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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의 김기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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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빛의 제국, 문학동네, 2006.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단 하루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 한 남자 이야기

  

1.
김영하의 이 소설을 언제 다 읽을까 해서 책을 사고도 미뤄두었다. 아니 논문계획서를 쓴다고 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자 하루 만에 다 읽게 되었다. 391페지이의 소설이 이렇게 진도가 빨리 나갈 줄이야...
    
물론 김영하는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냥 내 맘대로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솔직히 그리 잘 읽힌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다. 아니 있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지워나간다. 마치 에셔의 판화 같은 구석이 있다.『검은 꽃』을 쓸 당시 나는 이런 고민을 했었다, 과연 인간들이 먼 곳에서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완전히 잊혀진다는 것, 그 허무함을 지문이나 대사로서가 아닌, 형식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까?『검은 꽃』은 1부가 2부보다, 2부가 3부보다 짧다. 특히 3부는 극단적으로 짧다. 그런 기우뚱함, 불균형, 뭔가 더 얘기되어야 할 것들이 되지 않은 듯한 느낌은 어떤 면에서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빛의 제국』역시 주인공의 의도와 의지, 그의 소통은 보이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 즉 주인공이 의식할 수 없는, 그에게는 4차원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의 외부에 위치한 소설의 구성과 형식을 통해 서서히 허물어져 나간다. 소설적 현대성에 대한 이런 지향이 제대로 실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소설을 읽음에 있어 <이야기>에만 집중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바람이다. 물론 이 소설은 <잘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 김영하「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작가세계 2006년 가을호
   
2.
작년 일심회 사건이 났을 때 이 소설이 생각이 났었다.
이정훈 씨가 그런 인물이었는데, 아직까지 그 본심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하겠다.
그들이 차라리 당당하게 임했으면 했는데... 



3.
김기영에 나는 감정이입이 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은 것으로 설정된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은 조건에서 생활하는 것 같았다. 이미 15년이상을 함께 살아온 아내와 15살의 딸이 있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김영하는 김기영에 상당히 세련된 분위기를 입혀주었다. 사실 NL 운동권에 대한 선입견상 구태의연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아는 과거 주사파들은 머리에 든 것은 몰라도 적어도 첨단의 자본주의에 잘 적응하면서 전혀 뒤떨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전히 운동권 언저리에 있는 이들은 예외이다.
 
하지만 나는 NL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물론 소위 좌파이지도 않지만, 그렇게 인식되니 그렇다고 해두자.
  
4.
소설 중간중간에 나오는 스파이에 관한 부분이 흥미롭게 다가왔고, 또한 기억에도 남는다.
 
이상혁(김기영을 지도했던 상위의 비선이다)은 이렇게 가르쳤다. "경지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지워라. 보면 보이지만 인상은 남기지 않는 사람이 돼라. 매력을 없애고 따분해져라. 언제나 공손하고 누구와도 절대로 논쟁하지 마라. 특히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는... 그런 대화는 쓸데없는 적을 만들게 된다. 너는 천천히 희미해질 것이다. 마음 속에선 불끈불끈 억하심정도 꿈틀댈 테지.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의문이 아예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하라." 그에 따르면 스파이는 반복적이고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스스로를 지우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84쪽)
  
기영은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역사상 유명한 스파이는 모두 실패한 스파이다. 최고의 스파이들은 절대 발각되지 않고, 그래서 조용히 은퇴해 노후를 즐기다 죽는다. 입이 근질거려 나불댔거나 부주의 때문에 자신을 노출시켰거나 혹은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돈이나 여자 같은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 바로 실패한 스파이들이고, 이들은 실패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345쪽)
  
얼마 전에 개봉했던 일본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에서 이와 비슷한 얘기를 다루었다지. 평범한 주부가 스파이로 활동한다는 것인데,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어정쩡한 라면 맛을 내는 라면가게 사장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평범함을 예찬하는 이 영화에 나온 대로 사실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인 스즈메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평범하게 지내는 것인데, 막상 맘먹고 하려고 하면 쉽지가 않다. 식당에서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평범한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렇고,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에서 과속을 하지 않으면서 어정쩡하게 차를 모는 것도 의식하면 쉽지가 않은 짓인 것이다.
 
드라마 <주몽>과 일심회 사건을 거치면서 세작, 간첩, 스파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스파이를 소재한 소설을 김영하가 쓸 줄은 몰랐다.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에서 스파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내 주위엔 스파이보다는 국정원 관계자들이 더 많다. ㅋ
위의 스파이 수칙에 보면 아무래도 나는 스파이는 아닌 것 같다.
  
5.
아내인 마리의 성생활 또한 내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충격적이다.
그래서 이를 기영에게 털어놓자, 기영이 자신이 북에서 온 사람임을 말했을 때 마리가 거짓말이라고 했던 것처럼, 기영 또한 "내가 그걸 믿을 거라고 생각해?"라고 얘기한다.
  
검색하다가 장재선의 문학노트(문화일보 기자인가?)에 보니 문학 속 성표현이라고 하여 섹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나온 부분을 옮겨놓았다.
   
이제 몇 분 후엔 두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리게 되겠지만 돈을 낸 이상 이것을 내 자발적인 선택이야. 쟤들은 고용된 지골로에 불과해. 많은 사내들은 자신들이 여자를 유혹했다고 믿지만 그건 오산이야. 사실은 그 반대지.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욕실의 물소리가 끊겼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쉬었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믿든, 어떻게 상상하든, 그녀로선 이 자리가 편치 않았다. 그랬다. 편할 리가 없었다. 잠시후, 그녀는 피부가 탱탱한 스물 한 살의 법대생들에게 자기 육신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살집이 잡힌 배에는 임신으로 생긴 튼살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습진을 앓은 사타구니는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고, 허벅지는 지방의 덩어리였다.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섹스를 앞둔 흥분상태는 아니었다. 손에 난 땀을 침대 시트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섰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곧 욕실에서 나올 사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몸이 달아 있다는 인상도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베란다에 만들어진 작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인공정원에는 산세베리아와 선인장들이 화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는 반투명 유리로 밖이 보이지 않도록 막고 조명을 밝혀놓았기 때문에 바깥이 낮인지 밤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밤 8시가 넘어 있었는데 마치 낮 2시 밖에 안 된 것 같았다.
  
연인과 판다가 타월로 하체를 가리고 욕실에서 나왔다.
″씨, 씨, 씻으세요.″
판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파우치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는 찰나, 성욱이 고개를 내밀었다.
″손이 그래가지고 어떻게 씻으려고 그래요?″
그녀는 깁스한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우리가 같이 하면 안 될까요?″
성욱이 판다를 돌아보곤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성욱씨만 들어와.″
  
성욱이 의기양양하게 문을 닫고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그녀의 두 팔을 위로 올려 블라우스를 벗겨냈다. 브래지어의 호크를 끌렀고 스커트를 벗겨 욕실 밖으로 던졌다. 팬티는 마리가 자신의 오른손으로 벗긴 후 잘 말아 라디에이터 그릴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욕조 속으로 들어가 왼손을 들자 성욱이 샤워기를 오른손으로 붙잡아 물을 틀었다. 물은 그녀의 발부터 적신 후,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물은 처음에는 차가웠지만 곧 적당히 미지근해졌다. 벌거벗은 성욱은 샤워기를 끄고 입을 내밀어 그녀의 젖꼭지를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그는 보디클렌저를 몇 방울 받아 음모에 문질러 거품을 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는 그 거품을 온몸에 고루 발랐다. 거품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마리는 간지럼을 탔다.
(315-317쪽)
  
″좀 돌아보세요.″
그녀는 그에게 등과 엉덩이를 내보였다. 물살이 그녀가 볼 수 없는 부분들을 두들겼다. 성욱이 마른 수건으로 비눗기가 씻겨내려간 몸을 천천히 구석구석 잘 닦아주었다. 그러고 있자니 그가 남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수건을 든 성욱을 껴안았다. 딱딱한 자지가 배꼽을 찔러왔다. 그녀는 무릎을 굻고 자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거세세 빨았다. 일 분쯤을 그러다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알지, 내가 자기만 사랑하는 거?″
″그럼요.″
″분명히 해둘래. 나는 이런 거 원한 적이 없어.″
″알아요. 제가 하자고 했잖아요.″
″지금이라도 잘 생각해봐. 내가 다른 남자하고 하는 게 정말 좋아? 괜찮겠어?″
″다른 남자하고 하는 게 아니래두요. 나하고 마리가 하는 거에요. 쟤는 우리의 섹스를 돕는 일종의 딜도인 거에요.″
″정말 나 사랑하지?″
″그럼요, 더 사랑스러워요. 날 위해서 이런 결단을 내려줬잖아요. 아마 평생 못 잊을 거에요.″
″....내가 저 친구랑....아니야.″
″뭔데요? 말해봐요.″
″그러니까 저 친구랑....어디까지 하는 걸 원해?″
그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러면서 두 팔을 내려 그녀의 머리를 잡았다. 그녀는 다시 성욱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다요, 다, 다른 남자가 마리를 범하는 걸 보고 싶어요. 그냥 나랑 한다 생각하고 하면 돼요. 이건 그냥 게임이에요. 너무 심각하게 말자구요″
딱딱한 귀두가 그녀의 입천장을 거세게 문지르며 더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왔다.
(318-319쪽)
  
30대 후반의 유부녀가 21살의 서울대 법대생들과 혼숙을 하는 장면은 파격이긴 하지만, 어쩌면 기영의 생활이 현실에서 그리 벗어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데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기영이 자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북으로 올라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즈음, 마리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펼치고 있는 있는 대목이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둘다 자신들이 하루 동안 한 짓에 대해 믿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루를 보냈고, 또 새날이 찾아온다.
 
6.
김영하가 무엇 때문에 이 소설을 썼는지 모르겠다.
한번 더 읽는다해도 잘 모를 것 같다.
  
김영하의 홈페이지 빛의 제국 게시판에 나왔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고 옥의 티 같은 것을 찾으려고 할 것 같다. 나 또한 '이건 뭐가 안맞는 것 같네' 하면서 읽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덮어두었다.
  
"이 게시판을 찾는 영민한 독자들께선  '옥의 티'를 찾기보다 치즈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어떤 의미가 지나가는 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독서에서오는 불편함의 근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그 불편함은 소설의 불완전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읽는 이의 내면과 텍스트가 충돌하는 데에서도 비롯됩니다. 그럴 때 독서는 비로소 자기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겠지요." (김영하 왈, "독자의 알권리와 카프카, 그리고 B급 영화")
 
역시 하루의 기록만으로는 부족하다.
  
7.
김기영을 쫒는 국가정보원 요원인 박철수의 캐릭터도 재미있다. 그는 헬렌 니어링이 쓴 [소박한 밥상]을 읽고 나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도 사서 읽었다. 니어링과 리프킨 모두 가운데에서 보면 왼쪽에 있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박철수에 대해 비현실적이지 않나 할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국정원 사람들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알 만큼은 알고...
 
어찌보면 변혁을 한다는 사람들도 이런 것들을 잘 알아야 할 터인데, 소설 중에 나오는 80년대 중후반의 학생운동권의 의식화 내용처럼 영 어설프다. 여전히 자신이 전위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8.
다시 한번.
김영하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주인공인 김기영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내가 김기영이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무엇을 느꼈나.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책 표지에 나오는 이 말은 폴 발레리가 말했다는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리라.
물론 이를 법정스님이 말했다는 이도 있고, 스콧 니어링이 말했다는 이도 있다.
 
나는 노암 촘스키의 말을 떠올렸지 뭐야.
"만약 당신이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당신은 정말 변화가 없는 현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생각한 대로 살아야 할 텐데, 그 "생각한 대로"가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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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8 19:41 2007/04/0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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