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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정치의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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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5일 촛불시위와 함께 연이어 새벽까지 계속된 가두시위를 보면서 생각난 점을 쓴다.
 
- 지도부의 부재가 두드러진다. 물론 이번같은 경우에 지도부가 따로 필요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대중들이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24일 여의도 집회를 마치고 합류한 많은 노동자들은 행진과 가두시위에서 거의 구경꾼으로 행세하였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그냥 지켜볼 따름이었고, 집회를 통해서는 이번에 처음 거리에 나온 듯한 이들이 주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우왕좌왕하였던 것 같고...
  
진보신당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새벽녘까지 중계를 하면서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대중의 자발적 열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단지 서명을 받으면서 주위를 환기하려고 했을 뿐, 촛불집회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부재했다. 그러했기에 정작 대중이 거리로 나왔을 때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은 물론 현장 좌파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의도 집회에서 공공부문 사유화에 반대한다는 유인물들을 찍어내면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려고 했던 현장조직들은 광화문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함께는 피켓을 많이 들고 왔고, 확성기도 있었기에 자신들 주위로 대중을 모을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자신들만의 구호를 외치고, 신문을 팔 생각만 했을 뿐, 거기에 나와 있는 대중들을 지도하지 못했고, 시위가 길어지자 대중을 남겨둔 채 사라졌다.
 
- 이번 행진과 가두시위는 기존의 운동권적 감성을 뛰어넘는다. 촛불시위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촛불집회에서 터져나오는, 애국과 태극기, 아리랑의 코드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불만이라고 하면서도, 이를 바꾸어내지 못하는 운동권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
 
24일 밤 촛불집회에서 일부 온라인카페의 성원을 중심으로 외쳐지던 '이명박 탄핵'의 구호는 그 자리에 있던 나에게는 장난으로 다가왔다. 여의도의 민주노총 집회에서 오는 도중 오늘 행진이 있을 거라는 말도 나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촛불집회에서 탄핵을 외치는 것은 주도권을 잡으려는 일부 노빠들의 목소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에서 대중의 힘을 느낀 대책위는 9시 반경 촛불문화제에서 행진으로 전환하였다. 대책위의 박원석 공동대책위원장이 청와대까지 항의의 행진을 벌이자고 하면서 이미 후미에서 종로쪽으로 향하고 있던 대열을 따를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 있던 대부분의 인원들이 행진대열에 합류하였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예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은 계속되었다. 광화문쪽으로 진출하려던 행렬은 교보문고 앞에서 경찰들에게 막혔고, 그 사이에서 군중들은 고시철회, 명박퇴진 등을 외치면서 앉기 시작했다. 그 한 가운데에는 확성기를 들고 선동을 하는 다함께가 있었지만, 이들이 대열을 계속 이끌어갈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좌우가 막혀 있기 때문에 아마 이렇게 있다가 사람이 줄어들면 11시경 즈음에 해산시킬 것으로 판단하고 자리를 떴는데, 그 시위는 새벽을 넘어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아마도 아침까지 남았던 이들은 대부분 촛불집회의 연장선에서 경찰과의 대치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았음에 틀림 없다. 그래서 경찰의 폭력진압을 충격적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 출범한지 3개월이 갓 지난 정권을 향해 대통령 탄핵, 아니 퇴진, 타도 구호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집회현장에서 독재타도, 이명박 정권 반대라는 구호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과거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퇴진을 처음 외치기 시작했을 때 그에 대한 반발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5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집회 후에 행진을 하여 청계 소라광장에 도착한 대중들이 재협상을 요구하면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려고 하던 민주노총 지도부를 향해 이명박 퇴진에 함께할 것을 요구한 것도 당혹스러운 일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25일 새벽 광화문에서 한용진 대책위 상황실장이 대오를 해산하고 저녁 때 다시 모이자라고 할 때 이를 거부하고 시위를 계속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 오랜만에 다시 들어간 아프리카의 현장 생중계는 집회현장을 가지 않고도 집회나 행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마이뉴스나 민중의 소리, 참세상, 그리고 다음 아고라의 자유토론, 정치, 사회토론방에 현장의 얘기들이 계속 올라오긴 했지만,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것에 비교할 수는 없으리라.
 
지금은 라디오21에서 40여시간 연속 생방송을 하고 있는데, 진보언론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확실히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 이명박에 대한 경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2MB도 그리 중립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집회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인터넷 방송을 청취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그를 쥐새끼라고 거리낌 없이 얘기를 한다.
 
포털에서는 쥐새끼라는 단어가 검색어에서 제외되었다는 말도 있고, 여기저기 올리는 글들이 삭제된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인터넷이라는 게 유용한 무기로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메커니즘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들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것조차 없었던 것에 비하면 나아진 것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이것이 기술적인 수단일 따름임을 명심해야 하겠고...
 
- 아직까지 촛불집회에서 행진, 가두시위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의 정치학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겠다. 또한 대중교통이 더이상 다니지 않는 새벽까지 시위하는 것에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과거의 가투할 때의 관성에 찌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현행 집시법 상에서 새벽의 시위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제 새벽 4시경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연행될 때에도 교통흐름을 방해하고 있던 것은 경찰들이었고, 평화시위를 하던 이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 것도 경찰들이었다. 오늘 새벽 12시가 넘어 신촌에서 경찰들이 시위대들은 물론 주위의 시민들을 항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면서 연행한 것도 상식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소라광장에 있는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은 것은 신촌에서의 연행 성과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새벽 시위에 적응하기 어렵다. 6월 항쟁 때도 새벽까지 시위에 나선 경우가 있지만, 그 때는 시위대가 나름의 자위수단을 갖추었다.
 
지금 시기에 새벽까지 시위를 할 때 어떠한 자위수단을 갖출 수 있을까. 어쩌면 최대한의 자위수단은 물리적인 수단이라기보다는 쪽수가 아닐 듯 싶다. 뜻을 함께하는 많은 이들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될 것이고, 함부로 해산이나 연행에 나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통체증과 관련된 문제는 여전히 난감하기는 하지만, 그 새벽에 도대체 몇 백명에 불과한 시위대가 얼마나 교통체증을 일으킨다고 이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지는 모르겠다.
 
- 실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는 경찰청 홈페이지에 폭력진압과 무차별 연행에 대해 항의하는 글들이 다시 올라오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다. 법원은 지난 대선시기 특정 대선후보에 대해 17차례에 걸쳐 비판적인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하였고, 정보인권단체들은 인터넷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고 비판해왔는데, 포털에는 이명박 정권의 타도를 외치는 글이나 댓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경찰청 홈페이지마저 장악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과거 노무현 정권 시기 꼴보수들이 했던 언행에 비하면 약한 편이지만, 실명제가 무력화되는 것은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 없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이들의 구성을 봐도 그렇지만, 미국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지금의 시위양상이나 참여하는 이들의 행태는 분명 과거와는 다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이를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게 우선일 것 같다.
 
- 웹캠, 디카, 휴대폰 문자 등을 통해서 상황이 신속하게 온라인상으로 전해진 것도 특이할 만하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할 때면 경찰들 뒷쪽에서 채증하는 짭새들이 있는 반면에, 그 반대편에서는 손에 휴대폰과 디카를 쳐들고 충돌현장를 담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플레쉬 때문에 의경들은 쉽사리 난폭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인파가 줄어들자 광폭하게 나와서 대열을 해산시키려고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기록된 내용들은 다음의 아고라나 블로그 등으로 확산되어 공중파 방송이나 보수언론에서는 나오지 않는 시위의 감추어진 면들을 드러내고 선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물론 약간 과장된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일을 처음 겪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분위기로 봐서는 촛불집회와 행진, 가두시위가 거의 매일 계속될 듯하다. 촛불을 쉽게 끌 수는 없을 것이며, 촛불이 꺼진다면 횃불이 등장할 것이다(개인적으로 미선이, 효순이 집회 이후에 촛불은 들지 않지만, 이번 시위를 보면 촛불의 의미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아마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농식품부 장관의 고시가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일단 장관 고시가 나가게 되었을 때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 5월 24일
 
그리고 연행자 문제와 함께 전주에서 어제 저녁에 시위 도중 분신을 시도했던 이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향후 시위방향을 좌우할 수 있다. 오늘부터 보수언론의 왜곡보도는 극심해질 것이다. 여론전이 중요하다. 여기에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가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거리정치의 활성화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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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타도'가 등장한 복고의 시대 (프레시안, 윤태곤/기자, 2008-05-26 오후 2:34:35)
[기자의 눈] '촛불'은 왜 '광장'을 벗어나 '거리'로 뛰어들었나 
 
  24일과 25일 '촛불문화제'는 '가두시위'로 '진화'했다. '거리의 정치'가 한창이던 때도 좀처럼 뚫리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미국대사관 앞길을 수천 명의 시위대가 휘젓고 다녔다. 같은 날 민주노총과 전교조, 흔히들 말하는 '운동권 프로'들이 운집한 서울 여의도의 '차분한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연출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 후보가 집권하면 '지난 10년 간의 성과'가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지난 20년 간 한국 일반 민주주의의 진전은 급격한 정치적 퇴행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반박했었다. 이 논의는 '포스트 87년 체제'에 대한 논의로도, '어쨌든 이명박은 막아야 한다'는 신판 비판적 지지론의 이론적 근거로도 작용했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는 530만 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정부 출범 이후 석 달도 되지 않아 '일반 시민'들로부터 '독재 타도'라는 고전적 구호가 등장했다. 역시 '이명박 시대'를 막았어야 하는 것인가? '민주화 세력' 재결집의 신호탄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촛불 정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정당과 선거라는 제도정치 기제에 대한 강력한 경고장이다. 이 경고장은 '전진기어 넣은 채 후진'을 감행하고 있는 자칭 '선진화 세력' 뿐 아니라 야당 기억을 10년 동안 다 까먹어 버린 '민주화 세력' 모두를 향한 것이다.
 
  지난 10년 간 익숙했는데 왜? 
  촛불이 차도로 뛰어든 24일 밤, 저지하고 나선 경찰과 맞선 학생들, 386 직장인들은 "평화적인 의견 개진을 왜 막나. 지금이 독재시대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경찰들은 아마도 어리둥절했을 게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노무현 정부에서도 '평화적인 의견개진'은 폭력적으로 억압당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롯데호텔에서 농성하던 파업 노동자들은 경찰특공대에 의해 진압당했고 2001년 말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평화롭게 길을 걷던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은 백주대낮에 경찰로부터 그야말로 '린치'를 당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라고 별다르지 않다. '촛불시위를 강경진압하는 장면'이라며 경찰이 방패로 무방비한 시위대를 심하게 가격하고 있는 내용이 담긴 동영상은 사실 지난 해 3월의 풍경이다. 일흔을 넘긴 농민이 경찰에 맞아 죽은 것도, 진압책임자였던 경무관이 직위해제 5개월 만에 현직에 복귀한 것도 다 노무현 정부 때 생긴 일이다.
 
  이러다 보니 현장의 의경들이나, 경찰 수뇌부나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을 게다. 기자의 눈으로 들여다봐도 세종로가 뚫렸는데도 경찰이 이 정도로 '양호하게' 대응하는 걸 보면 "눈치를 꽤 보는구나"싶기도 했다.
 
  '민주 시민', 일반 시민'과 '운동권'으로 분리되다 
  1997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서 '일반 시민'과 '운동권'은 완벽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지금 경제가 어려운데"라는 진부한 훈계말고도 "이제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때가 아니냐"는 근엄한 훈계가 뒤따랐다. 신지식인 담론, 주식 열풍을 통해 '10대 보다 못한 20대, 88만원 세대'를 만들어 낸 정권도 이들이었다.
 
  금배지를 단, 아니면 코스닥 성공신화를 창출한 '386 의장님'들은 "1990년 소비에트 몰락으로 세상이 바뀌었듯이 우리 정권 창출로 한국은 완전히 바뀌었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보수언론과 손을 잡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시대착오적 행태로 몰아붙이며 "신자유주의는 대세다. 대안 없는 비판은 필요없다"고 매몰차게 꾸짖었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 포함)은 물론 구 열린우리당 내에서 근본적 목소리를 낸 인물 가운데 '386세대'는 있을지언정 '386명망가'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공부문 민영화, 금융화, 무분별한 세계화가 '선진화'로 통한 것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난 10년 정권에 의해서다. 이명박 대통령은 '더 많은 선진화'라는 이들의 주장을 충실히 계승한 것에 불과하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1987년 체제의 기반이었던 '민주 시민'은, '일반 시민'과 '운동권'으로 완전히 분리됐을 뿐더러 양자는 적대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제대로 된 담론도, 전술도, 헌신도 보여주지 못한 '운동권'의 책임도 적지 않다.
 
  '민주화 세력'과 '선진화 세력'의 합작품 
  "세상이 달라졌다"고 10년 동안 주장하다가 갑자기 대통령 선거가 닥치니 "아직도 위험하다"고 말을 바꾸는 데야 믿어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지난 대선과 총선, 수도권이나 20대·30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지율 급등의 주요한 원인은 안심하고 이들에게 한 표를 던질 수 있게 만들었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외쳐온 '민주화세력' 덕분이란 이야기다.
  
  어쨌든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바로잡으러 나섰으니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인가? 1997년 이후 정권들이 즐겨 사용한 'OECD 기준'으로 보면 '선진국 시민'들도 종종 거리로 나선다. 전쟁, 세계화, 연금 및 재정정책 등에 대한 찬반논란이 단골 메뉴다.
 
  하지만 2008년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 거리의 구호는 고전적이게도 '독재타도'다. 이명박 정부가 큰 흠결 없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통성을 갖춘 정권이라는 점을 부인하긴 힘든데도 말이다.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은 광장에서 피어났다. 돌이켜 볼 때 한미행정협정 개정과 탄핵 반대라는 요구가 완전히 관철된 것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촛불이 광장을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2002년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마저 주위를 기웃거렸고 2004년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에서 "사실 나는 탄핵을 반대했다"는 고백이 잇달았다. 촛불은 촛불 이상의 의미를 지녔고 광장은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에게 충분한 압박이 됐다는 이야기다.
 
  2002년보다 1987년에 가까운 2008년  
  그러나 2008년의 상황은 다르다. 대선과 총선을 대승으로 마무리한 정부여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야당은 있으나마나, 아니 걸리적거리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이러다보니 촛불이 광장을 벗어나 거리로 뛰어나올 수밖에. 광장과 정치적 제도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이상 '거리의 정치'가 부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도권으로 수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야당과 의회의 부재, 검찰-국정원-경찰-노동부 등으로 이어지는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부활, 정책 반대에 대한 응답으로 '하사'되는 '특별사면 고려', 환율 하락으로 인한 국민소득 하락, 남북관계 경색…. 도래한 복고의 시대에는 복고적 방법으로 대응할 수밖에.
 
  아 참, '선진화'된 풍경이 하나 있긴 하다. 정부정책에 반대해 거리로 뛰쳐나오던 프랑스 고등학생들처럼 우리 고등학생도, 심지어 중학생도 정치적 발언을 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사르코지를 벤치마킹하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의 '치적'이다.
 
  '그래도 경제는 살렸던' 전두환 시대와 '그래도 민주주의는 진전했던' 민주 정권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만 고루 겸비한 시대다. 역설적이게도, 이명박 정부의 도움으로 일반시민과 '운동권'이 재결합해 '민주 시민'으로 환골탈태할지도 모르겠다.
 
  1987년 절정을 이뤘던 '거리의 정치'가 요구한 것은 대통령 직선제와 소선거구제, 즉 '제도'였다. 20년 만에 부활조짐을 보이는 '거리의 정치'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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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6 06:05 2008/05/2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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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바퀴 2008/05/26 08:47

    지금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행동하는 다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
    립서비스처럼 대중을 주체로 세우는 운동을 해야한다는게 아니라,
    주체로 서가는 대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필요...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스스로 행동하는 대중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

     Reply  Address

  2. 나루 2008/05/26 17:21

    87년에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큰 힘을 발휘했고
    재야나 학생운동세력보다 더 풍부하고 즉각적인 요구를
    쏟아냈다고 기억합니다
    지도부, 라는 것의 존재 자체에 대해 저는 여전히 회의적인데
    촛불집회라는 방식, 혹은 몇 가지 불편한 관점에 동의하건 안하건
    일단 거기에 가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Reply  Address

  3. 새벽길 2008/05/26 17:38

    지도부라는 게 별다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조금 어색해서 그렇지 전위라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되는데,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로서 나서는 게 그게 지금의 전위가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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