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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2008. 『어루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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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2008. 『어루만지다』. 마음산책.
 
원래는 고종석의 이 책 말고 다른 책을 읽어보려 했는데, 도서관에 들어온 신간서적 중에는 이것밖에 없어서 읽게 되었다가 푹 빠져들었다.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손봐서 엮은 책인데, 글의 곳곳에 자유주의자로서의 고종석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물론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을 때에는 한 편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책으로 나오니 또 읽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의 속편 격이라고 하지만, 이전의 것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고, 자신이 『어루만지다』를 “자매서이되 온전한 독립서”라고 한 것에도 드러나듯이, 이것만 따로 봐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아래 몇 부분을 발췌해놓긴 했지만, 발췌한 부분만을 보기보다는 책 자체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개 글 속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섞여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잘잘한 일상에서부터 우리말 풀이, 상식, 세상사에 관한 얘기들까지 고종석이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잘 녹아 있다. 자신의 개인사를 글 속에 집어넣어서 이렇게 맛깔나게 풀어놓기도 쉽지 않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의견이 다른 곳도 있지만, 대체로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다. 이럴 때보면 내가 고종석의 자유주의에 말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사실 아직까지도 딱히 무슨 입장이란 것이 서있는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왔다갔다 하니 어쩔 수 없다. 아직 배움이나 경험이 부족해서일까. 하지만 이 글들이 원래 올라왔던 인터넷 한국일보의 관련 페이지를 보면 고종석의 글에 동의하지 못하고 비방을 하는 이들의 댓글이 다수 발견된다. 아직까지 고종석 정도의 입장도 아직은 편하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아래 발췌한 부분 중의 몇 개를 가지고는 아는 사람과 토론을 해도 좋을 듯 싶다. 그러면 좀더 생각이 정리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런 책을 읽는 도중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여전히 나는 삶을 너무 각박하게 사는 것 같다. 좀더 여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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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붓심이 피운 마흔가지 ‘사랑언어’ (한겨레, 전진식 기자, 2009-01-09 오후 07:20:08)
〈어루만지다〉고종석 지음/마음산책·1만4000원
지난해 신문 연재글 손질해 엮어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속편 격
입술·주름·혀놀림…우리말 탐색
음운 되새김질 의미·감성 꺼내
 
 
기자·소설가·언어학자·번역가·정치평론가. 고종석(50)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같은자리말들이다.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쓰기로 이름난 그가 새해 들어 스물한 권째 책을 펴냈다. 1993년 장편소설 <기자들>을 내놓은 뒤 16년 만이니, 해마다 한 권 넘게 책을 쓴 셈이다. 문학비평가 권성우씨는 그의 글 알짬으로 “유목민적 자유로움과 강한 자존심”이 빚어낸 “성찰적 유미주의자의 열린 시선”을 들기도 했다. 그의 붓심은 천변만화 유위변전의 언어를 꽃받침 삼아 피어난다. 글마다 차림새는 달라졌어도 그의 글을 하나로 꿰는 코바늘은 사랑이다. 사랑은 그가 서른넷 “푸른 나이”일 적 펴낸 첫 책 첫머리부터 압정처럼 박혀 있다. “사랑에 공포는 없다, 최상의 도덕이므로. 사랑에 의혹은 없다, 최대의 진리이므로. 사랑에 속박은 없다, 참다운 자유이므로.”(우치무라 간조)
 
<어루만지다>는 지난해 한 신문에 연재한 글을 손질해 엮은 책이다. 지은이는 13년 전 나온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의 속편 격”이라 인정하면서도 체제·내용을 달리했으므로 “자매서이되 온전한 독립서”라고 새겼다. 책은 “입술과 입술을 맞댐으로써 우리는 사랑의 기슭에 발을 들여놓는다”에서 시작해 “(무/잠재)의식 속에 한 점 그늘, 한 점 구김살, 한 점 주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겪지 못하고 생을 지나쳐 온 것이리라”로 맺는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그가 토박이말 마흔 개를 추리고 “그 모국어 낱말들이 서로 수줍게 사랑하고 사납게 질투하며 격렬히 춤추는 모양”을 묘사한 것은 자연스럽다. 그가 뽑은 ‘사랑 사전’의 올림말엔 입술·혀놀림·발가락·손톱·잇바디·주름처럼 몸의 부분을 가리키는 말들이 가장 많다. 그것들 사이에 감추다·궂기다·어루만지다·엿보다·엇갈리다와 같은 동사가 지나고, 바람벽·그네·어둑새벽·술·보름·춤·구슬 등이 앞말들을 두르고 비추는 풍경 노릇을 한다. 그 낱말들이 친족이나 인척처럼 엮인 “텍스트의 안감은 로맨스와 에로스의 경계에 걸쳐 있다.”
 
‘미끈하다’ 편에서 문장 예닐곱을 솎아 보면, 지은이가 사랑의 말을 다루는 실루엣이 드러난다. “미끈함은 점액질의 미끄러움이다 … 미끈함의 점액질 정도가 미끄러움보다 크다는 것은 그 끈끈함이 /ㄴ/ 소리 안에 담겨 있다는 뜻일 테다. /ㄹ/은 그저 흐를 뿐이지만 /ㄴ/은 끈끈하게 흐른다 … 미끈함은 성적 쾌락의 한 질료다 … 거푸거푸 만지고 거듭 문지르면 미끈해지고 매끄러워진다 … 만지는 것은 사랑 행위의 처음이자 끝이다 … 그 미끈함을 일상의 끈끈한 생동으로 껴안을 때, 연애는 (어쩌면) 활명적(活命的)이다.” 음성학·음운론의 관점에서 말을 분석한 뒤 그 결을 찬찬히 되새김질하면서 의미와 감성을 끄집어내는 식이다. 이쯤에서 말이 성길 때 지은이는 문학·음악·영화 등으로 부챗살처럼 생각을 넓혀 빛깔을 입히고 유약을 바른다. <훈민정음>과 <훈몽자회>를 두루 인용하는가 하면, 향가·고려가요에서부터 신경림·황인숙의 시까지 불러낸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글뿐 아니라 개그맨 김국진도 ‘사랑의 말’로 호명한다. 스스로 밝혔듯 ‘망측한’ 구절도 과감히 노출했다.
 
논란이 될 대목에서도 지은이는 너나들이하듯 스스럼없다. “몰래 이뤄질 수조차 없을 만큼 성매매의 공간을 말끔히 쓸어냈을 땐, 솟구치는 성욕이 강간 같은 성범죄에서 출구를 찾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꽃값(화대) 없는 청결한 사회보다 꽃값 있는 불순한 사회를 원한다.” 올림말 마흔 개를 모두 토박이말로 삼았다고 했지만 ‘바람벽(--壁)’이 ‘순수한 토박이말’인지는 강물(江-)이 그러하듯 또렷하지 않다. 바늘귀에 실 꿰듯 알뜰하게 다듬은 글에서도 오류가 보인다. 봉우리나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 ‘오름(오롬)’을 ‘오롬(오롬)’으로 잘못 적었다. 그러나 잔실수가 있다 하여 지은이 글이 바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로잡으면 될 일이다. 품질이 좋은 놋쇠를 녹여 부은 다음 다시 두드려 만든 그릇이 방짜라면, 그의 글은 모국어의 물리·사회·생리·심리학을 아우르는 ‘방짜글’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은이를 사랑하는 읽는 이들이 그 티들마저 어루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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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사랑의 기슭 또는 봉우리
 
입술을 쓰는 입맞춤이 섹스가 아니라 그저 밋밋한 정서적 발돋움의 몸짓일 뿐이라는 바로 그 점에 힘입어, 입술 둘레에선 온갖 성적 환상이 피어오른다. 혀는 들춰진 외설이지만, 입술은 외설의 달콤한 가능성으로 창을 낸 순애(純愛)다.
 
우리들 마음속의 소리-이미지 놀이터에서, 그 ‘술’이나 ‘시울’은 차라리 ‘살’과 이웃해있다. 입술은 입살이고, 눈시울은 눈살이므로. 어원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작동하는 이런 민중적 상상력이 입술과 눈시울을 진정한 사랑의 말로 만든다. 살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거처이므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젖어드는 것은 넓은 의미의 사랑 증세, 연민의 증세다. 그 뜨겁게 젖어드는 눈시울은 뭉클한 가슴과 이어져 있다.
 
감추다 - 품거나 담거나 가두거나
 
한 쪽은 감춤이고 다른 쪽은 드러냄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드러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그릇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 드러냄 역시 감춤이다. 그러니까 허영심도 감춤의 욕망이다. 그것은 감추기 위해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이런저런 모자람을 감추기 위해, 꾸며낸 넉넉함을 드러내려는 마음.
 
제가 지닌 좋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전형적 태도는 감춤과 드러냄 사이의 망설임이다. 누군가 그 좋은 것을 훔칠까 걱정스러워 저만 아는 곳에 감출 수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 내놓고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 그 걱정에 앞설 수도 있다. 그렇게 감추고도 싶고 드러내고도 싶은 좋은 것, 그래서 더러 도둑맞기도 하는 좋은 것이 사랑이다.
  
감춤과 들춤은 사랑의 동역학이기도 하다. 그것이 꼭 속된 사랑에서만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일종의 수사(搜査)고, 숨바꼭질이다. 이름에 값하는 사랑이란 감춤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겠으나, 현실의 사랑이 그렇게 씩씩한 것만은 아니다.
 
사실을 곧이곧대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의 관용어 ‘머리를 감추고 꼬리를 숨긴다’에서, ‘감추다’와 ‘숨기다’는 자리를 맞바꿀 수 있다. 미래의 연인 앞에서 제 마음을 감출 때, 우리는 그 마음을 숨기는 것이다. 그런데, 내 감각으로는, ‘숨긴다’에는 왠지 일탈의 뉘앙스가 짙다. 모자람을 숨기는 사람보다 모자람을 감추는 사람에게 더 너그러울 수 있을 것 같다.
 
감춘다는 것은 또 무언가를 자기만 아는 곳에 가두거나 품거나 담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도록 담을 두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담 안쪽이 사랑의 공간이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사랑의 공간은 비밀의 공간이다.
 
메아리 - 자기애와 교감 사이
 
메아리가 자기애의 언어, 재귀적 사랑의 말인 것은 오직 그 시초에서다. 메아리는 이내 은유를 통해 공감이나 호의적 반응의 뜻을 덤으로 얻었다. ‘메아리(반향)를 얻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말이 사람들의 호의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공감이 모든 사랑의 밑절미라면, 메아리는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방향을 바꾼 소리의 물결이 메아리라면, 메아리는 대화의 언어다. 그 대화가 사랑의 시작이다. 공감하며 대화하는 마음들의 파동은 진폭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정서적 맥놀이를 만들어내는데, 은은히 울려 퍼지는 이 마음의 맥놀이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맥놀이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두 파동의 진동수가 비슷하되 똑같지는 않아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너무 다른 마음들은, 똑같은 마음들이 그렇듯, 사랑이라는 맥놀이를 낳기 어렵다.
 
메아리는 마음과 의견의 교호작용이다. 메아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리고, 사랑의 소리다. 메아리 없는 세상은 공감 없는 세상이고 교감 없는 세상이며 사랑 없는 세상이다.
 
미끈하다 - 점액질의 미끄러움
 
미끈함은 성적 쾌락의 한 질료다. 그것은 거칠함의 폐색(閉塞)에도 미끌미끌함의 방종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덕이다. 미끈함은 평형이고 평상(平常)이다. 지나침과 모자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중간지대. 그것은 또 조화이고 균제(均齊)다. 미끈함 속에서, 미끌미끌함과 거칠함은 균형을 이룬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성감(性感)을 활짝 열어제친다.
 
사랑이 미끈하다는 것은 그것이 치명적일 수도 있고 활명적(活命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미끈함에 미끄러져서 일상을 걷어차고 색황의 나락으로 한없이, 덧없이 굴러 떨어질 때, 연애는 (어쩌면) 치명적이다. 그 미끈함을 일상의 끈끈한 생동으로 껴안을 때, 연애는 (어쩌면) 활명적이다.
 
혀놀림 - 공감각(共感覺)의 물리학
 
구애의 중요한 기술 하나는 말솜씨다. 참이든 참으로 꾸민 거짓이든, 신실함이든 신실함으로 위장한 허장성세든, 그럴싸해 보이는 말에 사람들은 자주 홀린다. 말주변은 사랑의 무기다. 태고 이래 노래꾼들이 읊은 시들의 태반이 사랑노래였던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 혀놀림의 기술은 유혹의 기술이고 사랑의 기술이다.
혀놀림이 사랑에 개입하는 다른 층위는 대놓고 육체적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혀를 놀리는 행위다. 언어로서의 혀놀림이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면, 행위로서의 혀놀림은 보여주거나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행위로서의 혀놀림은 다시 둘로 나뉜다. 그 하나, 보여주는 혀놀림은 저 혼자 혀를 놀리는 것이다. 이 혀놀림은 아직 섹스에는 이르지 않은 행위지만, 섹스로 가기 위한(또는 그저 보는 이들에게 성욕을 불어넣기 위한) 노골적 유혹이거나 도발 행위다. 또 다른 하나, 느끼게 하는 혀놀림은 소위 프렌치키스나 구강성교와 관련돼 있다.
 
가냘프다 - 몸의 뉘앙스, 마음의 실루엣
 
한편으로 사람은 가냘픈 것에 이끌리기도 한다. 맹자가 어짊의 고갱이로 여겼던 측은지심이 바로 가냘픔에 이끌리는 마음일 텐데,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옛사람들이 보기에도 사람의 본성 가운데 하나였다. 섬약하고 가녀린 것을 업신여기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것을 애달파하고 더러 기리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가냘픈 것에 이끌리는 마음은 연애에서 두드러진다. 사람들은 풍만하고 강건한 몸뚱이 이상으로 가냘픈 몸뚱이에 끌리고, 드센 성품 이상으로 여린 성품에 이끌린다. 그러니까 연애라는 비합리적 행위는 부분적으로 자기파괴 욕망에 떠밀리는 것 같다.
 
사람들이 제 잠재적 연인의 가냘픔에 끌리는 이유 하나는 그 가냘픔이 안도감을 준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살이의 처절한 전투(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와 팍팍한 노동에 지친 정신과 육체가 연애라는 안식처를 간구할 때, 그 휴게소는 안전할수록 좋을 테다. 그런데 가냘픔은 일종의 미성숙함, 미숙함, 나약함이다. 가냘픈 연인은 제가 휘어잡을 수 있는 상대, 만만한 대상이다. 연인의 가냘픔 앞에서 사람은 제 존재감을 얻게 되는지 모른다. 비로소 자신이 굳세다는 느낌을.
가냘픈 것은 투명해서, 속이 훤히 비친다. 그것은 속여넘기고 속아넘어가는 것이 지배원리인 불투명의 생존공간에 한시적 무장해제의 쉼터를 마련한다. 그 가냘픔 앞에서, 또는 그 속에서, 사람들은 경계심의 갑옷을 벗고 누울 수 있다.
 
가냘픔은 일종의 결핍이다. 그것은 존재의 모자람이고, 생기의 부족이다. 가냘픔 앞에서, 사람들은 거기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활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가냘픈 것은 가련하고 서러운 것이니.
 
얄팍한 생각, 얄팍한 신의, 얄팍한 지갑을 꺼리면서도 사람들은 가냘픔에 끌린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가냘픈 것이기 때문이리라. ‘가냘프다’에 ‘가늘다’가 포함돼 있다면, 사랑을 낳는 것은 가느다란 신경일 테다. 사랑은 무딘 신경, 씩씩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사랑은 가느다랗고 잘다. 모든 사랑은 잔정이다.
가느다란 것은 다 애잔하다. 그 애잔함에 이끌리는 마음이 사랑이다. 아니, 애잔함이 사랑이다. 가냘픔, 가녀림이 사랑이다.
 
발가락 - 꼼지락거리는 관능
 
발가락은 손가락처럼 사람의 사지 끝머리를 이루고 있고 그 뼈의 구성도 같지만, 그 쓸모가 손가락에 크게 뒤진다. 꼼지락거리는 굴신운동말고 발가락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손가락 덕분에 우리는 호모파베르가 되었지만, 발가락이 인류문명에 이바지한 바는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발가락은 인류의 역사 내내 그저 꼼지락거렸을 뿐이다. (혹시 발가락이 직립과 발돋움에 도움이 됐으려나?)
그러나 발가락의 꼼지락 운동은 그것을 우리 몸의 가장 귀여운 부분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꼬물거리는 발가락은 귀엽다. 더 나아가 아름답다. 그리고 그 귀여움과 아름다움은 설핏 관능을 낳는다. 내 발가락을 누군가의 발가락에 댈 때, 누군가의 발가락을 내 혀로 핥거나 내 이로 살짝 깨물 때, 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우리는 연인이다. 발가락을 꼬물거릴 때, 우리는 호모루덴스다.
 
아름다운 것이 꼭 작아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큰 발(가락)이든 작은 발(가락)이든, 새끼발가락이 가장 크든 가운뎃발가락이 가장 작든, 그 발의 주인에게 반한 사람의 눈에는 그게 미워 보일 리 없다. 오늘 저녁엔(낮이라도 좋고) 제가끔 연인의 발가락을 한번 살펴보자.
 
손톱 - 시샘하는 사랑
 
손톱은 본디 손가락 끝을 보호하기 위해 생겼겠으나, 사람들은 이내 그것에서 장식적 효용을 발견했다. 손톱에 꽃물을 들이거나 매니큐어를 칠할 때, 거기 온갖 형상을 아로새기며 네일아트를 실천할 때, 우리는 손톱을 성적 소구에 이용하는 것이다. 할퀴는 손톱은 동물적 공격성의 기호지만, 보여주는 손톱은 사랑의 미끼다. 누군가의 손이 섬섬옥수라 할 만큼 곱다면, 손톱은 그 섬섬옥수의 우듬지다.
손톱은 제 단단함으로 손가락 끝을 보호함으로써, 얄궂게도 그 밑살을 우리 몸의 가장 여린 부분으로 만들었다. 마음에 꺼림칙하게 걸리는 일을 비유하는 '손톱 밑의 가시'라는 관용어가 손톱밑살의 그 예민함을 드러낸다. 
  
잇바디 - 눈 속의 매화
 
꽃값 - 사랑, 사랑의 꽃이로구나!
 
화대나 화채나 꽃값 같은 말에서, 꽃은 여성(의 몸)의 은유다. 여성을 꽃에 견주는 일은 고금동서의 자연언어에 흔하다. 그 때, 꽃을 꺾는다는 것은 여성과 합방한다, 더 나아가 여성의 정조를 앗는다는 뜻을 지닌다.
 
꽃은 여성을 향한(생각해 보니, 남성을 아울러도 되겠다) 사랑을 나른다. 조의나 축의를 드러내는 꽃들도 있으나, 꽃의 쓰임새는 주로 사랑의 드러냄이다. 이 행성의 수많은 남자들이(때로는 여자들이) 여자들에게(때로는 남자들에게) 사랑의 표시로 꽃(다발)을 건넨다. 소박한 연애에 드는 돈의 적잖은 부분은 꽃값(해웃값말고 꽃 사는 데 드는 돈)이다.
 
우선, 성을 파는 사람을 나무랄 수 있을까? 성의 일차 판매자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기 어려운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회안전망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기 십상이다. 이렇게 성을 팔아서만 삶을 꾸릴 수 있는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자유의사에 따른 거래를 통해 제가끔 원하는 걸 얻는 것이 경제 구성원리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특정한 노동력을 파는 사람들을 들춰내 비난하는 것은, 더 나아가 그 노동을 불법화하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음, 성을 사는 사람을 나무랄 수 있을까? 성 구매자는, 대개, 사지 않고선 그것을 누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배우자나 연인이 없는 사람들, 또는 성적 매력이 하룻밤 짝을 호리기에도 모자란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성욕은, 먹고자 하는 욕구나 자고자 하는 욕구처럼, 원초적이고 강렬한 본능이다. 특정한 종파의 직업적 종교인말고는 제 생애 내내 이 욕구를 억누르는 사람은 없다. 성욕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건강한 사람에게 성 파트너가 없다면, 그가 고를 수 있는 방법은 성을 사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를 힐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건강하지만 매력 없는 누군가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성 매매가 불법이라면? 그래서 성 공급자를 찾기 어렵다면? 그는 의사 성행위라 할 자위에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가능성은 그가 완력으로 남을 굴복시켜 강제로 성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 매매를 철저히 불법화하는 것이 사회의 피륙을 찢어낼 수 있음을 뜻한다.
불법화해도, 성 매매는 이뤄지게 마련이다. 이 피해자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는 이들의 다수는 힘없는 사람들이다. 몰래 이뤄질 수조차 없을 만큼 성 매매의 공간을 말끔히 쓸어냈을 땐, 솟구치는 성욕이 강간 같은 성범죄에서 출구를 찾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꽃값 없는 청결한 사회보다 꽃값 있는 불순한 사회를 원한다. 정부가 할 일은 성 시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성 노동자들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눈길을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 간여를 삼가면서도, 꽃값이 공정가격에 가까워지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 당위로서의 무지(無知)
 
'모름지기'는 '모르면 몰라도'보다 단정의 정도가 한결 더 크다. 올바로 얘기하자면, 단정의 정도가 아니라 강제의 정도라 해야 할 테다. 다른 당위성 부사어들처럼, '모름지기'도 주로 동사나 존재사('있다')와 친하게 어울려 다닐 뿐 형용사나 지정사('이다')와는 사이가 데면데면한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가 모든 범주의 용언하고 두루 어울리는 것과는 두드러진 차이다.
 
한국어에선 '모르다'와 '알다'가 균형 잡힌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난 사랑이 뭔지 알아!"와 반의적 서술 대칭을 이루는 문장은 "난 사랑이 뭔지 몰라!"다. 그러나 영어에는 '모르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다. 영어 화자들은 그저 '알지 못한다(do not know)'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앎을 향한 욕망은 태곳적부터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동물과 가르는 본성으로 간주돼 왔다. 그 욕망에 올라타, 인간은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국의 속담 하나는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이라 말한다. '아는 게 병'이라고 할 때의 앎은 덜 익은 앎, 참에 이르지 못한 앎일 수도 있겠지만(선무당이 사람 죽인다!), 어느 땐 앎 자체가(설령 그것이 참된 앎이라 할지라도!) 병이 되고 탈이 되기도 한다. 비속한 예로, 제 연인의 옛 연인(들)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탈이 되기 십상이다.
 
신비가 없다면 사랑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 하나는 모름이다. 모름은 신비를 낳고, 신비는 사랑을 낳는다. 사랑의 언어는 뜻 모를 소리(여야 하)고, 사랑의 행동은 뜻 모를 행동이(어야 한)다. 설령 알게 됐을 때도 모르는 척하는 것, 모르쇠로 덮어두는 게 사랑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을 진짜 아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에는 성과 생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랑이다.
 
바람벽 - 허깨비가 노는 스크린
 
그네 - 자유와 사랑의 비행선(飛行船)
 
무지개 - 사랑이라는 이념
 
한국 초등학생들이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우듯, 영어권 어린아이들은 Roy G. Biv라는 가상인물의 이름을 익힌다. 무지개 빛깔 이름들(red, orange, yellow, green, blue, indigo, violet)의 첫 자를 따 만든 이름이다. “요크의 리처드가 경솔하게 싸움을 걸었지”(Richard Of York Gave Battle In Vain)라는 문장을 외우기도 한다.
 
이상적인 정치공동체가 갖가지 이념들의 공존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면, 이상적인 사랑공동체 역시 다양한 성 취향들의 공존 위에 세워질 것이다. 무지개의 사랑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무지개의 사랑은 무지개의 사랑들이다.
 
미리내 - 그리움, 또는 부재(不在)의 사랑
 
어떤 사랑은 시공간적 거리에 허물어지고, 어떤 사랑은 그 거리를 연료로 더욱 세차게 불타오른다. “촛불은 바람에 꺼지고 큰불은 바람에 활활 일듯, 이별은 작은 열정을 지워버리고 큰 열정을 더욱 키워준다”고 라로슈푸코는 말했다.
이별이 열정을 키우는 것은 부분적으로 기억의 미화작용 때문이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먼 곳의 연인은, 이미 죽은 연인은 한없이 고귀하게 치장된다. 그 때 부재(不在)의 사랑, 곧 그리움은 최고의 사랑이 된다.
 
누이 - 우애와 연애 사이
 
엇갈리다 - 결정론의 감옥 안에서
 
결정론 앞에서 사람은 보잘것없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그 순간에도 미리 결정된 대로 움직이고(심지어는 생각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결정론 안에서, 모든 우연은 필연이다. 가능세계는 수도 없이 상상할 수 있겠지만, 실현되는 세계는 오직 하나이므로. 적어도 우리의 경험 안쪽에서는 말이다.
상당한 정도의 미결정성이, 곧 우연이 지배하는 양자역학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사태를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즉 우리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연은 필연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엇갈림이나 맞물림이 사람의 자유의지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니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자체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은 미리 결정돼 있다. 자유의지란 환상일 뿐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도 이미 결정돼 있었다.
그러나 결정론이라는 과학적 세계관이 사람을 사악하고 무력하게 만들 것은 확실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또는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제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니까. 말하자면 제가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 결정론의 세계엔 윤리와 책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아니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짐짓 주장해야 한다. 어떤 행위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행위자는 책임에 비례해 벌이나 상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내 연인을, 내 아내나 남편을 내가 골랐다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사랑의 엇갈림이나 맞물림조차 자유의지로 피하거나 이룰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어떤 선택(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도 우리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인간이 자유롭다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 자기기만조차 이미 그리 되도록 결정된 것이겠지만. 
 
궂기다 - 삶과 사랑의 궂은 그늘
 
사실 사랑을 절박하게 만드는 사정 가운데 큰 것은 죽음의 불가피성일 것이다. 영원히 사는 존재들에게 사랑은 아무런 긴장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사랑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 그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하는 잠재적 축복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영원한 불활(不活)로서의 죽음의 불가피성은 사랑의 소진되지 않는 연료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열정과 강도로서, 죽음에 맞선다.
그 사랑의 결사적 굳건함은 더러 죽음과 포개지기도 한다. 그 죽음은 흔히 자살이다. 그 때, 자살로 이어지는 절망은 사랑의 최고치이기도 하다.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랑이야기에 따르면, 로미오는 줄리엣의 위장된 궂긴소식에 절망해 자살하고, 가사(假死) 상태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의 진짜 궂긴소식에 절망해 자살한다.
 
어둑새벽 - 열정의 추억 둘
 
B와 나는 자주 밤새 걷다가 어둑새벽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그리곤 몇 시간 뒤에 또 만났고, 어둑새벽이 될 때까지 붙어있었다. 어둠 속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도시의 낮과 밤이, 저녁과 새벽이 얼마나 다른지 알리라. 어둑새벽의 신촌, 어둑새벽의 원효로, 어둑새벽의 한강은 햇빛 속의 서울과는 아주 다르다. 어둠의 정령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도시의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같은 것이 느껴진다.
 
젊어서도, 요즘처럼, 어둑새벽에 깨어 있을 때가 많았다. 동이 틀 무렵 겨우 잠이 들어, 이내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둑새벽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B와 서울거리를 걸을 때, 어둑새벽은 환희의 시간이었고, 신비의 시간이었다.
 
켤레 - 온전함을 향한 짝짓기
 
사랑의 주체인 두 호모 사피엔스를 ‘켤레’라 부르는 것은 적절한 한국어 사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간절한 사랑이라면, 그 둘이 합쳐져야만 한 벌을 이룬다면, 켤레라 못 부를 것도 없겠다. 연애나 결혼을 한다는 것은 두 짝이 한 켤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 행로는 두 켤레의 신발이 그리는 행로이기도 하다.
 
간지럼 - 성적(性的)인, 슬며시 성적인
 
근지러움은 일종의 불편함이거나 불쾌함이지만, 간지러움은,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일종의 쾌감이다. 등이 근지러우면 긁어서 해결할 수 있지만, 발바닥이 간지러우면 갉아서 해결할 수 없다. 간지러움을 없애려면, 간지러움을 낳는 사물을 살갗에서 분리해야 한다. 그 사물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다.
 
정도가 지나친 간지럼은 고통이다. 때로 그것은 고문에 가까운 고통이고, 실제로 고문의 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절한 수준의 간지럼은 육체적 쾌감이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육체적 쾌감인 성적 쾌감과 슬며시 닮았다. 연인들끼리 섹스를 하면서 (전희로서) 상대의 몸을 어루만지거나 핥아줄 때, 그것이 낳는 쾌감의 핵심은 간지럼이다.
 
간지럼의 쾌감은 아무런 고통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간지럼은 부드럽고 절제 있는 쾌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쾌감에 견줘, 죄의식이 따르지 않는 쾌감이기도 하다.
  
밴대질 -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성은 인간의 실존에서 가장 사적인 부분에 속한다. 그러니 우리 주위의 누군가가, 또는 어떤 저명인사가, 동성애자든 트랜스젠더든, 그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접는 것이 좋겠다. 성년자들이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제 몸을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섞든, 밴대질을 하든 비역질을 하든, 그것은 저마다의 취향이고 권리다.
꼭 특정한 종파의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단 한 번의 성행위도 하지 않고 삶을 마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취향 때문이든 종교적 신념 때문이든 장애 때문이든,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이성애를 실천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들에게 무심하듯, 동성애자들을 무심히 대하는 것도 이성애자들의 윤리다. 성 소수자들은 성 다수자들의 찬양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무심을 바란다. 그럼으로써 세상의 증오가 확 줄어든다면, 그 무심을 실천해야 마땅하다.
 
눈물 - 액화(液化)한 보석
 
아름다운 눈을 흔히 보석에 비유하는 관행에 기대면, 눈물은 액화한 보석, 액체보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보석을 너무 헤프게 흘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사실 사랑이 낳은 눈물이든, 삶의 고단함이 낳은 눈물이든, 그 눈물은 저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에서 추한 것 하나가 바로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다. 자기연민의 눈물, (엄살스러운) 설움의 눈물 말이다.
얼굴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병자들이나 빈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야 어차피 쉽지 않겠지만, 가족, 친구, 동료, 이웃, 공동체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려보자. 결식아동들을 위해, 이주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장애인들을 위해, 병자들을 위해,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보자. 그 눈물이야말로 진짜배기 '사랑의 눈물'이다.
 
딸내미 - 어떤 '가족로맨스'
 
속삭임 - 아리따운 은밀함
 
'속삭이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답게 얘기한다'는 뜻이다. 속삭임은 정다움의 언어다. 희망을 속삭이든, 행복을 속삭이든, 사랑을 속삭이든. 심지어 가슴 아린 사연을 속삭일 때도 마찬가지다. 정답지 않은 사람에게 슬픈 얘기를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을 리는 없을 테니.
속삭임은 또 비밀의 언어다. 사실 이 비밀은 흔히 정다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 비밀-정다움을 신뢰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얘기를, 정답고 미더운 상대만 들었으면 하는 얘기를 우리는 속삭인다. 
 
스스럼 - 청춘의 순정, 노년의 기품
 
'스스럽다'는 '정분이 두텁지 않아 조심스럽다', '수줍고 부끄럽다'는 뜻이다.
남녀 사이의 스스럼은(동성애자라면 같은 성끼리의 스스럼도) 연애의 시작이다. 한눈에 반했든 호감이 쌓여 애정으로 변했든, 아직 고백하지 못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 우리는 스스럽다. 여느 여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남자도, 제가 (몰래) 사랑하게 된 여자 앞에선 스스럽다. 그 스스럼은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말을 더듬거리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진 뒤에야, 그 스스럼은 점차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진다. 가슴 두근거림도, 얼굴 붉어짐도, 어눌함도 차차 잦아들어 이윽고 없어진다. 그것은 열정이 탈바꿈을 겪는다는 뜻이다. 열정은 정으로 도타워진다. 스스럼은 정다움으로 바뀐다.
 
스스럼이 정다움으로 무르익을 숙성기간을 적어도 몇 개월은 거친 뒤에야, 그 정다움이 겨워져, 혹은 격해져, 살갗을 부비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순정의 목마름이 생겨난 순간에야, 섹스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섹스를 나는 스스러워한다. 사실은 혐오한다. 아니, 스스럼이나 혐오감을 떠나서, 그런 '인스턴트 섹스'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강간이나 성매매의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 처음 본 여자(또는 남자)와 잠을 잘 수 있을까? 나는 섹스를 연애의 시작이라 여기지 않고, 중요한 매듭이라 여긴다.
 
스스럼은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도 드러나지만, 도드라지게는 어눌함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짝사랑의 대상 앞에서, 우리 혀는 자주 꼬이고, 할 말은 혀끝을 맴돌 뿐 발설되지 않는다. 스스럼이 (거의) 없어지는 것은 상대와 너나들이를 하게 됐을 때다. 섹스가 스스럼이 없어졌다는 표시이자 스스럼을 없애는 수단이듯, 너나들이 역시 스스럼이 사라졌다는 증거이자 스스럼을 없애는 방법이기도 하다. 같은 연배 사람들과 스스럼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너나들이를 한다. 한편 그들과 스스럼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부러 너나들이를 하기도 한다. 나이 차가 나는 사람들끼리도, 스스럼이 없어지면, 너나들이야 하지 않지만 흔히 반말을 주고받는다.
 
술 - 불꽃으로 타오르는 물
 
술은 사랑의 촉진제다. 그것은 서먹한 남녀 사이의 스스럼을 없애주고, 분위기를 낭만적으로 만든다. 알코올이 뇌를 자극해서만이 아니라, 술자리 자체가 낭만적이다. 수줍은 선남선녀들에게, 술(자리)은 사랑의 묘약이다.
 
나는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죄다 유럽어다)에는 없다고 썼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말 '술'에 딱 대응하는 말도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한숨 - 깨어진 사랑, 되돌아온 사랑
 
'사랑의 말'이라는 주제 아래 우리가 만지작거릴 '한숨'은 '한숨짓다'의 '한숨'이다. 이 한숨은, '한숨 돌리다'의 한숨과 달리, 정한(情恨)을 담고 있다. 한숨은 사랑의 말 가운데서도 슬픈 사랑의 말이다. 한숨은 한탄이고 탄식이다. 한숨은 쓰디쓸 뿐 달콤한 법이 없다. 그것은 웃음의 대척에 있다.
 
한숨은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말, 뜻밖에 깨진 사랑의 말이다. 한숨에서 대뜸 연상되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과부'인 것도 한숨이 슬픈 사랑의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슬플 때도 한숨을 쉬고, 그 슬픔이 갑자기 잦아들었을 때도 한숨을 쉰다. 호모 사피엔스는 신기한 동물이다. 이 대목에서 서양우화 하나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사람이 똑같은 숨결(입김)로 사물을 데우기도 하고 식히기도 하는 걸 보고, 그 이중성에 놀란 반인반수의 삼림신(森林神) 사튀로스가 앞으로 인간과는 상종을 안 하겠다고 했다는 얘기 말이다.
 
한숨은 슬픔의 말이면서 안도의 말이고, 깨어진 사랑의 말이면서 되찾은 사랑의 말이다. 한숨의 사랑은 모순의 사랑이고, 움직이는 사랑이다.
 
보름 - 더 붉게, 더 불룩하게
 
정월 대보름은 그 해의 첫 보름날이라 해서 특별히 '대(大)'를 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늘상 쓰는 '정월 대보름'이란 말에서, '정월'은 사실 필요 없는 말이다. 정월말고는 어느 달의 보름에도 '대'를 붙이지 않으니 말이다. 
'한가위'는 그 달의 '한가운데임'을 뜻하지만, 이 말 역시, 대보름처럼, 아무 달에나 붙이지는 않는다. 오직 8월 보름만이 '가위'고 '가윗날'이고 '한가위'고 '한가윗날'이다. 그러니까 흔히 쓰는 '팔월 한가위'라는 말에서 '팔월'은, '정월 대보름'에서의 '정월'처럼, 남아도는 말이다.
 
'보름'의 어원을 두고는 두 가지 견해가 맞서 있다. 첫째는 이 말을 '불'이나 '붉다', '밝다' 따위와 동계어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둘째는 이 말을 '볼록하다' '불룩하다' '불어나다' '불리다' '부풀다' 같은 말들과 동계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어느 쪽이든 '보름'의 어원은 사랑과 이어져 있다. 사랑은 붉게 타오르는 마음이자 밝게 빛나는 마음이다. 사랑은 부푼 마음이자 불룩한 마음이다. 사랑은 뾰족하지 않고 원만하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는 속담이 가리키듯,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랑은 그 밝음과 부풂의 절정에 이른 뒤 서서히 어두워지고 졸아든다.
 
그믐 - 신생(新生)을 꾀하는 그윽함
 
'그믐'은 '검음'이고 '검정'이다. 그믐밤엔 세상이 온통 검게 어둡다.
사람의 유전자에 박힌 별난 미적 감각 때문이든, 현재의 인종적 위계질서가 만들어낸 편견 때문이든,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검정보다는 하양을 높이 친다.
하양은 진선미고, 검정은 위악추(僞惡醜)다. 그래서 한자어권에서든(黑白ㆍ흑백) 몇몇 유럽어에서든(영어의 'black and white'나 프랑스어의 'noir et blanc'), 그 둘을 함께 언급할 때 검정을 하양에 앞세우는 관행이 기묘하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천오백여 년 전 주흥사(周興嗣)라는 중국인이 <천자문>의 들머리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얹었을 때, 그 세 번째 글자 '검을 현(玄)'은 전혀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거기서, 검다는 것은 깊숙하고 으늑하고 그윽하다는 뜻이다. 그들 생각에, 검다는 것은 깊이나 두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두텁고 그윽하다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하양의 투명성은 얄팍함과 경박함의 기호이기도 하다. 반면에 검정의 불투명성은 그윽함과 두터움의 기호다. 그렇다면, 그믐의 사랑, 검은 사랑을 깊고 그윽한 사랑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배려로 그득 찬, 무르익은 사랑 말이다.
그러나 둥그런 보름달에 견줘 그믐달의 가냘픈 외양이 어떤 결핍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보름달이 가득함의 기호라면 그믐달은 기욺의 극점이다. 그믐달 아래서 우리는 혼자일 것 같다. 그믐달은 혼자됨과 쓸쓸함과 소슬함의 배경이다. 그믐의 사랑은 왠지 짝사랑이거나 슬픈 사랑일 것 같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 같다. 그믐의 사랑, 곧 검음의 사랑은 구름의 사랑이고 흐린 사랑이고 저문 사랑이다.
 
거품 - 사랑의 유토피아
 
거품은 어떻게 사랑의 말이 되는가? 나는 세상의 사랑 가운데 적지 않은 경우가 거품의 심리학에서 태어난 것이리라 넘겨짚는다. 이 때, 거품의 심리학은 스탕달이 <연애론>(De l'Amour: 1822)이라는 에세이에서 발설한 '결정작용(結晶作用: cristallisation)'과 비슷한 효과를 낳는다. 스탕달이 (남성) 연애심리의 핵심단계로 파악한 결정작용이란, 잘츠부르크의 암염 채굴장에 던져진 나뭇가지가 이내 소금의 결정으로 덮여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게 반짝이게 되듯, 연애 심리도 이런 과정을 거쳐 공상의 세계에서 상대방을 극도로 미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정과 거품은 사실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녔다. 한쪽 이미지가 응축된 단단함이라면, 다른 쪽 이미지는 터질 듯한 부풂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슷하다. 상대의 단점에 눈이 멀게 한다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상대의 단점마저 장점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연애감정에 빠졌을 때, 제 연인의 신경질은 섬세함으로 보이고, 우유부단함은 신중함으로 보이며, 유약함은 너그러움으로 보이고, 폭력성은 강건함으로 보인다. 동그란 눈은 보름달을 닮아 예쁘고, 가는 눈은 초승달을 닮아 예쁘다. 연인의 말주변이 좋을 때 그 달변이 발랄한 지성의 증거로 보이듯, 연인의 말수가 적을 때도 그 어눌함이 웅숭깊은 지성의 상징으로 보인다. 연인의 살짝 얽은 얼굴은 귀여운 보조개들로 채워져 있는 듯하고, 연인의 팔자걸음은 자연과 조화롭다. 연인의 파란 눈은 바다와 하늘을 닮아 사랑스럽고, 연인의 갈색 눈은 알밤(栗)처럼 귀엽고 앙증스럽다. 이런 모든 과정은 결정화의 과정이면서 거품이 부풀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결정작용이나 거품의 심리학에 따르면, 연애란 착각이고 환상이다. 사실 적지 않은 연애들이 이런 착각이나 환상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단계에서, 혹은 거품단계에서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런 경우에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이 결혼으로 열매 맺은 뒤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졌을 때, 다시 말해 거품이 터졌을 때, 우리들은 밋밋한 결혼생활을 맥없이, 권태롭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이어간다.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 가운데 용기 있는 이들은 이혼을 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사랑이 거품이라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런 거품 없이 이뤄지는 사랑은 매우 드물 것이다. 열정을 낳는 것은 부풀려진 매력인데, 그 부풀려진 매력이 바로 거품이기 때문이다. 슬퍼라, 거품은 사랑의 유토피아(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다)다.
거품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성자들에게나 가능할 테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성자가 아니다. 우리들의 세속적 사랑 대부분은 거품 속에서, 부풀려진 매력 속에서, 눈에 쓰인 콩깍지에 의지해 이뤄진다. 그러니까 "저 커플은 참 어울리지 않아. 어쩌다가 저런 여자가 저런 남자를 만났다지?" 따위의 말은 입 밖에 내선 안 된다. 거품을 만드는 방식은, 매력을 부풀리는 방식은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제3자의 눈에는 도무지 띄지 않는 어떤 매력이, 거품처럼 부풀어, 두 남녀를 붙어있게 하는 것이다.
 
춤 - 가상의 섹스, 또는 미적 쾌락과 성적 쾌락
 
그대 - 노래 속에 갇힌 정인(情人)
 
문법책엔 '그대'라는 말이 버젓하게 2인칭 대명사로 올라있다. 사전에도 "[편지글 따위에 쓰이어] 1) '너'라고 할 사람을 대접하여 일컫는 말 2) 애인끼리 '당신'이라는 뜻으로 정답게 일컫는 말"이라 풀이돼 있다. 문법 교과서나 사전이 언어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편지글에서든 입말에서든, 21세기 한국어 화자들은 '그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농담의 맥락 바깥에서 손아랫사람이나 애인을 '그대'라고 일컬으면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알맞다. 미치지 않았으면서도 농담의 맥락 바깥에서 '그대'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 사람은 두 부류다. 첫째는 사극(史劇)에 등장하는 캐릭터고, 둘째는 대중가요 가수(나 작사가나 일부 시인)다.
 
시도 넓은 의미의 노래에 속한다면, '그대'는 노래 속에만 존재하는 말이다. 그 말이 노래 바깥으로 튀어나왔을 땐 우스꽝스러움의 기호가 되지만, 노래 안에 얌전히 갇혀 있을 땐 진지한 연심(戀心)의 기호가 된다. 그렇다. '그대'는 진지하다. 때로는 너무 진지하다. 사전에는 편지글에 쓰는 말이라 풀이돼 있지만, 나는 이 글의 독자들에게 서신에서든 전자우편에서든 제 연인을 '그대'라고 일컫지 말기를 간곡히 권한다. 물론 농담의 맥락에선 써도 좋다. 그러나 진지한 연서에서라면 절대 이 말을 써선 안 된다. '그대'의 과잉 진지함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진지함 그 자체로 머무는 곳은 시를 포함한 노래 안에서일 뿐이다.
 
구슬 - 유년의 황홀
 
어루만지다 - 사랑의 처음과 끝
 
섹스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좁은 의미의) 섹스가 배제된 연애가 가능할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서로 어루만질 의사만 있다면. '어루만지다'는 '가볍게 쓰다듬으며 만진다'는 뜻이다. 추상명사를 목적어로 취할 때, 어루만짐의 도구는 손이 아니라 따뜻한 말이나 유무형의 배려일 테다. '어루만지다'는 한자어 '애무(愛撫)하다'와 뜻이 많이 겹친다. 그러나 '애무하다'는 추상명사를 목적어로 취하지 않는다.
 
강제나 거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루만지는 행위는 그 대상에게 주체의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다. 때로 그 사랑의 대상은 "청화백자를 어루만지다"나 "소담한 벼 이삭을 어루만지다"에서처럼 사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 어루만짐의 대상은 상대의 몸이나 마음일 것이다. 제 연인이 무슨 일로 모욕을 당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그 상처를 어루만진다. 따스한 언어로. 제 연인이 계단을 급히 내려오다가 발목이 접질렸을 때, 우리는 그 발목을 어루만진다. 따스하고 섬세한 손길로. 그러니까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다.
 
어루만짐이라는 형태의 스킨십은 사랑의 처음이자 끝이다. 사람의 살은 다른 사람의 살과 닿을 때 생기를 얻는다.
나는 마음의 치유행위이자 사랑행위로서 어루만짐이 되도록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되는 법이다. 늙음은 심신의 쇠약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내나 남편, 정인(情人)이 살아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들은 대개 섹스를 포기함과 동시에 어루만짐까지 포기하고 만다. 어루만짐이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어루만짐은 더 나아가, 때로는 죽음으로 이르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몸이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몸이 어떤 접촉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이 탓이든 다른 이유로든 외로움을 타는 사람에게 어루만짐은 최고의 약손이다.
 
어루만짐이 필요한 사람이 지천일 것이다. 그들을 몸과 마음으로 어루만짐으로써 그 외로움을 치유해 보자. 자신의 외로움도 치유해 보자. 길어봐야 백 년 안에 썩어문드러질 제 손을, 제 볼과 입술을, 그런 멋진 일에 써보자. 한 시인의 표현을 훔쳐오자면,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서랍 - 깊숙이 묻어둔 편지들
 
머리가 말랑말랑할 때 새겨진 기억은 또렷하고 오래 간다. 반면, 머리가 굳은 뒤 새겨진 기억은 자주 흐릿하고 이내 잊힌다. 그래서, 나이 쉰에 다다른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을 때, 초등학생 시절 읽은 책의 줄거리가 서른 넘어서 읽은 책의 줄거리보다 외려 더 또렷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건들의 선후 관계도, 어려서 겪은 일들이 나이 든 뒤 겪은 일들보다 더 또렷할 때가 많다. 나이와 함께 점점 졸아드는 기억력의 물기가 시간의 원근법에 금을 내 엉클어놓아 버리는 것이다.
 
버금 - 정인(情人) 앞에만 서면
 
'버금가다'라는 표현을 제외하면, 일상어에서 '버금'이라는 말은 자주 쓰지 않는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들은 버금가온음, 버금딸림음, 버금딸림조, 버금딸림화음, 버금삼화음, 버금청(알토), 버금막청(메조소프라노) 따위의 표현에서 말고는 '버금'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없다. 사실 이 음악용어들도 한자어 용어를 우리고유어로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낸 말이어서 생경함을 간직하고 있다. 아, '으뜸상' '버금상'이라는 말도 가끔 들을 수 있다. 최우수상이나 우수상, 1등상이나 2등상에 해당할 말을 이리 고친 이들은 분명히 언어민족주의자들일 것이다.
 
독자들도 잘 알다시피 한국어에는 수를 나타내는 낱말체계가 고유어와 한자어로 갈려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따위의 기수사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따위의 서수사는 고유어고, 일, 이, 삼, 사, 오 따위의 기수사와 제일, 제이, 제삼, 제사, 제오 따위의 서수사는 한자어다.
한국어 수사체계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은, 그리고 그 두 종류 수사의 쓰임새에 일정한 규칙이 없는 것은, 한국어를 익히려는 외국인들에게 악몽이다. 왜 "기차는 저녁 팔 시 마흔 분에 떠나"라고 말하면 안 되고 "기차는 저녁 여덟 시 사십 분에 떠나"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그런데 왜 또 군대에서는 '저녁 여덟시 사십분'이 '이십시 사십분'으로 변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왜 '쉰 원짜리 동전'이나 '여덟 초(秒) 동안의 키스'는 그른 표현이고, '오십 원짜리 동전'이나 '팔 초 동안의 키스'는 옳은 표현인지를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그저 "그게 관행이야, 외워!"라고 말할 수밖에.
 
사랑은, 특히 열애나 순애는, 그 주체와 객체의 으뜸감과 버금감을 뒤바꾸는 행위다. 사랑이라는 열병은 그 주체의 자기보존 욕망, 자기확장 욕망을 더러 압도한다. 고금동서의 많은 연애서사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심지어 목숨을 내던지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연애서사 속의 인물들은 자신과 피를 나누지 않은 연인을 위해 더러 목숨을 바친다. 으뜸의 자리를 연인에게 주고, 제게는 버금의 자리를 남긴다. 한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개인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열정에 빠진 한 개인은, 같은 종(種)에 속한 이성(때로는 동성)이라는 것말고는 자신과 아무런 생물학적 실로 연결돼 있지 않은 타인을 자신보다 더 중요시한다. 제 유전자의 확산과 무관한 경우에도 이런 자기희생을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사랑은 정신의 질병이랄 수도 있다. 제 유전자의 확산과 무관한 경우에도 제 짝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생물체가 이 행성 위에 사람말고도 있을까? 없을 것 같다. 순전한 사랑은 그 주체끼리 으뜸의 자리와 버금의 자리를 맞바꾸는 행위다. 또는 최소한, 자기 다음의 자리, 즉 버금 자리에 한 타인을 세우는 행위다.
 
두 차례 주례를 서며 나는 신부 신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늘 같은 편이 돼라. 세상 모든 사람이 네 배우자에게 등을 돌려도 너만은 배우자 편이 돼라. 자기보다 상대방을 더 위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자기 다음 자리에는 상대방을 두어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세상의 으뜸이 되는 것, 상대에게 으뜸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버금으로 내려앉는 것, 2인 공동의 배타적 이기주의, 그게 내가 생각하는 연애고 사랑이다."
 
비탈 - 사랑의 포물선
 
이 행성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어디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서울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미가 제 자식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무조건적 사랑이다. 서울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는 나에겐 가장 편안한 도시가 서울이다. 그리고 편안함은 사랑과 통한다.
 
서울은 편한 도시다. 이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도 그걸 어느 정도 인정할 게다. 24시간 문을 여는 상점이 수두룩하고, 한강둔치에까지 밥과 술을 배달해주는 서비스가 있는 곳이 서울이다. 무료 공중화장실이 서울만큼 흔한 도시도 찾기 어려울 테다. 그런데 이 편한 서울이 내게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야 할 때다. 서울엔 비탈길이 너무 많다. 그 비탈길을 달리는 탈것들도 자주 비틀거린다. 한길만이 아니라 골목길도 비탈진 곳이 많다. 그런데 나는, 비탈길을 내려가는 건 몰라도 오르는 건 질색이다.
 
사랑의 행로도 비탈길 비슷한 것 아닐까?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 늘 평정을 이룰 수만은 없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숨쉬기와 희로애락에서도, 사랑과 걷기는 사뭇 닮았다. 열정이 높은 기울기로 상승할 때, 거기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엔 조바심과 불안이 들러붙어 있다. 비탈길을 오를 때처럼 숨도 가빠진다. 높은 기울기로 상승하는 열정은, 높은 기울기로 하강하는 열정만큼이나 스트레스다. 열정이 하강할 때도, 슬픔과 허무감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엔 후련함, 속 시원함, 해방감이 따른다. 비탈길을 내려갈 때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을 잘 아는 연인들은, 정열의 기울기와 속도를 조절해가며 사랑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연인들은, 열정의 기울기와 속도에 휘둘려, 사랑을 망쳐버릴 것이다.
그런데, 길게 이어지는 사랑이 망쳐버린 사랑보다 꼭 낫다는 법은 없다. 가장 볼품있는 사랑은 때로 가장 망쳐버린 사랑이다. 줄리엣과 로미오의 사랑처럼.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아니, 운명의 문제다. … 사랑의 비탈은 직선이 아니라, 포물선을 포함한 곡선일 수 있다. 구간마다 미분 값이 달라질 수 있다. 아니, 달라지는 게 예사일 것이다. 사랑은 어지러운 행적을 그리는, 굽이굽이 비탈이다.
 
엿보다 - 사랑의 뒤틀림 또는 시동(始動)
  
'엿보기'가 사랑의 말이라면 그 사랑은 불구의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은 제 눈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간수(看守)의 사랑이자, 딴 사람의 눈에 걸려든 수감자의 사랑이다.
 
엿보기는 곱다란 사랑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무꾼과 선녀의 사랑은 지상의 샘에서 멱을 감는 선녀를 나무꾼이 엿봄으로써 시작됐다. 엿보는 사람은 음란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수줍은 사람일 수도 있다. 순애(純愛)는 본디 수줍음에서 발원한다. 연모하는 마음은 붉디붉은데 제 처지에 비춰 언감생심일 때, 사람은 상대를 맞보지 못하고 엿본다. 그 엿보기의 사랑은 흔히 짝사랑이다.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넘보지도 못하는 사랑, 그 비스듬한 사랑이 엿봄의 사랑이다.
 
주름 - 바로크의 무늬
 
주름은 사랑의 얄팍함을 두텁게 한다. 그 평면성을 입체화한다. 주름을 통해서, 사랑은 부피를 얻는다. 주름이란 일종의 접힘, 포개짐, 겹침이기 때문이다. 나이든 연인의 주름은 그가 제 연인을 위해 긴 세월 마다하지 않은 수고의 자국이다. 바지의 주름은 제 연인에게 되도록 멋지게 보이려는 연애의 근본적 욕망에 닿아있다. 똑같은 바지의 구김살은 연인과의 허물없음을 드러낸다. 어느 주름이든, 그것들은 머릿속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구체화한다.
 
나이든 연인들의 주름살은 그들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훈장이다. 주름 없는 사랑은 밋밋한 사랑이고 정적인 사랑이다. 주름은 사랑에 발랄함과 역동성을 부여한다. 아니 발랄하고 역동적인 사랑의 결과가 주름이다. 그 접히고 포개지고 겹친 주름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랑의 사연이 숨어있을 것인가. 그 줄 사이사이에, 그 면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을 것인가. 사랑은 주름을 통해 서사가 된다. 로망이 된다. 아름다움의 추구가 사랑의 한 연료라면, 주름은 사랑을 예술로 만든다. 어느 프랑스 철학자에 따르면, 주름은 바로크의 질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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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1 21:02 2009/07/2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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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gimcheol님의 트윗 Tracked from @gimcheol 2010/11/14 01:54

    이권우의 되살아나는 혀의 에로티시즘을 위하여[親Book]고종석의 <어루만지다>서평 http://bit.ly/cHW7Kh 를 읽고 2008년에 이 글을 읽고 다양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 또한 강추다 http://bit.ly/cqdCQ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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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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