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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혁신자치체, 그 성과와 한계 (홍성태,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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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교수가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에 쓴 일본의 혁신자치체에 관한 글도 담아옵니다. 혁신자치체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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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혁신자치체, 그 성과와 한계


1. 일본의 지방자치 : 전전과 전후

  일본의 지방자치는 메이지 21년, 즉 1889년에 시작되어 이미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의 지방자치제는 ‘지방명망가의 지방자치이며, 그것을 다시 천황과 지방관료가 지배하는 구조’였다. 일본의 지방자치는 주민의 자치에 기반하여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지배와 통치를 관철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메이지 유신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일본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기획이었으며, 이 기획은 군국주의의 지배와 제국주의 전쟁으로 끝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의 지방자치는 이러한 중앙집권구조와 군국주의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도구로서 기능하였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의 근대는 전후의 민주개혁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일본의 근대사에서 전전과 전후라는 구분은 단순한 시기구분 이상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방자치의 경우에도 이 같은 구분은 확실히 유효하다. 전전의 지방자치가 명백히 중앙의 지방통치방식에 불과했다면, 전후의 지방자치는 확실히 새로운 민주적 역량을 육성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학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전후 일본의 지방자치는 대략 세 번의 전환점을 거쳐 변모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 번째, 1953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지방재정의 위기. 이 위기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국토의 황폐와 전후 개혁에 대한 일본의 재정제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 위기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일본의 자치단체는 사실상 자치권을 정지당하는 사태에 처하게 되었다. 요컨대 ‘적자의 자주적 해결을 강요당한 자치체는 이 무렵부터 지역개발에 광분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앙의 정계와 재계의 힘이 자치체로 침투하도록 만들어 지방자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이 시기는 일본이 전후의 경제적 피폐를 딛고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한 ‘고도성장기’이다. 일본은 이 시기 동안에 전전의 경제능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엄청난 파괴를 대가로 이룬 것이었다. 이 같은 파괴를 배경으로 새로운 형태와 내용의 사회운동이 일본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이 새로운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공해반대 주민운동’이었다. 그리고 혁신자치체는 이 운동에 기반하여 나타났다. 곧 주민운동은 혁신자치체를 낳은 원동력이었으며, 혁신자치체는 주민운동의 가장 커다란 제도적 성과물이었다.

    
  세 번째, 1980년대 이후. 혁신자치체는 고도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폐해들에 대한 시정을 직접적인 정책과제로 내걸고 나타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석유위기가 계속되면서 일본은 저성장시대, 또는 안정성장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혁신자치체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기업사회형의 지역사회형성론이 지방자치를 주도하게 된다. 호소카와와 이와쿠니로 대표되는 ‘지방경영론’이나 ‘지방의 시대론’과 같은 논의들이 그 좋은 예이다.
  
2. 혁신자치체의 등장과 소멸
  
  혁신자치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사실 생소한 개념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는 혁신 정치세력이 제도화되었던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혁신자치체라는 개념은 혁신 정치세력의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개념이다. 우선 개념적으로 보자면 혁신자치체는 보통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첫째, 자치단체의 장이 사회당과 공산당 또는 그 어느 한쪽을 포함한 복수 야당의 지지 하에 당선되었고 그 지지를 계속 얻고 있는 경우.
  둘째, 자치단체의 장이 사회당이나 공산당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고 그 지지를 계속적으로 얻고 있는 경우.
  
  이처럼 혁신자치체는 어느 경우나 이념적으로 보자면 명확히 혁신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 자치단체장인 자치단체를 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신자치체를 혁신 정치세력의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혁신자치체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즉 혁신계 인사의 당선을 그의 이념에 대한 지역주민의 찬동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를 가져오는 자민당에 대한 거부가 생활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보인 혁신계 인사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던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생활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혁신계 정당을 더욱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혁신자치체라는 명칭은 그렇게 정확한 명칭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환경파괴, 도시의 교통난, 주택난과 같은 이른바 ‘현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서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는 대중들의 욕구가 혁신자치체를 낳은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 전역에서 생활환경을 개선하고자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던 주민운동이야말로 혁신자치체의 진정한 산모였다.

    
  혁신자치체는 자치체의 행정방식과 내용에서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 외에 지역 내의 사회운동세력과 혁신적 정치세력의 결집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것은 패전 이후 일관되게 강행된 성장제일주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거둔 커다란 제도적 성과였으며, 이에 따라 삶의 질을 무시한 성장제일주의의 횡행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혁신자치체의 역량은 혁신자치단체장 간의 수평적 연합이 이루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혁신자치단체의 단체장연합이 처음 결성된 것은 1964년이었으며 당시의 참가자는 약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10년 뒤인 1974년경이 되자 참가 단체장의 수가 약 140명으로 늘어나서 도쿄, 오오사카, 쿄토, 나고야, 요코하마, 가와사키, 고베 등의 대도시가 모두 혁신자치체가 되었다. 성장제일주의로 인한 폐해가 가장 심각했던 대도시는 모두 혁신자치체가 성립되어 도시 행정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현대 일본 사회의 변화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혁신자치체는 1978년에 몰아닥친 제2차 석유위기에 따른 변화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석유위기에 대응하여 대기업은 합리화와 감량경영을 통해 석유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대기업의 노동조합들은 ‘기업방위’를 위해 기업의 합리화와 인원삭감에 협력했다. 이 때문에 대기업 노동조합은 투쟁력을 상실했고 오히려 어용조합화하였다. 이같은 노동운동의 우경화와 함께, 혁신자치체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공명·민사 양당의 우경화가 진행되어 양당은 결국 혁신세력에서 이탈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모든 야당의 공동협력으로 실현되고 있던 혁신자치체의 붕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혁신자치체 붕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혁신자치체의 재정위기였다. 석유위기 이후의 경제침체로 세수입이 줄어들면서 지자체의 재정도 적자에 직면했다. 복지정책에 힘을 쏟았던 도시지역의 혁신자치체의 재정적자는 특히 심했다. 1978년부터 1979년에 걸쳐 혁신자치 단체장들은 보수파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전후 전투적 노동운동과 결합되어 거센 투쟁을 전개했던 자치체가 한국전쟁과 함께 찾아온 재정위기로 단기간 내에 보수화되고 말았던 것처럼, 고도성장의 폐해에 맞서 성립된 혁신자치체는 석유위기와 함께 찾아온 재정위기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혁신자치체는 고도성장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노력의 소산이었으나, 동시에 그 같은 노력은 결국 고도성장이 이룩한 경제력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3. 혁신자치체와 일본의 정치

  일본의 지방자치는 흔히 ‘1/3 자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지방정부의 재정자립도가 1/3에 불과하여 중앙정부의 지원에 항상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방정부의 처지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처럼 일본의 지방자치는 제도적으로 중앙의존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한계를 가진다. 이와 연관된 것이지만, 일본의 지방자치가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풀뿌리 보수주의의 정치구조’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의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지방 유지의 정치구조’로도 불린다. 즉 주민은 지방의 유력자에게 청원을 하고, 지방의 유력자는 지역 출신 의원에게 청원을 하고, 지역 출신 의원은 당의 힘을 빌려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구조가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구조는 여당이 이익을 주는 대신에 주민의 지지를 받게 되는 정치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신자치체의 등장은 오랜 기간 합의된 상태로 폐쇄되어 있던 이 같은 정치구조에 어느 정도 파열구를 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혁신자치체는 새로운 정치·행정 스타일을 도입했다. 예컨대 주민과의 대화 창구를 개방함으로써 자치단체장이 주민의 민원사항을 직접 접수하고 처리한다는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자치체가 중앙정부의 말단 행정기관이 아니라 주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일본에서는 혁신자치체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혁신자치체로서도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혁신자치체는 중앙과의 직결을 단절하고 중앙의 지배에서 독립함으로써 발생하는 정치적 손실을 주민과의 직결을 통해 주민의 강력한 정치적 지원을 받음으로써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참여정치, 생활정치에 기반함으로써 혁신자치체는 공해나 복지 등과 관련된 새로운 방침을 일본의 정치과정에 도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주민운동의 성과를 지방자치의 혁신으로 이끌고 간 혁신자치체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는 1967년의 지사선거에서 도쿄지사로 선출된 미노베 료키치이다. 그는 본래 도쿄교육대학의 경제학 교수로서 1967년의 지사 선거에 사회당과 공산당의 합동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당시에 생활환경이 급격히 악화된 상황이었던 거대도시 도쿄의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고도성장은 도쿄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도쿄도를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일극 중심의 공간구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결과 도쿄도는 극심한 ‘과밀의 문제’로 시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에 자민당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여기서 도쿄도가 혁신자치체로 바뀔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찾는 시민들이 혁신지사 미노베 료키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도쿄도 혁신지사 미노베가 이룬 정치적 성과는 여러 가지이다. 크게 보아 그것은 복지의 확충과 환경의 개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1969년에 제정된 공해관련 조례로서, 이 조례는 일본의 환경정책사에 그야말로 획기적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조례는 공해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주민에게 있다는 것과 기업은 최대한 공해를 방지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을 법적으로 밝히는 ‘무과실책임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조례의 제정으로 말미암아 도쿄도는 중앙정부와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조례는 1967년에 제정된 상위법인 ‘공해대책기본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자민당이 지배하던 중앙정부는 위법이라고 주장하여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약 1년간에 걸친 도쿄도와 중앙정부의 정쟁은 중앙정부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환경문제의 개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법을 개정하기 위한 임시국회가 1970년 11월에 열리게 되었다. 이 국회는 공해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뒤에 ‘공해국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국회에서 공해대책기본법이 전면 개정되어 14개의 법률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해법의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어서 1971년에는 환경문제를 전담하는 정부기구로서 환경청이 신설되었으며, 1973년 가을에는 ‘공해재판’의 진전에 따라 세계 최초로 공해관련 건강피해보상법이 제정되었다. 혁신지사 미노베 료키치의 도쿄도에서 시작된 변화가 일본의 환경법과 환경정책 전체를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같은 정책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최대의 가해자였던 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세계를 제패한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동차의 오염물을 규제하는 법률이 세계 최초로 실행되어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일찍부터 기술혁신에 주력했으며, 이 때문에 마침 서구 선진국에 몰아닥친 환경보호의 움직임에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가장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혁신자치체는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중앙집권의 정치구조에 파열구를 내어 실질적인 지방자치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산업구조와 생산방식의 조정을 강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주민의 여망에 부응한 지방자치의 변화가 시대의 변화를 선취하는 결과를 빚었다는 이 사실에 우리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4. 혁신자치체의 성과와 한계
  
  일본의 1960년대는 격동기였다. 안보투쟁의 종식과 함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념지향적 운동들이 빠르게 개량화되어 더 이상 사회운동세력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고도성장과 함께 나타난 허다한 문제들을 정면에서 해결하고자 나타난 자연발생적 대중운동이 바로 주민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주민운동의 제도적 성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혁신자치체였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일본의 새로운 사회운동의 황금기에 혁신자치체운동은 ‘하나의 새롭고도 공정한 공적 생활’을 창조하는 운동으로, ‘전통적 민주주의의 본성 자체를 변혁’시킨 운동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일본의 낡은 정치를 갈아엎고 ‘신정치’를 가져온 운동으로 평가되었다.

    
  혁신자치체가 거둔 구체적인 정책적 성과로는 환경의 개선, 복지의 확립, 자치의 확립을 들 수 있다. 도쿄도를 포함하여 모든 혁신자치체가 1960년대에 들어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던 공해반대 주민운동의 성장에 기반하여 성립되었다고 해도 사실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도성장기 동안에 자행된 환경파괴의 문제는 자심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공해병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나마따병’이나 ‘이따이이따이병’이 모두 그 시기 일본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 만큼 공해문제를 해결하고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은 혁신자치체가 수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혁신자치체는 현대적 복지제도의 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하여 혁신자치체가 수행한 중요한 성과를 노인복지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은 세계 제일의 고령화사회로서 노인복지에 많은 재정을 투입하고 있는 데, 노인복지의 문제도 혁신자치체의 주도로 비로소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치의 확립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종래 중앙정부의 말단 행정기관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자치체가 독자적인 정치단위로 확립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음에 지적해야 할 것은 풀뿌리 보수주의의 근간으로 여겨졌던 자치체가 주민의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의 학교로 변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한계를 보면, 정치적으로는 혁신정당이 혁신력을 잃고 말았다는 점과 정책상으로는 ‘시빌 미니멈론’의 한계를 들 수 있다. 먼저 혁신력을 잃었다는 것은 혁신자치체의 정책이 주민의 강력한 지지 하에 중앙의 정책을 변경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자민당으로서도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자민당에서도 유사한 정책들을 제시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혁신자치체의 고유한 혁신성은 점차 그 빛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고도성장의 성과를 복지의 증진으로 돌려야 한다는 시빌 미니멈론에는 산업정책과 재정정책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결함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석유위기가 잇따르고 저성장 시대와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금방 드러났다. 1/3자치라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지방정부의 취약한 재정상태는 경제가 악화되면서 금방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혁신자치체는 다시금 중앙정부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혁신자치체의 쇠퇴와 관련해서는 그 내재적 한계와 함께 자민당의 대응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민당의 대응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68년에 발표된 도시정책대강으로, 그 핵심내용은 공공사업의 대부분을 자치체에서 민간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이로써 대도시에 성립한 혁신자치체는 재정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지방의 보수적인 현들은 집중적인 재정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도성장이 야기한 심각한 폐해들은 이미 어느 정도 개선된 상황이기도 했다. 예컨대 1977년에 발표된 OECD의 보고서는 불과 10년 사이에 일본의 환경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혁신자치체의 성립을 가져온 문제들이 해결된 이면에서 새롭게 등장한 경제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혁신자치체는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성립된 혁신자치체가 이번에는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좇아갈 수 없는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에는 혁신자치체가 모두 보수자치체로 바뀌었으며, 이제 자치체의 정책은 도시경영론으로 변해갔다. 당시의 오오히라 내각 하에서 ‘지방의 시대’라는 구호가 새롭게 외쳐졌으며, 자민당의 지휘 아래 보수주의가 재편되고 혁신자치체는 사라져갔다.
  
5.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일본에서 고도성장은 이념이 아니라 생활과 여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른바 ‘무당파 대중’을 낳았다. 이것은 가치의 변화를 포함하는 커다란 시대적 변화의 결과였다. 혁신자치체운동은 극심한 공해로 말미암은 수많은 피해대중의 자발적인 주민운동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국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사회운동이고 정치적 조류였다. 이런 점에서 혁신자치체운동은 일상이 영위되는 삶의 자리에서 삶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 서구의 신사회운동과 같은 궤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혁신자치체는 자치단체의 개혁단계를 넘어서 일본의 정치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으며, 중앙정부와 지방의회에서는 보수세력이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이런 점에서 혁신자치체의 성과를 정치제도의 차원에서만 찾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혁신자치체가 거둔 더 중요한 성과는 이른바 ‘신민’에서 ‘시민’으로의 변화라고 불리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개된 시민적 주체의 형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 점에 대한 평가 역시 일본 사회가 여전히 전근대적 보수주의와 근대적 팽창주의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혁신자치체운동은 다양한 ‘공해’에 대응해서 새롭게 ‘공익’을 추구했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자치의 발전을 위한 자치노, 즉 자치체 노조의 헌신적이고 활발한 연구 및 실천이 이러한 혁신자치체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유념해 두어야 할 중요사항이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해’와 ‘공익’의 내용도 변한다. 혁신자치체운동이 빠르게 퇴조한 이유는, 한편에서 보수지배의 정치구조를 혁파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에서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둘 다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생활의 혁신이라는 새로운 ‘공익’의 실현을 바라는 주민의 요구에 부응했을 때, 강고한 보수지배의 정치구조 속에서도 혁신자치체가 나타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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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6 02:43 2006/04/26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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