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 (오마이뉴스)
정치|법제를 바꾸자 거리정치, 아고라, 정당정치, 진보정당, 촛불논쟁 View Comments
오마이뉴스에서 진보정당 실험, 촛불과 관련하여 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의 문제로 연속적인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의미가 있는 것이라 담아놓으면서, 그에 대해 간단하게 코멘트를 해본다.
김문주 새사연 부원장은 평화시위의 원칙, 비폭력 시위의 원칙을 지키자고 뜬금없이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시민 불복종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한한다.폭력-비폭력의 문제를 꺼내는 것은 조중동의 프레임에 말려들어 가는 것이다. 도대체 폭력의 기준은 뭘까?
국민투표를 제안한 것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는지 여부보다는 국민투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토의가 전국민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촛불이 더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오창은 연구위원의 최장집 교수 비판에 동의할 만한 것들이 많다. 다만 촛불을 그냥 즐기자는 것이 결론이어서는 곤란하다. 도대체 뭐가 남는데? 시민들이 또다른 사안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뛰쳐나올 수 있을까? 촛불은 자발적으로 진화하지 않을 것이다. 외부에서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든다면 경찰이 색소가 든 물대포를 쏘고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잡아가고 있다. 이제는 물대표가 나오면 다들 흩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부러 색소를 맞고, 조직적으로 색소를 묻혀서 대량으로 연행되는 활동을 비조직적 대중들이 행할 수 있을까. 아고라를 통해서 가능할까. 48시간의 구금과 100만원이 넘는 벌금, 그리고 이후의 법정싸움까지 이러한 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응집된 힘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를 하기 위해서라도 조직적인 구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역할을 진보정당이나 대중조직이 해준다면 그 자체로 신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이것이 정당과 운동을 연결하는 훌륭한 정치활동이 될 것이고...
정당정치가 삶의 정치 영역으로, 풀뿌리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 전에 지역 토호들 말고 풀뿌리 영역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면서 지역운동의 비정치화를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는 구태의연한 지역시민단체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마을 단위에서, 바로 일상에서 정치가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바꾸어야 세상이 변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준섭 박사, 이 분은 예나 지금이나 그 사고방식의 구태의연함이 여전하다. 박사학위 따고 나서 좀 변했나 했더니... 어떻게 '매국적, 반민족적' 이런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까.
박종원의 글은 최장집 교수의 논지를 반복하고 있다. 진보정당 쪽에 조금 더 신경쓰고 있는 것이 약간 다를 뿐이다. 오창은에 대한 비판은 나름의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의제 민주주의가 당장 바뀔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노력을 보이고 있지도 않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박상훈 대표는 인터뷰를 거부하여 이전 경향신문 토론회에서 제출했던 토론문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의 토론문은 당연히 다른 인터뷰글보다 긴 편이지만, 그리 빠뜨릴 내용이 없어 거의 전재하였다.
이 글에 대한 댓글상의 반박을 정리해서 담아온다. 물론 이 댓글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가 있을 듯해서이다.
"촛불이 가지는 문제의식은 정당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나 정당이 '실패'한 상황에서 국민의 직접적 개입 경로를 열어놓자는 겁니다. 이건 엄밀히 말해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하는 '반직접민주주의'이자 ' 반대의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운동만 하면 해결된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지금 촛불은 엄청난 대중의 호응과 참여를 이루어냈지만 해결할 경로가 없어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촛불시위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논쟁들을 꼼꼼히 검토해보셨다면, '운동'만으로 한계가 있는 현 상황을 누구나 답답하고 있고, 뽀죡한 대안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텐데요. 지금 상황은 '좋은 정당'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당'이 지금 당장 없는 상황에서 '지금'우리가 할 일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는(부정이 아니라) 다양한 제도들, 예를 들면 소환제나 국민투표와 같은 것에 대해 현실 가능성 없는 이상일 뿐이라는 식의 주장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악용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를 실현 불가능한 직접민주주의(모든 국민이 다 모여서 하는 직접민주주의)와 동일하게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촛불이 정당정치를 이해못하는 것이 아니라 최교수님과 박대표님의 '대의제에 대한 고집'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 즉 정당을 바로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정당을 없애버리자고 주장한 사람도 적어도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의제는 대표님 말처럼 모든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일상정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안된 것이고, 만일 그것이 일순간이라도(항상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부정할 것이 아니라 제도적 보완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표님은 직접 참여가 현실화되어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부정만 하실 듯 하군요.
이런 선문답보다,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주장하시는 최교수님이나 박대표님이 하셔야 할 것은 '지금 당장'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는 편이 더 낫습니다."
최장집이나 박상훈의 글에서 나타나는 운동, 운동정치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정치를 단지 선거나 정당으로 협소하게 파악하면서 운동하는 정당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를 테면 소위 사회주의 정당이나 전위정당을 추구하는 경우 운동일까, 정당일까. 정당을 일개의 운동단체 수준으로 파악하는 통일전선론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대하지만, 원내외를 넘나드는 급진적인 좌파정당의 경우 운동과 정당의 분리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수 있지 않을까.
정상호 교수의 글에는 공감하는 바가 많다. 다만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이명박 정부의 중간평가이자 촛불시위의 중간평가였다고 파악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교육이라는 이슈에서 진보진영이 선전하기엔 아직 제약이 많다. 주경복 후보가 당선될 뻔했던 것은 그 만큼 선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조중동과 공정택 진영은 전교조를 타겟으로 삼고 선거운동을 했고, 결국은 성공했다. 전교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만큼 전교조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 한계지점을 넘어설 때이다.
신광영 교수의 글은 밋밋하다. 지금까지 나왔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인터뷰 글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준호의 글은 사회당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말을 하고 있다.
김원 박사의 글에 대해서는 2008.07.18 23:03에 간단하게 코멘트한 적이 있다.
"2008년 촛불시위 현장에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깃발을 만들어 나왔다. 거리정치에 대한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퇴조한 것이다. 2002년과 대비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이다." 이러한 지적은 서울에서만 타당하다. 지방에서는 촛불시위가 거의 없었거나 있더라도 조직된 사회운동단체 중심이었다. 김원 박사 뿐만 아니라, 촛불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면 대부분 전국적인 시야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문제를 자기문제로 표출하기에는 정당은 너무 낡았다고?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진보)정당이 과연 있기라도 했을까? 낡았다고 하기엔 펴보지도 못했다고 하는 게 타당하다. 더구나 풀뿌리 지역운동, 공동체운동이 앞으로 대중들의 일상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화두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진보정당은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산별노조와 결합할 때 더욱더 그러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역 중심의 산별노조도 건설되지 않았고, 진보정당 또한 없었다고 봐야 한다.
한국정치를 관통하는 특징인 "대중의 우발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제도정치로 통제할 때 민주주의가 공고화된다는 주장은 현상유지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대중을 그냥 그렇게 놔두어야 할까.
나머지 분석과 진단, 대안 제시에는 동의한다. 김원 박사의 글은 함께 논의해볼 내용이 많이 있다고 본다.
최광은의 글은 김원 박사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이를 장석준 팀장이 잘해주었다. 역시 같은 정치조직의 회원이라...
아래의 글들 중에서 오창은, 박상훈, 정상호, 김원, 장석준의 글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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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요구 '1150만 국민청원운동'을 제안한다 (오마이뉴스, 김문주 기자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2008.07.01 14:22)
[주장] 촛불정국 풀어낼 유일 해법은 '국민투표'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오판하고 있다. 그들이 기대하듯 짓밟으면 촛불이 근절 될 것이라는 것은 단연코 오판이다. 봉쇄되고 밟히는 것은 다만 시청이라는 공간과 문화축제라는 시위의 형식뿐이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봉쇄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분노로 타오르며 기필코 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역사의식으로 충만해 갈 것이다.
오히려 촛불은 진화를 시작할 것이다. 당장에 게릴라 시위로 진화를 시작하지 않았는가? 게릴라 시위가 발전하면 투쟁하는 민초들은 투쟁의 승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할 것이다. 축제 참여야 개인 자격이면 충분하지만 80년대식 게릴라 투쟁은 조직적으로 연계될 때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촛불시위는 5년간 멈추지 않을 장기전화 되고 적절한 시점에 전면전으로 전환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공안통치는 순수한 촛불을 더욱 조직적이고 강력한 시위대로 만들어내며 현 정부의 불행한 미래를 더욱 짙어지게 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고유권한인 헌법 72조에 충실하는 것이다. 헌법 72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 투표에 붙일 수 있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외교상 중요한 문제이며 국가 내부적으로는 정상적 통치행위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국가안위가 위험에 이른 중대 사안이다. 이런 문제를 대통령과 주변인들의 고집으로 풀 수는 없다. 비록 자신의 신념과 달라도 국민의 절대다수가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적 통치의 출발이다. 만일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믿는다면 헌법 72조에 기초하여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고 민의에 물으면 될 일이다. 이 길만이 번져가는 촛불을 끄고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더불어 촛불을 들었던 시위대 역시 냉철해져야 한다. 경찰의 폭력에 자구적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은 청와대의 저급 통치술에 걸려드는 꼴이다. 공안통치의 의도를 파탄내고 촛불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비폭력 시위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또한 평화시위의 원칙은 시민 불복종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촛불시위 중 등장한 조중동 불매운동, 조중동 광고기업 불매운동 등은 불복종 운동의 좋은 사례다. 이는 지난 87년 6월 항쟁 당시 등장했던 KBS시청료 납부 거부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탄압으로 사라진 광장을 물리력으로 되찾으려 하기보다는 전 국민의 생활의 장을 광장으로 전환시키는 불복종운동을 확산시키는 평화시위 원칙을 지켜나가야만 촛불운동에 지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또 정치공세를 남발하기 보다는 정확하게 쇠고기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 일부에서 터져 나오는 '이명박 정부 퇴진' 구호는 국민 전체의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다. 또한 일부에서 제기되는 이명박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 요구 역시 지난 참여정부 시절 위헌판결을 받은 바 있어 현실성 없는 정치공세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현재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쇠고기 협상 수용과 전면 재협상이라는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길 뿐이다. 이는 촛불시위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해결법'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1150만 국민청원운동'을 제안한다. 본디 국민소환제나 국민청원 같은 직접민주제 성격의 발의는 전체 유권자의 4~5%정도의 요구로 실행되는 것이 관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지난 6월 10일 전국적으로 100만 명 이상이 촛불을 든 것은 이미 국민직접청원의 규모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1150만은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대선에서 얻은 득표수가 1140만을 약간 상회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을 지지한 득표수를 넘어서는 국민청원서를 제출해야만 이명박 정부에게 국민투표를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 민심은 이 거대한 청원운동을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다. 만일 1150만 청원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국민투표를 거부한다면 현 정부는 실질적으로 탄핵된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도 촛불 민심도 반복되는 충돌을 끝내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국민투표는 현행 헌법을 통해서 촛불정국을 풀어낼 유일의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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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대의민주주의론'은 교과서적 강박"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2008.07.02 08:38)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 ①] 오창은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두 달이 넘도록 촛불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는 한 그의 임기내내 촛불의 거리정치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촛불의 미래'를 두고 촉발된 논쟁은 주목할 만하다. 그 논쟁의 최전선에는 지난달 20일 퇴임한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가 있다.
최 전 교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체제"라며 "나는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제도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최 전 교수의 발언은 그 진의와 관계없이 '촛불시위 정리론-정당정치 수렴론'으로 해석됐다. 특히 대안지식연구회, 지행네트워크 등 젊은 지식인그룹은 촛불시위를 '자율주의' 혹은 '직접행동 민주주의' 등으로 옹호하며 그의 발언을 비판하고 나섰다. 지행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내부게시판에 '최장집-박상훈 그룹의 제도민주주의학파가 한국정치의 위기다'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통해 '최장집 사단'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어제, 오늘 <경향신문>의 시국토론회에서의 촛불집회에 대한 이들의 논의를 들어보면 결국 '양당체제의 복원'이라는 대의제의 '신화화'에 끈길기게 구속되어 있다. 이들의 민주주의론은 내 판단에 이제는 '낡은 보수주의'다. 그들은 광장에서 이론을 구성하지 않고, 이론에서 광장을 유추하고 있다. 이런 텍스트 자유주의가 한국정치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냉소주의와 허무주의 이외에 과연 대안이 있는가. 여의도 국회와 무관하게 아름다운 촛불을 그 낡아빠진 '이론'의 안경을 벗고 볼 수는 없는 걸까. 정치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말보다는 '상상력의 빈곤'이라는 것.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특히 오창은(39)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은 '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통해 김우창 교수(고려대 명예교수)와 함께 최장집 전 교수를 공개 비판해 주목을 끌었다. 오 연구위원은 이 글에서 "촛불집회 이후를 생각하는 최장집 교수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며 "(그의 주장은) 잘못된 정당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정치로 수렴하고 해결하자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의 주장은 '제도정치'에만 갇혀 있기에 문제가 있다. 최 교수는 '사회적 갈등이 처리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만큼 적어진다'고 본다. 즉 대의민주주의 제도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촛불집회와 같은 사회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학자 그룹에 속하는 최 교수가 '대의민주주의 제도'만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제도는 끊임없이 대중의 요구와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어 왔다. 완전한 제도는 없으며, 항상 불완전한 제도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주권자들의 요구 속에서 변경되어 왔을 뿐이다."
더 나아가 오 연구위원은 "촛불집회로 일컬어지는 사회운동에 대한 최 교수의 시선은 보수적 면모를 내비치고 있어 위태롭다"며 최 교수가 토론회에서 언급한 '운동의 5가지 한계'를 강하게 비판했다. 최 교수가 언급한 '운동의 5가지 한계'란 ①대안을 형성하거나 여러 대안들을 조정해 결정하기 어렵고, ②각 이슈들의 중요성을 위계적으로 배열해 일상적으로 정책을 추구하기 어렵고, ③다른 이슈들이 등장할 때마다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④강열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고, ⑤시민사회 내부의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등이다.
오 연구위원은 이를 두고 "분석으로서는 올바를 수 있으나 대의정치로의 수렴을 주장하는 근거로서는 정당하지 않은 논거들"이라며 "이는 현재의 상태를 '정상에서의 일시적 일탈'이냐, 아니면 '비상사태'로 보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시각 차이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정당질서와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비상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 군주제 시절에도 시민의 동의는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요구되었다. 국가는 시민의 동의없이 운영될 수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적 질서 속에서 시민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은 정책이 강압적으로 추진되었고, 시민의 저항에도 무심할 뿐이니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동의의 원칙'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복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최 교수의 태도는 '교과서적 강박'일 뿐이다."
오 연구위원은 "더 큰 문제는 최 교수의 시각이 현 상황을 오로지 정치영역만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데 있다"며 "광범위한 영역에서 생명의 정치, 일상의 정치, 광장의 문화정치가 싹트고 있는데도 이러한 가능성을 제도정치라는 온실 속으로만 옮기려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지행네트워크'(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만난 오창은 연구위원은 "이렇게 즐겁게 시위한 적이 있었나"라며 '촛불 예찬론'을 폈다. "촛불시위는 경험의 반복이면서도 운동의 형식 등에서 새로운 변화들이 있다. 운동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의 시위나 집회와 다르다. 무거운 이슈임에도 거리에서 소통하는 방식은 밝고 즐겁다. 촛불에는 구호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낙천성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대상을 질타하는 방식과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오 연구위원은 "촛불을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로 봐야 한다"며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 데서 벗어나 생명의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기가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 연구위원은 "집회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이게 어떻게 수습될까 하며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의식이 있는 것 같다"며 "잘 수습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됐다"고 지적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사안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것을 포용해서 어떤 성과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강박이다. 그런 강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 강박은 애시당초 '촛불은 내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 비롯됐다. 의미, 수습, 성과 등에 너무 조급해하면 안 된다. 그런 강박이 촛불을 수그러들게 하고 자발적 진화에 걸림돌이 된다. 자연발생했기 때문에 갈 때까지 가는 것이다. 질적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미래의 일이다."
이 대목은 '혁명적 낭만주의'를 떠오르게 한다. 이에 오 연구위원은 "촛불시위 자체에 낭만이 있었다"며 "그것이 촛불시위의 특징이고 상징이고 변별점"이라고 응수했다. 오 연구위원은 "(촛불의 진로를) 제도의 민주주의로 수렴하려는 것은 (촛불의) 미래를 가두는 것"이라며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가 가지 않는 길을 만드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우리의 모델일 수는 없다. 한국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일 수 있다. 그걸 두려워하지 말자. 시민의 직접행동과 주체의 판단에 따라 정치적 상황이 바뀌고, 한 공동체의 진로가 바뀌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촛불시위는) 한국 사람들이 가진 역량과 우리가 올바르다고 생각해온 서구의 근대적 정치질서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대의제 민주주의론'에 천착해온 최 전 교수를 겨냥한 것이다. 그가 서구의 민주주의 모델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그는 "최 전 교수가 제도권적인 냄새를 풍긴다"는 지적까지 내놓았다. "최 전 교수가 대의정치를 강조했던 80-90년대와 2000년대의 맥락은 다르다. 2000년대 들어서 시민의 직접 의사표현이 강해졌다. 대의제에 대한 실망이 쌓이면서 직접 얘기해야겠다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대의제의 오작동 상태가 아니라 대의제의 비상상태다. 권력을 위임받는 쪽에서 주권자의 요구와 무관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은 주권자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오 연구위원은 "최 전 교수는 '(이미) 있는 모델'만 생각한다"며 '최장집 비판론'을 계속 이어갔다. "한국적 모델에 대한 급진적인(radical) 시각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 최 전 교수가 생각할 수 있는 진보의 상한선은 '진보정당이 실질적인 집권능력까지 갖추어야 한다'는 정도다. 하지만 대의정치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다. 제도를 좀더 급진적으로 바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최 전 교수는 교과서 강박 속에서 '있는 모델'만 생각하고 있다.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미래에 과감하게 발을 내딛을 수 있어야 한다. 알고 있는 길은 언제나 안정적이다. 진보는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 연구위원은 "최 전 교수가 지난날 진보진영에서 진보적 역할을 해왔지만 지금은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며 "진보진영 안에서 그의 스펙트럼은 보수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오 연구위원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대의제가 부르주아 정치질서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며 "대의제가 더 이상 민의를 대변할 수 없다면 대의제 장치들의 역할은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운동의 충격없이 제도나 패러다임이 바뀐 적이 있나? 직선제 쟁취 등 주체의 급진적 요구로 제도가 바뀌었다. 시민의 직접행동이 가지고 있는 급진주의(radicalism)을 두려워해야 하나? (오히려) 그것이 사회진보의 동력이었다. 누가 간 길을 따라 가는 시기는 끝났다. 서구의 길이 안전한 길이었던 때도 끝났다."
촛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젊은 지식인그룹은 대의제 정치에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오 연구위원에게도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정치는 "직업정치인들이 자신들의 효율성을 위해 만든 것"에 불과했다. 특히 오 연구위원은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 이번 촛불시위의 교훈'이라는 일각의 시각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대통령이 한국정치의 미래를 가늠한다고 보면 안 된다. 자신의 일상에 대한 판단과 행동, 결정에 따라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것이지 대통령에 위임함으로써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게 아니다. 대통령을 나중에 잘 뽑으면 된다? 이건 민주주의의 발전이 아니다. 앞으로 한국은 대통령 해먹기 힘든 사회가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힘들었고, 이명박 대통령도 이 시스템 그대로 간다면 힘들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질서의 새판짜기다. 직접 민주주의의 다양한 통로를 만들내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5년에 한번 투표하고 끝나는 우리의 의사결정이 정책이 투입되는 풀뿌리에서 강화되어야 한다."
오 연구위원은 '촛불시위가 앞으로 어떻게 수렴돼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강박증'이라고 일갈했다.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공감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얻은 것을 많이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떤 걸 얻을 수 있을까? 대중운동의 강화? 정당정치? 조직의 탄생? 이런 것은 아니다. 촛불이 한쪽으로 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냥 개인은 개인대로 단체는 단체로 필요한 부분을 가져 가면 된다."
끝으로 기자는 오 연구위원에게 '촛불은 계속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에게서 '낙천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촛불의 진로는 누가 대신 결정해주는 게 아니다. 촛불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도 강박이다. 촛불을 계속 이어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보수언론이나 이명박 정부가 원하는 바다. 아무도 안나오면 어떠냐? 강박이나 부채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바라보고 즐기자."
덧붙여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에 이런 충고를 남겼다. "지역자치운동에서 성공해야 한다. 민노당이 학교급식문제로 인정받으며 당을 바라보는 편견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상층부의 상징으로만 활동하다가 실패했다. 진보신당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풀뿌리에서 성공해야 한다. (정당정치가) 삶의 정치 영역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것이 정당정치의 올바른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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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계승하는 '제2의 국민운동본부' 건설하자 (오마이뉴스, 소준섭 박사, 2008.07.02 09:41)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②]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이제 과연 촛불시위는 어떻게 더 발전시켜 가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그간 토론회를 통하여 정권퇴진이냐, 쇠고기투쟁에 국한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진지하게 논의해왔다. 그러나 현실의 실천은 난해했던 논의의 수렁(?)을 간단하게 뛰어넘어 이미 쇠고기투쟁과 정권투쟁이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전진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촛불시위를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계속 전개해 나아가야 한다. 비록 경찰의 원천봉쇄로 난관을 맞았지만 다양한 형태로 조직화를 지향함으로써 게릴라 방식의 시위와 대규모집단시위의 형태를 적절히 결합시키고 시기와 역량에 맞춰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KBS와 'PD수첩' 지키기 그리고 조중동에 대한 압박 운동 등 이제까지의 각 실천운동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동시에 이제 우리의 운동을 보다 광범한 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그간 관망하고만 있던 민주당이 대거 시위현장이 동참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이제 불교계를 비롯하여 기독교, 민주진영 그리고 교수를 비롯한 각 전문가집단들도 여러 가지 형태로 동참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마치 전두환의 시대착오적인 4·13호헌조치가 전 국민 각계각층의 호헌철폐 서명운동과 대중투쟁이라는 요원의 들불로 연결되었듯이 이제 우리의 운동도 각계각층의 운동으로 확대되고 6월항쟁 시기의 국민운동본부와 같은 조직이 건설되어야 한다. 6월항쟁 당시와 비교하여 현 상황은 양김과 같은 상징적이고 정권의 대안으로서의 강력한 대체세력이 부재하다는 차이가 엄존하고 있고, 이것이 국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이끌어내는 데 적지 않은 부정적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현재의 광우병대책회의가 그간의 희생적이고도 훌륭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다만 '활동가그룹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음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국민들에게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소수의 사회 원로들로 운동본부를 구성하도록 하고(여기에서 일반 제도 정치권의 참여 정도는 제도정치권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 정도를 참작하여 최소화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각계각층이 튼튼하게 연대하며 이것이 동시에 네티즌들과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반이명박 정권의 대오 아래 조직적인 실천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네티즌들은 종교계나 정당 등 자신과 관련이 있는 기구나 단체부터 요청하고 나아가 네티즌들이 집단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이 운동은 향후 각계각층을 묶어내는 좋은 매개로 운용될 수 있다.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운동은 미국산 쇠고기 불매 운동이나 각자 자신들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서명운동을 비롯한 다양하고도 집단적인 움직임을 실천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또한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는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으로서의 국민투표 관련법(국민의 일정 비율 이상 서명을 얻으면 국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법률) 제정 등의 법률 및 제도 쟁취의 실천은 제도정치권을 위시하여 민주진영을 묶어낼 수 있는 이슈로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향후 고시의 위헌판결 문제는 운동의 분수령이 될 것인 바, 여러 모로 명백하게 위헌인 고시의 위헌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적극적인 지원 활동도 효과적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위헌으로 판결될 경우 그나마 정권과 민중의 마지막 타협점으로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위헌판결조차 되지 않을 경우 그야말로 사법부조차 불신 당하면서 정권의 총체적 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한다.
이러한 다양하고 광범한 각계각층의 운동, 운동본부의 결성, 네티즌의 운동 등의 실천들이 촛불운동에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반드시 이명박 정권의 시대착오적이며 반민중적 반민족적 억압의 '산성'을 무너뜨리고 참다운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어젖힐 것이라 확신한다. 더 큰 연대로 촛불을 커다란 들불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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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촛불은 정당정치의 개선으로 이어져야 (오마이뉴스, 박종원 기자, 2008.07.04 09:14)
[촛불논쟁] 오창은 대안지식회 연구위원의 글에 대한 반론
현재 시민사회에서 촛불의 미래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 중이다. 첫째는 촛불집회의 성격을 특정 이슈에 한정할 것인지 정책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퇴진운동으로 확대할 것인지의 대한 논쟁이다. 둘째는 현재의 촛불이 한국의 대의민주주의에 어떠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지, 이것이 보완적 관계인지 대체적 관계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그리고 이 논쟁의 중심에는 다들 아시다시피 지난 달 20일 퇴임한 전 고려대 최장집 교수가 있다.
내가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최장집 교수의 대의민주주의론에 대한 진보진영 일각의 비판, 그것에 대한 반론이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확실히 획기적이다. 지리상의 제약, 운동 수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닌 그들 자체의 느슨한 연대에 기반한 움직임, 지도부가 없는 집회, 통신의 발달로 인한 정보민주주의의 발달 등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볼 수 없던 일들이 지난 50일간 폭발했다. 여기에 사법적 구성 주체가 아닌, 즉 국가에 대해 의무와 권리(투표와 납세 등)를 완전히 행사할 수 없는 10대가 국민으로서의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은 가히 혁명적이다. 이러한 민중운동의 파격적 변화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특히 인터넷을 통한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러한 민중운동은 정당정치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기반으로 한다. 그 불신은 저조한 투표율로 나타나거나 이른바 '처절한 응징' 식의 투표행태를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이는 국민 전체의 투표행위를 설명하는 데에는 일반적이지 않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유권자 시장에서 보여주는 지극히 반사적인 투표행위다. 한마디로, 정당의 정책과 상관없이 맘에 안 드는 정당을 응징하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정당을 몰표로 밀어주는 패턴을 말한다.
2007 대선에서 'BBK' 의혹과 대운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것은 실상 대운하와 MB노믹스, MB독트린이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기점으로 한 당시 여당과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나마 더 나은 놈을 뽑자는 게 아니라 야당을 찍는 행위로서 당시 여당에 응징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지지율은 현재도 유효하다. 국민들은 이렇듯 특정 정치 이슈들을 계기로 돌아가면서 자신을 실망시킨 정당들을 죽인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태는 유권자의 쏠림 현상과 정국을 환기하기 위한 정당의 이합집산을 부추긴다.
한마디로 지금의 민중운동은 의회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지독한 불신에 기반하며, 이는 이중적 투표행위를 재생산한다. 이 패턴은 민의를 반영하지 않는 정당을 집권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총선이나 대선으로 여권을 응징을 할 수 없을 때 국민들을 거리에서 정치하게끔 한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은 국민들의 정당정치 문화의 개선으로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국민들의 의식세계는 입체적이다.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이다. 아니, 이중적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자신의 연고지 축구팀을 응원하듯, 연고주의에 찌든 정당지지 문화, 지역주의 투표행위도 국민의 이중적 정치행위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현재 보여지는 국민의 진보주의적 성향과는 완벽히 모순되는, 국민들의 또 다른 정치적 특징인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민중운동은 이러한 반사적 투표행위를 중심으로 한 이중적 투표행위라는 사이클의 일부로서 벌어지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지금의 촛불을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이라고 보기 이전에 대선과 총선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투표행위와 비생산적 정치활동을 국민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 개선할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 7월 2일 <오마이뉴스> 보도된 오창은 대안지식회 연구의원은 "한국사회는 서구사회가 가지 않는 길을 만드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우리의 모델일 수는 없다. 한국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타당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과정이 각 국의 특수함 속에서 발전한다는 것은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 모델이 인터넷과 네트워크를 통한 직접 참여민주주의의 실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동의할 수 없다. 너무 섣부른 진단이다.
서구의 민주주의 모델의 가장 큰 장점은 과정과 절차에 있기보다 그 가치에 있다. 18세기 근대에 제도적으로 표출된 것은 민주주의 이전에 자유주의에 기반한 권리보장 테제다. 이는 단순한 민주주의에서 보여질 수 있는 다수의 횡포와 중우정치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권리보장 테제는 민주주의라는 절차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핵심 가치이며, 국민 개개인에 대한 신성불가침적 안전망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자유주의적 권리보장 테제는 민주주의라는 단순 절차를 포괄한다. 이를 보장하지 않는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다수의 지배'라는 이름의 절차에만 머물 뿐이다.
지금의 인터넷은 직접 참여와 대중들의 자발적 동원에 있어서는 획기적이지만, 특정 이슈에 대한 정보의 과잉 공급, 소수자, 소수의 의견을 가진 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는 열악하기 그지 없다. 특히 질 낮은 댓글의 근절과 그 책임성에 대한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상황 아닌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순히 인터넷에서의 활동과 촛불이 효과적인 동원 효과를 발휘한다고 해서 그것을 대의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지목하는 것은 성급하다. 또한 그 절차에 실험에 있어서 서구의 권리보장 테제의 가치는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절차의 파격이 아니다. 시스템의 부작용을 감싸는 보편적 가치 배양이다. 새로운 모델의 실험은 그 이후에 고민해도 충분하다.
지금의 촛불은 우회로다.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이기에 여념이 없고 의회는 그들을 지지하는 보수정당이 장악하고 있다. 국민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기관이 모두 막혀 있기에 국민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투쟁은 '수동적 자발성'이다. 모순된 말 같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 말은, 국민의 의사가 정부와 의회로 연결되는 투입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국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거리투쟁은 분명 민주적이지만 필연적으로 공권력과의 충돌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 폭력을 견뎌내야만 하는 존재 역시 국민이다. 집회에 참가한 이들의 희생은 고귀하지만, 매번 이슈가 터질 때마다 그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다. 더욱이 민주주의를 위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것을 몸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발상은 안이하다. 그리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그것이 우리가 정당정치를 바꾸고 정화해야 하는 이유다.
당장 기간 당원제와 20대들의 정치진출 확대, 투표연령 확대, 표의 등가성 확립과 선거구 개정, 행정부의 권력분산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민의가 반영되지 않는 정당정치라는 것은 뒤집어 말해 개선 여부에 따라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적 모델에 대한 급진적인 생각은 그 이후에 고민해도 전혀 늦지 않다. 현재 한국의 의사결정 주체와 그 과정은 이미 매우 역동적이다. 더 큰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현재 상황에서 의미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사결정 주체들에게 폭넓은 형태의 시스템적인 안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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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정치체제 대신 못해... 보수독점 강화할 수도" (오마이뉴스, 2008.07.08 17:10)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③]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아래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지난달 16일 진보신당-경향신문 주최 토론회에서 '촛불집회와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의 전문이다. 박상훈 대표는 <오마이뉴스>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촛불집회에 대한 많은 해석들을 보면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필요없는 것처럼 치부되기도 한다"며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체제를 바꾸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수독점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둔 채 그 밖에서 운동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낭만적"이라며 "나나 최장집 선생님이나 늘 생각하는 건 어떻게 노동있는 민주주의,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 편집자주>
최근 촛불집회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보다보면, 촛불집회를 누가 더 높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실제 현실의 여러 측면이 획일화되고, 과장되고, 나아가서는 신화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향이 너무 커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위대한 시민'과 '대중의 놀라운 창발성' 등을 거론하는 사람 중에는 지난 대선과 총선을 이야기할 때 대중의 보수화와 욕망의 정치에 포획된 대중을 말하고 보수정권 10년 집권론을 이야기한 사람도 있다. 황우석 사태 때에는 과학 이데올로기에 동원된 대중을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했고, 5.18 때가 되면 '위대한 광주시민'을 이야기하다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에 노예가 된 유권자'를 질타했던 사람도 있다. 시민 대중, 유권자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따라서 분석의 독립적인 단위로서 단순화되면 상황 논리에 종속되기 쉽다.
이번 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는 해석이 그간 사회운동의 다양한 시도와 발전에 대해 접촉의 기회를 갖지 못한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새로움의 발견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흥분은 이를 통해 사태를 드라마틱하게 전하고 싶은 비판언론들의 이기적 욕구로부터도 비롯된 바 크다. 그러다보니 실제 현실과 신화화된 해석 사이에 격차는 두드러져 보인다.
이번 촛불집회를 아날로그 정치 대 디지털 정치, 근대적 정치 대 탈근대적 정치, 전통적 정당정치 대 참여적 생활정치 등 과격한 이원론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 백미라 할 수 있다. 사태의 구조가 부정적이고 낡은 것으로 묘사된 개념들로 환원되는 것도 문제지만, 현실의 대안을 디지털 정치, 탈근대적 정치, 참여적 생활정치 등 개념으로 치환된 어떤 추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해석에 있어서 과도한 자의성의 결과이자 사태를 신비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촛불집회의 위대함만 이야기할 경우 우리가 개선해야 할 여러 과제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촛불집회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열망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조중동의 시각에서 공격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억압자의 시선과 검열 권력이 전도된 형태로 재생산되기도 했다.
비폭력과 평화가 이데올로기가 되어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주장했던 사람과 단체에 대해 과도한 비난과 공격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런 의제들이 합리적으로 제기될 수 없었던 것에는 그것이 자칫 촛불집회의 위대함과 순수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형태의 획일주의가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자들의 과도함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그밖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무책임하게 강요되는 현상이다. 대의민주주의 때문으로 사태의 원인을 환원하는 해석, 제도정치 내지 정당정치에 대한 부정 내지 반정치주의적 경향들, '새로운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 등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 정치관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벗어나는 주장 혹은 반민주적 논리가 당연한 듯 강요되는 것은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촛불집회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해석하거나, 대의민주주의를 나쁜 민주주의의 유형으로 이해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해석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들을 실망시키겠지만,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다. 과거 그리스 아테네민주주의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사례를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최대 3만 명 정도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의 민주주의 모델을 이상으로 보거나 대안으로 실현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복고적이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이들의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로 상식화되어 있는 것은 권위주의 시기부터 초중고 교과서에서 당연한 듯 강요된 잘못된 유형화 때문이기도 하다.
아테네 민주주의 역시 추첨의 방법으로 대표를 뽑았고, 확률적으로 말한다면 4명 가운데 한 명의 시민만이 살면서 24시간 동안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당시에는 귀족정의 제도로 정의된 선거의 방법으로 20년 이상 연속으로 선출되었다.
귀족과 명사들의 의회정을 유보없이 비판한 레닌이 구상한 사회주의 정치체제 역시 대의민주주의였고, 실제 실현된 소비에트라는 대의제 역시 홉스봄이 강조하듯 발칸 문제에서 민족과 인종, 언어, 종교적 대표성을 해결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구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한 유형으로서 직접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의 민주주의는 모두 대표를 뽑고 그에 책임을 묻는 대의민주주의로 이루어진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신화화된 비판에는 "사악한 정치가(내지 파당적 이익에 골몰하는 정당) 대 선량한 시민"의 가정이 숨어 있다. 시민이 직접 스스로의 문제를 다룰 수 있으면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학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듯)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는 데 있지,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든다는 데 있지 않다. 과거나 지금이나 좋은 통치자를 뽑는 것이 실제 정치의 중심 문제이지 시민이 직접 정치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위대성을 수백만 번 말해도 현실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대표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이 하층배제적이고 상층편향적인 민주주의는 개선되기 어렵다. 촛불집회에 나타난 민주적 열망을 어떻게 정당체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확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정치는 권력의 문제를 핵심으로 하면서 억압과 통제, 갈등과 음모, 전략과 이해관계, 리더십과 타락 등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불가피하게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선용될 수 있는 정치의 구조와 체계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핵심이지 현실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알리바이로 반정치주의를 부추키고 동원할 일이 아니다.
촛불집회는 민주화이후 한국정치가 갖게 된 특정의 패턴 내지 악순환의 구조를 해체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운동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 운동의 에너지가 민주화 이후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민주화 이후 체제의 형성은 구체제에 기원을 둔 보수적 정치세력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보수독점적 정당체제가 등장했고, 이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괴리는 계속되었다. 간혹 정권교체의 과정에서 야당과 운동의 에너지가 접합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실망의 사이클로 이어졌다.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을 만들어낸 원천이다. 1990년과 91년의 5월 정국, 97년의 총파업, 2000년의 총선시민연대, 2002년의 촛불정국, 2004년의 탄핵정국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대규모 운동의 개입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정치의 세계는 계속해서 보수적 독점체제의 지속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불만은 강렬했고, 선거 때마다 정치엘리트 교체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고,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등장하고 소멸하는 것을 반복했지만 구조와 제도로서 정치의 보수성은 변화되지 않았다. 재벌에 대한 비판이 거세고, 재벌 총수가 개인적으로 수난을 겪고 개별 기업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재벌중심 경제구조는 더욱 강고해진 과정과 유사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갖는 이러한 패턴 때문에 한편으로 보수독점의 체제는 그대로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 운동의 분출과 대규모 항의의 표출이 주기적으로 반복해 왔다. 그러다 보니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리거나, 반대로 어떤 변화도 불가능할 것 같은 교착국면이 지속되다가도 갑작스럽게 상황이 급변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이러한 순환구조에서 우연히 동원과 열망의 주기를 목격하게 되면 한국정치는 '변화와 역동성'의 상징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탈동원화와 실망의 주기로 돌아선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정치는 '정체와 퇴행'을 특징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말하려는 요점은, 한국정치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은 보수독점적 정당체제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현재와 같은 정당체제를 그대로 둔 채 반정치적 열정과 도덕적 호소로 운동의 지속만을 강조하고 생활정치와 새로운 민주주의론을 개념적으로 불러들인다 해도 그간의 악순환의 구조가 그대로 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운동을 통해 정치체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은 위험하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했듯, 민주주의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다. 실망스럽겠지만, 민주주의는 큰 변화를 잘 허용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매우 강고한 제도적 정당화의 원리를 갖는다. 정당성을 갖지 못한 채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권위주의에서 정권퇴진 운동이 갖는 정당성과는 달리, 민주주의 체제에서 운동을 통해 민주적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경우 이에 대한 반작용은 매우 클 수 있다. 운동은 자발적 항의의 표출이고 그 자체 민주주의를 활력 있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정치체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국민적 위임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의견의 조직화와 항의의 표출을 통해 정부의 일방적 통치행위를 제어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대안적 정치세력의 성장을 통해 정치적 대표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효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촛불집회의 민주적 효과는 거리에서 얼마가 모이고 안 모이고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되고 또 촛불집회가 종결되었다고 해서 그 효과가 끝났다고 보는 이해의 방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커다란 사회현상이 주는 충격과 결과는 현상이 종결된 이후에도 지속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실현된다.
촛불집회는 한국 정치에서 항의의 조직화를 응집시키는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달리말해 향후 누가 의식적으로 동원하지 않아도 매우 작은 조직화의 비용으로 재현될 수 있는 집합행동의 한국 모델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밖에도 유, 무형의 형태로 다양한 문화적 효과를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를 바꾸고 노동, 인권, 생태, 사회적 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의 하부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도록 실천하는 과제가 남겨졌다.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는 왜 나라마다 다른가? 그 차이는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대체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클수록 투표율이 높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으며, 소비사회로 경도되는 정도도 덜하고, 사회가 성장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몰리는 정도가 작고, 폭력의 정도나 범죄율이 낮으며, 문화적으로도 풍요롭다. 반대로, 노동운동이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가 정치적으로도 과소대표될 때 그 나라의 민주주의 질은 낮고, 공동체적 관념은 취약하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토양 역시 척박하다. 사회의 중요한 집단이익이 배제됨 없이 폭넓게 대표되는 조건 위에서만 민주주의는 사회를 보다 넓은 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통합하는 결정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한 문제이다.
노동이 생산체제, 시민사회, 정당체계 등의 차원에서 충분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조직화되지 않는 한, 현실의 민주주의는 금융자유화의 진전 과정에 개별적으로 포섭된 중산층 중심의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노동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아니면 노동귀족으로 공격받기 십상이다. 노동의 참여와 그에 기반을 둔 강력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심 문제 중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이냐 정당이냐"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문제를 토론하고자 하는데, 이는 잘못된 질문이고 잘못된 기준이다. 정당은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중심적이고 또 필수적 요소이다. 따라서 어떤 정당, 어떤 정당체제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이다. 그러나 운동은 민주주의 체제 여부를 정의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며, 운동이 민주주의와 접맥되는 차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운동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말해주는 지표는 되겠지만, 운동으로 정치체제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운동이라는 개념을 도덕화하고 민주주의의 문제를 이러저러한 운동론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정당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기 어렵다. 건강을 위해서는 세끼 식사만으로는 부족하고 적절한 운동과 휴식 및 기타 건강보조제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일단 식사를 제대로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지 운동과 휴식, 건강보조제로 식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숙의 민주주의 혹은 심의 민주주의니 하는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에도 찬성하기 어렵다. 그것은 ① 이성적 시민이 ② 완전 정보 상황 하에서 ③ 숙의나 심의에 참여하게 되면 해당 정치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이끌 수 있다는 가정을 갖는다. 따라서 이런 민주주의관이 정치체제의 원리가 되면 (미국의 정치학자 쉐보르스키가 지적했듯) 귀족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정치관으로 이어진다.
서민과 노동자들에게 시민으로서 모든 정보를 취득하고 이성적으로 논증하고 심의에 참여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평범한 보통의 민중을 포괄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그렇게 평화롭고 합리적이고 평등하고 갈등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공동체는 갈등도 있고 편견도 있고, 이익에 대한 집착도 있고 과도한 열정도 있다. 이러한 실제의 정치적 삶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만이 현실적일 수 있고 강할 수 있다. 심의민주주의니 숙의민주주의 하는 것은 개별 단체나 개별 정당조직 내에서 확대할 수 있는 보완적 원리일 수는 있어도 정치체제를 그렇게 조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도 촛불집회에 대해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다만 의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간의 해석자들의 해석 역시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촛불집회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촛불집회를 절대화하는 것 역시 하나의 해석이고 의견으로 접근해야지 이를 도덕화하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나 정당과 정치인은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표를 요구했고, 책임 있는 대표가 되겠다고 했다. 일정한 표는 곧 국회의원의 수와 예산 지원이 뒤따르고 이는 정당법 등에 의해 뒷받침된다. 지금의 사태가 어디로 귀착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기 어렵게 된 것은 제대로 된 야당 하나, 책임감 있는 정치지도자 한 명이 없기 때문이다.
의석의 많고 적음은 이유가 안 된다. 국회의원이고 아니고도 문제가 아니다. 사태의 핵심을 힘 있게 규정하고 과감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의 공간'을 열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상황에 끌려가는 것이 문제다. 현실의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대안의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시민의 권리다.
불행하게도 진보정당은 그간 촛불집회 과정에서 정당으로서의 권위나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시위 참여자들이 대안이 될 정치적 권위체에 대한 요구를 크게 갖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민주적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정치의 악순환 구조를 강화시키는 보수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금과 같은 보수독점적 정당체제, 진보정당 없는 정당체제, 노동배제적 정당체제를 지속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진보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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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는 68혁명 전조... 교육감선거는 그 중간평가"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2008.07.08 17:05)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④] 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한양대 연구실에서 만난 정상호 연구교수(제3섹터연구소)는 "촛불시위는 68혁명의 전조"라고 평가했다. "생활정치 측면에서도 그렇고, 그동안 표출되지 않았던 이슈들이 나온 점에서 그렇다. 이전의 촛불은 한미관계(효순·미선이사건), 대통령 탄핵 등 중앙권력과 관련된 거대담론이었다. 하지만 이번 촛불은 광우병, 교육, 의료민영화 등 시민적 이슈들이 정당에 앞서 아래로부터 표출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활정치가 자리잡으면 이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조직화되지 않은 주부나 (중·고등)학생들이 새로운 참여자로 등장했다. 68혁명 이후 구체제(Ancien- re'gime)적 요소가 문화적 측면에서 확 바뀌었다. 우리의 경우도 문화적 전복 같은 것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68혁명과 2008년 촛불시위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이란 무엇인가?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의 발언에 그 답이 들어 있다. "(한 조합원이) 전기가 끊겨 아이들이 촛불을 켜놓고 공부한다고 했다. 엄마한테 되려 그 아이들이 '엄마, 텔레비전도 안 나오고 컴퓨터도 안 되니까 집중이 잘 돼'라고 했다고…. 촛불만 보면 그 얘기가 떠오른다. 그래서 촛불을 차마 못 켜겠다."(2008년 6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은 "촛불집회 때문에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고도 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촛불은 거대했지만 이슈는 잠식당했다." 68혁명 때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 이루어졌지만, 촛불시위는 아직 그런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 정 교수의 진단이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운동들은 노동운동과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이슈와 만나는 순간 (운동과 노동은) 분리·분산됐다. 87년 6월항쟁 이후 일어난 88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중산층과 제도야당이 운동대오를 이탈했다. 운동이 급진화되는 순간 그렇게 됐다. 그런 점에서 촛불과 노동의 균열적 요소가 있다."
또 촛불시위가 '수도 서울 중심' 즉 '중앙집권적'이라는 사실이 68혁명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정 교수도 "쇠고기라는 동일한 이슈이고 전국적 이슈인데 왜 지역에는 서울만큼의 열기나 참여가 없는 걸까?"라며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에) 자칫 촛불이라는 것이 과잉대표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런 진단의 연장선상에서 정 교수는 "우리는 운동과 정당이라는 두 개의 영역이 분리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68혁명은 신사회운동으로 이어졌고,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제도권정당의 새로운 세대로 편입됐다. 슈뢰더 등 68세대들이 정당개혁을 위한 '신중도', '제3의 길' 등을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정당과 운동, 제도정치와 거리정치가 분리돼 있다. 그래서 촛불시위의 경험이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겠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이 386세대처럼 새로운 '촛불세대'를 만들 수 있을까?"
정 교수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과제'라는 논문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제민주주의' 논쟁이 "정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한국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이다, 정당이다 하며 한쪽 편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내게 불편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민주주의를 대치시키고, 정당정치-운동정치, 제도정치-거리정치 등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조차 지식인적 사고 같다. 소통과 연계는 이 둘 사이에서 맺어지고 강화돼 민주주의가 한단계 발전한다는 것이 보편적 패턴이다. 미국에 제도정치, 정당정치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은 직접민주주의 기제들이 가장 발달한 국가 중 하나다."
하지만 자율적 운동단체(이익집단)는 크게 발달했지만 정치체제는 보수적인 미국과, 정당이 발달하며 대체로 진보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유럽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유럽의 경우 사회경제적 의제가 정당을 통해 관철되고, 생활정치나 지역정치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의 기제들이 일상에서 작동되고 있다. 어떤 경우를 보더라도 두 가지(정당과 운동)가 분리되는 영역 속에서 진보가 나타나는 역사적 경험은 없다. 그래서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는 전제 속에서 논쟁이 진행되어야 한다. 둘 중 하나가 선택되고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만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며 정당정치의 복원과 활성화를 강조한 최장집 전 교수의 견해와 관련, 정 교수는 "정치를 선거와 정당으로 협소화시켰다"고 비판했다. "최 전 교수는 운동정치를 정치의 부수적 요소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촛불시위는) 운동도 한국정치를 여전히 활성화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기제라는 것이 드러났다. 운동이 정치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동력이자 발전기제라는 것이다. 한국은 운동사회(Movement Society)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대선 끝나고 5개월 만에 촛불시위와 같은 진화, 전환이 있을지 누가 알았겠나? 내재적 힘이 없다면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최 전 교수는 민주화 이후 디지털시대에 이런 운동이 갖는 진보적 요소를 간과했다." 다만 정 교수는 "직접민주주의자들은 최장집 교수를 너무 협소하게 의회중심자로 보는 것 같다"며 "하지만 최 교수는 운동이 갖는 의미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운동과 정당(정치)이 연계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정치적 부작용을 고민해왔고, 그 고민들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 교수는 '직접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지식인그룹에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운동 역시 정치의 부분요소일 뿐이다. 운동은 정치의 부분집합인데 완결적인 요소로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대의제민주주의 없이 직접민주주의의 순수한 형태가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가? 조희연 교수처럼 촛불시위를 지나치게 긍정일변도로 보는 시각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런 시각을 가진 그룹은 '촛불만으로 한국민주주의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는 지나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최근 직접민주주의자들은 너무 나가서 일체의 지도적 권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정 교수는 "직접민주주의자들은 현재 주민투표·발의·소환·소송제, 참여예산제, 시민배심원제 등 서구에서 얘기하는 이상화된 직접민주주의 제도들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일관되게 '직접민주주의-대의제민주주의' '거리정치-정당정치'의 이분법을 비판한 정 교수는 '대의민주주의를 견인하기 위한 직접민주주의의 확장'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는 "국민투표, 국민소환 등을 중앙정부 수준에서 도입해야 한다"며 "직접민주주의의 도입이 정당정치의 역동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직접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으로 상징성이 큰 농협 등의 조직에서 대표를 뽑거나 중요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에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다양한 의사결정 구조에 다양한 (직접민주주의) 실험을 착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직접민주주의의 활성화 정도에 따라 정당정치가 비례한다는 자료가 더 많다."
그렇다면 정 교수가 생각하고 있는 '촛불의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촛불은 정당과 병행하면서 진화해야 한다"며 촛불이 가야 할 몇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먼저 이슈의 다원성으로 가야 한다. 노동, 교육 등 사회경제적 이슈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지속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촛불은 노동, 정당과 만나야 한다. 또한 왜 지역의 촛불시위 참여나 열기가 서울만 못하는가? 그런 점에서 촛불은 풀뿌리로 내려가야 한다. 지방자치단체가 갖고 있는 독선이나 부패, 일방적 행정은 이명박 정부 못지않다." 정 교수는 특히 "촛불이 진보적이라는 근거를 가지려면 우리 사회의 핵심의제인 교육과 비정규직문제를 돌파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 단초를 마련해줘야 한다"며 '7·30 서울시 교육감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이명박 정부의 중간평가이기도 하지만 촛불시위의 중간평가이기도 하다. 공정택 후보는 교육분야에서 '리틀 이명박'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공 후보가 다시 뽑힐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진짜 이렇게 되면 촛불의 배반이다. 그런 결과는 이율배반적이다. 또 아무런 대안도 없이 '또다른 공정택'이 당선된다면 그것도 촛불의 바른 승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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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이명박' 출현 막으려면...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해법 (오마이뉴스, 홍현진 기자, 2008.07.09 11:13)
[주장] 난치병 걸린 대의민주주의, 대대적 수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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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이여 주부들을 포섭하라! (오마이뉴스, 신광영 기자, 2008.07.11 11:06)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⑤] 신광영 중앙대 교수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10일 코리아연구원의 <현안진단> 제124호'에 '촛불시위와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신 교수는 이 글에서 "촛불시위는 한국의 대의제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인터넷정당 등 대안적 정치조직이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분석했다.
2008년 봄 촛불시위는 한국정치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다.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을 한 보수정권의 집권 초기에 발생한 촛불시위는 정권의 무능함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국정치의 한계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속성을 드러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세 가지 점에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첫째, 2008년 봄 촛불시위는 노동조합·시민단체·정당이나 사회단체와 같은 기존의 조직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초중고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회운동들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전의 사회운동들은 주로 사회운동가들에 의한 조직적 동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노동조합·학생단체·시민단체 등에 의해서 조직적인 방식으로 시위가 주도되었다. 이와는 달리, 촛불시위는 다양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조직 중심의 참여와 차이를 보였다. 그 결과 촛불시위에서 기존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역할은 대단히 주변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반면, 인터넷 커뮤니티의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둘째, 촛불시위는 2007년 대통령 선거와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사회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진 한국사회의 보수화 명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대단히 취약한 것이며, 총선에서 나타난 한나라당의 지지도도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인기는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정으로 인한 반사이익의 결과이며, 유권자들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진 것이 단순히 정치적 차원의 보수화가 아니라 복합적인 사회정치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셋째, 촛불시위를 통해서 기존의 정치권, 더 나아가 한국의 대의제민주주의가 한계를 드러났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와 관련하여 여당과 야당을 포함한 제도권 정당들이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지 못하였고, 국민의 요구를 수렴하지 못하면서 기존 정당들의 무기력함이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뿐만 아니라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증폭되면서 대안적인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단적으로 2008년 봄 촛불시위는 한국사회의 심층에서 일어나고 잇는 사회변화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적 정치의 탄생을 촉진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촛불시위는 21세기 한국사회가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두 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여론형성 방식의 변화다. 90년대 말부터 인터넷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기존의 매체와는 다른 과정을 통해서 정보가 공유되고, 집합적으로 지식이 축적되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언론과 대학과 같은 기존의 전문가 집단이 독점했던 정보와 지식이 대중에 의해서 공유되고 더 나아가 더 다양한 정보수집과 축적이 대중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합적 지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집합적인 정보공유와 생산된 지식의 공유 그리고 인터넷 토론을 통한 의견교환과 수렴 등 새로운 형태의 정보, 지식, 여론 형성 과정이 등장하였다. 광우병에 관한 해외의 정보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누리꾼들에 의해 수집되고, 실시간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축적되었다. 이러한 정보의 유통속도는 일간지나 주간지와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서 기존 언론매체들을 압도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인터넷정보가 하루 단위나 일 주일 단위로 전달되는 느린 정보를 압도하면서 기존 언론매체의 영향력을 급격하게 약화시켰다.
기존의 신문이나 방송과는 다른 인터넷 포털인 다음의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토론모임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소통되면서, 기존의 매체에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차 기존의 매체와 대립적인 성향을 지니는 새로운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관심 있는 다양한 누리꾼들이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토론을 벌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집단지성의 등장을 보여주는 예이다. 여기에서 유통되는 정보 가운데 부정확한 정보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의견들은 점차 누리꾼들에 의해서 가려지면서, 참여를 통한 여론 형성이라는 새로운 사회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촛불시위에서 드러난 또다른 새로운 변화는 기존의 사회운동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운동방식의 등장이다. 기존 시민단체들은 촛불시위를 주도하지도 못했고, 시위 참여자들을 동원하지도 못했다. 촛불시위 참여자들은 기존의 시민운동 조직이 아니라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치적인 목적을 갖지 않은 다양한 인터넷 동호회들 내에서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논의되면서 대단히 이질적인 네티즌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햇던 것이다. 이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은 촛불집회 토론회에서 한 참여자가 언급한 것처럼, "황당한 정책에 어이가 없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였다.
이들은 촛불시위 참가뿐만 아니라 모금을 하여 촛불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김밥과 생수를 공급했다. 뿐만 아니라, 광우병 쇠고기 반대 신문광고와 <조선> <중앙> <동아>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다양한 인터넷 동호회가 자리를 잡고 있다. 기존의 운동조직과는 다른 가상세계의 사이버 커뮤니터가 현실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인터넷 동호회들이 촛불시위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광우병 쇠고기 반대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먹을거리 안전'이라는 단순한 생활상의 요구였다. 이들 동호회들은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호회들이다. 이것은 경제발전이나 사회진보의 실질적인 내용과 다르지 않다.
먹을거리 안전문제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바로 삶의 기본을 위협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것은 흔히 '생활정치'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변화다. 삶의 안전과 질 문제는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점에서 촛불시위는 21세기 한국정치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일반 시민들의 일상과 관련된 의제라는 점에서 이전의 쟁점들과 다르다. 2008년 촛불시위는 생활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드러내는 생활정치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현상이었다. 생활정치의 주체는 남성 노동자가 아니라 생활을 책임지는 가정주부라는 점에서 생활정치의 등장은 여성의 정치적 주체화를 함의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21세기 진보정치의 내용이 무엇을 포함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것은 <시사IN>과 진보신당이 공동으로 주최한 토론회에서 레몬테라스의 30대 주부의 주장에 압축되어 있다. "앞으로 진보신당이 갈 길은 바로 주부를 포섭하는 길이 아닐까"
촛불시위를 계기로 시민들의 일생생활의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었다. 촛불집회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의 집합적 경험을 통해서 체득된 시민의 힘은 향후 다양한 계기를 통해서 분출될 수 있는 새로운 잠재력이 되었다. 그리고 일상의 정치화로 요약되는 새로운 정치의 등장은 정치의 주변에 놓여 있었던 여성들을 핵심적인 정치적 주체로 만들었다. 다음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공론장은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여론이 형성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인터넷 정당과 인터넷 국회와 같은 제도권 정치조직과는 다른 대안적인 정치조직이 가상공간인 인터넷에서 실험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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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소녀의 정당 가입을 허하라! (오마이뉴스, 오준호 사회당 서울시당 위원장, 2008.07.11 13:17)
[주장] 촛불의 역동성으로 정당정치를 바꾸자
국민주권은 민주주의의 절차를 넘어 생명과 안전-이것은 민주주의의 기초다-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한나라당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도 아니고… 정권 퇴진은 촛불이 변질된 증거다"라고 볼멘소리를 해댔지만,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정부는 필요하다면 끌어내려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촛불광장에서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집회' 자체를 처음 와 본다면서도 입을 모아 "이명박은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촛불은 실로 민주주의를 배우는 '단기속성코스'였다.
촛불을 아직 끌 수 없다는 의견이 다수이더라도, 촛불의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분명히 있다. 특히 생활 속으로, 지역 속으로 촛불을 가져가자는 의견이 많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민주주의의 단기속성코스'는 빨리 배운 만큼 빨리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촛불의 역능이 제도정치를 변화시키고, 그 안에 영토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는 '직접민주주의냐, 제도정치냐'하는 잘못된 이분법의 연장선에 있지 않다. 거리의 운동 없는 제도정치는 가장 좋은 상황에서도 관료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도정치의 변화가 없으면 거리의 운동으로 얻어내는 성과는, 그것이 근본적 대혁명이 아닌 이상, 언제나 불안한 것이다. 당장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쇠고기와 대운하 문제를 잠시 미룬 채 대체복무제, 분양가 상한제 등의 개혁성과부터 원점으로 돌리고 있다. 촛불이 완전히 잠잠해지는 순간 쇠고기와 대운하 역시 다시 출발점으로 가져갈지도 모른다.
현재의 제도정치를 보자면, 거긴 촛불의 입장에서 무덤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들은 이번 촛불정국에 성실히 참여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성실한 참여자 이상의 역할을 했는가? 민주노동당은 '강달프'의 기백으로 버텼고 진보신당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칼라TV> '리포터'였으며 사회당은 시민들이 직접 쓴 피켓으로 시청 앞에 매일 '시민산성'을 만드는 것으로도 벅찼다. 이것은 진보정당들의 능력 부족이기도 했지만, 시민들 스스로 표현하고 발언하려는 의지가 정당들의 지도력을 능가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결국 여기에 답이 있다. 촛불의 역동적이고 다양한 정치의식을, 역시 그렇게 다양하게 반영하는 정치가 제도 내에 가능해야 한다. 즉 더 많은 정당, 더 활발한 정당정치가 탄생해야 한다.
'아고라당'을 만들자, '촛불당'을 만들자고 한다. 환영한다. 하지만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아고라 안에도 격렬한 논쟁이 잠재된 의견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촛불을 함께 들었다는 이유로 하나의 통일정당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또 하나는 현재 한국의 정당법이 그런 역동적 당 창건운동을 철저히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의 민주주의는 더 많은 정당들의 민주주의 속에서 성장·전화하게 될 것이다. 아고라 당, 촛불당 주장이 그저 냉소적 반(反)정치를 뜻하는 슬로건이 아니라면, 정당정치를 바꿈으로써 실제로 아고라당과 촛불당이 가능하도록 함께 시민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럼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 단적으로 한국의 정당법은 청소년의 정당가입을 불허하고 있다. 독일 사민당의 경우 14세면 당원가입이 가능하다. 당원 1천명의 시도당 5개를 요구하는 규정도 돈과 조직을 가진 정치세력에게만 유리한 것이다. 중앙당을 서울에만 두는 '전국정당' 규정도 완화되어야 한다. '도봉구에 사는 걱정 많은 사람들'(그런 깃발을 보았다)이 지방선거에 왜 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할 수 없는가? 그밖에 공무원, 교사의 정당가입 허용, 완전 선거공영제의 실시, 텔레비전 광고의 정당별 의무배당,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의 도입도 꼭 필요한 개혁이다.
평소에는 각자 다른 이름으로 지역과 부문에서 생활정치를 펴며 진보의 영향력을 확대하다가 선거 시기에 '선거연합'으로 모이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독일좌파당의 약진은 2005년 좌파 정치세력들이 선거연합을 통해 출마하여 의미 있는 득표를 얻었기에 가능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99년 '제5공화국운동'이라는 선거연합을 통해 당선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의 목적은, 더 많은 정당이 생겨나고 합종연횡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의 '난립'을 가져온다는 우려는, 촛불의 힘이 바로 다양성에서 나왔음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다양성이 건강함의 지표이다.
기존의 진보정당들도 정당정치 개혁에 절실하게 나서야 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초록당, 생명평화당, 아고라당, 촛불당, 배운여자당 등등 모두 깃발을 들자. 생활에서 현장에서 각자 더 많은 국민과 누리꾼의 요구를 수렴하고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자. 같이 싸우자. 정당법과 정치관계법을 개정하기 위해 같이 노력하자. 백만 서명운동에 나서자. 2010년을 향한 촛불정치의 네트워크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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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2008.07.14 18:04)
[촛불논쟁-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⑥] <여공 1970…>의 저자 김원 박사
촛불에 상찬을 늘어놓은 다른 지식인들에 비해 그는 차분했다.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2006년)>란 책으로 주목받았던 김원 박사(정치학)는 6월 중순께 발표한 글에서 "아이들의 촛불을 보며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환호해서는 안된다"며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을 주문했다.
"우리는 이미 2002년 촛불이 어떻게 잦아들었으며, 당시 촛불을 든 아이들이 88만원세대가 되어 고용불안 속에서 '경제를 살려준다'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김 박사는 '촛불이 일상으로 들어왔을 때'를 언급하며 비판적 시각을 이어갔다. "한달 전 뉴타운 건설에 열광했던 집단이 갑자기 촛불 속에 자신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한국정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거리의 정치가 순간 잦아들면서 일상으로 대중들이 돌아갈 때,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는 다시 강력한 흡인력을 보이며 대중을 빨아들였다. 이 점에서 촛불로 한국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가 변화했다고 판단한 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심지어 김 박사는 "(2002년 촛불에 이어) 2008년 촛불에도 '민족주의'는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힘을 발휘하고 있다"며 이를 "민족적 자존심에 기초한 멘탈리티의 재생"이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촛불 독자성은 강화되고, 사회운동 영향력은 약해져"
그동안 미시사의 관점에서 사회운동을 연구해온 김원 박사는 1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만나서도 "촛불시위를 주도한 중고생들을 '촛불세대'로 규정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촛불시위의 양상·분위기·아우라가 과거 거리정치와는 분별되는 측면이 있다. 가족단위로 촛불시위에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전선을 쳐놓고 미느냐 밀리느냐는 문제로 치환되지 않고 잔치 혹은 페스티벌 성격이 상당부분 더해졌다. 중고생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초기에 주도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더 두고 봐야 한다. 세대라기보다는 광우병 문제와 자신의 교육현실이 겹치고, 문자세대와는 다른 인터넷세대의 감수성이 결합돼 초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 박사는 중고생들의 촛불시위 참여 양상이 기성세대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신자유주의적·시장주의적 교육에 복종하는 애들로만 알았는데 스스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기성세대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성찰한 것이다."
이어 김 박사는 민족주의의 재현이라는 '촛불의 낡음'에 대비되는 '촛불의 새로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더욱 더 약해졌다. 2002년 촛불시위 때는 사회운동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2008년 촛불시위 현장에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깃발을 만들어 나왔다. 거리정치에 대한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퇴조한 것이다. 2002년과 대비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이다."
즉 "촛불의 독자성은 한층 더 강화되고 사회운동의 무능력함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김 박사는 "이는 2002년 촛불을 경험하면서 운동진영이 학습효과를 가진 결과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더 이상 깃발을 내세워 일방통행적인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대중운동으로 전화하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오히려 대중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 거기서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실험할 게 더 남아있나"
또한 김 박사는 "사회운동과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이 촛불시위로 분출됐다"며 촛불시위가 한국사회에 '두 가지 성찰'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더 이상 한국사회의 변화는 기존의 제도화된 정당이나 정당정치를 통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촛불은 촛불이고 제도정치가 시민사회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앞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는 촛불시위든 거리정치든 대중지성이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기존의 사회운동 패러다임을 고집했을 때 사회운동이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대중의 호민관'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대중을 이해할 수도 없고, 대중이 복무할 수 있는 언어공간도 확보할 수 없고, 그들을 사회적·정치적 변화의 장으로 끌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대중의 호민관으로서 역할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이번 촛불시위에서 그런 점을 학습했다고 본다."
이런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김 박사는 최근 촛불논쟁의 단초를 제공한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의 '대의제 민주주의론'과 관련 "현상 유지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최장집 선생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최대치는 친노동자정당의 집권인 것 같다. 국가권력이나 정부행태의 변화·집권 등을 통해서만 좀더 풍부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친노동자정당의 집권을 돕는 시간에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사회 각 부분에서 추진하는 게 (새로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중의 판단과도 부딪친다. 대중들이 투표와 선거에 참여해 자신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느냐?"
이 대목에서 김 박사는 "정당정치는 대안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라며 '진보정당 무용론' 혹은 '정당정치 무용론'으로 비칠 수 있는 도전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이미 "촛불집회에 대한 많은 해석들을 보면,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필요없는 이론들"(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작년이 87년이 20년 되는 해였다. 좋은 정당, 진보정당의 실험을 더 할 게 남았나? 더 이상 거기에 목을 매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파산 선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나? 대중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문제를 자기문제로 표출하기에는 정당은 너무 낡았다. 그런 것들이 명백한데 계속 (진보)정당에 목을 매야 하느냐? (진보) 정당이 대안이라고 얘기해야 하느냐?"
이어 김 박사는 "대중의 우발성과 예측불가능성이 한국정치를 관통하는 특징이 아닌가 싶다"며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아래로부터 대중투쟁에 근거했을 때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대중의 우발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제도정치로 통제할 때 민주주의가 공고화된다는 주장은 현상유지적이고 보수적"이라며 거듭 '최장집 사단'의 견해를 비판했다.
"대공장 남성 정규직 중심의 진보정당 노선을 재검토해야"
김 박사의 도전적인 주장은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핵심사업장인 대공장 노조 조합원들은 이랜드 투쟁은 물론이고 촛불시위에도 관심이 없다. 현재 노동운동의 상태가 이러하기 때문에 민주노조운동이 얼마나 생명력을 갖고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여성·실업 등의 문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대공장 남성 생산직 노동자를 주요한 조직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정당운동의 패러다임을 재검토해야 한다. 노조운동이 지역·산업·계층을 달리하는 소수자와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
김 박사는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생산직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의 지지가 취약하기 그지없다"며 '지지층 외연의 확장'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진보정당 원내 진입) 초기에는 '거대한 소수'를 운운했지만 지금은 지지기반이 얇아졌고 노동자층의 적극 지지도 사라졌다. 그래서 기존 기지층의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촛불에서 제기된 이슈들을 중심으로 지구당 차원이든 지역투쟁 사례를 통해 촛불시위에 참여한 다양한 층들을 지지층으로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밑으로부터 지지층을 확산하고, 정당의 일상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채널과 소통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사회운동과 진보정당 양쪽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김 박사는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풀뿌리 보수주의를 깨지 않으면 진보정치를 할 수 없다"며 "수도권이든 비수도권이든 아래로부터 풀뿌리 보수주의를 일상에서 깨는 노력과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보수가 주도하는 한국적 정당체제 속에서 진보정당이 장기적인 생존력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박사는 "촛불이 잦아들고 다시 일상이 조성됐을 때 촛불을 지지한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와 관련, 그는 새로운 대안으로 검토할 만한 사례로 '이랜드 투쟁'을 언급했다. "이랜드 파업이라는 비정규직 파업이 지역을 중심으로 소비자·노조·정당·사회운동과 동시에 결합됐다. 그래서 이랜드 투쟁은 지역화·집중화·전국화될 수 있었다. 이랜드 투쟁을 거치면서 '시민·비정규직·소수자 등의 일상적 정치활동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깨달은 것 같다. 촛불도 그런 활동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 박사는 "촛불만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촛불이 던진 변화를 읽으면서 대중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정치활동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게 없는 상태에서 매주 촛불시위 하러 나가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촛불은 대중투쟁의 정형화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명박 정권이 악수를 두면 촛불시위는 5년 내내 계속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자기 생각을 사회운동과 결합하고 의식을 끌어올릴 때 (촛불시위처럼) 사회운동을 강화시키는 대중투쟁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기존의 사고를 바꾸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실험을 이명박 정권 내내 계속 한다면 '진지를 갖는 사회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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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최광은 사회당 대표, 2008.07.15 15:43)
[반론] '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에 답하며
일단 김원 박사의 주장을 검토하기에 앞서 '거리정치'와 '정당정치'를 대립시키는 이분법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이 주제는 촛불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가장 문제 설정이 잘못된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기성 정당정치가 촛불 국면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혹은 한국의 미발달된 정당 체제의 한계가 현재의 국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거리정치'와 '정당정치'를 대립시키는 것은 하나의 특수한 현상을 놓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일명 '거리정치'로 표현되는 대중들의 투쟁이 큰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들의 욕구와 열망을 담아내고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적 틀 자체가 부재했거나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이루어진 현재도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은 여전히 한국 정당 체제의 주요 변수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은 '거리정치'와 '정당정치'의 대립을 부각시켜야 할 때가 아니라 이 둘 사이의 선순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진보적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의 정당 체제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전략 수립이 절실하다.
김원 박사가 6월 중순께 발표한 글에서 "아이들의 촛불을 보며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환호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 1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만나 "촛불시위를 주도한 중고생들을 '촛불세대'로 규정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을 보내자고 주문한 것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는 '거리정치'의 휘발성을 적절하게 지적했고,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토대의 완고함을 환기시켜주었다. 새로운 대중정치 공간의 형성은 진보진영 전체의 과제다. 문제는 어떤 형식이 부여된 어떤 구체적 공간을 매 계기마다 만들 것인가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이 공간과 정당정치 사이의 매개를 확보하는 일이다.
그러나 김 박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약을 감행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회운동과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이 촛불시위로 분출됐다"며 촛불시위가 한국사회에 두 가지 성찰을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하나는 더 이상 한국사회의 변화는 기존의 제도화된 정당이나 정당정치를 통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기존의 사회운동 패러다임을 고집했을 때 사회운동이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대중의 호민관으로서 역할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이번 촛불시위에서 그런 점을 학습했다고 본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문제설정과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의 주장은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의 역할이 끝났다는 '정치적 허무주의'로의 퇴행으로 읽힐 수 있다. 그는 나아가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중의 판단과도 부딪힌다. 대중들이 투표와 선거에 참여해 자신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정당정치는 대안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앞서 그가 주문한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을 정작 본인이 망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금은 정당정치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할 때가 아니라 정당정치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때다. 정당정치를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대중들의 열망을 통제해야 한다거나 의회의 틀로 가두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당정치가 이러한 대중들의 역동성을 흡수하며 정치적 의지를 결집시키는 유효한 틀로 사고되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김 박사의 단정적인 주장은 이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변화를 꾀하는 것과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를 의문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후자는 관념적일뿐만 아니라 공상적이다. 국지적인 시도는 있었을지언정 보편적인 제도가 된 적도 없고, 될 수도 없다. 현대 사회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와 정당정치를 넘어선 보편적 정치제도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했다. 이는 자본주의를 타도했다고 선언했던 몰락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갈파하며 이를 새로운 형태의 귀족정 혹은 과두정이라고 비판한 <선거는 민주적인가>의 저자 버나드 마넹도 대의제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와 단순 대립시켜 후자를 찬양하며 현실 가능한 정치 프로젝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정당, 진보정당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행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왜 그런가? 먼저 현실의 시대 규정으로부터 출발하자. 바로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포스트 민주주의'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유지되고 자유권에 대한 본질적 침해도 없기 때문에 파시즘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의 기초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정치 체제를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정의하자.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반(反)국민성이 드러나고 있는 역설이 바로 '포스트 민주주의'의 적나라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는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이명박 정부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하는 말일 수 있다.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의 퇴조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의 세계사적 규정이기도 하다.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가 보여주고 있는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기존 정당 체제의 붕괴, 특수주의와 협소한 이해관계가 지배하고 있는 노조운동, 정치와 경제의 분리 및 경제의 정치화, 정치광고가 지배하는 정치언어, 경제 포퓰리즘 및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 공공연하고 합법적인 로비스트 네트워크의 발달 등.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 저항 또한 새로운 모습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촛불시위에서 그 대표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저항의 핵심 의제가 모든 사회적 의제로 확대되는 경향, 먹을거리 안전을 포함한 안보 개념의 확장과 정체성 담론의 부상, 탈정치의 정치 등이 그것이다.
'탈정치의 정치'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 이는 아직 저항의 형태에 적절한 형식이 부여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 저항이 나름대로 이어지고 발전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정치 현실을 변화시킬 힘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중정치 공간을 더욱 확장하는 것과 함께 이것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구체적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그리고 이것의 중요한 전제는 이명박 식의 우파 대안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넘어 좌파 대안을 창출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이것을 매개로 새롭게 대중정치를 구성해야 하고, 서로 대안을 향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들의 주권의식은 한층 진화했다. 주권의 기초에 대한 정부의 공격과 이에 대한 방어를 통해 주권의식이 급격히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를 적절한 형태로 담보하지 않는다면, 퇴행이 일어날 수 있다.
저항과 대안을 매개할 수 있는 정치력이 절실하다. 이것은 우파 혹은 중도파 정당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진보정당이 대중정치 공간을 확장시키고 대안을 창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의 진화된 주권의식과 사회적 의제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정권퇴진을 주장하거나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의 거대한 열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고 현실적 경로도 될 수 없었다. 주창자들도 레토릭을 넘어선 구체적인 정치적 주장과 행동을 조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산 쇠고기 3불(안 사고, 안 팔고, 안 먹기) 운동을 부각시키려는 흐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퇴행이다. 소비자운동이 국민주권운동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왕의 전제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로 이용되었던 '마그나 카르타'를 부활시키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촛불시위에서 적극적으로 부각된 6가지 의제(쇠고기, 교육, 의료, 민영화, 방송언론, 대운하)의 요구를 담은 현대 한국판 '마그나 카르타'를 작성해 보자. 촛불시위를 이어가며 각각의 의제에 대한 요구안을 폭넓은 토론을 통해 만들자.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끝까지 압박하자. 그 결과에 따라 촛불시위의 승리를 논하자. 진보정당이 이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진보정당의 실험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정당 체제의 변화를 앞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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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 보이콧은 무책임한 주장, 아고라모델을 정당정치에 도입해야"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2008.07.21 10:06)
[촛불논쟁 - 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⑦]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팀장
"촛불정국은 당이 진화하는 과정이 됐다." 진보신당의 젊은 이론가인 장석준 정책팀장은 촛불시위가 원외정당인 진보신당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평가했다. "국회가 개원하기 2개월 전까지 우리의 연단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촛불정국은 소중한 기회였다. (총선 이후) 적응 방향을 혼란없이 찾아갈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단서가 잡혔다. 진보신당이 촛불의 수혜를 본 셈이다."
'촛불의 수혜'는 당원과 후원금의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장 팀장은 "촛불정국에서 진보신당은 대중을 앞서가기보다 대중과 동행했다"며 "그런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첨단의 발전 측면과 시민사회의 능력을 학습했다"고 말했다.
장 팀장은 16일 오후 여의도 당사에서 진행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1세기 대중사회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촛불시위의 사회적 맥락을 짚었다. "20세기 대중사회와 지금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20세기 때는 대중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많이 얘기했다. 매스미디어가 사람을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일차원적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지금은 매스미디어가 진화해서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대중이 스스로 통제하고 자기 것들을 만들 여지가 생겨났다. 이전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봤던 것들이 이제는 대중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치 후진성과 달리 (촛불은) 21세기 대중사회의 가능성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선진적으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장 팀장은 "촛불 과정에서 크게 반성해야 할 세력"으로 '정당'과 '노동운동세력'을 꼽은 뒤, 특히 "노동조합운동이 촛불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며 안 된다"고 강조했다. "촛불을 동원한 주체는 82쿡, 소울드레서 등 인터넷 카페들이었다. 노조가 여성이든 중소기업 노동자든 그들의 생활문제에 다가가 그들을 조직화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했다. 하지만 기업별 노조라는 경직된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조직으로까지 가지 못한 것이다. 산별노조도 말로만 산별노조가 아니라 노동운동 경험이 전혀 없는 20대 청년이나 여성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파업 하나로만 수렴되는 동원논리가 아니라 다양한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거듭나지 않으면 노동운동도 크게 정체될 것이다."
이어 장 팀장은 최근 쏟아지고 있는 '촛불 해석들'에 대해 "하나하나가 틀린 주장은 아니다"라면서도 "특정한 측면에서만 바라본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촛불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현상이다. '성숙한 대중사회'라는 것도 '집단지성'이나 '다중'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특정한 측면을 너무 과장해서 신비화하는 논설이 많다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통해 정당정치의 시대는 갔다는 식은 일면적 주장이다. (김원 박사처럼) 제도정치의 역할을 너무 보이콧하는 것은 분명 오류다. 반대로 촛불시위는 일회적 분출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정당정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역편향이다."
장 팀장은 "촛불에 현혹된" 혹은 "촛불을 신비화한" 등의 직설적인 표현을 써가며 비판적 시각을 이어갔다. "촛불은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인 집단행동이다. 대의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의 분출은 주기적으로 있어 왔다. 물론 촛불은 10년 전 집단행동보다 더 발전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패턴은 반복되고 있다. 이는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일상적 대의가 안되고 있기 때문에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된 것이다. 그래서 대의구조는 그대로 놔주고 촛불의 집단행동이라는 측면만 가져가자는 것은 일면적 처방이 될 수밖에 없다."
장 팀장은 "최근 정당정치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 중에 김원 박사가 가장 화끈하게 얘기한 것 같다"고 촌평한 뒤, 일부 젊은 지식인그룹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당정치 무용론'(혹은 '진보정당 역할 마감론')에 적극적인 반론을 시도했다. "단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너무 일면적으로 나간 게 아닌가 싶다. 저는 이중의 변화 과정, 즉 이중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당정치가 포함된 정당(체제) 수준의 변화도 필요하고, 또 정당정치가 포함되지 않은 시민사회 수준에서 사회운동, 대중의 직접 참여, 대중자치 등의 활동영역을 늘려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국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일본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일본 시민사회의 진보적 역량이 한국 시민사회에 뒤진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영역이 발전했다. 그런데 한국과 비슷한 정치양상을 보이고 있다. (보수적인) 전국단위 정치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당정치를 해도 안되니까 보이콧하고 시민사회의 사회운동에 전력하자는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다."
이어 장 팀장은 촛불을 바라보는 '최장집 사단'의 시각에 대해 "여전히 대의민주주의에서 정당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적절하다"면서도 비판적 평가를 곁들였다. "박상훈 박사(후마니타스 대표)의 지적처럼, 역사장 가장 전형적인 민중권력의 사례라는 파리코뮨(Paris Commune)이나 소비에트(Soviet)도 역시 대의기구였다. 대의제에서 벗어난 직접민주주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장집 사단은) 대의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대의제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국민소환제가 핵심적 요구일 수 있다. 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선출주체인 민중이 대표를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대의제를 개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 팀장의 얘기대로 촛불의 성과가 진보정당의 약진에 기여할 수 있을까? 이는 '촛불의 거리정치가 표로 연결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도 단순화할 수 있다. 그의 대답은 일단 '낙관적'이었다. "약진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웃음). 진보정치세력도 나름대로 활동하면서 학습효과, 교훈을 얻었다. 그걸 제대로 살려 나가면 가능하다. 진보정치의 큰 한계 중 하나가 지역적 토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지역은 보수세력이 다 장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2년 후에 있을 지방선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 중심이던 촛불의 힘이 지역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2010년 지방선거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지가 진보정치의 과제다.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촛불의 열망을 한국사회에 (더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장 팀장이 이렇게 '낙관적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배경에는 '촛불로 인한 20∼40대의 각성'이라는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계급, 지역 등과 함께 세대가 중요한 변수다. (한국에서는) 10년 단위로 경험하는 게 많이 다르다. 그래서 세대 정체성이 정치적 의견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된다. 촛불 정국에도 50·60대 이상은 거의 안움직였다. '한국은 미국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보수적 가치체계가 이런 격변기에도 안 바뀐 셈이다.
반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바람의 한축을 이룬 20대의 성장에 대한 기대는 촛불을 거치면서 분명하게 정리됐다. 20대가 보수로 쏠린 것은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심리였다. 하지만 촛불의 주체로 참여하면서 정리됐다. 또 노무현 정권의 실정 때문에 의기소침했던 30·40대가 '이명박 반대'로 정리됐다. 이렇게 가치 혼란의 상황이 일정하게 정리되면서 정치세력들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여기가 마련됐다."
문제는 '촛불의 열망을 어떻게 정당정치에 담아낼 것인가'에 있다. 여기에 장 팀장뿐만 아니라 진보정치세력의 고민이 있다. 장 팀장은 "인터넷과 거리가 서로 소통하며 환류했던" '아고라 모델을 하나의 대안으로 내놓았다. "아고라와 거리가 소통하는 모델이 정당정치에 도입되어야 한다. 아고라에서 숙의(熟議)하고, 거리에서 행동하는 '아고라 모델'을 정당이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21세기에 걸맞는 대의제 개혁과 관련돼 있다. 아고라가 선(善)의 공간만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자생적으로 걸려지는 매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정당이 그런 메커니즘에 주목해야 한다. 아고라에서 끝나지 않고 (숙의해서 합의한 내용이) 거리로 연결됐기 때문에 촛불이 가능했다."
장 팀장은 '기존의 정당모델'과 '아고라모델'을 대비시키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나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기존의 정당모델은 계몽적 모델이었다.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정당은 특정한 지식이 모여있는 중심점이었다. 그런 체제를 갖고 대중을 설득하고 교양한다. 하지만 아고라모델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발언한다. 게다가 인터넷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진다.
정당 자체가 광장이 될 수는 없지만 정당 앞에는 광장이 열려 있어야 한다. 정당은 그 광장에서 대중을 만나고 소통해야 한다. 정태인 전 비서관이 '넷의회'를 제안했는데 그걸 구체화해보려고 고민중이다. '말랑말랑한 국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이런 넷의회가 활성화되면 진짜 국회도 말랑말랑하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장 팀장은 "기존의 국회 안에 갇혀서는 (아고라모델을 적용한) 활동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장 팀장은 "대의제가 항상 그렇듯 정당이 대중의 열망을 100% 채울 수 없다"며 이를 '지도력의 문제'로 풀 것을 주문했다. "진보정당은 대중의 열망을 상징할 수 있는 지도자군을 형성해야 한다. 87년에는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지도자군이 있었다. 지금 대중들이 진보정당을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진보정당의 지도자들이 그런 정도의 지도자군으로 부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지도자 후보군들이 대중들과 부대끼면서 창조적인 정치활동 상을 만들어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수밖에 없다. 다만 노회찬, 심상정, 강기갑 등 잠재력을 가진 지도자 후부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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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신당은 100만 촛불이 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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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0 08:28
신당은 100만 촛불이 갈 길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과 이땅의 어머니 아버지들, 직장인, 예비군, 노동자들은 이제 새로운 정당의 주인이되고,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일부 엘리트정치인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들로 표현되는 '노무현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신당의 중심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 보통의 시민들이어야합니다..
개방 2008/08/21 12:33
새벽길글도 이제는 별로군.
새벽길 2008/08/21 13:06
ㅋㅋ 저는 예전부터 별로라고 생각했는데요. 특히나 블로그 글은 더욱...
사실 무플을 방지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