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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와 <나쁜남자> 그리고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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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에 실린 나디아님의 똥파리와 나쁜남자를 비교한 글을 보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글이 쉽게 익히지도 않을 뿐더러 - 이건 내가 자주 그러하기에 잘 알 수 있다. ㅡ.ㅡ;; - 그 관점에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예전에 <나쁜남자>에 대해 퍼다 놓았던 글이 생각나더라. 아마 나디아님은 이 펌글에 대해서도 나와 의견일 다를 것 같다. <똥파리>를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누구랑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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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와 <나쁜남자> 그리고 폭력 (레디앙, 2009년 06월 15일 (월) 15:19:09 나디아)
[독자투고] 김기덕과 양익준 감독이 폭력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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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0 04:25 
 
언젠가 김기덕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옮기려고 담아놓은 글이 있다.
하나는 '나쁜 남자'에 대해서 쓴 모님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정성일님이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194호(2004. 9. 20)에 쓴 글이다. 역시나 출처를 봤더니 그 모님의 원글은 사라졌다. 이런 글들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면 안되는 걸까. 특히나 그 의견이 소수이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원글의 주인에게 담아왔다는 말도 못해서 미안하다. 연락할 길도 없는데 어쩌랴. (--> 결국 허락을 받았다. 아마 재펌해도 되겠지)
정성일 님의 글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김기덕의 영화를 다시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김기덕이 공격하려는 것은 계급적 추락이다. 인신매매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대학생을 가져다 놓았을 때, 그리고 대학교가 한국 사회에서 부르주아 사회로 편입하는 거의 공식화된 제도이며, 그 제도 안에서 서울대학교를 가기 위해 온 나라가 미쳐있는 사회에서 갑자기 그 토대를 무너트리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역겹게 생각하는 그 자리에 가져다놓았을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불쾌감은 이 영화를 역겹게 만든다. 그것은 사실상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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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영화의 힘-정치적 코드로 읽기 (정성일/영화평론가, 진보정치 kdlpnews-194 호 2004.9.20 발행)
‘계급적 환상’의 정수리에 칼을 꽂는 사람
 
김기덕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부분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심지어 (영화 평을 쓰는) 내 동료들 중에는 김기덕 영화 시사실에는 아예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맹세한 사람도 있다. 자기 이름을 걸고 ‘김기덕 저격수’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 영화 평론가도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좀 내게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보기 힘든’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 
물론 나도 그의 영화가 편하게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 저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영화를 본 다음 공개적으로 지지를 선언하는 글을 만나기란 힘든 일이다. (나는 그 어떤 영화가 그 어떤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 할 지라도 원래의 내 견해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이 글은 김기덕이 감독상 2개를 받았다고 갑자기 그의 영화를 옹호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그가 악명을 날리게 된 첫 번째 영화는 그의 네 번째 영화인 <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여기서 여자의 질 속에 낚시바늘을 넣었으며, 그걸 입에 넣고 마치 낚시하듯이 끌어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인신매매나 매춘, 혹은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시체를 건져내는 것으로 먹고사는 남자들을 주로 등장시켰으며, 그의 영화에서 여자들은 육체적으로 잔인한 과정을 견뎌내야만 했다. 
 
(세 번째 영화) <파란 대문>에서는 자기 집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그 집 여대생이 그녀가 아플 때 대신 매춘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자신의 자서전에 가까운 (여섯 번째 영화) <수취인 불명>에서는 한쪽 눈을 잃은 여고생은 그 눈을 고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미군 부대의 젊은 미군 병사에게 자기 몸을 내어주고, 그런 다음 그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까스로 얻어낸 눈을 자기 스스로 찔러서 다시 잃어버린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서 못을 삼킨 다음 그것을 배변을 해서 다시 끌어낸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상상이기도 하지만, 설혹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제로 영화에서 화면으로 확인해야 할 때 그건 심정적으로 참으로 힘든 일이 된다. 
  
그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보는 사람을 힘들게 만들긴 하지만 왜 김기덕의 영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지, 혹은 적대감을 끌어내는지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영화는 사실주의 미학에 기대어 선 영화가 아니다. 의도적으로 이야기는 그 어느 지점에서 단절을 만들어내고, 인물들은 구체성을 상실하기 일쑤였다. 때로 그것은 빈곤의 미학이라는 말로 오해받았다. 하지만 그 말은 김기덕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어떤 환상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것은 그것이 실재가 만들어내는 환상이 아니라. 그 반대로 환상이 찾아오는 실재를 다루었다. 이 말이 핵심이다. 여기서 방점은 그 방향의 동사(動詞)에 있다. 그러므로 그는 던져진 이야기와 영화의 전개가 반대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결과가 원인을 찾으러 온다. 종종 그의 영화를 보면서 길을 잃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그런 다음 그 둘은 일종의 블랙 홀 안으로 들어간다. 혹은 그것은 실재의 얼룩과 같은 장소에로 이동한다. 무엇보다도 김기덕이 자신의 주인공을 다루는 방법은 대부분 어떤 공간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 안에서 그들에게 끈질기게 가혹한 과정을 견뎌내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 공간은 일종의 알레고리이며, 혹은 상징이다. 
  
<나쁜 남자>가 나쁘게 보이는 진짜 이유
그런데 <나쁜 남자>를 보면서 불현듯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하나는 김기덕의 영화가 종교적인 메시지, 혹은 구원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서 알릴 생각이 없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거의 느닷없는 엔딩을 맞이한다. 깡패 한기가 대학생 선화를 납치해서 사창가에 팔아 넘기고, 그녀가 부서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기는 칼에 찔려 죽는다. 그런데 죽어 가는 그가 죽지 않고(좀 더 정확하게는 죽어가다가 살아나서!) 선화와 함께 트럭을 몰고 떠돌면서 매춘으로 먹고사는 기둥서방의 비루한 삶으로 영화가 느닷없이 끝난다. 이것은 이제까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엔딩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일종의 따돌림을 느낄 정도이다. 더 이상한 점. 거기서 우리는 갑자기 복음성가 “날마다 숨쉬는 것을”을 듣게 된다. 그러나 김기덕은 이 노래를 스웨덴어 버전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자막 번역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김기덕은 자신의 구원의 메시지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믿음의 소망은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자, 그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도착한다고 믿는다. 
 
두 번째. 이 영화는 그 끔찍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정작 섹스 장면이 없다. 있다면 섹스 직전까지의 상황만이 있고, 그 다음은 소리가 대신한다. 김기덕은 섹스에 몰입할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섹스 장면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다.
  
문제는 ‘여자’가 아니라 ‘여대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질문. 만일 깡패 한기가 시골에서 막 올라온 여자를 인신매매해서 사창가에 넘겼을 때와 여대생에게 같은 짓을 했을 때, 그 행위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후자가 훨씬 당신을 힘들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테면 전자의 경우는 70년대 한국문학에서 수없이 다루어진 소재이다. 그리고 그 소설들은 수없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김기덕과 같은 공격을 받지 않았다. 오직 김기덕만이 그러한 ‘상상’에 대해서 그것을 상징으로 환원하거나 혹은 사회적 비유로 돌려 말하지 않고 그 자신의 정신적 트라우마(상흔)의 결과로 공격받았다. 
 
여기서 방점은 여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에 있다. 김기덕이 공격하려는 것은 계급적 추락이다. 인신매매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대학생을 가져다 놓았을 때, 그리고 대학교가 한국 사회에서 부르주아 사회로 편입하는 거의 공식화된 제도이며, 그 제도 안에서 서울대학교를 가기 위해 온 나라가 미쳐있는 사회에서 갑자기 그 토대를 무너트리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역겹게 생각하는 그 자리에 가져다놓았을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불쾌감은 이 영화를 역겹게 만든다. 그것은 사실상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역겨운 교양과 이데올로기적 환상
김기덕은 분명히 우리들의 총체적 모순에 대해서 분노를 안고 있으며,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어디를 공격해야 그 계급적 환상이 무너지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캐치’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의 삶을 통해서 학습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2004년 45살 된 남자의 최종 학력이 ‘국민학교 졸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뼈 속 깊이 느낄 것이다) 
 
그의 분노와 절망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체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 교양의 지식으로 이루어진 담론에서 김기덕은 불편한 대상이거나, 혹은 그가 만들어낸 영화들은 그들에게 목안의 뼈와 같은 존재이다. 그것을 토할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다. 그를 정말 인정하기 싫은데, 그를 부정하면 그들이 인정하는 가치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때 이상할 정도로 비평담론들과 영화 언론들은 침묵하였다. 그것은 ‘똑같은’ 상을 이창동이 <오아시스>로 받았을 때와 대조되는 분위기이다. ‘단순무식’하게 말하면 <빈 집>이 수상한 것을 무시하기 위해서는 베니스영화제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의 호기심을 안고 그 영화에 대해서 과대평가를 했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오아시스>에도 같은 말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그 난처한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침묵이다. 김기덕은 점점 더 불편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고, 그런 만큼 우리들의 사회의 역겨운 교양과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김기덕의 왼쪽과 노동운동
그러나 김기덕은 그 분노와 절망을 안고 공격하지만, 그러나 그는 왼쪽의 자리에 서거나 혹은 왼쪽에서 오른 쪽을 보는 방식으로 그것과 싸우지는 않는다. 여기에 쟁점이 있다. 그의 분노는 결코 정치경제학적 지식을 끌어들이거나, 혹은 진보의 철학을 안고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단지 그가 덜 각성했거나(!), 혹은 의식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질문은 고스란히 당신에게도 돌아간다. 
   
당신은? 반대로 김기덕은 왼쪽의 편에 자기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왼쪽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국민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45살의 이 남자가 온 몸으로 자기를 부수면서 예술가의 자리에 올 때까지 단 한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다. 노동자의 세계에서 자주 (진보의) 철학은 이야기되어지지만, 그러나 그만큼 예술이 이야기되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재벌들의 이름보다 더 많은 화가들의 이름을 댈 수 있는가?  휴일에 텔레비전을 끄고 아이들과 시와 소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노래방에 가서 부를 수 있는 노래와 암송할 수 있는 시의 숫자를 비교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을 시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가진 자들의 교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와 정치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면, 철학과 예술은 인간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노동조합은 임금투쟁과 사법조항과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는 만큼 그들 조합원이 누려야 할 문화적 향유와 교양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현장에서 투쟁하고, 집에 가서 지배자들의 미디어와 가진 자들의 이데올로기로 넘쳐나는 드라마와 역겨운 물신주의적 유혹에로 이끄는 영화에 투항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좋은 세상 더 많은 친구, 그리고 김기덕
김기덕은 오른 쪽의 자리에 자기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동시에 왼쪽에도 설 장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종교이며, 그는 세상을 바꾸는 대신 세상이 자기에게 준 죄의식과 거기서 견뎌내기 위한 환상으로서의 구원에 매달리고 있는 예술가이다. 그는 노동자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서로가 만나야 할 장소를 서로 알지 못했다. 김기덕은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예이다. 나는 좋은 세상에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더 많은 친구들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투쟁은 임금과 법 조항에서뿐만 아니라 좀 더 넓게, 텔레비전 모니터 화면과 스크린과 서점과 콘서트 홀과 미술 전시관과 무대에로 더 펼쳐져야 한다고 믿는다. 당신이 당신의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좋은 세상이란 그저 돈을 많이 벌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는 고작 그런 세상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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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나쁜 남자라는 영화를 보았다. 한국의 소위 "페미니스트"들에게 폭탄을 맞은 영화. 사랑하는 여인을 창녀로 만들었다는 그리고 그 여자가 결국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무엇보다도 두 남녀는 여성의 성매매를 생계 수단으로 살아가기로 한다는 줄거리. 줄거리만 들으면 경악할 사람들 많겠지.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발언을 하는 것이 되는 영화. 위험한 영화.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좋다. 한국 영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앞으로 이 영화라고 할 생각이다.  돌을 맞을 때 맞더라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다. 젠장.. ^^
  
우선 이 영화는 사랑얘기가 아니다. 사랑 얘기로 읽으면 도무지 말이 안되는 것 맞다. 이 영화는 공존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이 사람과 공존하는 것. 특히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공존..
  
남자 주인공은 길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를 만난다. 자신을 죽어도 데이트 한 번 해 볼 수 없는 여대생.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서양미술사" 책을 끼고 다니는 여대생.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본다.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도 있구나..하고 바라본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남자와 같은 벤치에 앉아있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 불쾌하다. 사실은 좀 무섭다. 이 인간이 나한테 나쁜 짓이라도 하면 어쩌지? 그래서 너같은 것이 감히 나를? 이라는 시선을 던지고 다른 의자로 옮겨 앉는다. 남자는 혼자 벤치에 남아서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역시 대학생 애인이 있고, 둘은 너무 애틋하다. 남자는 갑자기 지나던 길을 멈춰 여자에게 기습 키스를 한다. 사람들은 몰려들고, 해병대까지 동원되어 남자는 죽도록 맞는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침을 뱉는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에게 공존을 이야기 하면 가진 자들은 불쾌해한다. 그냥 같이 앉아 있을 수 있겟냐고, 같이 살 수는 없겠냐고 하는 것도 가진 자들은 "뺏으려느냐?"고 화들짝 놀란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겠다고 말해도 소위 "여론"은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재벌을 다 죽일 것이라는 흉한 소문을 퍼뜨린다. 그래서 못가진 자들은 빽소리를 낸다. 나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파업도 하고 농성도 한다. 여전히 그냥 같이 살자는 것이지만 가진 자들의 반응은 격렬하다. 여론은 노동자의 편이 아니고, 해병대는 동원된다. 못가진자는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고 "네 까짓 것이 감히?"라는 소리를 듣는다. 공존을 거부한 쪽은 가진 자임에도 불구하고 욕을 먹는 쪽은 못 가진 쪽이다.
  
현실은 여기까지. 하지만 영화는 한걸음 더 나간다. 가진 자를 납치해서 못가진 자로 만들어버리는 인위적인 행위가 가능한 것이 영화다. 사실 그 여자가 훔쳤던 드가류의 그림은 남자가 즐겨보는 플레이보이의 유럽판일 뿐이다. 이제 그 여자도 6만원짜리가 된다.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것. 사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여자에게 강요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네가 네 자리에서 나와 공존할 수 없다면 너도 나처럼 만들 수 밖에.. 라고 선언한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굳이 사랑이라고 말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영화에서 쭈욱 얘기하듯이 양아치들에게 사랑은 사치다. 먹고 사는 것, 죽고 죽이는 것이 법칙인 사창가에 버섯처럼 사는 양아치들에게 사랑은 사치다. 그래서 양아치가 무슨 사랑이냐고 남자는 자신의 부하를 죽도록 패준다. 그리고 그 부하에게 칼로 찔린다. 부하가 남기고 간 칼을 땅에 묻는 남자를 보면서 나는 김기덕 감독이 소름끼칠 만큼 계급적인 사람이라는 암시를 받는다. 양아치에게 사랑은 사치지만 절대로 양아치는 양아치를 배신해선 안된다. 김기덕 감독이 좋아진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벤치에 다시 앉아본다. 결국 남자가 여자에게 바랬던 것은 이렇게 따뜻한 봄날에 벤치에 같이 앉아서도 서로 경계하거나 무서워하거나 적대시 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남자는 말한다. 우리는 너희의 것을 뺏으려는 게 아니고 우리도 죽지 않고 사람답게 너희랑 같이 살고 싶은 것 뿐이다...호들갑 떨지 말라는 말이다...가진 자들아..
  
남자는 여자와 똑같이 생긴 사람과 "공존"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남자와 여자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다. 나중에 그 죽은 여자가 남겨놓은 사진은 바로 현재를 사는 남자와 여자의 사진이었다. 죽어버린 단 한 번의 공존의 시도. 남자와 여자가 가장 첨예하게 갈등하던 시절, 남자와 여자는 공존을 할 줄 알았던 여자의 죽음을 함께 지켜봤다. 우리에게 "공존"의 시도는 이제 죽었을까? 죽어버린 공존의 시도를 보면서 나는 몰락해버린 "공존"의 세계들을 생각했다.
   
여자와 남자는 다시 만난다. 여자는 노동자가 되어 몸을 팔고 남자에게 온다. 남자는 사창가를 떠나서 "공존"의 기억이 자살해버린 갯가에 서있다. 둘은 그 곳에서 만난다. 그리고 여자는 창녀로 남자는 그 창녀의 차를 몰아주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여자는 몸을 팔고 남자는 뒤치닥거리를 한다.  이 장면이 아마도 많은 사람에게 가장 도발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감독이 그리는 세상이 참으로 소박하다는 생각을 한다. 혁명을 해서 다 죽여버리겠어!라고 말하지 않는 감독. 그저 외딴 섬마을 바닷가에서 노동을 팔고 노동을 사고 그러면서 조용히 살겠어. 사랑을 하든 공존을 하든 서고 경계하고 싸우지 말고 소규모로 말이야.. 라고 말하는 감독. 칠레의 MIR운동이 생각났다.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외딴 산골에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던 그들. 결국 그들은 아옌데가 떠난 칠레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피노쳇이 수없이 죽였지만 계속해서 재생산되던 작은 공동체, 공존의 꿈은 지금도 칠레에 남아있다.
  
나의 이 영화 읽기는 사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영화를 2번 봤는데 정말이지 감독의 메세지가 너무나 분명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여서 그럴까? 파란대문을 볼 때도 느꼈지만 가장 "파격적인" 줄거리를 갖고 실은 참으로 소박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좋다. 감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는 나쁜남자예요.. 라고 말할 생각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도 그런 공존의 세상이기에...
  
사족) 이 감독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 나는 당연히..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나한테 묻는다. 근데 너는? ... 혹시 엉뚱한 곳에 있는 거 아닌가? 나? ... at 2004-04-07 (wed)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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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22:26 2009/06/1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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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벽길 2009/06/17 00:08

    무엇 때문인지 이 글에 자꾸 이상한 덧글과 트랙백이 걸린다. 웬 똥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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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카페 홍보 도우미 다운받기 Tracked from 2009/06/16 20:57

    가입한 카페에 자동으로 글을 올려 주는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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