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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2004. 『개혁의 덫』. 부키.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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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장하준 교수의 '개혁의 덫'을 읽었다. 헌책방에서 산 것은 꽤 되었는데, 이번에야 읽은 것이다.
이것은 장하준 교수가 신문 칼럼으로 써놓은 것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장하준 교수가 평소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반복적으로 잘 나타나있다. 물론 중복되는 내용도 많다. 
 
장하준 교수가 주장하는 전반적인 논지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 궁극적인 귀결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시장화 및 주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에는 의견을 함께 하지만, 이에 대한 대안을 제출하는 데 있어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를 넘어서려면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듯 싶다.
 
아무튼 아래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책을 읽고나서 나중에 써먹을 수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췌를 하였다.
 
장하준. 2004. 『개혁의 덫』. 부키. 


○ 세계화는 ‘필연’이 아니다
 
낙후된 기술을 가지고서도 19세기 말에 이미 현재와 유사한 정도의 세계 경제통합이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장하준, 2004: 19-20)
 
첫째로, 이미 1백여년 전에 증기선이나 유선전신과 같은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지금과 유사한 정도의 세계화가 이루어졌었다면, 현재의 세계화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기술의 발달보다는 국제 정치와 제도적 변수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1960년대 세계 경제의 통합 정도가 19세기 말보다도 낮았던 것은,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요 선진국들이 IMF와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체제’를 통해 국제자본 이동을 규제하였고, 새로이 경제주권을 획득한 신생 독립국들이 무역과 자본 이동을 제약하여 자국 산업과 금융업을 보호하는 경제민족주의를 추구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둘째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는 고도로 진행되었던 세계화가 그 이후에는 지속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이뤄진 세계화는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정과 국제정치적 갈등을 초래했고, 결국은 대공황을 시작으로 붕괴하고 말았다. 이후 몇 십 년 동안 세계 각국이 브레튼우즈 체제로 대표되는, 지나친 국제화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규제된 세계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정책이나 제도를 시행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에게는 세계화 과정을 기술 결정론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정치적·제도적인 시각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 행동의 가능성을 규정해줄 뿐이지 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기술 결정론적으로 해석하여 불가피하고 정지될 수 없는 과정으로 해석하게 되면, 앞으로 진행될 세계화 과정의 내용을 현재 존재하는 국제정치 구도 속에서 힘을 가지고 있거나 이념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나라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 시장 경제만으로는 안 된다
 
한국경제의 위기는 과도한 규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면밀하게 짜여진 ‘견제와 균형’시스템을 성급하게 해체한 데에 원인이 있다. 설비 과잉과 대기업 도산 등 오늘날 한국 경제의 위기를 말해주는 주요 징후들은 한국 정부가 ‘투자 조절’과 ‘경쟁 관리’라는 두개의 기본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야기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허가 및 금융 지원 등 각종 경제적 이권이 학연ㆍ지연을 중심으로 특정인에게 배분되면서 경제 권력이 소수 집단에게 집중되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서 최근에 나타난 양상이다. 과거에도 재계에서 정계로 많은 돈이 흘러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 사안에 대한 청탁을 위해 돈이 오간 일은 드물었다. 제조업체들이 국가의 계획 아래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정실 자본주의는 최근 10년 사이에 정부가 점차로 규제 가이드라인을 포기함에 따라 떳떳치 못한 정치 거래가 성행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장하준, 2004: 22-23).
 
○ 국적 없는 자본이 존재하는가?
 
세계화의 진전으로 이제 국적을 초월했다는 초국적 기업들의 경우에도 전략수립, 연구 개발, 브랜드 관리,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 등 핵심 기능은 아직도 거의 전부가 본국에서 행해지고, 최고경영진도 대부분 본국인이다. 1998년 독일의 다임러 벤츠그룹이 미국의 크라이슬러사를 인수했을 때 처음에는 양사의 동반자적 결합이라며 이사회를 같은 수의 독일인과 미국인으로 구성했지만, 합병 후 4년이 지난 지금은 이사 14명 중 미국인은 2명뿐이라는 사실은 그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다.
 
선진국에 기반을 둔 투자기금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이 대주주가 되면 한국 같은 후발국 기업은 성장과 경쟁력에 엄청난 견제를 받게 된다. 이들의 주 고객층이 고령화되고 안정화된 선진국 국민인지라 후발국 기업들이 행하는 적극적인 투자보다는 배당을 높이는 방식의 경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본에 국적이 없다고 외치는 선진국들도 자국 경제의 대외 방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서슴없이 외국자본을 규제해 왔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자유시장 경제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는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외국인 투자를 엄격히 제한했다. 해운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금지했고, 외국인의 토지소유와 채광권ㆍ벌목권 등을 엄격히 규제했으며, 은행의 경우 미국에 영주하지 않는 외국인 주주들에게는 투표권조차 주지 않을 정도였다.
 
또 프랑스ㆍ독일ㆍ스웨덴ㆍ스위스ㆍ네덜란드 등 대부분의 유럽 선진국들에서는 주요 대기업의 주식을 정부나 정부관련 금융기관이 일정 부분 소유해 안정 지분 확보를 도와주거나, 차등 주식의 발행을 허용해 비핵심 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등의 방법으로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규제하고 있다(장하준, 2004: 46-47).
 
○ 선진국들이 바뀌어야 한다
 
대다수의 시민단체는 지난 20여년간 IMF와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에 자금을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요구해 왔던 재정긴축·고(高)이자율·상품 및 자본시장개방·민영화·규제완화 등의 정책은 대부분의 경우 약속과는 달리 개발도상국들의 발전을 촉진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IMF와 세계은행이 해당 국가의 특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교과서적 모델에 기반한 쳔편일률적인 정책을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이들은 IMF와 세계은행의 경우 그 의사결정구조 자체가 일국일표(一國一票) 방식이 아닌 돈을 낸 만큼 투표권을 갖는 일불일표(一弗一票)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본금을 많이 낸 선진국, 특히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표면적으로는 일국일표의 원칙을 취하고 있는 WTO마저도 실제로는 대부분의 결정이 선진국간의 막후협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며, 이들 국제기구의 민주적 대표성과 운영의 투명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그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이들 국제기구의 민주적 대표성 결여를 비판하는 시민단체들 역시 민주적 대표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임을 지적하지만, 그렇다고해서 IMF 등의 국제기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간과될 수는 없을 것이다(장하준, 2004: 54-55).
 
IMF 등 국제경제기구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일부 과격한 좌파 시민단체들이나 미국의 일부 국수주의적 우파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기구들을 폐지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구들의 의사결정 방식과 정책방향, 그리고 나아가서 현재 세계경제질서 자체가 좀더 민주적이고 개도국의 이익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세계화는 정치적 한계에 부닥치게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통합된 세계경제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장하준, 2004: 56).
 
○ 여전한 ‘경제적 구타의 악순환’
 
영국은 16세기까지만 해도 당시의 '첨단산업'이던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인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양모를 수출하고 모직물을 수입하던 유럽의 후진국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 헨리 7세 등 영국의 왕들은 양모에 수출관세를 부과하고, 모직물에 수입관세를 부과하는가 하면, 정부가 직접 나서 외국인 기술자를 스카우트해 오는 등 모직물 산업의 수입대체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1721년에는 영국 최초의 수상인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의 지휘 하에 본격적으로 국가주도 산업화가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이 시행한 산업 및 무역 정책은 유치산업에 대한 보호관세 및 보조금 지급, 수출품 원재료에 관한 관세 환급, 수출보조금 지급 등 20세기 후반 일본이나 한국이 쓴 정책과 매우 유사했다.
 
이후 18세기에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최고의 공업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정작 영국이 관세를 완전히 철폐하고 자유무역을 시작한 것은 자국의 경제적 우위가 공고해진 19세기 중반(1860년대)이 되어서였다. 이때부터 영국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유무역과 자유방임의 미덕을 설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이 자기들은 관세와 보조금을 통해 공업을 발전시켜 놓고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무역을 권고하는 것은 영국의 과거를 아는 당시의 '후진국'인 미국이나 독일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이 때문에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 리스트(Friedrich List)가 『국민적 정치경제의 체제』(The National System of Political Economy, 1841)에서 영국이 후진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권하며 다니는 것은 자신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놓고는 정작 뒷사람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kicking away the ladder)과 같다고 혹독히 비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장하준, 2004: 58-59).
 
유치산업 보호를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영국이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으며 10달러짜리 지폐를 장식하고 있는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었다.
 
해밀턴은 1791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이 유럽의 선진국의 경쟁을 물리치고 산업화를 하기 위해서는 관세와 보조금을 통해 '유치산업'(infant industry)을 보호,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경제학의 아버지'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을 비롯하여, 당시 경제학계에서 정설로 여겨지던 '미국은 농업에 특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행위였다.
 
그 같은 해밀턴의 이론은 농산물을 자유롭게 수출하고, 값싸고 질 좋은 영국의 공산품을 마음대로 수입하고 싶어 했던, 자유무역 체제를 선호하던 남부 지주들의 저항을 받아 그의 생전에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다가 1816년 영-미 전쟁 종식 후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해밀턴의 이론은 미국이 세계 최고의 제조업 국가로서 지위를 완전히 굳힌 1945년까지 130여 년간 미국 경제정책의 기조를 이루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35-55%에 달하는 세계 최고율의 제조업 관세를 유지하며 자국산업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1870년대 증기선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산업은 대서양이라는 자연적 보호장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스위스 경제사가 베어록(Paul Bairoch)이 미국을 "현대 보호무역주의의 본산이요 철옹성“(mother country and bastion of modern protectionism)이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또한 미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자본수입국으로서 외국인 투자를 엄격히 규제하였다. 해운업에 대한 외국인투자는 아예 금지되어 있었으며, 농지ㆍ채광권ㆍ벌목권에 대한 외국인투자도 엄격히 규제되었다. 은행의 경우에는 외국인은 이사가 될 수 없었으며, 국책은행의 경우에는 외국인 주주의 투표권 행사마저 금지되어 있을 정도였으며, 19세기 말 새로운 세계적 금융 중심지로 떠오르던 뉴욕주의 경우에는 은행업이라는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1886년 외국은행의 업무를 제약하는 법을 도입하는가 하면, 1914년에는 아예 외국은행의 지점 설치를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런 미국도 자신들이 욕하던 영국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국의 산업이 세계최고의 위치에 이르자 자유무역과 외국인투자 자유화를 옹호하기 시작한다(장하준, 2004: 59-61).
 
스위스의 경우 1907년까지 특허법의 도입을 거부하면서 독일의 화학ㆍ제약 기술을 '훔쳤음에도' 오늘날 스위스 제약회사들은 특허 수호에 다른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마찬가지로 일본은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보다도 더 심하게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지만, 요즈음은 WTO 에서 자국이 과거에 사용했던 규제의 대부분을 불법화하는 다자간 투자협정 체결을 다른 누구보다도 목청 높여 외치고 있다(장하준, 2004: 61-62).
 
우리나라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다. 산업화 초기에는 다른 누구 못지않게 자국산업을 보호하고,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며, 지적재산권을 무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 산업에 수출경쟁력이 생기고, 우리기업들의 해외투자가 시작되고, 우리가 출원한 특허 건수가 늘어나자 '안면몰수'하고 선진국과 같이 후진국들에게 시장개방 압력을 넣고 있다.
 
영국, 미국, 스위스 등 현재의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보호무역, 외국인 투자 규제, 지적재산권 무시 등 '나쁜 짓'을 한 지가 워낙 오래되어 자기 조상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망각했다는 핑계라도 있다. 그러나 불과 10-20여 년 전만 해도 후진국의 입장에서 선진국의 개방압력을 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면서 자국산업을 발전시키려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다만 그 뻔뻔스러움이 부끄러울 뿐이다(장하준, 2004: 62).
 
○ 정치 논리의 개입도 필요하다
 
시대의 변화와 사회 여건, 그리고 사고방식의 변화에 따라 시장 논리와 정치 논리 간의 경계선이 바뀌었던 예는 무수히 많다. 시장 여건에 따라 혹은 시장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장하준, 2004: 68-69).
 
지금은 누구나 당연시하지만, 중앙은행 제도와 기업의 유한책임 제도 등이 19세기 후반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은행이나 기업가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가져오는 만큼 시장 논리를 해친다며 반대하였다.
 
또 이후 도입된 독과점 규제, 금융 시장 규제, 재정 적자를 통한 경기 부양, 공공근로 사업, 누진세 제도를 통한 소득 재분배 등의 정책들도 처음에는 시장 논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비난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이제 자유방임주의의 귀감으로 여겨지는 미국 정부도 일상적으로 집행하는 정책들이 되었다.
 
결국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통하는 절대적인 시장 논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그 경우 특정한 사회에 있어 시장 논리와 정치 논리를 구분하는 구체적인 경계선은 어떻게 그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 구성원 간의 정치적인 합의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시장 논리가 낳은 어떤 결과를 놓고 민주적 의사의 취합 과정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면, 그 결과는 정치 논리에 의해 수정될 수 있고 또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 정부 주도 경제는 ‘절대악’인가?
 
정부 역할을 축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현 단계에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부 역할의 축소가 아닌 재정립이다. 정부 역할 축소론자들의 주장대로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에서 일부 개입주의적 정책에 의해 여러 가지 비효율성이 야기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른 많은 경우 정부 개입이 소위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여 우리 경제의 효율성을 향상시켰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장하준, 2004: 72).
 
정부 역할 축소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경제가 복잡해지면서 정부 개입이 과거와 같이 기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형태로 지속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경제 발전에 따라 정부의 역할 자체가 축소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민간 부문 능력이 향상되고, 시장 제도를 비롯한 각종 경제 제도가 성숙되면서 기존에 정부가 깊숙이 개입하던 여러 영역에서 점차 정부 개입이 불필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경제의 선진화에 따른 첨단 산업의 진흥과 사양 산업의 정리, 기술혁신 능력의 향상 및 노동력의 질적 향상, 사회간접자본의 고급화와 사회복지의 확대, 공공 소비의 확산, 소비자 권익의 향상, 노사 관계의 선진화 및 환경 문제의 개선 등 이전에 불필요했거나 중요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입 영역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장하준, 2004: 73).
 
○ 탈산업화가 경제 선진화인가?
 
‘제조업 종말론’의 여러 가지 약점
 
첫째로, 탈산업 사회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제조업 제품에 대한 실제 수요는 고소득 사회가 되어도 감소하지 않는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보몰(William Naumil) 교수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로손(Robert Rowthorn) 교수 등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은, 제조업 생산성이 서비스업 생산성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관계로 제조업 제품의 상대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이지, 제조업 제품의 실제 소비량이 줄어들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둘째로, 최근 선진국에서 서비스업의 비중이 늘어난 데에는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나 업무 프로세스 혁신(reengineering), 업무 외주화(outsourcing)와 같은 기업 재조직의 결과 발생한 통계적 환상도 한 몫을 하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많은 제조업체들이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던 사내 서비스들 - 예컨대 판매나 경영 컨설팅, 종업원 복지와 관련된 업무 등 - 을 별도 회사로 분리ㆍ독립시키거나 외부 업체에 발주하게 되면서 종전까지만 해도 통계상으로 제조업의 일부로 구분되던 경제 활동들이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서비스업은 제품의 성질상 국제 교역이 어렵기 때문에 국제 수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80년대 제조업의 몰락을 방치한 영국이 금융업 등 서비스 산업의 강세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국제 수지 난을 겪으면서 지속적인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넷째로, ‘제조업 종말론’의 비판자들은 많은 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최종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기보다는 제조업체에 생산자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그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금융업, 경영 및 기술 컨설팅, 첨단 소프트웨어 제공 등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든든한 제조업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탈산업화가 일어나게 되면 서비스 부문이 창출할수 있는 것은 저임금, 저부가가치 활동, 그러니까 소위 ‘맥도널드’ 일자리뿐인 셈이다.
 
산업화가 고도로 진전되면서 제조업의 상대적인 생산성 향상에 따라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증가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며,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공장’보다는 ‘사무실’이나 ‘점포’에서 일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탈산업화’ 현상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첨단 지식을 기초로 한 서비스업의 중요성과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제조업의 중요성이 축소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관광업이나 은행업 등 서비스업에 의존하여 세계 최고의 소득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스위스가 실상은 기계ㆍ화학ㆍ제약 등을 중심으로 영국의 3배에 가까운 1인당 제조업 생산량을 자랑하는 제조업 강국이라는 사실은, 건실한 제조업 기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장하준, 2004: 88-90).
 
○ 민영화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장하준, 2004: 91-94)
 
지난 1999년 10월 초 영국 런던의 패딩턴역에서 열차간 정면충돌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유례없는 사고가 벌어지면서 영국의 민영화 정책의 공과(功過)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패딩턴 역의 충돌 사고는 기차의 자동제어장치와 신호등의 결함이 있는 상황에서 과로한 기관사의 실수까지 겹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진단인데, 많은 사람은 이같은 문제가 패딩턴 노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광범하게 퍼져 있으며, 이는 민영화된 철도회사들이 승객의 안전보다 이윤을 앞세워 설비 투자를 줄이고 인건비 절감에 치중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한 철도가 아직도 국유화되어 있는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해 영국의 열차 사고율이 훨씬 높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일단 민영화된 철도산업을 다시 국영화하지는 못할지라도 정부가 나서서 철도회사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고, 패딩턴 역 열차 사고 이후 쏟아지는 비판적 여론을 견디다 못한 철도회사들은 결국 안전장치를 강화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1979년 집권 이후 1997년 총선 패배에 이르기까지 18년의 세월 동안 민영화는 영국보수당 정부의 간판 정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민영화는 그 초기에는 항공 서비스·자동차·철강 등 제조업과 일반 서비스업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전화·전기·수도·가스·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부문으로 확대되었고, 항공서비스·전화 등 일부 부문에서는 민영화의 결과 서비스의 질이 개선되면서도 비용은 절감되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논자들은 이러한 기업 효율 개선의 주원인은 경쟁체제의 도입이지 민영화 자체가 아니었다면서, 민영화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민영화 없이 한국통신과 데이콤간의 경쟁체제의 도입을 통하여 통신산업 효율화의 획기적인 개선을 거두었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 있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 민영화의 문제는 이처럼 경쟁체제의 도입이 가능했던 몇몇 산업 분야를 제외하고는 민영화가 별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도·전기·가스 등의 경우 약간의 서비스 개선은 있었지만, 가격을 많이 올라 저소득층 고객들에 타격을 주는 가운데, 임원진들의 봉급은 적게는 50%, 많게는 500%씩 올려 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다. 또 철도의 경우는 민영화된 업체들이 설비투자를 소홀히 한 탓에 잦은 철도차량 및 선로의 고장으로 인한 운행 지연 및 취소가 빈발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번 패딩턴 역 사고에서 보았듯이 승객의 안전마저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민영화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첫 번째 교훈은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민영화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민영화가 성공을 거둔 산업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별다른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대만·오스트리아·노르웨이·프랑스 등이 공기업 주도의 경제체제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민영화=효율성’이라는 단순한 공식이 들어맞지 않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교훈은 기업 효율의 향상에 중요한 것은 민영화를 통한 소유권의 이전(移轉)보다는, 경쟁체제의 도입이라는 것이다. 민영화된 영국 산업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은 기술적 성질상 경쟁체제의 확립이 가능했던 항공서비스·전화 등의 산업들이었던 것이 그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영국의 경험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민영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영화 이후의 규제장치에 대한 세심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민영화 이후 철도회사들의 설비 투자나 안전 대책에 관한 규제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 이번 철도사고의 주원인이었다. 그렇지만 세계 최고의 안전 기록을 자랑하는 일본의 철도가 대부분 민영이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규제만 잘 된다면 민영화가 꼭 승객의 안전 경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영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민영화 이후의 규제체제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으면 민영화는 여러가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민영화의 옹호자들은 지금까지 흔히 영국의 경험을 ‘성공사례’로 들어가며 민영화의 이점을 선전해 왔다. 패딩턴역 철도사고를 계기로 영국 내부에서조차 민영화의 득실에 대한 재검토가 일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영국 민영화의 실상을 파악하고 우리에게 맞는 교훈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 공적 자금 회수, 과연 서둘 일인가?
 
금융위기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공적자금의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위기가 해소된 뒤의 정책이다. 가령 지난 몇 년간 우리 정부는 공적자금을 하루라도 빨리 회수해야 한다며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과 금융기관의 신속한 매각을 추진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현명한 정책이었는가.
 
‘신속 매각’ 정책의 전제는 국영기업은 비효율적이므로 하루 빨리 민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영기업이라고 꼭 비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포스코, 그러니까 포항제철의 성공이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최근 일본의 닛산자동차와 우리나라의 삼성자동차를 매수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프랑스의 르노자동차도 1996년까지는 공기업이었으며, 삼성자동차를 매수할 당시도 정부가 44%의 주를 소유한, 사실상의 공기업이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매각할 때는 공적자금을 최대한 회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정부는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가.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들을 하루라도 빨리 팔아야 한다며 스스로 시한을 정해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상업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가격에 팔지 않았는가.
 
17조 원 가량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을 불과 5000억 원에 팔았다. 이는 제일은행이 매각 후 1년반 동안 올린 이윤 정도에 불과한 낮은 가격이었다. 또 대우자동차를 GM에 4,800억 원에 넘긴 것도 모자라 채권 은행의 계속적인 대출을 정부가 보증하기까지 했다. 훨씬 규모가 작은 기아자동차를 산 현대자동차가 1조 2,000억 원을 내고 대출보증도 받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매각이 결정된 현대투자증권은 투입된 2조5000억 원의 공적자금 중에서 1조 원 정도밖에 회수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푸르덴셜에 사후손실까지 보전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판다고 한다.
 
국영화된 기업을 꼭 팔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영기업도 잘 경영할 수 있다. 필요하면 민간에 위탁해 경영할 수도 있다. 당장 제값을 받고 팔 수 없다면 5년, 10년을 기다려서라도 제값을 받아야 한다. 팔 때에도 국내자본에 대해 역차별을 하지 말고 외국계 자본에 파는 경우는 기술개발ㆍ수출ㆍ금융 등 여러 측면에서 국민경제에 대한 파급효과를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국영기업을 매각할 때 국민연기금으로 일정량의 주식을 매입하도록 해 ‘국민주’를 만들어, 혈세를 내 부실기업을 구한 국민들의 이익이 민영화 이후에도 반영되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적 자금은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그 위탁경영자에 불과하다. 공적자금의 조기회수가 사실상 회수포기를 의미한다면, 결국 이는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장하준, 2004: 96-98).
 
○ 세계화는 기술이 아닌 정치의 문제다
 
인터넷은 세계 어디에 앉아서도 전화선만 있으면 전세계의 정보를 접하게 해주었고, 이메일은 빨라도 며칠씩 걸리는 국제 특급우편, 그리고 빠르기는 하지만 번거롭고 비용도 비싼 팩스를 대신하여 아무리 많은 양의 정보도 1-2분 안에 세계 어느 곳에나 받아보고 보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많은 사람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첨단 기술의 혜택이 소수의 엘리트만이 아닌 대중에게로까지 퍼지게 되면서 세계화는 기술발전에 의한 현상이라는 관념이 광범하게 폭 넓게 퍼지게 된 것이다.
 
세계화를 이 같이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게 되면,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보를 부정하는 과거 지향적인 인물들로 보이게 될 수밖에 없다. 세계화론자들이 종종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영국 산업혁명 초기에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산업화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러다이트(Luddite) 운동가들에 비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과연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전으로 돌아가 그 이후 세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 그러니까 대략 1870년대부터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 세계경제는 요즘만큼 ‘세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의 세계화는 지속되지 않았다.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선진국간의 세계 분할 투쟁 때문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과 투기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한 원인이 되어 일어난 1929년의 대공황을 거치게 되면서 국제 무역과 국제 금융이 붕괴되었고, 그 결과 제2차 대전 때에 이르게 되면 세계화는 20세기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화가 다시금 급격히 진전된 것은 주요선진국들을 필두로 세계각국이 정책을 변경해 개방을 추구한 1980년대 이후의 일인데, 정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세계화 수준을 획복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었다. 인터넷을 빼고는 이미 현대적 수송ㆍ통신 기술이 모두 존재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세계화 수준이 증기선과 유선전신에 의존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세계화 수준보다도 낮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는 1960-70년대의 세계화 수준이 낮았던 이유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각국이 국가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세계화의 속도를 규제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지, 수송ㆍ통신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세계화가 수송ㆍ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단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게 되면, 이후부터 세계화가 어느 정도 진전될 것인지의 여부는 정치적ㆍ정책적으로 - 특히 강대국에 의하여 - 결정되는 것이지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기술수준은 세계화의 한계를 규정하지만, 그 한계 내에서 정확히 어느 정도 세계화가 일어날 것인가의 여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닌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다(장하준, 2004: 116-119).
 
○ 장님 코끼리 더듬듯 하는 선진국 벤치마킹
 
싱가포르 하면 시장개방과 외국자본의 적극 유치라는 면만 강조되지만, 실상 이 나라는 토지가 대부분 국유화되어 있고, 많은 주택이 공공 임대주택이며, 외국계 기업을 제외한 주요 기업들은 대부분 국영이다. 싱가포르를 벤치마킹하자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이런 식의 토지 및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지지할 것인가.
 
핀란드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노조 조직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노동시장 규제도 엄격하고, 사회복지 제도가 발달해 세금도 많다. 게다가 1930년대부터 1993년 유럽연합(EU) 가입 때까지 외국인 지분이 20% 이상인 모든 기업을 공식적으로 ‘위험기업’으로 분류해 특별관리했는가 하면, 지금도 핀란드 투자청 웹사이트를 통해 ‘우리는 절대 국내기업보다 외국기업을 우대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는 나라이다. 국영기업 비중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노동시장 규제완화, 세금 감면, 외국인 투자자 우대, 민영화 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개방론자들이 핀란드에 대해 제대로 알면 과연 그 나라를 벤치마킹하자는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싱가포르나 핀란드에서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개방이 좋다는 사실이 아니다. 성공적으로 개방을 해내기 위해서는 개방의 충격을 흡수하고 그 희생자들을 구제해 사회통합을 유지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들이 복지국가, 토지 국유화, 공기업, 노동시장 규제, 외국인투자 규제 등의 ‘반(反)시장적’ 수단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장하준, 2004: 125-126).
 
○ 누구를 위한 재벌 개혁인가?
 
현재 재벌 개혁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그 궁극적 목표가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라는 점이다(장하준, 2004: 160-161).
 
주주 자본주의는 기업은 주주의 소유물인 만큼 주주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의 주인이 주주라는 것은 법적인 해석일 뿐이고 실제로 영미계 나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주주란 직접 금융의 조달자로서 경영진ㆍ노동자ㆍ채권자ㆍ하청업체ㆍ지역사회 등 여러 이해당사자(stakeholder) 집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또 주주 자본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주식 시장이 정확히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18세기 초 영국의 동인도회사 주식에 대한 투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 말 세계를 휩쓴 인터넷 거품까지 지난 30여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역사는 주식 시장이 기업 가치의 판단에 있어 얼마나 비효율적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더욱이 기업의 실적이 분기별로 평가되는 주식 시장의 속성상 ‘단기주의’(short-termism)의 만연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설비와 기술에 대한 꾸준한 투자를 통한 경영을 어렵게 한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주주 자본주의의 추구는 기업의 장기적 발전에 좋지 않다. 대부분의 주주들이 기업의 장기적 성공에 따른 이익보다는 단기적 배당이나 주가 차액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따져 나가다 보면 주주 자본주의는 장기적으로 주주들에게마저도 좋은 것이 아니다. 주주의 단기적 이익만 추구한 결과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장과 발전이 제약되면서 주주들 역시 결국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주 이익의 추구가 과연 국민 경제 전체에 득이 되느냐는 점이다. 주주 자본주의는 글자 그대로 주주의 이익을 추구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주식 시장이 교과서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주주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주주 자본주의가 강화된 1980년대 이후 영미계 국가에서 대량 해고, 고용의 불안정화, 소득 분배의 악화 등이 급증한 것은 주주의 이익과 다른 사회 성원들의 이익이 불일치할 수 있다는 좋은 증거일 것이다.
 
게다가 주주 자본주의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주주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이나 미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소득 분배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 면에서도 ‘열등생’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추구되고 있는 재벌 개혁에 대한 대안은 재벌 체제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주의 이익만이 아닌 국민 경제의 이익을 위해 그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억제하는 것이다.
 
재벌 체제의 장점은 경영권의 중앙 집중, 대규모 자금 동원력, 위험 분산 능력 등을 통해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해 비교적 쉽게 새로운 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그만큼 위험도 큰 체제이다. 계열 기업 간의 상호 보조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전망 있는 산업을 키울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도 채산성이 없는 기업을 계열사 간 보조를 통해 지탱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부실을 장기화하는 것은 물론 자칫 계열사 전체의 연쇄 부실까지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총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대규모 투자를 과감, 신속하게 할 수 있다는 커다란 강점이 있지만, 투자가 실패할 경우에는 치러야 할 대가 또한 매우 크다.
 
이러한 재벌 체제의 단점을 막기 위해서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개혁 과제인 회계의 투명성 제고, 사회이사 제도의 도입, 소액 주주 권한의 강화 등을 통한 외부 감시 기능을 제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업원, 거래 은행, 하청업체 등 기업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해 당사자들에 의한 내부 감시를 강화하는 일이다. 많은 주주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의 사정을 잘 모르는 국외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총수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뿐만 아니라 주주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합치할 수 있게 조정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와 관련 우리나라 재벌들은 지금까지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정부의 보조와 보호 아래 성장한 것인 만큼, 재벌 기업들을 총수 가족의 것도 아니지만 주주들만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재벌 총수를 통제한다면 그것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이지, 주주들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곤란한 것이다.
 
또 재벌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꼭 기존 총수 가족의 지배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일본의 경우에서와 같이 가족 소유가 없이도 주거래 은행 제도, 관련사 간 상호 주식 소유 등을 통해 재벌 체제의 장점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정 지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총수 가족에 의한 통제를 단시간 내에 없애려 하면 재벌 구조 자체가 붕괴되고 국민 경제가 외국 자본에 의해 교란당할 수 있다. 때문에 재벌들은 역사적으로 국민들에 대해 자신들이 진 빚을 인정하고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며, 국민들은 이러한 전제 아래 재벌들이 안정 지분을 확보하는 것을 도와주는 정치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재벌들의 안정 지분 확보를 위해서는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하고, 지주 회사 설립 요건을 완화해 주는 동시에, 은행의 기업 주식 소유를 용인하며, 재벌들 사이의 상호 출자를 시도하고, 국민연기금의 사용으로 ‘국민 지분’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재벌들은 그 대가로 주주 자본주의 이론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사회적 간섭을 피하려는 구태를 버리고 사회적 통제를 받아들여야 한다(장하준, 2004: 164-166).
 
○ 파이, ‘키우면서 나누기’
 
우리나라에서 ‘파이’라 하면 사과파이 속에 과일 등을 넣은 후식 정도에 해당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16세기까지도 파이는 속에 고기나 야채 등을 넣은 주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때문에 아직도 영국에는 해물 파이, 돼지고기 파이 등 파이라고 불리는 요리가 많은데, 성장ㆍ분배 논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파이가 ‘분배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60년대 말이라고 한다.
 
과연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파이를 더 고르게 나누려고 하면 파이가 잘 커지지 않는 것일까. 다시 말해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분배를 희생해야 하는 걸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다. 성장과 분배는 상충할 수도, 상호 보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해 분배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가장 앞세우는 논리는, 고소득층이 주로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로 소득이 집중돼야 투자와 성장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제완화를 통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부를 창출할 기회를 확대하고,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를 통해 부를 창출할 동기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고소득층으로 소득이 집중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산적 투자보다 사치성 소비나 자본도피에 열중한다거나, 소득분배의 악화가 사회갈등을 심화시킨다거나 하면 소득집중은 도리어 성장에 해로울 수도 있다.
 
최근 나오는 다국간 비교를 통한 실증연구에서도 소득 분배가 평등할수록 성장이 잘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남미의 국가들은 엄청난 소득불평등에도 불구하고 한국ㆍ대만 등 소득이 균등하게 분배돼 있는 나라보다 투자율이나 성장률이 낮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소득분배가 많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는 도리어 국민소득 대비 37% 선에서 26% 선으로 급격히 떨어졌고 성장도 둔화되었다.
 
‘성장주의자’들은 아울러 규제를 완화해야 기업할 의욕이 커져 경제성장이 촉진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규제 완화의 대상과 내용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완화는 경제 불안을 가중시켜 투자와 성장을 저해했다. 영국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장기적 투자보다는 단기적 이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사회간접자본이 낙후되어 - 최근 빈발하는 열차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 전체 경제가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은 “파이를 고르게 나누기 전에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규제완화,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 등의 정책을 펴 왔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성장률은 1960∼70년대의 3.2%에서 1980∼90년대의 2.2%로 오히려 떨어졌다.
 
이러한 성장의 저하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자본 자유화는 투기자본의 이동을 활발하게 해 경제 환경을 불안하게 만들며, 투자를 저하시킨다. 아울러 규제 완화로 말미암아 투기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생산적인 투자가 줄어든다. 그 결과 야기되는 투자 축소는 수요 위축을 불러오게 되고, 수요 위축은 다시 투자 축소를 부채질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 소득 분배 악화로 사회갈등이 심화되어도 투자심리가 위축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경우에도 투자 하락은 성장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장하준, 2004: 173-175).
 
○ 주주 포퓰리즘을 경계한다(장하준, 2004: 186-188)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인수합병이 자유화되면서 우리나라 주요 기업들은 경영권에 대한 위협을 크게 받고 있다. 이들 기업의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세력은 기존 경영진이 과도한 투자로 이윤도 많이 못 내고 배당도 적게 해 ‘보통 주주들’의 이익을 해쳐 왔다면서, 자신들이 경영권을 쥐면 주주가치 중심의 경영으로 보통 주주들의 권익을 제고할 터이니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위 ‘주주가치 경영’이 장기적으로 기업에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주가치를 올리는 가장 빠른 길은 대규모 감원을 통해 인건비를 줄이는 한편 설비나 기술개발 등에 대한 투자를 최소화해 이익을 많이 올리고, 그렇게 얻은 이익 중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부분을 배당하는 것인데, 최근 우리 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이윤을 내면서도 투자와 고용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런 주주가치 경영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영전략은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투자 여력을 축소하고 기술발전을 저해하는 동시에, 종업원을 불안하게 만들어 노사관계도 악화시키는 등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기 쉽다. 이렇게 당장은 보통 주주들을 위하는 듯하나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활력을 떨어뜨려 그들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주가치 경영은 포퓰리즘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에서 보통 사람들이 포퓰리스트 정권을 뽑으면 결국 그들을 뽑은 보통사람들 자신이 피해를 보는데 반해, 보통 주주들의 경우에는 ‘주주 포퓰리즘’의 이득은 자신들이 챙기고, 그 비용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주들은 포퓰리스트 경영진을 뽑아 단기적으로 배당 증대와 주가차익을 통해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 반면 그로 인해 기업의 활력이 저하되면 언제든 주식을 팔고 떠날 수 있다. 주주는 그렇게 떠나면 그만이지만 기업의 활력이 저하돼 고용과 소득이 창출되지 않으면 대가는 그 회사의 종업원이나 거래업체, 그리고 모든 국민이 치르게 된다.
 
그렇다면 기업의 경영전략 결정에서는 주주(shareholder)뿐만 아니라 모든 이해당사자(stakeholder), 나아가 국민경제 전체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대책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업들과 국민경제는 미구에 주주 포퓰리즘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다.
 
○ 소유 경영도, 전문 경영도 상관없다(장하준, 2004: 194-196)
 
‘스톡옵션’(stock option) 제도라는 것도 ‘대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전문 경영인의 보수와 기업의 주가를 연동시킴으로써 전문 경영인으로 하여금 주주의 시각에서 기업을 운영할 동기를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1980년대 영미계 국가들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스톡옵션 제도는 일견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 실제 운용을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경영 평가를 위한 ‘벤치마킹’을 동급 기업과의 비교 성과로 하지 않고 단순히 절대적 주가로 하는 경우 경영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주식 시장에 돈이 몰려 주가가 상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톡옵션을 보유한 전문 경영자는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스톡옵션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도 전문 경영인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문제이다. 1965년에 미국 평균 노동자 봉급의 20배에 불과하던 미국 최고경영자의 봉급이 본격적으로 스톡옵션 제도가 도입된 이후 급등하기 시작하여 1989년에는 56배, 1997년에는 116배로 뛰더니, 1999년에는 1,000배 가량이나 되었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 경영보다는 소유 경영이 더 좋은 것인가? 그렇게 볼 수도 없다. 대리인 이론의 중요한 약점 중 하나는 전문 경영인이나 소유 경영인이 경영 능력은 같고 부여된 동기만 다르다는 가정 하에 그 이론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 경영인이 소유 경영인보다 경영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면 기업 이익에 앞서 어느 정도 사익을 추구한다고 해도 소유 경영보다는 전문 경영이 득이 많을 것이다.
 
대리인 이론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약점은 인간 행동이 전적으로 이기심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물론 이기심이 인간 행동 전반, 특히 경제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동기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 인간 행동을 보면 조직에 대한 충성심, 사회적 책임감, 직장 동료와의 유대감(solidarity), 역지사지의 심정(vicariousness) 등 비이기적 동기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 완전히 이기심으로만 움직이는 존재라고 하는 대리인 이론의 전제를 따른다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재벌이 해체된 다음 자신들을 감시하는 지배 주주도 없고 스톡옵션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의 전문 경영인들이 그다지 봉급도 많이 받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여 일본 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기업들의 성공은 전문 경영인들이 자신들의 회사, 관련 업체들, 회사가 위치한 지역사회, 그리고 나아가서는 국민 경제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그 공동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감을 다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국영 기업, ‘매각’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정부가 구제 금융으로 회생시킨 기업들이나 금융 기관들을 서둘러 민영화하는 것은 결국 국민의 세금을 써서 창출된 추가적인 부를 이 기업들을 인수하는 소수의 주주들에게 넘겨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 만큼, 이러한 기업이나 금융 기관은 민영화하기보다는 계속 국영으로 남기거나 혹은 민영화하더라도 정부가 상당 정도의 지분을 소유하여 그들이 국민 전체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경영되도록 감독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장하준, 2004: 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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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의 '한국식 개입주의' (프레시안, 이승선/기자, 2004-09-04 오전 11:48:28) 
[신간] '제조업 강국론' 편 <개혁의 덫>  
  
  노무현 정권의 ‘주류 개혁론자’들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의 장하준 교수는 최근 발간된 <개혁의 덫>(부키 간)에서 ‘자본가 편인가, 노동자 편인가’ 하는 기준으로 보자면, 현재 흔히 ‘좌파’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주류 개혁론자’들은 “지극히 우파적“이라고 규정한다.
  
  “노무현 정권의 ‘주류 개혁론자’들은 ‘지극히 우파적’”  
  장 교수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가령 재벌 통제의 문제에 있어서 이들 주류 개혁론자들은 노동자를 비롯한 이해당사자 집단들의 관여에 의한 통제가 아닌, 주주의 재산권 행사에 의한 통제를 주장한다. 또 이들은 소액주주 권한의 강화를 강조하는데, 이는 노동자의 이익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주로 단기적 주가에 관심이 있는 소액 주주 입장에서는 경기가 안 좋을 때에는 노동자를 해고해서라도 이윤율을 유지해 주는 편을 선호하는데, 이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 주류 개혁론자들을 시장 원리의 확대를 외치면서 노동 시장 규제 완화를 강화하는데, 복지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것은 노동자에게 매우 불리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장 교수에 따르면 ‘시장인가 정부인가’하는 기준으로 보아도 현재의 주류 개혁론자들은 우파적이다. 우리나라의 기존 경제 체제가 국가 주도 체제였기 때문에 지금은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진보적’ 혹은 ‘좌파적’인 것으로 비춰지는지 몰라도 전통적인 기준을 본다면 현재의 주류 개혁론자들과 같이 개방과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우파적인 논리라는 것이다.
  
  “시장주의와 민주주의는 엄연히 달라”   

 
   
<개혁의 덫> ⓒ프레시안

 

  이어 장 교수는 우리나라의 많은 주류 개혁론자들은 시장 원리의 확대가 경쟁 심화를 통해 기득권을 파괴하므로 ‘민주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장에서의 평등과 민주주의적 의미에서의 평등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선진국의 경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시장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확대는 누진소득세 제도의 도입, 국유화 등 ‘반 시장적’인 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질 것이라면 현대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인 1인1표제 도입까지 반대한 사실은 시장주의와 민주주의가 엄연히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주류 개혁론자’들이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들이 기존의 질서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권 ‘주류 개혁론자’들이 빠진 ‘개혁의 덫’”  
  장 교수는 여기서 노무현 정권의 ‘주류 개혁론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우파인지 좌파인지 이념적 설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급진적’으로만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들어 오히려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개혁의 덫’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이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장 교수는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있는 ‘주주 자본주의’와 ‘아메리칸 스탠더드’에 불과한 ‘글로벌 스탠더드’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주주 자본주의는 다음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기업은 주주의 소유물이고 따라서 주주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 둘째, 주주의 이익이란 주가로 표현되는 기업 가치의 극대화를 말한다. 셋째, 이러한 기업 가치 극대화를 위해서는 적대적 인수.합병이 활성화되어 무능한 경영자를 갈아치울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업 가치의 극대화는 곧 사회적 이익의 극대화이다.
 
  장 교수는 “일견 흠 잡을 데 없는 논리”라면서도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문제가 많다”며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주주 자본주의와 글로벌 스탠더드의 허구성  
  실제로 영미계 나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주주란 직접 금융의 조달자로서 경영진.노동자.채권자.하청업체.지역사회 등 여러 이해 당사자 집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게다가 주주 대부분은 기업의 장기적 성공에 따른 이익보다는 단기적 배당이나 주가 차액만을 추구하는 만큼 주주의 이익을 따르는 것이 기업의 장기적 발전에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도 문제다.
 
  기업 가치는 주식 시장이 가장 잘 판단한다는 가정도 문제가 많다. 자본주의 역사 3백여 년은 주식 시장이 기업 가치 판단에서 얼마나 비효율적일 수 있는지는 최근의 인터넷 거품이 잘 보여준다. 특히 그 속성상 실적이 분기별로 평가되는 ‘단기주의’가 만연하는 주식 시장의 경우 설비 및 기술에 대한 꾸준한 투자를 통해 기업 성장을 도모하는 정통적인 경영 방식의 채택을 어렵게 한다.
 
  장 교수는 “무엇보다는 주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국민 경제 전체에 득이 되는지 의문”이라면서 “한국도 주주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기업들이 장기 투자보다는 경영권 방어에 더 힘을 써야 하는 상황이 돼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글로벌 스탠더드나 건전한 기업 지배구조는 경제 성장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면서 “경제가 성숙한 선진국에 진입한 다음에 형성된 것이지,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도입된 게 아니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개발도상국이 자신들의 경제 발전 경로를 선택하려 할 때 그런 식으로 역사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줘서는 안된다”면서 “선진국들이 개발 도상국과 후진국에게 자유 무역과 외국인 투자 개방을 외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후진국 또는 개발 도상국이었을 때는 보호 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철저히 규제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각종 규제난 노사 관계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한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에 부실 기업을 마구 팔 때 외국인 직접 투자가 크게 늘었다. 지금 와서 그 때에 비해 직접 투자가 떨어졌다고 난리를 치는 것이 옳은가? 또 이런 결과가 경제 정책의 실패 탓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지금도 그때처럼 기업을 막 팔아치워야 한다는 말인가? 외국 자본이 한국에 들어올 때는 물건을 팔 시장이 얼마나 큰지,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지, 노동력의 질이 어떤지 등을 따지는 것이지 노사 관계, 규제. 법인세 같은 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금 인센티브로 끌어들인 외국 자본은 그 매력이 없어지면 언제든 보따리 싸서 떠나 버리게 마련이다. 사실 떠나는 자본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빠져나간다.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고, 나가기 어려운 외국 자본만이 꼭 노사 관계가 어떠니 규제가 어떠니 하고 문제 삼는다,”
 
  “동북아 금융허브? 꿈깨”  
  그는 “자본에 색깔과 꼬리표가 있는 건 아니다”는 자본 유치론에 대해서도 “자본에 국적이 없다는 말은 강대국 자본들이 만들어 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반론을 편다. 자본에 국적이 없다지만, 자본의 핵심 경영진은 철저하게 국적을 따른다는 것이다.
 
  나아가 장 교수는 주주 자본주의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받아들인 나머지 ‘금융강국’으로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열겠다는 ‘동북아 금융허브’ 구상에 대해 “헛고생마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 암스테르담, 런던.뉴욕으로 이동한 것은 그 나라의 제조업 발달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앞으로 1백년간의 손실을 보전해 준다는 약속이 있으면 모를까, 그런 약속 없이 오랫동안 홍콩, 싱가포르에 뿌리박고 영업해 온 국제금융센터들이 한국으로 옮겨 올 리 만무하다. 동북아 금융허브는 좋은 말로 헛고생이고, 자칫 남의 장단에 춤추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면 빨리 제조업을 버리고 금융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업으로 옮겨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강력한 제조업 없이 금융중심지로 성장해 잘 살게 된 나라는 없다고 단언한다.
 
  “제조업 강국만이 금융강국으로 발전 가능”  
  제조업 강국인 부국에서 금융이 발전하는 것이지, 금융의 발전을 통해 부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관광업, 금융업 등 서비스업에 의존해 부자가 된 것으로 알려진 스위스는 사실 최고의 공업국이라는 것이다. 스위스의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액은 98년 기준을 8천달러가 넘어 세계1위다. 당시 미국 5천3백달러, 영국 4천1백달러, 우리나라 2천1백 달러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단지 제조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제조업 비중이 낮아질 뿐이라는 것이다.
 
  금융허브론자들이 모범 사례로 거론하는 싱가포르나 홍콩도 금융강국이기 이전에 제조업 강국이다. 싱가포르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액은 98년 기준으로 6천1백달러였으며, 홍콩도 중국과 통합되기 전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가 85년 기준으로 1천3백달러로 당시 우리나라의 6백68 달러의 2배가 넘는 공업국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형성된 재벌체제를 발전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재벌은 장기적인 성장 동력이나 국민 경제 틀 안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대성공, 그리고 삼성자동차의 실패는 재벌 체제라는 같은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재벌 체제는 자금 동원력을 통해 대규모 투자를 과감하게 할 수 있고, 계열 기업 간 상호보조를 통해 장기적으로 전망 있는 산업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채산성 없는 부실기업을 지탱시키고 계열사 연쇄 부실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위험도 크다. 모든 제도는 장단점이 있다.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없애 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제는 타율이다. 재벌 체제 개혁은 재벌이 한국 경제에서 3할대를 치도록 할 것이냐, 4할대를 치도록 할 것이냐의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재벌 체제 살리되, 재벌 총수.주주 권리는 사회적 통제돼야”  
  이같은 주장은 자칫 ‘친재벌적 학자’의 주장으로 매도할 수 있다. 여기서 장 교수는 “물론 재벌 총수 가족의 지배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면서 "재벌 총수 일가 자신들부터 ‘주주 자본주의 이론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사회적 간섭을 피하려는 구태를 버리고 사회적 통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지금까지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정부의 보조와 보호 아래 성장한 것인 만큼 재벌 기업들은 총수 일가의 것도 아니지만 주주들만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재벌 총수를 통제한다면 그것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이지, 주주들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재벌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꼭 기존 총수 가족의 지배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일본의 경우에서와 같이 가족 소유가 없이도 주거래 은행제도, 관련사 간 상호주식 소유 등을 통해 재벌 체제의 장점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정 지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총수 가족에 의한 통제를 단시간내에 없애려 하면 재벌 구조 자체가 붕괴되고 국민 경제가 외국 자본에 의해 교란당할 수 있다. 때문에 그는 “국민들은 재벌들이 안정 지분을 확보하는 것을 도와주는 정치적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구체적 방안으로 그는 재벌들의 안정 지분 확보를 위해서는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하고, 지주 회사 설립 요건을 완화해주는 동시에, 은행의 기업 주식 소유를 용인하며, 재벌들 사이의 상호 출자를 시도하고, 국민연기금의 사용으로 ‘국민 지분’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또한 사회적 통제기법으로 그는 종업원, 거래 은행, 하청업체 등 기업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해 당사자들에 의한 내부 감시도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민주 사회에서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정부의 산업 정책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부의 개입이 권력 남용이나 정경유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한국식’ 개입주의 정책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노르웨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부패도 적은 선진국들이 지난 50여 년간 은행의 국가소유, 선별적 산업정책, 주요 산업의 국유화, 외국인 투자의 엄격한 제한 등 ‘한국식’ 개입주의적 정책을 추구해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어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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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의 '한국식 개입주의'」를 읽고
자유영혼 / 2004-09-06 오후 4:37:16
 
외국자본에 의해 교란당하지 않도록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하여 재벌들의 안정지분을 확보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첫째 중요한 것은 자본의 국적성이 아니라 자본이 국민들의 후생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세계 각국은 외국자본을 끌어와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자본이 국내 진출하는 데 제약요인으로 지적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기업경영의 투명성 부족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들은 불과 몇 퍼센트의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경영을 전횡하기 때문에 투명성이 부족하고 소수주주들의 권한이 침해될 소지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모재벌의 2세는 전환사채를 헐값으로 사들여 주주와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횡령하고 실질적인 재벌오너가 되었으며 지난 대선 때는 수백억원의 비자금이 조성되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둘째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하여 재벌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할 경우 계열기업간 불공정거래, 독점폐해 등으로 인해 중소기업들이 설자리를 잃게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소수 재벌들이 국민경제를 좌우할 경우 국가리스크가 커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우의 패망은 IMF 위기를 촉발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셋째 글로벌 스탠더드, 건전한 기업지배가 경제가 성숙한 선진국에 진입한 다음에 형성된 것이지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지금과 같은 선진국이 되기 이전에 글로벌 스탠더드나 건전한 기업지배를 도입하지 않았던 것은 공업화 초기 소규모 가족기업이 대부분이라 그 필요성이 크지 않았고 인지가 발달하지 않아 이러한 제도를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것이 선진국으로 가는데 장애가 되는 잘못된 제도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제도는 선진국으로 가거나 선진국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도입니다.

넷째 경영권 방어가 대주주에게는 일자리를 지키는 중요한 문제일지 모르나* 다른 소수주주나 종업원, 그리고 국가경제 입장에서는 누가 더 경영을 잘 할 것인지가 보다 중요합니다. 대주주가 경영을 잘못하여도 경영진을 바꿀 수 없다면 이는 과거 전제주의 왕권시대의 폐해가 기업경영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 경제적 여유가 있는 대주주들이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달린 일자리를 그처럼 쉽게 빼앗으면서도 자신들의 일자리인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는 것을 그토록 싫어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다섯째 소수주주가 단기적 이익만 추구한다는 견해는 많은 여타 학자들도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소수주주가 비합리적인 경제주체이거나 기업의 투명성 부족으로 비주주는 주식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따라서 소수주주가 주식을 기업의 펀더멘털을 반영하는 수준 이상의 가격으로 비주주에게 팔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소수주주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나 소수주주가 비주주에 비해 우월한 정보를 가진다는 가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정입니다. 그리고 소수주주가 단기적 이익만 추구하는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 방법인 대주주에게 지분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보다 기업의 투명성이 높이고 전문경영인제도를 도입하거나 장기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다른 이해집단(종업원 등)의 견제가 더 나은 방안일 수 있습니다.(물론 이러한 방안도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여섯째 재벌들이 출자총액한도를 완화시켜 달라는 가장 큰 논리는 투자를 저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자와 투자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고 실증분석에서도 출자총액한도제도가 투자를 저해하였다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한국식 개입주의’가 부활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이 글에서는 ‘한국식 개입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은행의 국가소유, 선별적 산업정책, 주요 산업의 국유화, 외국인투자의 엄격한 제한 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람직할 수도 있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본론의 대부분의 주장은 공감하지만 출자총액한도제를 완화하는 것은 우리나라 경제의 특성상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식 개입주의'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자칫 IMF 위기의 근원인 과거 계획경제정책의 폐해를 다시 초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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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서평 (LG경제연구원 주요도서요약)
저자: 장하준 출판사 : 부키 (2004년 8월)  
 조용수 | 2004.09.23
 
Ⅰ. 경제개혁이라는 덫
Ⅱ. 경제개혁론자들의 오만과 편견
Ⅲ. 한국기업이 그렇게 문제인가?
Ⅳ. 결론과 시사점 
 
지난 1997년 외환위기는 1960대 이후 30여년동안 지속되어 온 한국경제 발전 패러다임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과거 정부주도 대기업 중심의 고도성장 체제가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었다는 진단이 정설로 굳어지면서, 기존의 경제사회 시스템에 대한 전방위적인 개혁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입주의적 산업정책과 은행에 대한 정부통제 차단, 과잉투자를 야기해 온 대기업들의 전문화된 독립기업 체제로의 전환, 공기업 민영화 및 외국인자본 유치, 노동시장 유연화의 가속 등이 외환위기 이후 지난 7년 동안 우리 경제와 사회를 뒤흔들어 온 개혁의 요체이다.
 
외환위기 직후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경제사회 시스템의 재구축 작업을 강도 높게 추진했고 덕분에 한국은 불과 수 년 만에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안팎의 찬사가 줄을 이었다. 경제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2000년대 들어 외환보유고는 세계 수위를 다투게 되었고, 실업률은 큰 폭으로 낮아졌으며 소비도 빠르게 늘어났다. 개혁은 성공한 듯이 보였다. 
 
개혁주의자들의 오만과 편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가 쓴 ‘개혁의 덫’은 지난 7년 동안 한국사회가 추진해 온 개혁의 성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장하준 교수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무분별한 수용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의 오만과 편견이 한국경제를 위기로 몰아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7년간의 경제 사회 개혁작업의 결과 투자의 붕괴와 실업난, 소비감소, 그리고 절대빈곤층의 급증 등 국민경제의 총체적 파산 조짐이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경제가 당면한 성장, 고용, 소득분배 등과 관련한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중 많은 것들이 개혁이라는 덫에 걸린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하준 교수는 이 책에서 세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인가, 글로벌 스탠더드는 과연 절대불변의 진리인가, 한국경제의 과거 성장시스템은 개혁 지상주의자들이 매도하는 것처럼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것이었는가 등등의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외환위기이후 우리 사회가 금과옥조로 받들어 온 세계화 이데올로기나 글로벌 스탠더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등이 기실은 미국 등 서방자본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적인 논리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결국 세계화 논리는 선진국의 경제민족주의를 세계주의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며, 우리나라도 오직 개방과 세계화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세계화 논리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 필요

세계화 논리와 더불어 최근 한국경제를 근저에서부터 변화시키고 있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매우 부정적이다. 영미식 자본주의는 사실은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영미계 국가들이 일본이나 독일, 프랑스 등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쳐지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편 이 책은 외환위기이후 한국정부와 IMF, 그리고 경제학계의 개혁론자 등이 주도해 온 개혁 방식에 대한 비판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재벌, 정부주도, 관치금융 등 한국경제의 기형적인 구조를 뜯어 고쳐야 한국경제가 살아난다는 소위 ‘한국경제 기형론’은 과거 30여년 동안 우리 경제가 구축해 온 성장시스템이나 성장과정상의 특수성을 전면 부정하는 단순논리라는 것이다. 저자는 재벌개혁과 관련해 재벌체제의 장점을 인정하고 주주이익이 아닌 국민경제 전체의 이익을 위해 그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억제해 나가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너의 소유를 인정하는 대신 사회적 통제를 관철하는 유럽식 대타협을 이루어 내기 위해 사회구성원 전체의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요구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결국 저자 장하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가 추구해 온 세계화나 영미식 자본주의는 결코 한국경제를 위기에서 구해 줄 해답이 아니며, 개혁의 환상에 사로잡힌 개혁 지상주의자들이 한국경제의 위기를 더욱 증폭시켜 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투자붕괴, 실업증가, 절대빈곤 확산 등 개혁의 덫에 빠져 있는 한국경제가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절한 시장 개입과 재벌체제의 교정을 통한 국민경제적 역할 부여, 그리고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위한 사회 대타협이 긴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날로 난국에 처한 한국경제의 활로를 찾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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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개혁의 덫』(부키 刊) 펴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교수신문, 2004년 10월 08일 (금) 강성민 기자)
잘못된 개혁의 환부 진단...국가개입 위한 논의 필요 
 
신자유주의의 한복판에 온몸을 담그고 난 후에야 그것이 뭔가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은 한국은 현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계층의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이런 사회경제적 문제는 아젠다 세팅도 되지 않는 ‘비결정’의 영역에 웅크린 채 사회분열의 ‘현실적’ 불씨로 자라고 있다. 성장의 넘쳐흐름 효과가 분배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성장론자들은 아직까지 ‘개방’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고 있지만, 이에 귀를 여는 쪽은 몰락한 ‘중산층’을 ‘대표’(?)한다는 현 정부와, 미국에 목맨 일부 계층 밖에는 없는 듯하다. 이런 시점에서 경제학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아마 그 동안 손을 놓았던 역사책도 좀 들춰보고, 非 미국 국가들도 관심있게 봐야 하지 않을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는 지속적으로 역사와 실증을 겸비한 채 한국경제를 관찰해온 학자로 꼽힌다. 뮈르달상을 수상한 ‘사다리 걷어차기’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비판해 주목을 받았다. 그가 최근 ‘개혁의 덫’(이상 부키 刊)이란 칼럼집에서 국내 경제 개혁론자들을 비판하고 나서 시선을 끌고있다.
 
유연한 국가개입을 위한 논의 필요

이 책은 지난 10년간 추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우리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친다. 1997년의 금융위기가 과도한 정부개입과 기형적 재벌체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오히려 금융규제의 미비 같은 지나친 자유방임 정책 때문이라는 주장을 시작으로 해서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자고 추진한 국영기업의 성급한 민영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나요. 공적자금 17조원이 투자된 제일은행을 5천억에 팔아치운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이건 제일은행이 매각된 후 1년 반 동안 올린 이윤에 불과한 낮은 가격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5년 정도는 버텨 제값을 받고 팔았어야죠.
 
제조업 기반 경제구조로 거듭나야

계속 이어지는 그의 분석은 경제학적 실증성과 정치적 시각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수긍가는 점이 많다. 가령 최근 SK그룹의 최대주주가 된 외국계 크레스트 증권이 분식회계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SK의 경영구조를 투명화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와 접촉을 벌이는 것을 예로 든다. “사실 크레스트 증권은 그 모기업이 모나코라는 유명한 세금 도피처에 위치한 펀드로서 도덕성·투명성 운운할 처지가 못됩니다”라며 장 교수는 꼬집는다.
 
그의 안목은 정부역할 ‘축소론’이 아닌 ‘재정립론’을 펼치는 데서 매우 돋보인다. 그는 경제가 발전하면 민간 부문 능력이 향상되고 각종 제도가 성숙되면서 정부개입이 불필요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경제의 선진화를 이어가기 위한 첨단산업의 육성, 사양산업의 정리, 노동력의 질적 향상, 사회간접자본의 고급화, 복지·공공소비·소비자 권익의 확산과 향상, 노사관계의 선진화 등 새로운 개입 영역이 등장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방의 충격을 흡수하고 그 희생자들을 구제해 사회통합을 유지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정부가 팔을 걷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 교수는 한국사회에서의 재벌의 중요성 인식 및 점진적 개혁, 공기업의 과도한 민영화 중단, 투자감소와 소비축소를 부른 ‘주범’인 주주자본주의 모델의 철폐 등을 거론한다. 특히 6T 산업에 ‘올인’하고, 허황된 금융허브를 꿈꾸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이었던 제조업 기반을 죽이지 말고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조업 제품에 대한 실수요는 고소득 사회가 돼도 줄지 않습니다. 최근 서양에서의 서비스업 증가현상은 ‘외주시스템’에 따른 통계적 환상도 섞여 있죠. 영국이 왜 금융업을 잘하면서도 국제수지 난을 겪겠습니까. 바로 제조업 경쟁에서 독일에 졌기 때문입니다. 스위스를 보세요. 우리는 그 나라가 관광수입만 올리는 줄 알지만, 실상은 기계·화학·제약 등을 중심으로 영국의 3배에 가까운 1인당 제조업 생산량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그는 이공계 기피현상도 결국 제조업 활성화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땀 뻘뻘 흘리는 육체노동만 연상하지 말고, 한국적 교육수준에 맞는 제조업 분야에 설비 및 연구투자를 해서 중소기업을 안정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이공계 인력들도 직업안정성이 높은 기업 등에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장 교수는 이런 개별적 대안들이 실현가능성을 가지려면 좀더 체계적인 틀로 만들어지는 것을 거쳐 넓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적 조건과 각 선진국들의 경제모델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하고, 경제학이 추상적 원론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성실하게 구해진 정확한 통계를 바탕으로 얘기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은폐’와 ‘왜곡’을 그만두라

그의 최종 화살은 학계로 날아온다. 싱가포르와 미국을 예로 들 수 있다. 학자들은 “싱가포르를 벤치마킹 하자며 이 나라의 시장개방과 외자 적극유치만 강조하고, 싱가포르의 토지가 대부분 국유화돼 있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부실금융기관에 국내총생산 3%에 달하는 거대자금을 투입해 조속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에서 드러나듯, 미국에서 진정으로 배울 것은 개방과 자유방임이 아니라 경제 민족주의와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한 '유연성'이라며 장 교수의 조언은 이어진다.
 
그의 통계분석과 그에 따른 전망이 보는 이에 따라서 이견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에 부족한 ‘역사적’ 안목과 ‘정치적’ 관찰을 적절히 조합하는 그의 분석태도는 ‘시장주의’와 ‘반시장주의’라는 ‘신념적 대결’에 가까운 지형을 그리고 있는 한국 학계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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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04:06 2008/05/19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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