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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에 대한 두 책의 재미있는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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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키어런 앨런 지음/삼인…'히틀러'식 카리스마 강조 2010/03/28 19:04:51
민중의 소리 기사는 출판사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지만, 그래도 가장 풍부하게 책을 소개해놓고 있어서 옮겨놓는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있을 듯하다. 물론 대부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고...

 

2010. 8. 14 베버에 대한 두 책의 재미있는 비교

막스 베버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단다. 이 책과 키어런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물론 전자의 책이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더라도 읽는데 따분함이 더하겠지만...
 
물론 나는 이미 한쪽으로 입장이 가있어서인지 새로 번역된 베버의 책에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거기에 관료제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있던가? 이젠 사회학에서 행정학으로 확실히 시각이나 전공이 바뀌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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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극우 인종주의자" (레디앙, 2010년 03월 06일 (토) 01:14:57 정상근 기자)
[새책]『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키어런 앨런 지음/박인용 옮김/삼인 펴냄/376쪽/1만5000원…'히틀러'식 카리스마 강조 
 
베버를 연구해 온 저자 키어런 앨런(Kieran Allen)은 베버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독일제국과 게르만 민족의 패권을 내세우는 민족주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준(準)군사 전략가로 중부와 동부 유럽을 독일의 패권 아래 두면서 영국과는 협정을 맺고 벨기에는 볼모로 활용하며 주된 적국인 러시아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고 밝힌다. 또한 “패전의 기운이 역력한데도 끊임없는 전국적 게릴라전을 역설”했으며, “관료제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며, 우매한 대중은 오직 카리스마적 지도자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정도면 파시즘, 히틀러의 냄새가 풍긴다.
 
저자는 베버의 이러한 점이 “숭배되고 조용히 존경받는 권위자로서 베버의 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베버는 독일 사회의 전쟁 지지 분위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 적극적인 창조자이자 옹호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베버는 젊은 시절 때부터 극우 보수 색채가 농후한 정치 활동을 해왔다. 분열된 독일 사회를 통합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베버는 1893년에 “독일이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역사가 내린 의무일 뿐 아니라 대중이 남부럽지 않은 삶을 향유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하며 극우 민족주의단체인 범독일연맹에 가담했다.
 
그러한 베버가 1차 대전 후, 살육의 전쟁을 “역사에 대한…(중략)…우리의 막중한 사명”이라고 보면서 “이 전쟁은 지도의 변화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를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심지어 베버는 자신이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도 전쟁을 끝까지 그리고 꾸준히 지지했다.
 
저자는 “주관적 가치 판단을 배제한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알려진 베버의 사회학이 그 이면에 “제국주의적 인종차별주의와 오만한 엘리트주의가 가득하다”고 평한다. 그에 따르면 베버는 학문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독일의 정치교육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그가 여러 논문과 저서를 통해 흑인과 인도인, 중국인 등 다른 인종과 문화를 폄하했다. 베버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문화가 없으며 식민지 지배를 받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봤으며, “전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는 발전과 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된 반면에, 중국 사회는 정체된 관료제를 만들어 낸 평화주의 때문에 멸시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베버라면, 그가 뒷날의 히틀러를 불러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베버는 현대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히틀러와 유사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역설했다. 베버는 의회 등 민주주의 제도에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베버의 해법, 정치 지도자론의 핵심은, 카리스마 있는 강력한 지도자에게 대중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운명을 위탁하고, 지배당할 때, 관료화로 무력해진 국가의 번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염원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그의 사후 ‘히틀러’가 되어 등장했다. 사회학의 창시자, 거두로 대접받는 한 학자의 명성과 진실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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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가면을 쓰고 전쟁과 학살을 선동한 막스 베버 (민중의 소리, 이동권 기자, 2010.03.08 오전 10:06)
[책소개]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막스 베버. 그는 사회학의 초석을 다진 학자로 알려져 있다. 사회학 방법론과 정치 카리스마에 대한 정교한 논의로 후대 사회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사회의 관료제 문제에 대한 냉정한 분석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이면에는 가공할 진실이 숨어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제1차 세계대전을 찬양하고, 동양인과 흑인을 덜떨어진 인종이라며 비웃었으며, 히틀러 못지않게 게르만의 영광을 꿈꾸었던 제국주의자였던 것이다.
 
신간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은 가치중립과 학자적 냉정함을 내세운 베버가 사실은 오만한 극우 민족주의자였으며, 지독한 제국주의적 편견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베버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독일제국과 게르만민족의 패권을 내세우는 민족주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심지어 준(準)군사 전략가로 중부와 동부 유럽을 독일의 패권 아래 두면서 영국과는 협정을 맺고 벨기에는 볼모로 활용하면서 적국인 러시아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고, 패전의 기운이 역력한데도 끊임없는 전국적 게릴라전을 역설했으며, 관료제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며, 우매한 대중은 오직 카리스마적 지도자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관료주의 문제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관주의적 전망을, 민족주의적 카리스마에 대한 호소로 돌파하려 한 대목에선, 나치 파시즘과 히틀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게다가 베버는 독일 사회의 전쟁 지지 분위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의 적극적인 창조자이자 옹호자였다. 수백만의 노동자들도 물론 1914년 8월의 전쟁 열기에 휩싸였지만, 전쟁의 참화가 개인에까지 미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베버는 전쟁을 끝까지 꾸준히 지지했다. 심지어 독일제국이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베버는 전쟁을 계속하는 전국적인 게릴라전을 주장했다. (본문 중에서)
 
베버는 젊은 시절 때부터 극우 보수 색채가 농후한 정치 활동을 해왔다. 분열된 독일 사회를 통합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베버는 1893년에 “독일이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역사가 내린 의무일 뿐 아니라 대중이 남부럽지 않은 삶을 향유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보면서 ‘독일에서 가장 사악한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단체’로 평가받던 범독일연맹에 가담했다.
 
정치평론가이자 이데올로그인 베버의 행적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더욱 뚜렷해졌다. 베버는 전쟁을 “역사에 대한 …… 우리의 막중한 사명”이라고 보면서 “이 전쟁은 지도의 변화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를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전쟁에 열광하면서 일련의 국가정책 관련 논문을 발표했는데, 논문들에서는 “전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일이 필요로 한 것은 쉽사리 절망에 빠지기 쉬운 수사적 호언장담이 아니라 분명한 전략적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군사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 가지 예로 베버는 중부 및 동부 유럽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선 영국과는 협정을 맺고, 폴란드는 독립을 보장하되 독일의 지배 아래 두면서, 궁극적으로 러시아를 주된 적국으로 상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벨기에를 일종의 볼모로 활용할 것으로 강조하면서 미국의 불가피한 간섭은 피해야 한다는 냉철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의 참화가 개인에까지 미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멀어져” 갔지만 베버는 자신이 죽임이 임박한 시점에서도 전쟁을 끝까지 그리고 꾸준히 지지했다.
 
그 무모한 대살육에서 200만 명의 독일인이 목숨을 잃고 400만 명이 부상을 당했는데도, 그는 끝까지 독일의 전쟁 노력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전쟁 책임을 인정하거나 살육의 책임이 있는 장성들을 비판한 독일인들을 비난했다. 독일이 패전한 뒤 베버의 주된 관심은 육군과 ‘군사학’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최고사령부의 권력을 부활시키는 정책을 옹호하면서 혁명적 좌익의 ‘폭력성’을 공격하는 데 전혀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저자에 따르면 베버는 가치중립적 외피 이면에는 제국주의적 인종차별주의와 오만한 엘리트주의가 가득하다. 우선 베버는 학문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독일의 정치교육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는데, 저자는 여기서 정치교육이란 “독일제국을 이끌어 나갈 사명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곧 베버는 정치에 학문이 종속된다고 본 셈인데, 이는 분명 존경받을 학자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베버가 여러 논문과 저서를 통해 흑인과 인도인, 중국인 등 다른 인종과 문화를 폄하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베버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문화가 없으며 식민지 지배를 받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베버는 또 호전적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기묘하게 동양을 무시했는데, 이를테면 “전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는 발전과 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된 반면에, 중국 사회는 정체된 관료제를 만들어 낸 평화주의 때문에 멸시되었다”다면서 엉뚱한 평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베버는 시종일관 대중의 정치적 역량을 불신하는 엘리트주의로 일관했다. 베버는 관료제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대중이 관료화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고 봤으며, 의회 의원들도 소수의 엘리트에게 찬성투표를 하는 거수기에 불과하고, 대중의 운명은 “차분하고 냉정한 관료들 또는 위대한 지도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보기까지 했다. 독일제국의 패권에 대한 베버의 강한 열망이나 냉혹한 엘리트주의는 분명 그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을 손상시키는 것. 그러나 베버가 궁극적으로 희구했던 정치 지도자론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서 놀라움과 공포까지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베버는 현대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히틀러와 유사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역설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베버가 염원하던, 민족주의 열망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히틀러’라는 이름으로 베버 사후에 등장했다”며 사회학의 창시자이자, 고매한 아카데미즘의 대표자, 고전 사회학의 거두로 대접받는 한 학자의 명성과 진실을 다시금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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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위대한 번역…"다시 베버를 주목하라!" (프레시안, 이홍균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2010-08-13 오후 6:43:17)
[프레시안 books]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묘비에는 "우리는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Wir finden nimmer seines Gleichens)"라는 묘비명이 적혀 있다. 그 문구가 상징하고 있듯이 그는 매우 독창적이고 진지한 학자였다. 그는 특히 아무도 개척하지 않았던 사회학의 여러 분야에 매우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었다. 그 가운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김덕영 옮김, 길 펴냄)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이고, 불후의 명저이다.
 
이 책이 막스 베버만 30여 년 가까이 연구한 학자, 김덕영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것은 한국 학계에 커다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독일에서 베버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이후, 교수 자격 논문까지 통과한 베버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친 진지한 연구자이다. 그러한 연구자에 의해 베버의 고전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더하여 그는 한 권의 저서에 가까운 양의 해제를 덧붙였다. '우리는 이에 필적할 만한 번역서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막스 베버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사회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개척한 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과 함께 세 명의 고전 사회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사회학의 많은 분야에서 수없이 많은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다. 그는 위대한 사회학 이론가이며, 동시에 정치사회학, 경제사회학, 특히 종교사회학, 문화사회학의 초석을 만들어놓은 위대한 학자이다.
 
베버는 사회학의 다양한 분과 영역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는다. 워낙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며 지금도 사회학 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근대 사회 조직의 중요한 특징인 관료제의 공통점을 추출하여 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론, 이념형을 고안한 학자이고, 보편적 세계사의 과정을 합리화로 파악하고 인간의 행위를 점차 '가치 합리성'이 아니라 '목적 합리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을 비판적으로 고발한 학자이기도 하다.
 
베버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 연구였는데 그는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종교의 교리에서 찾은 학자로서 유명하다. 예를 들어 동양의 종교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는 '신의 그릇(bowl of god)'의 종교이고, 서양의 종교는 신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의 도구(tool of god)'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그는 지금도 사회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는 각종 개념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권력에 대한 정의, 다양한 행위에 대한 정의, 지배의 유형에 대한 정의 등이 그것이다.
 
막스 베버(1864~1920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사회학 연구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학 연구의 중요한 초석이 되는 역저이다. 이 책에서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사회의 영향 가운데 하나인 종교의 영향에 의해 행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자본주의는 베버에게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이었다. 그는 그 힘의 발생을 '경제적 상황의 반영인 상부구조로서' 파악한 마르크스를 소박한 사적 유물론이라고 비판한다. 그에게 자본주의 정신은 '적대적 세력들로 가득한 세계와의 험난한 투쟁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원인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발생한 문화적 기원을 찾아냈다.
 
그 기원을 찾기 위해 베버는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역사학이나 신학 공부를 선택하는데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경영학이나 공학을 선택하는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에서 출발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비세속적이고, 금욕과 종교적 경건성을 견지하고 있다면, 프로테스탄트들은 자본주의적 영리 활동에 더 몰입하고 있는 차이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이 차이를 프로테스탄트의 '다소 유물주의적인 혹인 반 금욕적인 '세속적 쾌락'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순수한 종교적 특징'에서 찾고 있다.
 
베버는 서로 다른 종교적 특징을 가지는 가톨릭 교리와 프로테스탄트 교리의 차이는 두 신도 집단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에 대해서 서로 다른 행동을 하게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대 기독교 교리의 차이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특히 칼뱅의 프로테스탄트의 교리, '예정 조화설'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자본주의적 영리 추구의 행위가 신의 부름을 받은 증거라는 내용이 들어있음을 발견한다. 근검절약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이미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고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돈을 많이 축적한 사람은 신으로부터 부름(소명=직업, Beruf)받은 사람이다.
 
기독교 영향권의 사회에서 신의 집으로 회귀할 수 없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확인할 수 없는, 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신의 구원을 받기 위한, 신의 말씀대로 살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삶의 의미(Sinn), 삶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종교는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이다. 종교에 의해서 자본주의적 행동 양식이 허락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직업관이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특성에 적응된 종류의 생활양식과 직업관이 '선택'될 수 있으려면, 즉 다른 종류의 생활양식과 직업관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으려면, 우선 그것이 형성되어 있어야만 함은 명백하다. 그것도 고립된 각 개인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인간 집단에 의해 담지되는 세계관의 형태로 형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79쪽)
 
뒤르켐이 개인의 외부에서 개인의 행위를 강제하는 '집합적 힘'을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 천명한 것과 같이 베버 역시 자본주의 정신을 고립된 각 개인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인간 집단에 의해 담지되는 세계관의 형태로 형성되는 것에서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고와 행위의 집합적 양식이 그것이다. 그러한 사고와 행위의 집합적 양식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버는 에밀 뒤르켐과 더불어 사회학이 무엇이고 사회학의 연구 대상이 무엇인가를 정립한 사회학의 고전 이론가이다.
 
그 사고와 행위의 집합적 양식은 베버에게 칼뱅의 예정 조화설이었다. 자본주의에 적응된 종류의 생활양식과 직업관의 승리를 이끌어 준 것은 프로테스탄트 교리의 하나였던 칼뱅주의였다. 칼뱅주의는 노동 자체가 절대적인 자기 목적인 양 여기고 일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능하게 했다. 교리와 자본주의적 현실의 요구 사이의 결합, 종교와 이윤 추구 행위의 선택적 친화성이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증명하고자 한 내용이다. '신을 위한 것이라면 너희가 부자가 되어도 좋다'가 그것이다. 직업에 내재된 구원의 확실성, 그것은 가톨릭에 의해 막혀있던 이윤 추구의 제약을 풀어 헤쳐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자신의 책의 말미에서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면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금욕주의는 사라지고 그 대신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쇠우리에 갇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이 된 무가치한 인간들이 양산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베버의 글은 독일 학자에게도 외국어에 해당한다. 문장이 매우 길고 현재에는 사용하지 않는 고어(古語)가 많아서 베버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수없이 많은 사례와 역사적 사건들의 등장은 읽는 이를 매우 힘들게 한다. 게다가 우리말로 옮겨지지 않는 많은 독일어의 장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러나 김덕영에게 이러한 것들은 결코 어려움이 될 수 없었던 듯하다. 문장도 매우 정확하고 간결하다. 이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동력은 한국 사회학 발전에 대한 그의 애착과 소명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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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7:09 2010/08/1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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