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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회주의’의 실험과 좌절 (장석준, 이론과실천 2002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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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라고 하여 김종철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의 인터뷰 기사가 떴습니다. 나중에 경기도 등의 다른 도로 다룰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서울시장 후보만을 인터뷰하는 것은 서울시장 선거가 여론의 초미의 관심사이긴 하나,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서울중심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켄 리빙스턴은 34세에 런던 시장이 됐는데..." (프레시안 2006-04-25 오후 12:08:12)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 민주노동당 김종철 서울시장 후보 

 

그 인터뷰에서 서울시장을 하기엔 너무 젊은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다고 하자, 김종철 후보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켄 리빙스턴이 34세에 런던 시장이 된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인터뷰를 보고 김종철 후보 블로그의 메모로그에 한 관악당원이 "켄 리빙스턴은 80년대에 런던시 의회 의장이었고, 시장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진 것은 2000년 이후입니다. 즉, 리빙스턴은 2000년에 초대 런던시장에 당선된 것"이라는 관련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에 실린 장석준 동지의 글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덧글을 달았습니다.

 

켄 리빙스턴은 2000년 초대 민선 런던시장이라고 하면 맞습니다.
각 구 자치체를 포괄하는 광역자치체인 ‘런던광역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 GLC)’는 1973년도에 설립되었고, 의원내각제를 고수하는 영국의 상황에서 런던광역시 행정부도 GLC 내의 다수당이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대처정부하의 지방자치선거에서 노동당 내의 좌파는 선전을 하여 런던광역시의회(GLC)의 다수파가 되었지요. 그리고 당시 런던시당 지도자, 즉 런던시의회 의장이었던 켄 리빙스턴은 자연스럽게 런던시정부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관선시장인 셈이죠. 따라서 2000년에 두번째로 시장을 하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켄 리빙스턴이 시장으로 있던 1981년부터 1986년까지의 런던은 ‘붉은’ GLC라고 불리울 정도로 좌파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대중교통체제의 추진,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의 건설, 민중계획국의 설치, 그리고 런던시의 총체적 변혁 전망을 담은 『런던산업전략』의 발간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시처럼 여기던 대처정부가 1986년 런던 광역자치체의 폐지를 통과시킨 후 최후를 맞았지요.

 

자세한 내용은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에 실린 장석준 동지의 글 '도시 사회주의’의 실험과 좌절 - 1981년∼1986년 영국 런던광역시정부의 경험을 참고하십시오.

 

아래 이론과 실천에 실린 원글을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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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회주의’의 실험과 좌절
- 1981년∼1986년 영국 런던광역시정부의 경험

장석준


  현재 유럽의 주요 대도시 시장들 중 상당수는 좌파 정치인이다. 파리 시장은 사회당 출신이고, 베를린 시장은 사회민주당 출신이다. 여기에는 런던 시장도 포함된다. 그런데, 런던 시장 켄 리빙스턴은 좌파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영국의 주류 좌파정당 노동당 소속이 아니다. 원래는 노동당 하원의원이었지만, 2000년에 실시된 런던광역시장 선거에서 런던 시민이 가장 원하는 시장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가 갖은 방법으로 그의 출마를 막으려 하자 결국 항명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고 그래서 당에서 제명되었던 것이다. 시장으로 당선된 지금도 리빙스턴 자신은 복당(復黨)을 원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블레어 정부의 런던지하철 사유화안에 반대하는 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에 노동당 지도부와의 관계는 더욱 나빠지고만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몇 십 년 간 몸담았던 당에서 제명된 한 외로운 정치인이 런던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마침 시장 선거가 한창일 때 런던에 체류하고 있던 필자의 한 친구는 하숙집 주인이 리빙스턴을 ‘우리의 켄’이라고 부르며 마치 잘 아는 동무처럼 여기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한 쪽에서는 위험한 극좌파들과 어울려 다니는 ‘붉은 켄’이라는 험담들이 끊이지 않고, 다른 한 쪽에서는 ‘우리의 켄’이라고 부르는 인물, 그가 바로 지금 런던광역시장이다. 여기에는 켄 리빙스턴이라는 한 명의 대중 정치인의 개인적 매력 이상의 뭔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1980년대 초·중반 노동당 런던광역시정부의 역사적 실험, 그리고 이에 대한 런던 시민들의 기억이다.  

  
1. 노동당 좌파가 런던광역시정부를 장악하다

  노동당은 1974년에 노동당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선거강령과 함께 권좌에 복귀했다. 당시 노동당 강령의 핵심은 ‘국민기업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NEB)’라는 국가지주회사를 만들어 주요 대기업의 주식을 장악하고 그래서 독점자본의 상당 부분을 국공유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노동당 우파는 이 급진적인 공약을 실행할 의사가 없었고 그래서 집권 이후 NEB의 설립 자체를 계속 미뤘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원안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이 경험은 노동당 좌파를 각성시키고 단결하게 만들었다. NEB안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였던 전 산업부장관 토니 벤을 중심으로 해서 각양각색의 당내 좌파 분파들이 결집했다(‘벤 좌파’라고 불림). 이들은 당 강령이 실행되지 못한 이유를 우파 주도의 의원단이 지배하는 당 구조에서 찾고 당내 민주주의의 쟁취를 핵심 요구로 내세웠다.

  
  사실 이 벤 좌파 운동 자체는 1981년을 정점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 글의 주제는 이것이 아니다. 굳이 이야기를 벤 좌파 운동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노동당의 지역정치가 급진화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벤 좌파 운동의 주요 기반은 주로 급진적인 직장위원들(영국의 산별노동조합에서 개별 사업장의 투쟁과 단체협상을 주도하는 활동가들)이거나 지구당 활동가들이었다. 특히 과거부터 노동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북부 산업지역의 도시들(셰필드 등), 그리고 런던광역시의 지구당들이 주무대가 됐다.

   
  그럼, 우리의 관심 대상인 런던광역시를 보자. 런던‘광역시’가 처음 생긴 것은 1973년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각 구 자치체를 포괄하는 광역자치체인 ‘런던광역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 GLC)’가 설립됐다. 의원내각제를 고수하는 영국의 전통을 따라 런던광역시 행정부도 GLC 내 다수당이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GLC가 처음 설립됐을 때부터 다수당은 노동당이었다. 그러나, 노동당 중앙정부가 자신의 강령을 저버리고 오히려 공공부문의 긴축을 추진하여 공공부문 노동조합과 대결을 벌이던 1970년대 말에 시정부의 다수파 자리는 보수당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런던시 노동당 역시 중앙정부의 방침대로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고 그 임대료를 올려 런던 시민들의 불만을 샀던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이 때부터 전당적인 당내 민주화운동에 발 맞추어 런던시당에서도 좌파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긴축재정정책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나 노동당 지구당 활동가들 중에는 1960년대 급진좌파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1977년에 드디어 런던시당 집행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런던 노동당 소식지>라는 매체를 매개로 런던시의 노동당 좌파 활동가들과 선진 노동자들을 잇는 활동가 네트워크를 따로 만들었다. 이 활동가 네트워크는 1981년의 지방자치선거에서 노동당이 선전(善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서슬 퍼런 대처가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그 때에 런던시에서는 노동당이, 그것도 노동당 내의 좌파가 GLC의 다수파가 됐다. 켄 리빙스턴은 바로 이 때 런던시당 지도자였고, 의원내각제의 관례에 따라 런던시정부를 이끌게 됐던 것이다.

2. ‘붉은’ GLC는 어떠한 실천들을 벌였나?
 
1) 대중교통체제의 추진
 
  1981년 선거에서 노동당 런던시지부의 핵심 강령들 중 하나는 교통문제의 해결이었다. 자가용 승용차의 증가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런던의 교통문제에 대해 이들은 대중교통의 활성화를 공약했다.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대폭 낮춰 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하고, 자가용 승용차 중심의 도로 교통을 되도록 억제해, 런던을 ‘걷고 싶은 도시’, ‘무공해 도시’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이었다.

   
  노동당이 집권하자마자 GLC는 곧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확 내렸다. 시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고, 실제로 대중교통 이용률이 획기적으로 증대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보수세력의 반격으로 인해 시끄러운 법정 분쟁의 대상이 됐다. 보수적인 법원은 요금의 재인상을 명령했다. 그러나, GLC는 지속적인 캠페인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여, 비록 처음의 인하폭보다는 적지만, 결국 요금 인하를 관철시켰다.

   
  당시 GLC의 교통정책이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은 2000년 켄 리빙스턴의 선거공약에서 핵심이 20년 전의 대중교통정책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요금인하문제를 둘러싼 보수세력과의 대결은 좌파 지자체에 대한 대처 정부의 경계와 긴장을 자극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2) 노동자가 경제의 주인이 된다 -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

  노동당 런던시지부의 선거강령 중에서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런던시 차원에서 NEB를 제대로 실천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런던시의 고용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경제의 진보적인 구조조정을 이루기 위해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Greater London Enterprise Board, GLEB)’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했다.

   
  GLEB는 런던시에서 재정을 출자하는 지주회사이고, 그 이사회는 GLC, 기업계, 노동조합의 대표들로 구성된다. GLEB는 출자나 주식 매입을 통해 사기업을 지방공기업으로 만들거나 혹은 대주주로서 지배력을 행사하며, 이러한 소유·지배를 통해 기업들로 하여금 ‘기업 계획’을 추진하게 한다. 기업 계획의 주된 주체는 해당 기업의 산별노조 지부다. 즉,  GLEB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금융 지원을 받은 기업에서 해당 기업의 노조 지부는 GLEB의 엄호 아래 강력한 단체협상력으로 경영진에게 친노동자적인 기업 계획을 관철시킨다. 기업 계획의 주목표는 고용의 양적 수준의 유지 혹은 증대, 고용의 질적 수준의 향상(즉 산업민주주의의 달성), 여성 노동자나 유색인 노동자를 위한 기회균등정책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약을 실제 추진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좌파 경제학자들의 주도로 2년간 준비 작업이 계속되다가, 1983년에야 드디어 출범했다. GLC가 유일한 출자자였고, 모든 투자 재원은 GLC로부터 나왔다. 이사진은 주로 노동조합 대표들, 협동조합부문의 경영자들, 그리고 경영·기술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이사 선임 기준은 GLEB의 정책 목표, 즉 고용 창출과 진보적인 산업투자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의하는지가 우선이었다. 첫 두 해에 걸쳐 GLC는 4천만 파운드를 GLEB에 할애했고, 이는 다시 대부나 주식 매입의 형태로 사기업에 투자되었다. GLEB가 지배 주주가 아닌 경우에도, GLEB가 주식을 매입한 사기업의 평균 지분은 25%를 넘었다. GLC의 공적 자금 투입분에 대해 환수는 요구되지 않았으며, 다만 GLC가 표명한 목표를 충족시키고 있는지 여부만이 모니터링됐다. 첫 2년 동안 GLEB가 새로 설립하거나 투자한 기업은 백 개 이상이었고,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창출된 새로운 일자리는 삼천 개 정도였다. GLEB가 새로 설립한 대표적인 벤처기업 중에는 노동조합운동을 위한 주간지 발행 사업도 있었다.

        
  처음 설립됐을 때 GLEB는 7개의 부서로 이뤄졌다. 자산부, 금융부, 기술부, 투자부, 산업부문별전략부, 정보부, 그리고 구조조정투자부가 그것이었다. 이 중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구조조정투자부와 기술부였다. 구조조정투자부는 진보적 산업구조조정을 기획·집행·감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조조정투자부는 다시 협동조합과, 기회균등과, 기업계획과로 나눠졌다. GLEB 활동 3년차부터는 모든 투자 계획이 반드시 구조조정투자부의 심사를 거쳐야만 하게 됐다. 구조조정투자부는 GLEB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은 사기업들이 GLEB의 ‘사회적’ 목표를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철저히 감사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해당 기업 내의 노동자 세력을 지원하여 효과적인 경영 개입을 추진하게 했다.

       
  또 하나의 핵심 부서인 기술부는 마이클 쿨리라는 노동운동가·과학기술운동가가 담당했다. 그는 70년대 말의 유명한 루카스항공사 실험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루카스항공사는 전투기 제조업의 불황을 이유로 인원감축을 추진했는데, 쿨리를 비롯한 기술직 노동자들이 단협에서 대안제품 생산계획을 제출하여 정리해고를 막았었다. 그 후부터 영국에서는 기술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숙련과 건강을 중요시하는 인간 중심 기술의 개발, 이윤보다는 민중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대안적 생산기술의 개발을 추진하는 운동이 불붙었다. 쿨리의 기술부는 이 운동을 지원하는 무기고 역할을 했다. 기술부는 노동조합과 주민 집단의 기술개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3개의 기술 네트워크, 즉 런던에너지환경네트워크, 런던운송네트워크, 런던혁신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들 네트워크는 인근의 기능대학을 거점으로 삼아 과학·기술 지식을 지원 받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기술개발의 성과는 GLEB가 지원하는 협동조합 기업이나 GLEB 소유 기업으로 이전되었다.

    
  GLEB는 소규모의 기업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협동조합화를 추진했다. GLEB 협동조합부의 모토는 “‘기업 계획’은 협동조합으로 가기 위한 대장정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GLEB는 특별히 소규모 기업의 협동조합화를 지원하기 위해 ‘런던협동조합기업위원회(London Cooperative Enterprise Board, LCEB)’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LCEB에는 2만5천 파운드가 출자됐고, 그 이사진은 소매협동조합협회, TUC(영국 노총), 주요 협동조합들, 그리고 협동조합운동단체인 런던산업공동소유운동, 협동조합 지원기구인 협동조합개발국의 대표들로 구성됐다.

    
  GLC의 대안경제정책의 핵심은 소수의 경제 관료가 아니라 각 기업의 노동자들 자신, 그리고 다양한 노동운동 조직들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는 이사진 구성에서 드러날 뿐만 아니라 GLEB의 경영 개입이 항상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화와 단체협상력, 일상적 경영참여활동을 북돋는 데서 출발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3) 민중이 도시 계획의 주인이 된다 - 민중계획

  80년대 GLC 내의 또 다른 중요한 기관은 저명한 여성주의자·사회주의자인 힐라리 웨인라이트가 주도하던 ‘민중계획국’이었다. 이 조직은 런던시의 개발·재개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다양한 주민집단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들은 과거의 노동당 시정부들이 했던 것처럼 도시 계획의 ‘구상’과 ‘집행’ 과정은 엘리트들에게 맡기고 민중들에게는 형식적인 ‘심의’만 요구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민중들이 도시계획의 설계과정에 참여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이것이 바로 ‘민중계획’이었다.

   
  예를 들어, 민중계획국 요원들은 보수당 정부의 공항 건설 계획에 반대해 투쟁하는 로얄 독스랜드 지역의 주민운동 단체인 ‘공항건설 반대운동(Campaign Against the Airport, CAA)’의 모임에 참석해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주민들이 단순히 반대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대안적인 지역개발계획의 실마리들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국원들은 대안적인 개발계획을 다듬기 위해 주민들이 GLC로부터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물었다. CAA 활동가들은 GLC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아 ‘민중계획센터(People’s Planning Centre, PCC)’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PCC가 실제 세워졌다. PCC에는 독스랜드 주민들 누구나 자신의 개발 구상을 가져와 논의할 수 있었다. PCC에 채용된 상근자는 두 명의 젊은 주부, 대학생, 은퇴한 항만 노동자,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노동조합 활동가, 이렇게 4명이었다.

    
  결과만을 이야기하면, PCC가 민중계획국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대안적 지역개발계획인 ‘로얄 독스랜드 지역을 위한 민중계획’은 실제 관철되지는 못했다. 공항건설계획은 보수당 중앙정부의 확고한 방침이었고, 지자체인 GLC가 이를 무효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민중계획국에 모인 좌파 활동가들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은 민중들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게 하면 사기업이나 관료기구의 전문 지식보다 훨씬 창조적인 상상력과 생활 속의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와 같은 관료주의적인 중앙집중 방식의 계획이 아니라, 초기 구상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민중 집단이 참여하는 참여계획 방식이 필요하다.
  비슷한 사례는 코인 스트리트에서도 있었다. 여기서는 예술가 집단이 재개발 작업에 참여하여 낡은 거리를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시켰다.

4) 『런던산업전략』 - 지방자치 사회주의?

  몇 년간의 GLEB 및 민중계획 경험은 런던시의 총체적 변혁 전망으로 종합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1985년에 발간된 『런던산업전략』이라는 책자였다. 이 책에는 런던시의 지역경제를 이루는 25개의 부문에 대해 상세한 미시적 계획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영국 노동당으로서는 최초로 경제활동에 대해 공공당국의 적극적인 계획 지침을 제시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는 몇몇 전문가들의 손에서 나온 흔한 관료적 청사진이 아니라 런던시의 노동자·민중의 목소리가 집약된 참여민주주의의 소산이었다. 비록 그 다음해에 GLC가 해체되어버림으로써 이 책은 사문서로 끝났지만, 이것이 보여준 ‘민주적 계획’의 가능성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당시 많은 평자들은 이러한 GLC의 활약을 ‘지방자치 사회주의’ 혹은 ‘도시 사회주의’라는 말로 요약했다.

3. ‘붉은’ GLC의 최후 -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한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이루는 것(일국 사회주의)도 불가능한데, 하물며 한 도시에서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맑스주의자 미셸 뢰비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브라질 노동자당이 펼쳐 보인 참여예산제의 성과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와 같이 반문한 바 있다. 이러한 한계는 런던과 같은 세계적 대도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세계 역사상 가장 우경한 정부 중 하나인 대처의 보수당 내각이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 아래서라면 말이다.

   
  노동당 좌파가 주도하는 지자체의 활약이 드높아질수록 중앙정부의 탄압도 본격화되었다. 첫 나팔은 IRA(아일랜드공화군,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를 지지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어울리는 리빙스턴에 대한 언론의 ‘빨갱이’ 공세였다. 대처 정부는 런던 광역자치체를 해체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지자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삭감했으며, 지자체가 지방세를 증대하거나 신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1984∼1985년 광산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과 동시에 벌어졌다.

    
  처음에 리빙스턴을 비롯한 노동당 좌파 자치단체장들은 전국적 연대를 통해 중앙정부의 지방예산 축소 계획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나, 광산노동자 파업이 패배로 끝나는 가운데 이 운동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GLC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노동당이 다음 총선에서 집권하는 것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다. 이 때부터 GLC의 활동은 마치 종말의 그날을 알면서 최후의 안간힘을 다하는 ‘백조의 노래’ 같은 음조를 띠었다. 1986년 대처 정부는 끝내 런던 광역자치체의 폐지를 통과시켰다. 겉으로는 중앙정부와 기초자치단체가 직접 교류하는 2단계 행정 모델을 통해 행정의 효율화를 달성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정치적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2000년에야 런던 광역자치체는 다시 부활했다. 15년 전의 그 리빙스턴을 첫 직선 시장으로 해서.
 
4. GLC의 실험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
 
  비록 한 도시에서의 사회주의 실험의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다고는 해도, GLC가 열어제친 새로운 실천의 전망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물론 지자체 사회주의라는 전통은 영국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영국식 사회민주주의의 원류인 ‘페이비언 협회’의 주된 실천 방안이 바로 지자체를 장악하고 이를 통해 공공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사회주의는 ‘수도관과 가스관의 사회주의’라고까지 불렸다.

   
  그러나, GLC를 비롯한 80년대 초·중반 노동당 좌파 지자체의 실천은 이러한 전통과 커다란 단절을 긋는 것이었다. 우선, 이들은 단순히 도시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공공재를 확대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사기업을 사회화하고 생산 활동의 계획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GLEB의 활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이들은 과거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처럼 대중들에게 뭔가를 ‘선사’한다는 입장에서 시정(市政)을 펼쳐나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광범한 영역에서 대중의 ‘참여’를 전례 없이 고양시켰다. 81년부터 5년간 GLC는 관료기구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마당과도 같았다. 노동당 좌파와 노동조합 활동가들, 맑스주의 학자들, 여성주의 운동가들, 유색인종 공동체의 지도자들, 대안적 생산계획 운동가들이, 시청 관료들, 노동당 우파 정치인들과 ‘불편한 동맹’을 맺으면서 시정부를 창의와 토론, 실험의 난장(亂場)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자치단체 수준에서, ‘국가의 민주화’라는 것이 실제 가능하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GLC 사례는 진보세력에게 참으로 값진 교훈을 던져준다. 지방자치 영역에서 진보세력의 과제는 단순히 노동운동·민중운동 출신의 지방정치인을 배출하는 것만도 아니고, 지역주민들에게 보다 나은 행정서비스를 ‘베푸는’ 것만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방자치 영역을 대중운동들에 열어주고 사회적 투쟁과 변혁의 장(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지방 국가관료기구를 안으로부터 요동시키고 지역 사회를 아래로부터 뒤흔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진보세력에게 지방자치체 진출은 국회의원을 배출하기 위한 준비 혹은 “우리가 보다 나은 시장, 구청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이 주도하는 경제를 만들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열어가는 ‘운동’의 한 부분, 바로 그것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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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6 02:11 2006/04/26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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