨아먹을 수 없게 되므로 실리적으로도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된다. 게다가 한국 사태의 불똥이 일본이나 미국에까지 튈 우려도 매우 컸다. 또 당시 미국의 자본가 세계에서는 국내 금리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금리인상이 이뤄질 경우, 아시아로부터 자본이 대거 이탈, 미국으로 쏠려 결국 아시아 위기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고, 그러면 미국(자본)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자본)에도 매우 해롭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을 하기에 이들은 보기 드문 규모로 축적 위기의 한국에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바로 그 조건으로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은 현재 한국 경제의 위기가 한국 자본의 축적 위기일 뿐만 아니라 ‘축적 위기를 관리할 능력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동시에 일러준다(강수돌, 1999: 25-27).
  
o 대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국가부도 사태나 외환 바닥 사태, 또는 국가경쟁력 약화를 경제 위기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의 핵심이 세계의 자본이 범지구적으로 인간 공동체와 자연 생태계를 급속도로 파괴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 속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 내면적인 자율성에 기초하여 자립자족적이고 상부상조하면서 서로 즐겁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로부터도 분리된 채, 자본과 시장 경쟁의 논리에 종속되어 힘겹게 살고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위기의 또 다른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삷의 위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위기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IMF 시대’의 위기란 이미 우리가 오래 전부터 경험하고 있는 삶의 위기가 더욱 첨예하고 세계적인 형태로 느껴진 것일 뿐 새삼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강수돌, 1999: 28-29).
→ 결국은 삶의 위기라는 것인데, 사람들의 인식은 그 이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2. 말 많은 세계화, 그 본질
 
o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흐름은 약 400년 동안의 준비기를 거쳐 불과 100년 만에 독점화, 제국주의화하였고, 이것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유발하였으며, 그 뒤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대체로 미국 독점자본 중심의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경제, 특히 선진 자본주의 경제는 그 축적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 과정에서 고도의 유연 합리화를 추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 직접투자 등 경영의 세계화를 공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 배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결국은 일국 차원의 복지국가형 모델로는 더 이상 자본의 발빠른 축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과학기술혁명을 생산과정에 도입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의 수익률을 경향적으로 저하시켰고, 이것은 자본으로 하여금 더욱 해외 진출과 세계화를 진행하게 추동했다. 나아가 시장도 국내 시장은 잠재적으로 포화상태로 치달았고, 국내 노동자들도 더 이상 규율 잡힌 노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복지국가적 노동자 통합정책은 돈이 엄청나게 드는 프로젝트이므로 더 이상 재정적으로 버티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더 이상 수익성이 높은 국내 투자 기회를 찾지 못한 엄청난 돈들은 생산과정 즉 실물경제로부터 이탈된 채 네트워크로 긴밀히 연결된 세계금융시장을 빛과 같은 속도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강수돌, 1999: 33-34).
 
세계화의 덫(강수돌, 1999: 35)
IMF는 그동안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그 나라의 경제 구조나 생활방식을 구조적으로 바꾸어 세계시장에 편입시켜내었다. 1980년대만도 IMF는 약 70개 정도의 제3세계 나라에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합리화를 강제하면서 구조조정을 유도하였다. 지금까지 지구촌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100개 정도의 나라들이 IMF에 의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반강제적 구조 조정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 조정 과정은 거의 예외없이 현지의 자급자족적 사회경제 시스템이나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경제를 지극히 세계시장의존적으로, 따라서 자본의존적으로 불구화시켜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게도, 빈곤(사회의 양극화)과 대외의존의 심화, 민주주의의 말살, 자연이나 전통 지역사회의 생태적․사회적 황폐화, 불평등 구조의 심화, 시민사회에 대한 자본 독재의 강화, 지구촌의 “20:80의 사회”로의 이행 등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물결의 경제 논리는 크게 네 가지 기둥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① 자본 운동에 대한 대외적 개방화, ② 정부와 노조의 기업에 대한 규제 철폐, ③ 공공부문이나 복지 제도의 민영화 및 감축, ④ 인원 감축을 비롯한 기업경영 유연화 등으로 요약된다(강수돌, 1999: 36).
  
Ⅱ.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7가지 분리
  
3. 7가지 분리
o 원래 ‘경영’ 내지 ‘관리’(management)라는 말은 라틴어로 ‘손’을 뜻하는 마누스(manus)에서 왔다. 이것이 기마술, 즉 ‘말 다루는 솜씨’로 이어졌고, 이 단어가 오늘날의 ‘관리’(management)이라는 말로 굳어졌다. 고전적인 ‘말 다루는 솜씨’로는 ‘당근과 채찍’, ‘박차를 가하기’, ‘재갈 물리기’ 등이 있다. 즉 주인이 의도하는 대로 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끌고 가는가, 그리고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강제로 먹이지는 못한다’는 격언에도 나오듯이 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관리의 핵심적 문제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인 인간 노동력과 관련, 경영학적 의미에서 관리(management)란 능력 개발과 동기 부여, 성과 평가와 노동 통제 등을 그 핵심적인 내용으로 한다(강수돌, 1999: 45-46).
 
4. 공동체로부터 개인의 분리
 
o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자에 의한 노동자 삶의 ‘종속화’ 경향 촉진은 두 가지 의미
하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노동시장에 나가서 자신의 노동력을 화폐와 교환하여 팔게 될수록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기존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폐기시키는 결과가 되어, 결국 이제는 어느 누구도 기업가 아래로 들어가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 나가기가 어렵게 된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형식상 자유롭긴 하지만 기업가 아래로 들어가 순종해야만 삶이 보장되는 이 모순된 현실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기업가들이 노동자를 ‘종업원’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삶의 종속성을 은연중에 확인하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노동 계약의 결과, 노동자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여 소비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하나의 대상화된 ‘생산요소’로서 또 기업가나 경영자에 의해 관리 통제되는 ‘인적 자원’으로서 자본가의 의지나 시장 상황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거나 적응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결국 ‘자유로운 종속’,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강수돌, 1999: 53-54).
 
o 노동의 내용도 문제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하고, 또 무엇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그 심각성을 깨우쳐야 한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내용이 공허하거나 단조로우며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멀다고 얘기하고 있고, 나아가 생산하는 내용이 갈수록 의미없는 것, 쓸데없는 것 또는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것, 또는 파괴적인 것 - 인간과 자연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것 - 들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고 있다.
노동사회란, 외적 자율성은 획득했으되, 자연과 인간의 파괴를 통한 이윤추구라는 내적 타율성이 강화된 사회이다(강수돌, 1999: 58).
 
o 사람들이 수출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양질의 노동력’으로 길러질 수 있도록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가정과 학교를 포함한 온 사회가 ‘공장’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나는 노동 능력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 자세의 측면이다. 노동 능력이란 건강한 육체는 물론 국어, 수학, 영어, 컴퓨터, 기술 등의 실력이며, 반면에 노동 자세란 작업 명령에 대해 거부하지 않고 복종하며 일할 수 있는 태도이다. 대부분은 초등하교,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부모님과 선생님, 어른들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일)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여기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노동 능력을 훌륭히 기르기 위해서이며,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은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태도, 즉 노동 자세를 성실히 가다듬기 위함이다. 특히 한 학기나 한 학년이 끝나면 몇몇 학생이 우등상을 받게 되는데, 이 상장의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바로 그 속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 있다. “…위 학생은 행동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라는 상장 문구에서 “행동이 방정하고”는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노동 자세가 올바로 길러지고 있다는 뜻이며, “성적이 우수하여”는 노동 능력이 뛰어나게 길러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소수의 우등생을 모범으로 하여 수많은 다른 학생들이 이를 따르도록 ‘보상을 통한 강제’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강수돌, 1999: 59-60).
→ 학교교육의 본질을 짚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제도교육은 그렇다 치고, 노조나 진보정당에서 모범당원, 모범활동가 등도 이와 비슷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o 대개 한국인은 중요한 사항은 바이어가 떠나기 전날 밤에야 다루기 시작한다. 따라서 귀국일자를 미리 말하지 말고 귀국 항공편을 복수로 예약하는 등 돌발사태에 대비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한국의 기업문화 내지 사회문화의 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문제를 차분하게 체계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최종 마감시각이 가까워져야 비로소 서둘러 한꺼번에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대개 많은 ‘중독조직’(addictive organization) 안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이는 기동성이 있어 좋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분별력 있고 지혜로운 판단이 이뤄지기보다는 혼란과 오판으로 귀결되기 쉽다. 이러한 의사결정방식은 한편으로는 자기 중심적인 권위주의 의식을, 다른 편으로는 일상화된 임기응변적 위기 대처 방식을 증명하고 있어, 전형적인 중독 조직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강수돌, 1999: 62-63).
 
5. 생산 수단과 노동력의 분리
 
o 경제 위기와 외자 유치
외자유치가 경제 위기, 삶의 위기와 맺는 관련성이란, 그 출처가 외국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본이 민중과 맺는 관계가 잘못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외자든 내자든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물론 내자에 비해 외자는 대체로 그 운동 반경이 훨씬 더 클 뿐만 아니라 운동 속도나 기동력, 융통성이 더 클 것이다. 따라서 개별 국가 차원에서 움직이는 노동 입장에서 보면 그에 마땅히 대응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외자 유치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민중이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능력을 갈수록 많이 잃어버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만큼 삶의 과정 자체가 외적인 힘에 대해 종속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현재 세계에는 약 4만개 정도의 다국적기업이 있어 전 세계의 정치경제를 쥐고 흔든다. 또한 수십조 달러 규모의 세계금융자본은 하루에도 지구를 수십 바퀴씩 돌며 순식간에 높은 수익을 뽑아가려 하고 있다. IMF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세계 자본의 대변자이자, 동시에 단기고리채 자본이 아니던가. 이러한 거대 권력체인 자본 앞에 특정 나라의 생산 조직과 민중의 삶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은 자립성의 상실과 종속성의 강화로 귀결되고, 이것은 결국 민중이 자율적이고 책임성 있게 삶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의 위기, 즉 삶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은 그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의사결정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객체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빌려오는 돈은, 돈과 함께 정치·경제 및 사회·문화 운영의 방식까지 그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고자 한다. 이렇게 외자라는 빚을 얻어 빚을 갚아나가는 일이 일상화되면, 우리의 후손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름대로의 독자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물려받은 빚을 갚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 운명, 즉 삶의 위기 그 자체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될 것이다. 
 
6. 계획과 실행의 분리
 
o 경쟁의 한계
; 세계화된 경쟁 물결의 결론은 명백히 범지구적 사회 분열과 생태계 파괴이다.
첫째, 경쟁을 어느 한 기업 입장에 국한된 시각으로 볼 때에만 ‘노사 모두가 성공하는 것’(win-win game)이 가능할 뿐이지, 사회 전체 또는 지구촌 전체로 보면 실패하는 기업, 따라서 실패하는 노사가 생기게 마련이다.  
둘째 일단 한번 성공한 기업의 노사가 앞으로도 영원히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들이 계속 성공할 수도 없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잠재적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즉 갈수록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동의 효율 및 경영의 효율을 높여 노동 강도를 높여야 한다. 물론 기업 특유의 기술 혁신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 무한 경쟁 과정에서 각 기업들이 그 상품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원가 절감 차원에서 흙, 물, 공기, 나무나 원유와 같은 값싼 원료를 채취, 운반하느라고 지구촌의 유한한 자연 생태계를 더욱 가속도로 훼손하여 결국에는 우리 모두의 삶의 토대를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구 자체도 각 기업별 무한 경쟁을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겠다고 소리치고 있는 점을 재빨리 알아차린 기업들은 ‘그린 상품’을 개발하여 생태계 문제를 재빨리 상품화하고 있지만, 이 것 역시 한계가 있다. 모든 기업이 그렇게 할 역량이 부족할뿐더러 경쟁의 압력이 존재하는 한 모든 제품을 그렇게 만들기도 힘들다.
 
세계시장을 둘러싼 경쟁이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상품경쟁력에 둔다. 시장 경쟁력이 없는 상품은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폐기처분된다. 따라서 그 상품을 생산한 노동도 아무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은 그 노동을 수행한 노동자가 쓸모없는 존재로 평가받는 것이다. 요컨대 대다수의 경쟁력 없는 사람은 이 경쟁 사회에서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 즉 시장 경쟁이 곧 삶의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시장 경쟁의 근본적 한계가 아닐까?(강수돌, 1999: 86-87)
→ 경쟁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까지 접근해보지는 못했다. 이래서 국제주의적, 생태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다.
 
7. 삶터와 일터의 분리
  
o 자가용 수요의 증대는 한편으로 삶터와 일터의 분리의 산물이요, 다른 편으로 그러한 분리의 현실과 자본의 효율성 논리를 노동자들이 생활 속에 내면화한 결과이다(강수돌, 1999: 95).
→ 갈수록 사람들이 자가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게 되고, 그것이 가진 효능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이를 테면 애를 가진 부부의 경우 차가 없으면 애를 데리고 외출하기 어렵다, 물건을 가지고 이동하려 해도 차가 있어야 편하다 등이 그런 이유이다. 그래서 사회 구조가 가진 문제를 개인, 자기 가족의 문제로 축소시켜 파악하게 되고, 차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가진 고통, 모두가 차를 샀을 때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하게 된다.
대중교통을 고민하는 이만 목이 터져야 대중교통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인식이 필요하다. 이렇게 변해가는 문화에 저항하고, 핵심을 깨우쳐 주는 것, 그런 것이 진보 아니던가.
 
o 정보화와 일터의 변화
정보화 과정은 노동과정상 노동통제 방식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즉 과거의 권위주의적 형태나 기계적 형태로 표현되는 외재적 통제보다는 제도적 형태나 소통적 형태로 표현되는 내재적 통제가 선호될 뿐만 아니라 가능해지고 있다. 여기서 제도적 형태란 경영참가 제도나 복지제도를 통해 노동자를 기업과 동일시하게 하여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소통적 형태란 자본이 노동에게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어느 정도의 자율 공간과 의사소통의 기회를 제공하여 자본의 운동 논리를 노동 스스로 내면화하게 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어떤 기업에서는 컴퓨터 통신망을 통하여 불만 사항이나 건의사항, 기발한 아이디어 제안 등을 아무런 위험 부담 없이도 그 조직의 높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고, 많은 경우에 이러한 제안은 채택되어 포상되기도 하고 불만 사항은 개선되고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욱 그 조직과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이른바 ‘전자민주주의’의 환상까지 가지게 한다. 그러나 반면에 정보기관과 기업이 공유하는 포괄적인 인사정보시스템이나 전자감응장치, 호출기, 휴대폰 등은 기업 활동에 거슬리는 행위를 하는 모든 개인이나 조직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실상 더욱 강력하고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다.
 
노동통제방식과 관련하여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생산직․사무직․관리직을 불문하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집단적으로 노동이 수행되는 경우에는 팀작업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에 유럽의 노조들이 노동과정의 자율성 확대나 노동자의 자질 향상, 노동의 인간화라는 맥락에서 요구한 것이지만, 정보화와 더불어 자본이 주도하여 인력감축, 노동시간상 빈틈의 축소(각주. 노동시간은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일하게 중요한 살아있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돈을 벌어주기 때문이다. 더 많은 노동시간은 더 적은 손실 또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본은 그 시간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한다. 반면 노동자들이 노동을 위해 쓰지 않는 어떠한 시간도 자본에게는 죽은 시간이다(해리 클리버,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권만학 옮김, 풀빛, 1996: 182 참조), 노동강도 강화, 외재적 통제의 내재화, 관리비용(위계적 경직성 및 중간관리자)의 축소, 노동자의 경험적 지식과 창의성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맥락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보기술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예민한 특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편으로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시스템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부 공정의 조그마한 장애도 전체 조직을 마비시키거나 교란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노동과정 및 관리과정의 정보화가 진척될수록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러한 위험성을 사전에 예방하는 데 동참하도록 만들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주인의식과 일체감, 그리고 원활한 의사소통 등이 더욱 강조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팀조직이 발전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보화를 기초로 하는 팀작업은 팀구성원끼리 자기통제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본이 생산성과 품질, 작업태도, 노조의 영향력 등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끝으로 정보기술의 도입은 소수의 남성 노동력이 핵심 노동자층으로, 그리고 다수의 여성 노동력이 주변부 노동자층(단순기술직, 단순사무직, 임시직 등)으로 양극화되도록 하는 데에 더욱 기여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강수돌, 1999: 102-103).
→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잘 지적하고 있다. 팀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겠다.
   
8. 인간과 자연의 분리
 
o 모든 것이 경쟁력을 중심으로 판정되고 인간의 생존 여부도 시장 경쟁력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가 도래하고, 세계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 사회와 학문 세계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첫째, 자연과 인간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효율서오가 그에 바탕한 경쟁 논리가 온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인간 주체의 무한한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은 갈수록 자연을 대상화, 수량화하여 개발과 성장,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그리고 생산성이라는 이름 아래 오히려 그 파괴성을 증대시켜 왔다.
 
둘째, 비록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이론적으로는 자원의 유한성을 전제하였으나, 현실 정치에서는 이러한 유한성을 철저히 망각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국민국가 단위의 상호경쟁적인 경제적 효율성 향상의 과정에서, 지구의 자원은 마치 무한히 ‘퍼낼 수’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이론에서는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은 처음부터 무한한 자원 - 따라서 아무런 시장 가격을 지니지 못하는 무가치한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러나 물이나 공기조차 바로 그러한 경제적 효율성 향상의 과정에서 오히려 급속도로 파괴되었고, 따라서 이제는 유한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셋째, 인간의 외면과 내면이 철저히 분리되었다는 점이다(강수돌, 1999: 108-109).
   
o “공격자와의 동일시”(H. 하이데, 한국 경제-축적양식의 위기, 「녹색평론」5-6월호, 1998)
자신을 공격하고 지배한 사람들에 대해 아예 저항을 않거나 저항을 하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더 이상 대안적 전망에 관해 고민하거나 결사항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공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공격자나 지배자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하고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강수돌, 1999: 118).
 
o 기득권을 가진 지배자들에게 대한 분노가 곧장 자동적으로 저항으로 연결되기보다는, 대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장래에 대한 걱정, 파산선고에 대한 두려움 등과 함께 뒤섞이면서 노동자들은 매우 심한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여태껏 애국심과 애사심을 너무나 가슴깊이 내면화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심리 구조를 적극적으로 파들어가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고자 하는 관리 방식이 종업원지주제나 우리사주제 도입, 그리고 참여경영 전략 또는 노동자의 중산층화 전략이다. 만일 이러한 여러 기법들이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공격자와의 동일시”가 더욱 강화되어, 마침내 ‘싸움의 상대방’이 뒤바뀌게 된다(강수돌, 1999: 119-120).
  
9.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o 정보기술을 활용한 상품광고가 세계 구석구석으로 침투하여 우리의 욕구 구조를 표준화시키고 탈정치화시키고 있다면, 유행과 패션은 그러한 상품 소비의 주기를 단축하고 “제도화”(강내희, 속도와 화면, 「문화과학」, 제12호/가을, 문화과학사, 1997: 166)시키고 있다(강수돌, 1999: 127).
  
o 웹스터와 로빈스는 오늘날 정보통신기술이 현대인의 모든 활동 흔적과 기록을 전자적인 감시상태 아래 남김으로써 기존의 테일러리즘을 생산현장 뿐 아니라 전사회적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고 하여, ‘사회적 테일러리즘’(social Taylorism)이라 이름짓고 있다(추광영,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미래문화, 「철학과 현실」가을호, 철학문화연구소, 1997 참조).
  
o 관광이나 여행의 산업화는 자동차의 대중화(대량 생산-대량 판매)와 더불어 진행된다. 원래 관광이나 여행은 자연이나 인간 사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그 이해의 폭을 심화시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다시 성찰하며 더욱 보람된 삶을 위한 심신의 재충전 기회이다. 또한 스포츠도 심신을 단련하여 삶의 건강성을 드높이는 데에, 그리고 스포츠를 매개로 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상품화되고, 나아가 스포츠의 경우 상대방을 눌러 이겨야만 거대한 상금을 탈 수 있는 새로운 투지의 장으로 변모하면서 급속히 상품화를 부채질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영상물의 경우 사람들을 탈정치화하고 은연중에 자본의 논리, 지배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조장한다.
 
다른 한편 진보적인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동문화를 상품화하면서 거꾸로 자본의 논리에 자기도 모르게 재포섭되는 위험도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운동들이 그 잠재적 위험을 극복하여 이념적 (확대)재생산을 해냄과 동시에 경제적 재생산까지도 해낼 수 있는 내적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강수돌, 1999: 134-135).
  
10. 인간 내면과 외면의 분리
  
o 세계경영과 성과주의
 
‘세계 경영’의 입장에서 지구촌 전체의 노동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배치,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과제 중의 하나로 된다. 그 ‘세계 경영’의 대표적인 수단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인종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 따위이다(강수돌, 1999: 139-140).
 
o 경제 위기와 애국주의
  
왜 자본은 근대 민족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본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에 국가의 힘이 필요하다(공권력으로서의 국가). 다른 하나는 자본이 노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에도 국가라는 경쟁단위가 필요하다(경쟁단위로서의 국가)(강수돌, 1999: 140).
 
문제는 자본끼리의 경쟁 관계가 지속될수록 각 자본들은 각각의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경쟁을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어떤 개별 자본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자본 일반의 노동 일반에 대한 지배력은 계속 유지, 강화된다는 점이다. 결국 자본간 경쟁 관계는 자본주의 지배 관계가 겉으로 드러난 형태일 뿐이다. 즉, 자본 일반이 노동 일반을 나라별로 갈라 놓고 서로 경쟁을 시키게 되면 나라별로 노동과 자본이 협동하여 애국주의 깃발 아래 다른 나라와 싸우게 되므로, 바로 그 과정에서 각 나라별 자본은 각각의 노동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고(‘참여와 협력’의 확보), 따라서 자본 일반은 그 지배력을 그만큼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행사 때, 사회자가 조별로 박수를 쳐보라고 하면서 조별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참여자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남들이 모두 경쟁하는 데 우리만 게을리 하면 패배하지 않느냐”하는 논리는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목소리이든지 아니면 문제의 줄기와 뿌리를 잘못 보는데서 오는 오류다. 결국 자본 입장에서 본다면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제 경기는 그 자체로 엄청난 초국가적 사업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자손손 국가별 애국주의를 장려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
  
이와 같이 시장지배력을 둘러싼 자본 사이의 경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쩔 수 없는 외적 강제로 보이긴 하지만 사실상은 자본이 자기 몸을 불려나가고자 하는 내적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가 되도록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자!”라는 식으로 ‘애국주의’에 흠뻑 빠져, 자본 사이의 경쟁에 노동이 동참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몸 불리기를 도와주는 일이다. 자본의 증식이란 자본이 노동을 매개로 자기 몸을 불려 나가는 것이므로, 바로 이것이 노동에게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뜻한다. 그것은 많은 경우 물리적 생명 자체의 죽음도 의미하지만, 더 중요한 측면은 살아 움직이는 주체적 역량의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경제 위기, 삶의 위기의 본질이 아닐까?(강수돌, 1999: 141-142).
  
o 성과주의와 연봉제의 함정
 
성과주의와 능력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임금제도, 승진 제도는 기업의 효율향상과 노동통제 측면에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이기 때문에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도입-적용-확산될 전망이다.
대체로 97년까지만 해도 능력주의, 성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연봉제 임금 체계의 도입은 일반적 사회분위기와 노조의 반발로 인해 저지되어 온 편이다. 하지만 97년 말 이후 이른바 ‘IMF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업들은 고용 위기의 상황을 이용하여 그 동안 주춤거렸던 성과주의 임금 제도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이른바 노동시장 유연화(정리해고와 파견근로, 임시직 증대)를 어느 정도 진척시킨 뒤에 이제 인사제도 유연화(성과급, 연봉제)를 진척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기업에서 성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인사제도의 유연화를 도입하려는 표면적 이유는 기존의 연공주의 체제(나이와 근속연수에 비례해서 임금과 승진이 정해지던 방식)에서는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하고, 별다른 공헌도 없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임금만 많이 받아가며 자기개발의 동기부여도 없어 조직이 정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용은 많이 치르되 창의적인 경쟁력 향상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련주의, 무사안일주의, 부당 차별주의, 부정부패, 낭비와 형식주의 등은 철저히 척결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연봉제를 통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까?
 
능력주의, 성과주의 인사 제도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함정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능력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다는 새로운 인사제도라는 게임의 규칙은 매우 훌륭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 물론 평가기준의 객관성과 공정성도 문제가 크다 - 게임 그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심각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 연봉제와 같은 능력주의 인사제도 아래에서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만큼 그대로 평가를 받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결코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이다. 즉 동료에 비해, 또는 다른 팀에 비해 얼마나 더 잘했는가가 문제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얼마나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는지는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 못 된다는 말이다. 평가 자체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갈수록 피곤해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무한경쟁이 부채질되기 때문이다. 둘째, 능력주의 인사제도가 강화, 확대되면 노사관계가 3차원에서 변질된다. 맨 먼저 집단적인 교섭관계가 개별적인 평가관계로, 노와 사의 힘 관계가 노와 노의 경쟁 관계로, 또 시간적으로 장기계약관계가 단기계약관계로 변동하는 것이다. 결론은 노동조합의 역할 축소와 무력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눈 속의 가시 같은 존재가 아예 사라지는 것이 좋겠지만,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주류노사관계이론의 입장에서조차도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힘을 가지고 경영 과정에 대해 ‘건전한 비판자’ 역할을 수행할 때 노동의 인간화와 경영의 선진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기업 내 구성원들을 상호 경쟁시키면 일부에게는 이러한 시스템이 동기부여 효과를 낳겠지만, 대다수에게는 동기저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부분적인 생산성 효과에도 불구하고 상호 경쟁 관계로 인해 총체적인 생산성에는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팀워크나 정보공유,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인한 효과적 문제해결 등의 측면에서 문제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의 노동생산성은 결코 그 개인 혼자만의 배타적 능력이나 업적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조직 속의 여러 개인들이, 그리고 유․무형의 관계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개인의 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평가 대상에 포함되는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업적과 성과에 치중한 나머지 장기적인 조직 발전에 도움이 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놓칠 가능성도 크다(강수돌, 1999: 152-153).
 
o 연공, 능력, 업무에 따른 차별조차도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자본과 경영의 입장에서는 그 차별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입장에서는 차별의 구조를 통하여 여러 집단 사이에 ‘이성적인’ 경쟁이 일어나도록 동기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조직구성원 전체가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 더 한층 땀흘리도록 만들어내는 것, 즉 효과적으로 분할 통치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강수돌, 1999: 154).
   
Ⅲ. 대안은 있는가
 
11. 세계화를 넘어서기
  
o 미국식 시장경쟁 위주의 자본주의란 한마디로 모든 판단의 기준을 시장경쟁력에다 두고, 오로지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력이 없는 사람과 조직은 가차없이 잘라내고, 경쟁력이 없는 공장이나 사무실은 가차 없이 폐쇄한다.
 
이를 미국의 자본가들은 ‘주주중심 민주주의’(shareholder democracy)이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주주들만 모든 판단과 기업 행위의 기준이 되고 이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의 공동선을 높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동일한 자본주의 경영이론 안에서도 ‘이해관계자 민주주의’(stakeholder democracy)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주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즉 노동자, 노동조합, 지역사회, 소비자, 환경운동가 등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권익을 골고루 생각해야 옳다는 견해가 많다.
 
ㅇ주주중심 민주주의의 한계
시장경쟁력만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은 경영합리화를 통한 인원 감축과 임금 인하, 조직 축소, 외주․하청화, 구조 조정 등을 가속화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쫓겨나고, 다수의 비정규직 사원들이 빈자리를 메우게 된다. 이들은 더 낮은 임금에 더 긴 노동시간을 일하게 되면서도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강수돌, 1999: 160-161).
 
미국의 뉴스위크조차도 이러한 미국식 자본주의를 두고 임금과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죽여나가면서 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킬러 자본주의’(killer-capitalism)라고 비꼬기도 한 바 있다(강수돌, 1999: 162).
  
o 자유화, 탈규제화, 민영화, 경영합리화 등 크게 네 가지 기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오늘날 세계화의 물결은 IMF나 IBRD, 초국적 기업, 그리고 세계금융시장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 각 나라, 각 기업에 시장경쟁력과 주주이익 향상을 위한 ‘하향평준화’ 경쟁을 촉진시키면서 고용불안과 대량 해고,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 복지감축과 재정감축, 금융공황과 사회 불안 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강수돌, 1999: 170).
  
12. 구조 조정과 위기 탈출
 
o 구조조정 - 5가지 시나리오
구조조정이라는 개념이 누구의 입장에서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첫째의 의미는 IMF가 요구하는 바, 보호주의적이고 규제 위주인 경제구조를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구조로 바꾸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경유착의 표본인 재벌을 개혁하여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을 폐지하고 내부거래를 금지하며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부실금융기관을 정리하고 금융기관의 대출 행위를 철저히 시장경쟁 논리에 맡기며, 세계금융자본에게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라고 한다.
 
둘째의 의미는 노동집약적이고 저부가가치형의 경제구조를 자본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형의 경제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배제적 자동화나 정보화가 가속화되고 따라서 인간 노동력은 가차없는 합리화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실업자나 임시직의 형태로 길거리로 내몰리고, 오로지 소수의 고급 기능인력만이 상대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게 되었다.
 
셋째의 의미는 재벌이나 대기업들이 많이 쓰는 의미로, 경쟁력 있고 고이윤이 나오는 분야(핵심․주력업종)는 살리고, 반면에 경쟁력 없고 이윤이 낮은 분야(주변․한계업종)는 과감하게 정리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기업들이 ‘고객만족 경영’을 외치고 다닌다하더라도 그것이 높은 이윤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한,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것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이상적 목표는 ‘빛 좋은 개살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 경쟁을 통해서 사회적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발상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는 일부 시민단체의 요구처럼 재벌 위주의 구조를 중소기업 위주의 구조로 바꾸자는 의미의 구조 조정이 있다. 이러한 구조 조정은 지금까지 재벌이 혈통과 친족을 매개로 경제적인 합리성이 아닌 전근대적 비합리성과 정경유착이라는 의혹 속에서 급성장을 해왔기 때문에 냉혹한 세계화의 물결을 헤치고 국제경쟁력을 획득하려면 과감한 재벌해체와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아가 대만이나 독일, 이탈리아 등의 경우에서와 같이, 중소기업체들이 그 고유의 유연성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성장한 나라의 국제경쟁력이 강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우리나라도 그렇게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로 전환해야만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에서 여러 시민단체들은 이런 식의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 정도 합리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즉 이 입장은 중소기업도 경쟁력을 획득하고 자본을 축적하면 얼마든지 독점대자본으로 클 수 있어 재벌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고, 다른 편으로는 이 시각도 세계시장과 국제경쟁력 강화의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부단히 사라지고 부단히 생기는 수많은 중소기업들 뒤에서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삶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의 의미는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구조조정으로,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필요와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경제 분야나 경영방식은 계속 살려 나가고 적극 장려하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잘라낸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군수산업이나 공해산업, 사치품산업, 퇴폐․향락업, 열악한 노동환경을 강요하는 분야, 중복투자된 분야, 사람들의 민주적 의견에 반하는 투자 등은 과감하게 척결해야 하며,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분야는 적극적으로 촉진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과정이나 노동과정을 일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욕구에 부합하도록 고쳐 나갈 수 있는 생산조직은 계속 살리고 그렇지 못한 조직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강수돌, 1999: 179-182).
  
o 고용 위기 시대를 돌파할 정책 대안들
첫째, 영미식 노동시장의 유연화 방식: 대개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을 확대함으로써 인건비를 줄이고 노동통제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여 마침내 신규 고용도 늘일 수 있다는 것
 
둘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의 방법: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는 노동시간 단축은 효과적인 고용창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주당 노동시간의 단계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독일 사회의 실업은 더욱 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다른 요인들, 즉 산업의 재편과 노동 과정의 합리화, 자본의 세계화 등이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새 일자리 창출의 가능성을 사전에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셋째, 정부나 공공기관이 주도하여 이루어지는 공공 고용창출 정책: 1930년대의 미국이나 1960년대 이후의 유럽에서와 같이 정부나 공공기관 또는 여러 형태의 고용촉진회사가 여러 가지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로 하여금 임시로 몇 개월, 일 년 내지 몇 년간이라도 일자리를 가지도록 촉진시키는 정책을 펼 수도 있다.
특히 동독의 경우에는 오래된 공장이나 산업설비를 재정비하는 작업, 산림보호 작업, 벌목 작업, 박물관 관리 작업, 도시빈민이나 노약자 돌보는 일 등에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고용을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 대책일 뿐 그 이후의 고용에 대해선 아무런 보장을 못해 준다.
 
넷째, 여성의 노동력을 재평가하는 방법: 가사노동이나 어린이 돌보는 일 등 지금까지 아무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던 일을 법적으로나 조세의 측면에서 제대로 평가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사노동이 ‘정상적인 서비스 직업’으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면 여성 실업자를 대폭 없앨 수 있다는 발상이다(독일 여성기업가연맹의 리자 헤어만이 제안). 이런 정책도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는 음모”라고 비난받고 있고, 또 실제로 이런 식으로 여성노동을 재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오늘날처럼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상존하는 고용 위기 시대에 효과적으로 실업을 줄일 수 있는지도 의문시되고 있는 형편이다(강수돌, 1999: 182-185).
  
o 현실적 실업 대책들의 한계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증대시키면 새로운 고용 창출이 이루어져서 결국에는 실업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논리. 해고의 역설
파괴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경제성장 자체도 문제이지만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고용 증대가 이뤄지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게다가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스스로의 삶의 자율성을 잃고 시장과 기업의 상황에 완전히 묶이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어,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노동자 삶의 경직화를 초래한다’는 말이 성립한다.
 
현재의 대책들은 오로지 자본주의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기능과 기술, 돈이 되는 재주를 보유한 자들만 높이 평가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 전반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의 문화를 확대하기보다는 분열과 차별의 문화를 강화하고 있다(강수돌, 1999: 185-189).
  
13. 독일 노동조합의 대응 전략: 고용 문제를 중심으로
 
o 사실상 기업별로 수행해야 하는 과업들은 서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고, 나아가 성별, 직종별, 직위별 노동자들의 욕구 또한 서로 달라서 구체적으로 노동조건을 어떻게 통일적으로 만들어내는가 하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독일 노총에서는 포괄적인 산별협약을 계속 체결하되, 이것이 개별 기업에서 실시되는 과정에서는 노동자들의 욕구나 업종별, 지역별, 기업별 특수성을 감안해서 신축적으로 적용하고 형성하자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기업경영의 유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노동시간의 선택권 및 시간주권도 높여주기 위해서, 산별 협약의 기초 위에서도 기업별로 다양하고 유연한 노동시간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모든 것이 고용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기업가들의 신규 투자 재원을 마련해 주었음에도, 기업가들은 ‘고용 없는 성장’을 추진하였고 결국 아무런 고용 창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독일노조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부의 재분배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고소득자로부터 저소득자로의 부의 재분배 정책을 적절히 실시하여 이 노사 양측의 부담 비중을 낮추게 된다면, 노동자뿐만 아니라 기업도 부담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고, 성장과 고용도 상당한 정도 촉진될 것이라는 것이 독일 노조의 시각이다(강수돌, 1999: 194-196).
  
o 노동형성 전략 - 자율성과 숙련 향상, 노동 참여와 공동 형성
독일 금속노조(IG Metall)는 1990년대 초 들어 “2000년대를 향한 단체협약 개혁안(Tarifreform) 2000"를 제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미래의 산업노동이 어떤 식으로 재편되어야 독일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바람직하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관해 일종의 지침서를 마련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생산직과 사무직 사이에 통일된 임금체계를 마련하는 것, 노동자의 업무 내용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재조직하는 것, 자율적인 분위기가 주도하는 팀작업을 조직하는 것, 평생 계속되는 능력 개발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 작업시간 중에 직업교육을 받게 하는 것, 과업량을 노동자의 의사와 능력을 고려해서 공동결정하는 것, 인력 배치와 인원 조정을 교섭하는 것, 작업장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 모든 결정을 노사 동수의 위원회에서 실행하는 것, 노동과정을 적극적이고 민주적으로 형성하는 것, 여성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를 위해 신분 상승과 승진 기회를 보다 많이 확보하는 것 등을 새로운 단체협약의 주요 내용으로 담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 깔린 기본적인 논리는 노동과정을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으로 형성함으로써 효율성과 생산성, 결국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독일 금속노조는 신기술의 도입과 적용, 노동의 조직과 통제, 산업안전과 환경보호, 직무분류 및 임금등급 조정, 개별 노동자 과업량의 결정, 인원 할당과 배치 전환, 노동자의 근무태도 조사나 노동생산성 조사 등과 같은 문제들에 있어서는 노동자평의회가 반드시 강제적인 공동결정권(erzwingbare Mitbestimmung, 노동자협의회의 동의 없이는 경영 측 단독으로 실행 불가)을 확보할 수 있도록 산별 단체협약에 못을 박아야 한다는 방침이다(강수돌, 1999: 201-202).
  
o 독일 노조의 고용 보호 전략이 주는 교훈
첫째, 독일 노조는 당면한 도전을 ‘위협’으로만 보지 않고 일종의 ‘기회’로 보고 있다. 사회생태적 구조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식의 사고 방식. 특히 노동시간 단축 운동과 사회생태적 구조혁신이 필요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독일 노조는 노동자 권익을 수호하고 발전시킴에 있어 사후적인 ‘보상’의 논리나 ‘보호’의 논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전적인 ‘형성’의 논리까지도 관철시키고자 한다. 모든 사회경제적인 구상과 계획을 자본과 정권에 맡기고 노동 측은 생산성과 경쟁력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할 터이니 대우만 잘해 달라는 식의 대응 논리는 노동자 권익 수호에 있어 한계가 많다는 것이다.
 
셋째, 그러나 독일 노조는 세계화된 시장 경쟁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계시장을 둘러싼 무한경쟁 안에서도 지속적인 ‘하향평준화’ 경쟁보다는 ‘상향평준화’ 경쟁을 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독일 노조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시장 경쟁은 일단 누군가는 그 속에 참여하기만 하면 하향평준화로 달려가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넷째, 독일 노조의 고용 보호 전략에는 ‘대안 사회’에 대한 전망이 부재하다.
최소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설계도에는 대안 사회에 대한 밑그림이 나와야 한다. 아무리 서투른 건축가라도 노련한 꿀벌보다 나을 수 있는 것은, 이 건축가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어떤 집을 지을까 하는 구상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강수돌, 1999: 202-204)
 
14. 한국판 트로이 목마와 재벌: 자본의 돌파구?
 
o 통일에 대한 입장
첫째, 휴전선의 긴장과 분단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남북한 생산요소의 재결합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통일에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북 분열을 강화하고 게다가 사회 분열까지도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남북한 통일은, 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남한 자본과 북한 노동력의 결합이라는 형태가 아니라, 새로운 자율자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남북한 민중의 민주적 결합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창의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진지하게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셋째, 남북통일은, 한반도 민족주의를 재강화하거나 세계시장에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겸허하게 기존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내면적으로 성찰하고 공동체와 생태계의 생명령을 동시에 살려내기 위한 진지한 모색 과정이 되어야만 한다(강수돌, 1999: 214-215).
  
o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이 제기되는 원론적 근거는 대개, 기업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되찾는다는 것이다. 즉 기업이 유기체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내외의 이해관계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기업이 저비용 고효율의 구조를 만들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비용을 사회화’한다.
 
- “기업이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제약을 받게 되자 절충적으로 나온 대안이 기업이 사회적 책임론이고, 그것이 일정한 성공을 거두자 경영학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편이 낫다(강수돌, 1999: 216-217).
 
o 재벌의 지배구조의 다층적 의미
첫째, 한국판 독점 자본인 재벌이 전 사회를 통째로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재벌의 몸 불리기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나아가 재벌에 고용된 관리자와 노동자들조차도 그 재벌의 생존 논리, 지배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왔다는 것이다.
  
둘째, 재벌이 그 계열사나 하청회사 - 1차, 2차, 3차 하청 등의 수직적 위계 관계를 통해 중소 자본을 체계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이다. 재벌은 한편으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일부 공정이나 조직을 따로 분리하여 하청계열사의 형태로 하위 편입시키고, 다른 편으로는 조직경계선 밖의 중소사업체나 특정 사업 영역이 돈이 될 것같이 보이면 즉각 재벌의 경계선 안으로 편입시켜 내었다.
재벌의 지배 관계는 전 사회적으로 노동자의 위계적 편성을 초래하여, 규모별로, 또 하청 관계의 위상별로 노동자들의 존재 상태와 의식을 차별화, 분절화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셋째, 재벌 조직 내부의 지배구조와 관련해서는, 회장 중심주의, 경영권 세습주의, 내부 거래, 상호 지급 보증, 회계장부 조작 등이 지배관계를 유지, 재생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만큼 재벌 조직 내부의 지배관계는 불투명하고 독단적이며, 돈의 흐름이 부정하게 조작되었다(강수돌, 1999: 220-222).
 
o 진정한 재벌 지배구조의 청산
첫째, 여러 유형의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정치경제 등 모든 사회적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힘이 토대로 자리잡지 못한 변화는 그 내용과 방향, 지속성에 있어 생명력을 갖기가 어렵다. 생명력이 있는 변화, 사회적 정당성이 있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이윤율,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따라서 경쟁력이 아니라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기업과 경제 분야, 일자리는 살려나가거나 새로이 만들고, 그렇지 못한 것은 과감하게 척결해나가야 한다.
 
둘째, 생산조직과 생산조직 사이에 그 어떠한 지배관계나 위계질서가 있어서도 안된다. 건강한 생산조직들 사이에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상부상조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이때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각 조직의 대변인들이 모여 전제적 과정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모든 생산조직은 내부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 역할을 돌아가면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경력개발과 역할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영자는 지배자나 결정자가 아니라 조정자와 심부름꾼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노동자도 작업 과정이나 경영 과정에 주체로 참여하여 투명하고 건강한 경영을 스스로 담당하고, 노동 생산물의 사회적 연관성 파악 및 자율적이고 책임성 있는 운영을 해나가야 한다. 계획의 입안과 실행이 철저하게 자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모든 운영원리는 삶의 질 향상에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 그리고 창의성과 다양성, 자율성의 구현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강수돌, 1999: 224-225).
  
15. 과연 ‘제3의 길’은 있는가?
 
o '제3의 길‘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볼 때, 과연 ’제3의 길‘조차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가치인가 하는 것도 되물어봐야 한다(강수돌, 1999: 227).
  
o 제3의 길의 핵심(강수돌, 1999: 228-229)
1) 자본주의의 길도 아니요, 사회주의의 길도 아닌 길이라는 뜻에서 제3의 길.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강점과 사회주의적 평등성의 강점을 동시에 살려내자는 뜻에서의 제3의 길.
이런 개념의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사적 소유, 시장 경쟁) 위에서 그 부작용(노동소외, 생태계 파괴, 빈부 격차)을 사회적으로 치유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 자본주의’로 불린다.
 
2) 복지국가 자본주의 또는 구식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자유, 정의, 연대 등 구좌파의 이념)을 신자유주의 또는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변용시킨 것이라는 의미.
세계화와 정보화의 구호로 표방되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성을 가진 세력들이 새롭게 변신함으로써 그 이념적, 정치적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
 
3) 미국식의 시장자유주의와 유럽 대륙식의 복지국가주의를 창조적으로 상호작용시킨 결과로 나온 것
 
o 제3의 길의 내용
범세계화와 지역적 보전의 조화(세계주의적 민족, 세계적 민주주의), 범세계적 다원주의, 사회 정의 및 평등과 개인적 자유의 공존(통합으로서의 평등, 적극적 복지, 포용적 사회), 책임과 권리의 공존(책임 없이 권리 없다, 활발한 시민사회, 민주적 가족),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민주주의와 국가의 공존(민주주의 없이 권위 없다, 사회투자국가, 새로운 민주국가), 기술 변화에 대한 실용주의적 자세 등이 제3의 길이 내세우는 가치와 프로그램들이다.
 
이에 대해 에릭 홉스봄은 근본적으로 “이미 끝장났음이 판명된 신자유주의”의 가정을 그대로 바탕에 깔고 있는 새 노동당의 ‘제3의 길’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가디언, 98. 10. 20)(강수돌, 1999: 229-230).
 
o 제3의 길은 가능한가(강수돌, 1999: 230-231)
이는 이론적, 논리적 측면에서 제3의 길이 과연 대안으로 성립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고, 제3의 길 정치를 실천적으로 구현해낼 주체적인 역량의 문제이다.
  
첫째, ‘제3의 길’이 이론적으로 일관성 있는 대안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실업문제나 빈곤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국가의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고,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를 예방하기 위해 국가에 의한 사회보장제도의 적극적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제3의 길이 결코 시장과 국가라는 양축을 잇는 일차원적 공간을 지양해내는 진정한 ‘제3의 대안’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를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온건한 반론’을 제기,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국가권력을 새롭게 장악하여 또다시 노동대중을 정치경제적 동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정치전략이 아닌가 한다.
 
둘째, 제3의 길을 실현할 주체는 있는가?
의미상으로는 민주적인 국가와 활발한 시민사회를 그 주체(political agency)로 내세우고 있다. 거기엔 여전히 권력 엘리트가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은밀히 내재해 있다. 반면에 기든스는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동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이제 계급적․집단적 블록보다는 개인화도니 행위자들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o ‘제3의 길’은 바람직한가(강수돌, 1999: 232-233)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동시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 사회민주주의는 복지국가를 표방하면서 고전적인 ‘제3의 길’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주체적 역량의 문제도 있었지만 물질적 토대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노동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모두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나눠 먹을 파이가 충분히 컸다는 점인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파이의 크기(scale of pie)가 아니라, 그 파이의 원천(source of pie)이다.
    
요컨대, 선진국의 노사가 대타협 속에서 나눠 먹었던 커다란 파이의 원천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선진 자본주의 내 자국 노동자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다. 선진국에서는 고도의 기술혁신과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경쟁력 있고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커다란 파이의 원천이 되었다. 둘째, 제3세계 노동 대중의 피와 땀과 눈물이다. 선진국 자본은 제3세계로부터 공업 원료나 농산물, 수산물, 임산물 등을 대량으로 가져가고 대신에 값비싼 기계와 기술, 자본, 제품과 서비스, 정보 등을 판매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부가 선진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셋째, 선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자들의 묵인과 동참 아래 이뤄진 자연 생태계의 파괴이다. 산업화 내지 상품 생산과정에서 지구의 물과 공기, 흙과 숲 등이 커다란 파이의 원료로 동원되어 빨려 들어갔다. 그 결과 이제 생태계 위기가 인류의 생존을 극도로 위협하고 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과연 고전적 제3의 길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그 유효성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파괴하면서까지 만든 파이를 배불리 먹는다는 발상 자체가 결코 바람직할 리 없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그러한 ‘파괴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기든스가 말하는 현대적 ‘제3의 길’은 어떠한가. 생각건대, 민주적으로 혁신된 사회투자 국가와 활발한 시민사회, 민주적인 가족, 창의적인 벤처기업, 능동적인 인적 자원, 효율적인 교육 제도, 범세계적 민주주의 지향성 등이 어우러진 현대적 제3의 길조차도, 인간노동에 대한 효과적 착취와 자연 자원에 대한 인간중심적 개발, 그리고 제국주의적 국제 사회 관계 등의 문제를 미해결의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기반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지속가능한 개발’, ‘생태적 현대화’, ‘성찰적 현대화’의 문제를 적극 끌어안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과제들 - 착취성, 인간중심성, 제국주의적 관계성 등 - 이 미해결된 상태에서의 지속가능성이나 현대화란 여전히 노동 대중의 객체화, 대상화, 자연 생태계의 상품화를 초래하며, 이것은 동시에 자본 축적의 현대화, 자본 증식의 지속가능성 제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룰 뿐이다.
  
o 한국에서 ‘제3의 길’이 갖는 의미(강수돌, 1999: 234-235)
첫째, 이념적 억압성과 편협성이 매우 극심한 우리 사회에서 ‘제3의 길’ 논의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념적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둘째,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범지구적 자본주의라는 배경 위에서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 그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IMF 체제’가 강제하는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들은 ‘제3의 길’을 가능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셋째, 김대중 정부나 국민회의를 과연 노동당이나 사민당과 같은 유럽의 중도 좌파와 동일선상에서 사고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넷째, ‘제3의 길’은 은연중에 노사대타협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러한 타협이 가능하려면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만족할 정도의 수입과 고용, 노동기본권, 경영참가권, 사회보장권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나아가 여러 시민사회 영역의 발전과 각종 사회운동의 성숙이 필요하다.
 
다섯째,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좌파와 우파의 이원론에 대한 문제 제기, 세계주의적 사고의 틀, 생태적 사고의 틀, 평등과 자유의 문제, 국가와 가족의 민주화, 자율적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 삶의 정치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 모두가 진보적 대안의 모색과정에서 심사숙고하고 적극 토론해야 할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Ⅳ. 발상의 전환
 
16. 전환 1 - 패러다임의 전환
 
o 총체적 사회혁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 하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경쟁과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연대와 협동’을 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연을 단지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그 품안에서 고맙게 살다가 조용히 그 속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겸손과 외경’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강수돌, 1999: 239).
 
o 대안적 구조조정 - 생산의 사회적 조정(강수돌, 1999: 241-242)
경제와 경영, 사회, 문화 등에 대한 구조조정에 있어 올바른 기준은 경쟁력이 아니라 삶의 질이 되어야 한다. 즉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분야는 계속 살리고 그렇지 못한 분야는 과감하게 척결한다. 여기서 자율과 자치에 기반한 ‘생산의 사회적 조정’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첫째, 기존의 시장논리와 국가나 당의 엘리트에 의한 계획 논리라는 이분법을 지양하는 ‘자율의 논리’를 통해 삶의 문제 해결에 있어 수요와 공급의 양과 질을 민주적으로 논의, 조절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생산의 목표가 무정부적 생산성 향상이나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삶의 질 향상과 건전한 사회적 욕구의 충족에 이바지하도록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을 양적․질적 측면에서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과잉 투자나 초과착취의 형태가 아니라, 사회-생태적으로 건강한 투자 및 노동의 인간화라는 형태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경쟁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o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첫째,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을 분리해서 보지 말자. 인간 사회에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은 거의 통일적으로 연관되어 있거나 함께 움직인다. 생산, 분배, 소비 등 모든 경제과정의 뒷면에는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사회경제적 변화 과정들도 결국은 이러한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권력작용의 한 산물로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경제적 변화과정들은 거꾸로 정치적 의사결정 주체들이나 그 상호간의 관계에 일정하게 긍․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문에 이해당사자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 과정 자체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이끌고 가려는 노력을 서로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싸움도 일어나게 된다.
 
둘째, 철저하게 살아 있는 운동은 그 자체로서 가장 올바른 정치세력화라고 본다.
만일 살아 있는 운동이 강하다면 그 자체로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의사결정 과정을 일하는 사람들이 주도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그 대변인 조직이 필요없다.
현장에 밀착된 운동이 별로 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당 건설을  위주로 하는 ‘정치세력화’가 문제되면서 오히려 운동과 조직이 분리되고, 그러면서 운동도 약해지고 정당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노동운동이든 생태계운동이든 현장에 기반한 살아 있는 운동을 더욱 철저하게 갈고 닦아 나가는 것만이 진정한 정치세력화이지, 그나마 불타오르는 운동을 모방하는 형태로 끌고 가려 하게 된다면 역설적이게도 사람과 운동 모두를 놓치게 된다.
 
반드시 산별 ‘조직체’가 구축되어야 현장 운동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좁은 범위의 기업별 울타리를 뛰어넘어 통일과 연대의 틀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운동과정’이다.
 
서구의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록 노동자 정당들이 그 강령에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나중에 현장 운동과 서서히 분리되어 가면서 결국 쟁취한 성과물은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이 아니라 초기 자본주의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극복한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올바른 조직이란 살아 움직이는 운동 그 자체가 조직이고 정치인 그런 것이지, 정당이나 정부, 산별노조 등으로 대표되는 굳어진 조직체와 그를 이끄는 지도자, 그리고 그에 따르는 많은 대중적 구성원 따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곤란한 것이다.
 
힘있는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연대 활동이 필요하다. 현장의 구체적인 문제에 기초하면서도 결코 좁은 범위에서만 간단히 또는 임기응변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기업이나 산업, 전체 사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문제제기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안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이다(강수돌, 1999: 243-247).
   
o 참여와 협력의 시대, 노사 관계의 민주화?
- 우리 삶의 사회적 과정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올바른 자세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많은 경우에 ‘참여’ 그 자체에만 현혹이 되어,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떠한’ 원칙으로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조차 우리가 현실사회의 성격이나 구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또는 참여를 요구하는 상황적 맥락이 어떠한가에 따라 방향이 많이 다를 것이다(강수돌, 1999: 248-249).
 
- 노사관계가 올바르게 개혁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사관계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노사관계 자체의 ‘지양’이다. 즉 노사가 구분이 없어야 하고, 따라서 지배와 ‘종업원’ 관계 자체가 신뢰와 협동관계로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이러한 근본적 전환을 위해서는 몇 가지의 기본적 원칙에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첫째는 공유공생의 원칙이다. 노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땅이나 기계, 건물, 원료 등 여러 생산수단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 할 뿐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특정 집단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고, 생산의 결과물도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이나 다종다양한 의견, 생각과 지혜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어 가짐으로써 주체적인 상호작용을 더욱 활발히 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자율자치의 원칙이다. 사회경제적 삶의 형식과 내용, 과정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 사회의 주인을 생산자로 본다면 이 생산자들이 생산․분배․소비의 내용과 형식, 생산․소비 과정의 여러 의사결정을 스스로 주관해야 한다. 외적인 힘에 빼앗긴 ‘내적 자율성’을 되찾고 스스로 단련시켜 나가야 한다. 나아가 이는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도 동시에 떠맡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는 엘리트 중심주의적 대중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뜻하기도 한다. 더디 가더라도 대중이 주체로 서도록 뒷바라지를 해가면서 함께 생각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여태껏 빼앗긴 자율성을 되찾고 진정한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길이다.
 
셋째는 인간존중의 원칙이다. 노동자는 더 이상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 분배를 스스로 주관하는 자로 바뀜으로써, 사용자는 더 이상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산자가 됨으로써 모두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 그 사람의 의견, 느낌과 감정상태에 젖어 드는 것(Empathy), 易地思之,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실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이다.
  
넷째는 생태조화의 원칙이다. ‘환경’이란 ‘Um-Welt’라고 하는데, 이는 나(인간)를 중심에 놓고 볼 때, ‘나(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런 관점은 나(우리)와 환경을 분리하여, 나는 주체이고 자연환경은 객체로 된다. 따라서 자연환경은 인간에 의한 지배와 이용, 개발과 돈벌이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에 ‘생태계’(Ecology)란 어원적으로, 집을 뜻하는 ‘Oikos’와, 논리를 뜻하는 ‘Logos’의 합성어로, 전체적으로는 ‘집의 논리’이다.
우리 인간은 큰 자연의 일부가 되고, 또 거꾸로 우리 인간 내면에 들어 있는 본성, 즉 내적 자율성, 삶의 활기, 생명력은 바로 작은 자연을 이루고 있는 셈이 된다. 자연과 인간은 둘다 ‘삶의 주체’인 것이다. 자연을 이런 눈으로 보게 되면, 발에 걸리는 돌부리 하나에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우리가 다니는 길도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큰 집의 일부로 볼 수 있게 된다(강수돌, 1999: 250-253).
   
o 사회적 참여의 수준
첫째, ‘위로부터’ 구상되고 제시된 정책을 단순히 실행만 하기 위한 참가는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과 구상을 세우는 문제에 있어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구상참가를 전제로 한 실행참가’여야 한다.
 
둘째,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품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자신의 품을 경쟁적으로 값싸게, 함부로 팔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만들어낸 연대의 틀이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야 가능하다.
  
셋째, 노조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사실상 위의 선진국형 노동조건 추구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경기변동과는 무관하게 노조는 자신의 내포와 외연을 부단히 확장해야 한다.
 
노조활동의 내포를 확장한다는 것은 노조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대가를 찾는다는 ‘보상’의 논리나, 건강보호, 고용 안정과 같은 ‘보호’의 논리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생태적으로 새롭게 ‘형성’하는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에 노조활동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말은 노조나 노동자가 노동조건의 개선에만 목숨을 걸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동조건 개선에만 목숨을 걸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동조건을 포함한 총체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뜻이다(강수돌, 1999: 254-255).
  
o 대안이 없다?
흔히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1980년대에 영국의 대처 수상이 노동자와 지식인의 저항에 맞서서 자신의 신보수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자본 자유화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해 내세운 이념적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이렇게 제대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과감하게 “대안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정한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진정한 대안은 무엇보다도 경제운용의 ‘원리’ 자체를 바꾸는 데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발상의 전환’에 바탕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 대안이 있는 것이다.
   
첫째, ‘경제’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 위기’란 수익성의 위기나 외환 위기 이전에 ‘삶의 위기’로 재규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토론 내용들이나 새 정부의 경제 과제 속에는 이러한 원칙적 입장이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다른 과제들을 묶어세우는 내적 일관성도 결여되어 있다.
   
둘째,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신바람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오늘은 힘들어도 다음달이나 내년이면 좀더 나은 생활이 가능하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새 경제 과제 속에는 비록 노동자들이 고통 분담, 아니면 심하게 고통 전담을 하더라도 결코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밝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갈수록 힘들어지겠구나’ 하는 암담한 전망만 예견된다면 참여와 협력보다는 거부와 저항이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셋째, 범지구적 시장 경쟁의 물결을 강요하는 세계화와 경쟁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경쟁의 한계’는 결국 지구촌 차원에서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분열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생산성’ 증대 과정이 불행히도 건강과 인격, 공동체와 생태계 등 삶의 질에 대한 ‘파괴성’의 증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핵심 문제이다.
  
넷째, 이러한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크게 두 가지 측면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 하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경쟁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대와 협력을 할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연을 단지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그 품안에서 고맙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그 속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겸손과 외경'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강수돌, 1999: 257-258).
  
17. 전환 2 - 삶의 질 향상과 노동시간 단축
 
o 20년의 시간이 미래의 삼사십 년을 위한 투자의 시간으로 설정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이미 처음부터 심각하게 왜곡된다. 그것은 이 시간들이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삶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양질의 노동력’을 생산해내기 위한 사회적 공장의 가동시간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강수돌, 1999: 262).
 
o 그 동안 여러 유형의 노동현장에서 기계화니 자동화니, 컴퓨터화니 하면서, 또 공정개선이니 하면서 온갖 지혜와 실력을 모아 이룩한 생산성 향상의 성과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지고 노동시간은 왜 이렇게 여전히 길 수밖에 없는가? 상식적으로, 생산성이 오르면 그만큼 삶의 여유가 많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전혀 여유가 없는 채 노동생활만 강요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장시간노동과 고강도 노동을 수십 년씩 하게 된다면 진정한 사회의 효율이나 삶의 질 향상은 결코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가진 주체적 생명력, 창의성과 자율성, 삶의 활력 따위야말로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근본 동력인데도, 바로 이러한 것들이 수십 년 동안의 직장생활과 노동생활에서 체계적으로 소진되기 때문이다(강수돌, 1999: 265).
 
o 노동시간이란 결코 우리 삶의 양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질적인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노동시간 단축이란 결코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보상의 차원으로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형성(re-shaping)한다는 차원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다(강수돌, 1999: 265-266).
  
o 일하는 시간과 인생을 즐기는 시간을 우리의 시간표에서 주중과 주말 또는 직장생활과 정년 이후 생활 등으로 분리하여 진정한 삶의 시간을 자꾸 뒤로 ‘유보’할 것이 아니라, 일상적 노동생활의 하루하루를 ‘일하는 동시에 삶을 음미하며 사는’ 것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필요성
 
1) 건강과 생명의 수호 - 과로사 및 산재, 직업병의 예방을 통한 노동생활의 인간화를 위해서이다. 노동력의 지출이란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지출하는 것이다.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 한, 개별 기업들은 결코 노동자의 건강이나 수명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한한 생산력의 발전이 결코 저절로 삶의 자유와 해방을 안겨다주는 것은 아니다.
 
2) 대량 실업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는 일자리 나누기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3) 지적 발달이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활동 증대를 통한 일상생활의 풍부화를 위해서도 요구된다. 노동시간의 단축과 여가시간의 확대는 다음 단계의 노동을 위한 휴식과 노동력 재생산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자신과 그 가족의 삶의 내용을 풍부화, 다양화, 고차원화시킬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여가시간의 확대는 지적․사회적 발달과 문화적․정치적 활동의 증대 가능성으로 연결되어 우리 모두의 삶을 풍요롭고 다양하게 할 수 있다(강수돌, 1999: 265-269).
  
o 우리는 지배자들에 의한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에 맞서,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첫째, 고용위기의 해소는 실업보험이나 일자리 소개와 같은 사후 대책이 아니라 새 일자리 만들기나 노동시간 단축 등 사전 대책을 통해 이루어낸다. 특히 ‘하루 4시간’ 정도로의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은 모두가 일자리를 고루 나누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삶의 여유를 되찾아 보다 수준높은 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대도시의 분산화 정책과 풀뿌리 민주주의 차원의 주민자치제가 힘차게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노동시간 단축과 더불어 어느 정도 명목임금 수입의 감소가 불가피하다면 이를 두려워하지 말자.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주택, 육아 및 교육, 의료제도만이라도 바꾸어 임금 지출 부분을 더 크게 줄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실질 임금은 오히려 늘도록 만들자. 따라서 주거공개념, 육아 및 교육공개념, 그리고 의료공개념 따위를 도입하여 삶의 문제들을 더 이상 개인만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그 재원은 정부 지출의 20%에 이르는 방위예산의 축소, 탈세 또는 누세 포착, 고소득자에 대한 상후하박식 직접세 추진, 비자금이나 뇌물 등의 생산적 전환, 정부 투자재원의 지혜로운 활용 등이 될 수 있다. 동시에 더 이상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 지방자치체를 올바로 개혁하여 방방곡곡에 자율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셋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내용’이다. 과연 일의 내용이 사회적 필요 충족이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지혜롭게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그에 도움 되는 것이면 더욱 장려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씩 척결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건강과 인격의 발전, 그리고 공동체나 생태계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경영․경제분야는 계속 살려나가고, 그렇지 못하면 과감하게 줄여나가야 한다. 특히 먹거리와 관계된 1차 산업이 건강하고 탄탄하게 중심을 잡고, 2차 산업이나 3차 산업은 삶의 질 향상 차원에서 보완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강수돌, 1999: 271-272).
  
18. 전환 3 - 희망 만들기
 
o 현재까지의 경제와 경영 방식, 삶의 방식 아래에 깔린 근본 ‘원리’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현재의 경제 위기, 즉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만일 경쟁 관계와 지배 관계에 기초한 경제 방식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과거의 번영’을 재현하려는 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불행하게도 삶의 위기가 재현되거나 갈수록 강화될 뿐이다. 나아가 우리의 경쟁력 회복은 다른 이들의 불행과 삶의 위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경쟁과 분열, 지배와 종속에 기초한 경제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기 성찰과 결심이 있어야겠다.
  
다른 한편, 보다 훌륭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국가나 당의 지도력 아래 ‘민족 경제’를 계획적으로 재편하면 시장 경쟁이 가지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현실 사회주의나 복지 자본주의, 개발 독재 등에서 보았듯이 문제가 크다. 하나는 아무리 훌륭한 국가나 당이 ‘민주집중제’라는 원칙을 내세우더라도 계획과 명령을 통해 새로운 지배 관계가 재생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관료주의, 엘리트주의, 조직보신주의 속에서 민중과 지도부가 유리되는 경험들을 상기해보면 - 이러한 경향성은 노동조합에서도 발견된다 - 이 문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둘째는 다양하고 복잡한 민중의 사회적 요구를 어떻게 소수의 지도부가 계획을 통해 ‘대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진정한 대안은 오히려 특정의 단일한 대안적 프로젝트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민초’의 모든 자율권을 확고히 보장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있다면 스스로 이러한 정도의 역할만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조차 민초들의 연대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단일하고 통일된 마스터플랜 - 이것은 결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 은 내세우지 못할지라도 무수한 대안들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에 대해서는 타협 없는 단호함과 엄숙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자본의 지배와 종속, 착취와 억압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NO!”를 외치되, 그 대안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은 “수많은 YES!”를 외쳐야 할 것 같다(강수돌, 1999: 273-274).
 
o 그러면 민초들은 어떤 식으로 자율권을 행사할 것인가. 첫째, 경제 즉 살림살이의 단위를 가능하면 분산하고 분권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직접 민주주의에 수렴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재벌을 비롯한 자본의 지배와 제국주의적 사회관계 전반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둘째, 그러한 살림살이 단위들이 민초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참으로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철저히 보장되는 열린 관계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이 어울려 살고 싶은 사람들을 스스로 선택하고, 또 살아가는 방식들조차도 스스로 선택해서 개성 있고 책임성 있게 살림살이를 영위하도록 해야 된다. 그러한 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셋째, 지금처럼 범지구화된 자본 관계가 강제하는 경쟁과 분열, 지배와 억압을 그대로 둔 채 우리 하나만 뒤바뀐다고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작은’ 원리의 큰 변화를 범지구적 연대를 통해 세계화해야 한다. 따라서 민초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필수 조건인 것이다. 민초들의 조직적, 정신적 연대가 강화되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우리가 원하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경제 혁신, 따라서 삶의 혁신 -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도 그만큼 생명력을 강하게 띠면서 발전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썩은 손톱의 아래 쪽에서 새 손톱이 자라나 마침내 썩은 손톱을 밀어내는” 그러한 변화가 와야만 한다(강수돌, 1999: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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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8 18:24 2007/04/0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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