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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과 젠더 - 경험

  • 등록일
    2007/02/16 02:44
  • 수정일
    2007/02/16 02:44
달군님의 [화장실과 젠더 이슈] 에 관련된 글.

그동안, 성폭력 예방을 위해 숙소를 분리했던 것처럼
화장실도 분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왔다----------

**

학교 다닐 때, 대규모 술자리를 많이 기획해 봤다.
당연히 단체로 많이 앉을 수 있으면서도 싸게싸게 먹을 수 있는 집을 선호하다보니
항상 학교 부근의 허름한 술집들이 선정되었다.
이른바 '누나집', '고모집', '이모집' 등등의...
(이건 따로 써야 할 것도 같은데... 가게의 호칭들도 반영하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주인 여성들-주로 중년 혹은 노년-이 남학생들에 의해 '모성의 상징'이 되어 있는 거 아닌가?. 여대 앞에도 이런 이름의 가게들이 있었을까? 문득 궁금.)

그런데 그런 술집들의 최고 단점은 바로 화장실.

보통 시설이 낡은 데다가, 좌변기는 찾아보기 힘들고 양변기 하나 달랑 있는데다가
물 내리는 장치도 없는 경우가 많아 수돗물에서 물을 틀어 바가지로 물을 퍼 내리는 방식이 주였다.
물론 성별 구분은 되어 있지 않았다.

즉 '머물고 싶은 화장실'과는 완전 정반대의 화장실들이었던 것.

처음엔 청소가 되어 있던 상태라도 점점 사람들의 이용이 많아지고,
특히 서서 오줌누는 것 등의 여파로 (결정타는 오바이트;) 금새 화장실은 지저분해졌다.

그때는 그냥 내가 쓰기에도 더럽다, 지저분하다, 이 정도만 생각했다.
그래도 재빨리 볼 일 보고 나와버리면 된다는 정도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나중에 여성 문제 토론하다 생각해 보니,
(그리고 종종 뉴스에서 남성 화장실보다 여성 화장실을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보면서)
 남성들이 소변볼 때와는 달리 여성들은 어떤 경우에든 더 불편했을 거란 생각이 미치자, '그땐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하는 반성이 들었다.

단순히 청결함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양한 방식의 성폭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입장에서는 칸막이가 있다 해도 남성과 같이 화장실을 사용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그 이후론 처음 가보는 술집이 있으면 화장실을 꼭 확인해 본다.
화장실이 깨끗한지, 성별 구분이 되어 있는지를 본다.
그리고 아는 술집 갈 일이 있을 때면 화장실도 조건에 넣어서 선택을 한다.

내가 일하던 사무실은 쬐끄만 빌딩이어서 칸막이로만 남녀 구분이 되어 있었다.
세면대에서 청소, 설거지 등을 하고 있다가 여성들이 들어오는 것 같으면 슬쩍 나갔다가 나중에 화장실을 쓰곤 했다.

***

그런데 All Gender화장실에 대한 얘기가 있네?
이런 생각도 있었구나.
'양성 평등'보다 '성 평등'이 낫다는 것처럼,
또 하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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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조심을 해야지.

  • 등록일
    2007/02/13 18:11
  • 수정일
    2007/02/13 18:11
사회생활 하는데 필요한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부정적 의미에서) 표정관리.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입조심.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맨날 "과묵하다", "왜그리 말이 없냐", "말 좀 해라"
등등의 소리를 달고 다녔는데

크고 나서는 왜
말이 많아서 잔소리가 되고
상대가 듣기에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얘기들을 많이도 늘어 놓는지.(특히 편한 관계에서)
나서길 좋아하는 운동권이 된 탓인가.

게다가 진실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쓸데없이 한 얘기가 이상하게 꼬여서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 판 싸움도 벌어졌고,

위험한 줄타기 설득판에서
괜히 카드를 많이 벌이는 바람에
일은 더 꼬이기만 하고.

2년 동안 묵언수행이라도 해야 할 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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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기 좋은 날 & 결혼식

  • 등록일
    2007/02/12 17:42
  • 수정일
    2007/02/12 17:42

**

동지가 보재서 아~~~무 생각 없이 영화표를 끊고 봤는데.

 

전~혀 새롭지 않은, 뻔하디 뻔한 그런 영화.

'돈 참 쉽게 벌려고 하는구만' 싶더라.

극장에서 보니까, 모텔 침대신에서는 계속 관객들의 웃음이 작게 터지긴 하는데

나로선 너무 뻔한 남성 판타지와, 남성들의 심리가 속 보여서

혀만 끌끌 찼다. (그렇다고 내가 완벽히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정희진이 한국에 여관이 그토록 많은 것에 대해 묻는 외국인에게

"그만큼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있다는 증거지"라고 둘러댔다는

문구가 계속 생각이 났는데,

 

정말 너무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결말.

오늘 아침에 면도하면서 '바람난 가족'은 정말 이거에 비하면 같은 소재를 다뤄도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영화 주제곡이 "바람아 멈추어다오"였으니깐. 훗.

**

가족이 결혼식에 가는데 같이 가서 밥이나 먹자고.

간만에 호텔 결혼식에 가서 커다란 홀의 커다란 원탁에 앉아 결혼식을 감상.

 

주례사가 좀 웃기군... 하는 생각 외에는 별 거 없었다.

(참고로 주례사의 주 내용 : 서로 꿍해서는 안 된다. 내 생일을 미리 알고 있나 까먹었나 두고 보자... 이러지 말고 미리 말하고 선물 뭐 해달라고 얘기하면 싸울 일이 없다... 는 둥. 참 실생활스러우면서도 역시 고전적인 주례였다)

 

옛날에는 가끔씩 결혼식에 가면,

이 담에 결혼식은 평등부부 선언대회 식으로 치를까. 가끔 이런 생각했는데.

예를들면,

주례 없이 여러 사람들의 축하사로 대신하고,

입장할 때 같이 손잡고 입장하고,

부부평등 선언문 같은 거나 낭독하고.

결혼식 참가자들, (아니 하객들이군; )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의식개혁을 촉구하는-

 

그러나 오늘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결혼제도에 편승하면서 내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작태를 버리고

결혼 자체를 거부하는게 차라리 낫겠다. 고 생각했다.

 

영원한 부부관계가 어딨냐. 흥.

 

뭐 어쨌든 한 끼 식사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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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야 할 곳 - 소안도

  • 등록일
    2007/02/09 13:47
  • 수정일
    2007/02/09 13:47

어제 친구의 말로는,

완도 근처에 있는데,

섬 주민 1100여명 중에 1000명이 사회주의자였고,

무장민병대가 존재했으며,

일제에 운동지도자가 잡혀가자 마을 주민 모두가 연대하는 의미로

겨울밤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는

뭐 사실상 소비에트 내지는 꼬뮌과 비슷했다는

섬이라 한다.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구체적인 수치는 쪼오끔 차이가 있지만,

언젠가는 한 번 자전거 들고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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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징병제 폐지를 이야기하자

  • 등록일
    2007/02/09 11:26
  • 수정일
    2007/02/09 11:26

 

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8/20070208/20070208131500.html

 

노무현 정권이 내놓은 군복무단축정책은

2+5로 표현되듯이 '노동력활용' 목적 + 표심잡기라고 본다.

(왜 표심잡기냐고? 2006년 입대자들까지도 '혜택'을 준다는데 그건 표심 잡기가 아니고 뭐겠냐)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보고 나면 좀더 생각이 정리가 되겠지만,

모병제/대체복무제가 '대안'일 수 있을지는 아직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

다만, 징병제 폐지는 분명한 요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군대는 사회 곳곳에 파고들어 있고,

남성 노동자들 대부분도 어떤 식으로든 군복무를 앞두고 있거나

군복무를 해 왔다.

 

중요한 이슈에 대한 태도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한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겪으면서 생각해 봐야될라나 싶군.

 

 

 



지난 2월 5일, 참여정부는 ‘병역제도 개선 방안’을 핵심으로 한 ‘비전2030 - 인적자원 활용 전략’을 발표했다. 일찌감치 ‘병역제도 개선’을 공공연하게 주장해왔던 정부가 병역의무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높여 현행 체제의 문제점들을 매듭짓겠다는 의지를 드디어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개선안은 새로운 문제점들을 양산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선안에 ‘사회복무제 도입’이 포함된 것은, 그동안 병역거부운동 진영에서 주장해온 대체복무제 도입의 의미와 입지를 상당히 축소시키는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새롭게 시행될 병역제도에 맞서 이제는 징병제 폐지-모병제 도입에 대해 다시 논의를 시작하고 준비할 때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개선안은 그동안 제기된 문제점들을 뛰어넘고 있나

‘비전2030’ 전략은 인적 자원 활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년 빨리 5년 더 일하기(일명 ‘2+5’)‘ 방안으로 학제 개편, 실업계 고교 특성화, 군복무 기간 단축, 퇴직연령 연장, 임금 체계 개편, 고령자 유리제도 마련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발표된 안의 핵심은 사실상 ‘병역제도 개선’이었다. 군복무 및 병역제도를 효율적으로 바꾸어 보다 일찍 사회에 진출(또는 적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병역제도 개선’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12월 말부터 노무현 대통령 및 정부의 발언이 있어 왔다. 또한 2005년부터 제기된 ‘21세기 선진 정예국방을 위한 국방개혁 2020’의 일환 속에 놓여있던 계획이기도 하다. 군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군비증강으로 귀결시키고 있는 ‘국방개혁 2020’이었기에 이번 개선안도 사실상 얼마나 달라질까 하는 불신도 있었지만 한편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프랑스식, 독일식 운운하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군 개혁 및 병역제도 개혁은 오랫동안 한국 국민이 요청해온 것들이었고, 소위 ‘비국민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사안이었다. 그래서 관련 사안들이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1년 이상 준비했다는 이번 개선안은 실망을 넘어 황당함마저 준다. 그야말로 한국 국민을 ‘인적 자원’으로 보고 제대로 ‘활용’해 보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군복무 기간을 6개월 단축하고, 전·의경 등 전환복무제를 폐지하고, 사회복무제를 도입·확장하겠다는 것은 분명 현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선안의 전체적인 취지와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한 강제징집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며, 더욱 강한 국가 중심적 인적 자원 관리 제도를 설치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선안을 예외없는 병역의무 부과, 군복무 기간 6개월 단축, 유급지원병제 실시, 전환복무제(대체복무제) 폐지, 사회복무제 도입 등으로만 정리해서 본다면 잘 된 개선안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그동안 시민사회와 인권·평화운동이 제기해왔던 문제점들 뿐만 아니라 보수진영에서 제기해왔던 문제점들도 한꺼번에 뛰어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기득권 계층과 고위직 관리들의 병역비리 문제, 전·의경 복무자의 인권침해 문제(시위 진압에 강제동원 문제, 노동력 착취 등), 복무의 형평성 문제, 복무자의 인권 문제, 병역의무에서 배제된 ‘비시민’의 시민권 문제,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 문제, 안보 영역의 확장 문제, 소외된 계층의 보호 문제 등 마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듯한 인상마저 심어준다. 면제자를 최소화시키고 병역의무를 모두에게 동일하게 지우는 방식은 그간 병역기피와 형평성 훼손을 우려해온 사람들의 지적까지 해결한다.

그러나 이 안은 일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지만, 더 많은 부분에서 문제들을 양산하는 안이 아닐 수 없다.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도 강제징집

발표된 개선안에 따르면, 대체복무제라 불리는 전환복무제(전경, 의경, 해경, 경비교도대, 의무소방 등 1~3급 현역을 전환한 복무제)를 전면 폐지하고 사회복무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사회복무제는 현행 병역 처분 4급자(보충역)와 5급자(제 2국민역)가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병역 처분 5급을 받아 사실상 병역을 면제받은 사람들도 사회복무제를 통해 무조건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예외 없는 병역의무’의 핵심이다.

사회복무제도의 기본방향과 운영원칙을 보면, 예외 없는 병역의무이행 체계를 정립돼 사회활동이 가능한 모든 병역의무자는 병역의무를 이행하도록 하고 현역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4급, 5급자)은 모두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복무하게 된다고 한다. 마치 새로운 복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회복무제 도입은, 그동안 공익근무 등을 통해 복무했던 4급자에게는 별반 달라지는 것이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복무 부적합자로 처분된 사람(5급자)에게는 강제 복무를 부여받는 일이다. 국방부와 병무청이 제시하고 있는 사례에서도 보듯, ‘손가락 장애나 인공 눈을 시술한 사람 등’은 사회생활이 가능함에도 그동안 군복무 면제 처분을 받아 국민들에게 병역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가 아니면 손가락이 없더라도 복무를 해야 한다는 논리다.

오랫동안 신체등급 5급(제 2국민역) 처분은 병역기피의 창구로도 이용되어왔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시행되면 강제징병에 몸으로 기피해온 사람들은 6급자로 판명될 정도로 심각한 질환이나 장애가 있지 않는 한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된다. 병역기피를 원천 봉쇄하는 새 개선안은 이렇게 의무복무의 형평성을 되찾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형평성에 맞는 일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병역 처분 5급은 기관지 천식, 류마티스 관절염 같은 질환을 가지고 있거나 상대적으로 경미한 신체 장애, 정신병적 장애, 주요 우울장애, 기분장애, 신경증적 장애, 생리적 장애 및 신체적 요인과 연관된 행태증후군(소위 성주체성 장애 포함)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됐다. 즉 공익근무(4급)에도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복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들 모두가 이제 사회복무를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약자로, 그동안 국가와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인간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그대로 노출되어 왔었고 자기 돈 들여 각자 알아서 생활해왔다는 사실은 삭제되어 버렸다.

차별받아왔던 이들에게 중증장애인시설, 양로원 같은 사회시설에서 의무적으로 봉사하도록 하는 사회복무제도는 그동안의 차별을 감추는 한편 더욱 차별하는 제도가 될 수 있다. 이 제도 도입의 취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돌보는 구실을 하기를 기대받는 제도일텐데, 정작 목적은 병역의무이행의 강화였던 것이다. ‘21세기 선진 정예 국방을 위한’, ‘인적 자원 활용 전략’이라는 개혁안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그 취지는 선진 강군과 국가 인적 자원 효율화에 따른 재편일 뿐임을 보여준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예외없는 병역이행으로 병역의 사회적 형평성 제고와 사회통합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병역제도를 개선하면 정예강군 육성과 국가경쟁력 강화, 선진복지사회 구현은 물론 국방개혁 2020, 비전 2030의 성공적 추진을 뒷받침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좀더 앞선 시기에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은 ‘병역면제에 대한 형평성을 감안해 사회복무제 도입을 깊이 있게 검토중’이라며 독일의 사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사실상 군면제제도를 없애자는 취지라며 아예 거동을 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면 신체상에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병역을 이행하게 될 거’라고 덧붙인 것처럼 정작 발표된 안은 독일의 대체복무제와 비교하기조차 무색할 정도이다.

이는 군복무로 국민의 위계를 가려왔던 현 징집제도를 바꾸는 것일 수는 있지만, 그동안 열등한 국민일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 성소수자 등에 대해서도 모두 징집함으로써 복무 자체는 희생이 아니라 누구나 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예외 없는 병역의무, 완벽한 병역기피 차단이라는 구호 아래 실시될 이러한 강력한 강제징집제도는 ‘힘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 군대 간다는 피해의식은 제거할지 모르나 더욱 강한 국민동원체제에 길들이게 하는 방안이지 않을 수 없다.

병역거부자는 처벌도 받고 사회복무도 해라

한편 병역거부자들은 오랫동안 대체복무제 개선을 이야기해왔다. 징병제가 부여하는 군복무는 결국 살상훈련을 강제로 받는 것이며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군인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병역거부자들은 이런 평화주의 신념을 지키는 대신 실형을 사는 법적 처벌도 감수했는데, 동시에 독일이나 대만의 경우처럼 대체복무를 통해 감옥에 가지 않고 의무를 이행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현행 대체복무는 4주간의 군사훈련을 필수적으로 마쳐야했기 때문에 병역거부자에게는 제도 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병역거부운동 진영은 대체복무제의 장점을 이야기했다. 병역거부자의 감옥행만이라도 막아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군복무제와 함께 가동되기 때문에 두 시스템 간 경쟁이 일어나고 자연스럽게 인력 확보를 위해 제도 개선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해 왔다. 또한 사회적 보호 장치가 미약한 한국 사회에서는 긴급하게 요청되는 제도이며 국가 안보의 개념을 확장해 강한 군사주의를 일정정도 깰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대체복무제도 도입은, 군사력을 통한 국가안보 확보와 국가수호의 군인 역할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탈군사화된 사회를 구성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열망이 반영된 듯 발표된 ‘병역제도 개선안’에는 사회복무제가 도입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이 사회복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고려되지 않았다. 독일을 비롯한 외국의 사회복무제 및 대체복무제도는 사실 병역거부자들에게 군 복무 대신에 부과하는 사회 근무 형태로 도입된 것임에도 한국 정부는 일부러 무시한 것이다. 그동안 병역거부자에 대해 구제조치를 하라고 헌법재판소의 권고,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유엔의 권고 등이 줄기차게 있어 왔지만 민주화 운동을 계승한다는 참여정부에서조차 보기좋게 배제된 것이다. ‘병역제도 개선안’을 발표하면서 국방부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인정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이번 복무제도 개편안에서도 배제’했다고 밝혔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사회 복무를 하도록 합법화하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병역 기피자들이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번 병역제도 개선안은 '특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둔 것이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에 “병역이행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특례는 인정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즉, 이들에게 사회복무를 허용하면 “병역제도 근간을 깨고 형평성 문제도 생기기 때문에 수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사회복무제 도입의 모델로 삼았던 독일의 경우는, 1956년에 '양심에 기초해 무기사용과 관련된 병역의무를 거부한 사람은 대체복무를 요구받게 된다'고 명시했었다.

결국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회적, 법적 처벌은 지속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리에 따르면 병역거부자들을 정신질환자 내지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경우로 취급해 5급 또는 6급 처분을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까지는 1년 6개월 이상 실형을 살고 나오면 징집에서 면제되는 제 2국민역(5급)으로 편입되었는데, 새 제도가 시행되면 징역을 살고 5급으로 재처분되어도 다시 징집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현행 병역 처분에서는 6개월 이상 1년 6월 미만의 징역 실형선고자 및 1년 이상 징역 선고자 중 집행유예된 자는 4급 처분을 받아 보충역으로 복무하고, 1년 6개월 이상 징역 실형선고자는 5급 처분을 받아왔다. 따라서 병역거부자는 이제 6개월 이상 실형을 살거나 1년 이상 실형선고와 함께 집행유예를 받아 4~5급이 되어야지만 그나마 사회복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새 제도 시행에 의해 병역거부자는 처벌은 처벌대로 받고 다시 사회복무를 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대부분 병역거부자들은 1~3급 현역 판정을 받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은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4급자가 되어 사회복무를 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라 해도 전과자가 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성은 이중 노동을 해라

개선안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군가산점제 확대 관련 논쟁에서 이미 격렬하게 제기되었던, 여성의 병역의무 부과와 관련된 문제이다. ‘병역제도 개선안’에는 ‘고아, 혼혈인, 귀화자 및 여성도 본인 희망시 사회복무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동안 열등 국민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사회복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병역의무 여부에 따라 위계화되었던 국민 등급을 해소해 보려는 것일까.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불평등과 국민 위계 문제를 의식했다는 이 방안은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사회복무제 도입·확장’은 ‘여성 징집’을 거론할 여지를 확 열어놓고 있다. 그동안 군복무를 이행한 남성들의 피해의식이 고스란히 비복무자 여성에게로 향했던 것을 본다면 사회복무제를 통해 여성도 똑같이 국가에 봉사하라는 요구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봉사 기여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맥락에서는 국가통제도, 사회관리도, 강력 징병제도도 정상적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반복해서 낳는다. 성별, 학력, 성정체성, 장애유무, 혼혈 여부 등에 따라 병역의무가 차등적으로 주어졌던 현실은 그동안 남성 중심적, 비장애인 중심적 국민 개념을 만들어왔지만, 여성을 비롯해 의무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이같은 의무를 부과한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복무제가 도입된다 해도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키는 의무’는 비장애 남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와 관련한 문제에서 성별 질서가 강하게 자리한 한국 사회에서는 전사회적으로도 성별 질서를 정상가동하게 한다.

사회복무제에 여성의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그동안 병역의무에서 배제되어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는 존재로 지탄받곤 하는 여성들에게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다. 성별화된 질서에서 여성에게도 사회복무를 요구하는 것은 열등 국민이라는 존재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기보다 여성들의 ‘비국민’ 위치를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러한 형식적 평등화는 이미 성별화되어 있는 사회질서에 이중 노동을 부과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병역의무를 지어주는 것으로 남녀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것은 가부장제 현실을 무시하는 것으로, 사회에서 차별은 차별대로 받고 복무는 복무대로 하는 이중 노동을 부과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성들에게 강제 징집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군복무든 사회복무든 병역의무가 남성 국민의 의무로 자리하는 상황에서는 여성들에게 사회적 의무로 강요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적 영역’을 담당하고 있어야 할 여성들의 위치가 정립돼 있는 사회에서 공적 의무 이행보다 사적 의무 이행이 더 강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민의 자격이 무엇이고 국민이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더욱 봉쇄당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은 실질적 평등화는커녕 남성/여성 역할을 더욱 고정·강화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회복무를 하는 여성을 치켜세우는 방식으로 복무하지 않는 여성들을 향해 더욱 의무 방기자의 혐의를 덧씌우게 할지 모르며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비국민’의 위치에 가두게 할 것이다. 

이처럼 이 개선안은 여성에게 사회복무 이행의 부담만을 가중시킬 뿐, 차별을 없애기 위한 방안이 아니며 오히려 차별을 가중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진정한 개선안이 되려면 ‘징병제 폐지’를 목적해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병역제도 개선안’에 징병제 폐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사회복무제 도입은 국방의 의무 또는 병역 의무를 확장시키게 했으나 징집제도 자체가 양산하는 문제들을 질문할 수 없게 한다. 예외 없는 병역의무 부과는 형평성을 높이고 병역제도 개선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안이 될 수는 있겠지만, 한편으로 ‘국가를 지키는’ 의무를 더욱 광범위하게 부여함으로써 국방 자체에 대한 의문은 더욱 어렵게 만들고 강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정상유지시키는 토대를 형성하게 할 것이다.

이 개선안이 ‘군복무 기간 단축’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군축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군축운동은 너무 군복무 기간 단축으로만 바라본 경향이 있었는데, 이 경향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부는 병력 감축을 내세우면서 군비증강을 꾀하는 놀라운 기획을 보여줬다. 종합적으로 더욱 강력한 국가 강제징집제도를 실시하겠다는 이번 계획안은 고도의 사회통제 전략이며 인적 관리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개선안이 되려면 ‘징병제 폐지’를 목적으로 준비되어야 했다.

그동안 병역거부운동은 군인이 될 것을 거부하며 군사력에 기초한 국가안보와 군대 역할에 대해 문제제기해왔고 징병제도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해왔다. 동시에 군대 내 폭력구조와 군인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귀기울여 왔다. 국방논리에 맞서 평화주의 가치를 설명하고 일관되게 전쟁에 반대해왔다. 한편 대체복무제를 통한 병역의무 이행을 요구하면서 징병제의 탈군사화를 노리기도 했지만 ‘국민의 의무’ 자체를 의문시하지는 못했고 이미 ‘비국민’의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도 못했다. 물론 병역거부운동은 평화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음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자체 고민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극복하는 실천을 모색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동안 집중해왔던 대체복무제 도입 운동은 사회복무제 도입으로 그 의미가 상당히 퇴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된 지형에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는 실천이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운동이 징병제의 문제에서 출발했던 만큼 이제 다시 징병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징병제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제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실 보수적 국방논리에 따라 봤을 때도 비효율적이고 ‘나쁜’ 제도이다. 각종 인권침해를 비롯한 기본권 문제들이 산적해 있으며 군사 문화의 사회 확산에 결정적 기여를 하고 군사주의 사회체제를 작동시키는 동력 기능을 한다. 또한 병역의무를 둘러싼 차별을 만들어내고 사회의 위계화를 조장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도 언젠가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가야한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한다.

징병제 폐지는 현실적으로 모병제(지원병제) 도입을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주장이다. 다른 단계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국적 국방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현실적 대안이 되기 어렵다. 군대를 해체하고 지역통합적 군대 창설도 방안이 될 수 있겠지만 역시 단계론적 접근 속에서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징병제 폐지 - 모병제 도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징병제 존속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북한의 위협 및 주변 강대국의 위협이라는 것도 이제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다자적-포괄적 안보 협력 체제가 안착된 상황에서 일국적 차원의 징병제 존속은 합당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이 먼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군축의 모범을 보인다면 높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병제라고 해서 평화주의 입장에서 인정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다. 모병제 하 군대라 하더라도 여전히 전쟁을 염두한 군사조직이며 얼마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모병제 자체도 이러한 의미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맥락을 무시하고 주장할 수는 없기에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떤 변화를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모병제 도입은 징병제가 가지는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징병제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쉽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모병제 도입은 탈군사화로 가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병제가 도입되면 군대는 더욱 첨단화되고, 국민으로부터 분리되어 민간 개입 및 통제는 어려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징병제를 유지한다고 군대의 첨단화를 막을 수 있는지, 민간 통제를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민간 개입은커녕 종속되어오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군 첨단화는 군 발전 과정, 현대화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징병제도가 존속된다 해도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아직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재원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환기에 국방-안보-군사주의에 대응하는 평화운동의 흐름은 생겨나야 한다. 한국사회 평화 실현을 위한 실천은 징병제 폐지에 관한 사회적 논의를 만들어가는 것에서도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 강인화, [한국사회의 병역거부운동을 통해 본 남성성 연구]

2007년 2월 7일

염창근 / 이라크평화를향한연대·평화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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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광고해주기-"얼굴들" 상영!

  • 등록일
    2007/02/09 10:53
  • 수정일
    2007/02/09 10:53

여기선 처음인듯. ㅋㅋ

보러갑시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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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읽은 후 단상.

  • 등록일
    2007/02/07 00:34
  • 수정일
    2007/02/07 00:34
*
왜, 가끔 물에 불린 미역을 흐르는 물에 씻으면,
흐물흐물-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잖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뇌가 흐르는 물에 씻겨지면서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을 받았어.


#
머리말을 읽으면서부터 굉장히 쉽게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계속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었고.
정말 솔직하게 썼다고 생각한다.
머리말에서 한 남성 장애인과의 에피소드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에 여성주의는 사실상 '외부로부터의 도입'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소위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트기에 적합한 책이 아닐까 싶다.
기존 운동의 딱딱하고 난해한 만연체 문장과 달리
정희진은 깔끔하고 톡톡 튀면서도 쉽게 얘기를 하고 있다.


&
우리는 일상적으로 '부정적' 표현들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특히 우리자 주력하고 있는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일단 '한계'부터 짚고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사회주의자들이 좀더 넓게, 유연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하는데,(이게 지나친 열등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고민과 차이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참 좋았다.
하나의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인정한다.
그리 딱딱한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지 않나.


*
3부로 가면서는 조금 어렵기도 했다.
내가 많이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라.
특히 연령주의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성매매에 대한 이야기는 여성운동 내부의 차이와 고민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볼 만 했다.
개인적인 상태 때문인지 "군사주의와 남성성" 파트를 읽으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개인적 차원의 실천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온당히 정당하다.
한편으론 나에 대해 비통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함께 읽고 같이 얘기해 보면 건질 게 좀 있을 것 같다.


$
나는 얼마전에  '여성주의'란 표현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조건 속에서 전술적으로 '여성주의'란 개념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도 얘기했다.

지금도 추상적인 표현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습관적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고 보지만,

정희진에 대한 어느 남성의 충고 - "페미니즘은 자기 주장을 하기 전에, 남자는 불쌍하다, 남자도 피해자다.... 이렇게 남자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는 부분을 읽고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했던 생각이 저런 태도 - "그 '효율성'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분석이 필요한 논리"와 맞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성'에 대한 나의 의식은 한참 퇴보하다가
이 책 덕분에 겨우 각성의 실마리를 다시 부여잡은 듯 한데,
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다시 퇴보하겠구나 +.+


"앞으로 딸들은 아버지의 검은 잉크를 엎어버리고 어머니의 젖이라는 흰색 잉크로 어머니에 대해 다시 써야 한다. 이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식욕, 성욕, 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라 남성의 3대 욕구인 셈이다."

"'북핵 문제'라는 말은 조지 부시의 언어다."

한국에 여관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있다"여서? ^^

"가부장제 사회의 관습대로 남자는 늑대이고 여자는 여우라면, 늑대는 늑대끼리, 여우는 여우끼리 사랑하고 섹스하는 것이 '정상'이다. 늑대랑 여우랑 섹스를 하다니!"

"마르크시스트든 파시스트든 집에서 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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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이란 곳

  • 등록일
    2007/02/06 22:01
  • 수정일
    2007/02/06 22:01
허리가 아파 쉬고 있는 동지를 만나기 위해 작별인사(?)차 들른 곳.
어떤 동지는 앉아서 얘기할 만한 까페 같은 것도 제대로 없다고 푸념을 하길래
되게 쬐끄만 도시인가 보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상당히 큰 도시.
여기저기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 있고. (혹은 많이 짓고 있고)
어디나 그렇듯이 터미널 주변은 복작복작하고.

동지 차를 빌려서 잠시 태안 바닷가에 나갔다 들어왔는데
대도시에서의 운전은 익숙하지만,
신호등이 거의 없는 시내에서의 운전은 가끔 당황스럽기도 하다.
차 별로 없을 때 눈치껏 들이밀기~

나즈막한 야산 자락에 들어서 있는 동네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 동지의 집은 정말 커다란 원룸.
피둥피둥 살찐 고양이 녀석 두 마리가 맘껏 뛰놀고 있었다.
덕분에 다음날 오후 그 집을 나올 땐 한참동안 테이프로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은 고양이털을 떼 주어야 했지.

밤에는 횟집에서 새조개를 먹기도 하고.(사진을 못 찍었다. 아쉽~)
맥주집에서 육포를 뜯기도 하고.
작년에 있었던 일들을 되씹기도 하고.
하여간 간만에 술 좀 먹었다.

양옆으로 작게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 골목길이 인상적이었고,
집에서 5분만에 자전거로 터미널 도착.
원래는 자전거로 안면도를 종단하려 했으나
숙취와 늦잠으로 뎅글거리다가 그냥 서울로 왔다.

그 동지는 시내 나갈 때도 항상 차를 끌고 다니는 것 같은데,
그 정도의 중소규모 도시야말로 자전거가 시내에선 최고의 이동수단일텐데~

가보기 전에는 서산이란 도시는 참 멀리 있는 것 같았지만.
서울에서 서산은 고속버스로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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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하나…훈고학은 이제 그만"

  • 등록일
    2007/02/06 11:15
  • 수정일
    2007/02/06 11:15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하나…훈고학은 이제 그만"
  [반론]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묻는다
 
  2007-02-06 오전 9:50:37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출판사 펴냄)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트로츠키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실장을 지낸 이재영 씨와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 단체 '다함께'의 이정구 씨가 한 차례씩 주고받은 논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번에 이재영 씨가 다시 재반론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그는 이번 글에서 "이정구 씨의 반론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와 근거 없는 논리적 비약이 많다"며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좀 더 솔직하게 담았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트로츠키, 레닌, 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훈고학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도 던지고 있다.
  
  <프레시안>은 트로츠키의 한국적 수용을 둘러싼 이번 논란이 현재 한국 진보 세력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한 지표라고 판단해 기고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없다
  
  ' 다함께'의 이정구는 내가, 트로츠키가 크론시타트 반란을 파괴했다고 비판한 것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을 잘 알지는 못한다. 잘 모르는 내가 알고, 잘 아는 그가 모르는 사실 몇 가지만 확인하자.
  
  이정 구는 크론시타트 진압 당시 트로츠키가 외지에 출타 중이었으며, 군사령관이 아니라 '당 전쟁 정치위원'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업적 역시 대부분의 전투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무시되어야 한다.
  
  반란이 진압되기 며칠 전인 3월 5일, 트로츠키는 국방 인민위원 자격으로 크론시타트 수병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통첩했는데, 이 일도 타자병이나 전신병의 책임이지 트로츠키의 책임이 아니라고 구차하게 변명해 보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1980년 5월에 전두환이 어디에 있었는가가 아니다. 나는 혁명가 트로츠키가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있다.
  
   이정구는 '트로츠키가 진압하지 않은' 크론시타트 반란을 달가워하지도 않는다. 안타깝지 않은가? 트로츠키가 현장에 있었다면, 더 많은 치적을 쌓았을 텐데. 이정구는 반란이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고, 반란자들이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의 제거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도 거짓이다. 그 해 2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 이에 볼셰비키 사병 당원의 3분의 1이 공식 탈당하여 봉기에 동참했다.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그런 유언비어는 국외에서 밀류코프(Miljukov)가 만들어낸 것이고, 반란자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연장선에서 "소비에트에서의 선거"를 주장했다. 이정구의 러시아 혁명 얘기는 역사 날조다.
  
  이정구는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두고 이재영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운운하는 것은 트로츠키의 ABC에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노동자 파업을 봉쇄한 계엄령 철폐, 사회주의자 석방, 집회의 권리,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요구로 내걸었다. 이게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트로츠키의 ABC'는 잘 모르지만,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는 조금 안다. 그래서 노동조합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노동조합의 자주성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다.
  
  "소비에 트 러시아 노동계급의 생산적 산업조직은 매우 큰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어떠한 과제일까? 그것은 물론 노동의 이익을 대표하여 국가와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제휴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조합은 원칙적으로 새로운 조직이며, 종래의 노동조합과 다를 뿐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혁명적 노동조합과도 다르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중)
  
   혁명과 내전기의 상황에서 볼셰비키와 트로츠키가 옳았는가, 노동자 반대파가 옳았는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발달한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민주주의의 최고양식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차원에서 당시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한 일은 카니발리즘에 가깝다. 그래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던 것이다.
  
  " 인민위원 지배 타도! 권력 인수 당시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3년 전 우리는 '당신들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당신들의 대표를 소환할 수 있고 당신들은 새로 소비에트 선거를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크론시타트에서 당으로부터의 압력이 없는 새 선거를 요구했을 때 새로 부상한 트레포프 트로츠키는 이렇게 명령했다. 총알을 아끼지 말라!" ( 중)
  
  민주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천박한 태도는 차베스에 대한 돈독한 애정으로도 확인된다.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고 싶기보다는 그가 입법권까지 독점한 것이 걱정된다. '사회주의'나 '반미'를 내걸었다고 열광할 필요는 없다. 그런 군부 쿠데타 정치인은 나세르 이래 수없이 많았다. 국유화나 미국과의 긴장이라면 단연 박정희를 꼽는 것이 옳다. 차베스의 실험은 페론보다 훨씬 덜 진지해 보인다.
  
  딱지 붙이기는 이제 그만!
  
   이정구는 "이재영은 (…)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듯하게 말"했다고 타박한다. 그런데 바로 몇 줄 아래에서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투쟁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라고 반문한다. '야합'이든 '연대'든, 했다는 말인가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 이재영의 다함께 비판에는 안타깝게도 (…) 분파주의가 엿보인다"고? 다함께가 당당하고 분파적이지 않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것은 "국내외 보수언론조차 (…)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도"했다고 뿌듯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는가를 스스로 되짚어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 조상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 테니, 다행스럽다.
  
  물론 다함께는 옳다. 옳기 때문에 옳다. 옳은 조직이 하는 일이므로 누구와 놀든 그것 역시 옳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정성진 역시 충실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다함께의 이 같은 철학 방법을 따른다. 정성진이 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가 청산되지 않은 포스트스탈린주의라 규정할 때 그런 방법론이 가장 빛을 발한다.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논하면서도 스탈린에 반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스탈린주의를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포함시키는데, 나는 이것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뿐이다. 올바른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로 인정했으므로 포스트스탈린주의다!
  
  자율주의는 왜 또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이정구는 "정 교수의 책을 조금만 훑어 보아도 (…) 풍부한 논거에 입각한 논리적 비판을 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내해주는데, 그곳 어디에서도 자율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관계에 대해 단 한 줄도 설명돼 있지 않다.
  
   케인스주의에 대해 정성진은 이렇게 말한다. "진보 진영의 케인스주의로의 경도는 (…)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스탈린주의적 뿌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이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을 채택하면서 케인스와 같은 개량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이들과의 연합을 도모했던 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런 논박은 모리스 돕이 케인스 비판에 비적극적이었던 데 대한 증명일 수는 있지만, 장상환, 신정완, 이병천 등 한국의 '케인스주의자'를 비판하는 논거는 못 된다. 대입논술에서 이런 주장은 '논리 비약, 논거 부적절'이라 채점한다.
  
  훈고학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나는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투쟁하는 당대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는 생산민주주의를 주장한 노동자 반대파에 대항하여 '지령 관료제'를 옹호하였고, 노동조합을 군대처럼 통제하기를 희망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트로츠키주의자'는 그것을 보지 않는다.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 고르바쵸프가 내건 "다시 레닌에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이 경향의 시초이다. 모든 죄과를 스탈린에게 뒤집어씌우고,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자 했던 이 발상은 마르크스 이래의 후계자들에게서 오도(誤導)와 왜곡보다는 계승이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스탈린에서 레닌으로, 레닌에서 마르크스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파산하고 만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향에 아직도 둘러싸여 있다. 기존 사회주의 실패의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추정되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의존,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를 대립시키고 후기 마르크스를 취사선택하는 알튀세르의 방식, 그리고 유행하는 외래 사조(思潮)를 직수입하는 한국 진보진영의 천박한 상업주의.
  
  그러나 우리의 실패가 상당 부분, 현실 적합성에 대한 주체적 검증 없는 차용(借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더욱 중요하게는 진보사상 또는 진보운동이라는 것이 특정 사상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분리 곤란한 게슈탈트적(Gestalt的) 거대한 총체라는 점을 되짚어 볼 때, 특정한 이론적 권위로의 도피는 잠시의 모면책일 수는 있어도 진보사상 본래의 목적인 대중 조직, 국가 운영에 기여하기는 어렵다.
  
  " 모건 스탠리의 2004년 4월 26일 민주노동당 방문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만남에서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당이 직면하게 될 두 가지 시험대, 즉 시장과 대중 투쟁에 대한 개량주의자의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국유화 계획'을 묻는 모건 스탠리의 물음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이 없다'고 답변했다." (김인식, 『다함께』 30호, 2004)
  
   개악보다 개량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는 분명히 '개량주의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2004년 4월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다함께는 그 때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현재는 있는가? 다함께는 개량주의자인가?
  
  국유화는 카페 혁명가의 낭만이다. 혁명을 준비하는 정당의 정책실장이라면 어떤 이유로, 어떤 기업을, 어떤 시기에, 어떤 방법을 통해 국유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국유화를 되풀이하는 데 멈춰서는 안 된다. 그의 책상 위에는 국유화 법률 공포안과 재정 충당 계획, 정치적 경제적 프로세스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4년의 민주노동당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가질 필요도 없는 당이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렇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있어 우리는 실천의 문제에서 이론상의 문제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하여 대한민국을 개조할 날이 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물론은 다른 철학 체계들과는 달리 결코 자기완결적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여러 과학들과의 연결에 의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물질 생산의 후진성은 그리스 철학을 명민한 추측으로서만 긍정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진보적 원칙과 몇 가지 과학적 발견의 '절대적 구성'일 뿐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유물론은, 유물론의 내용을 채울 과학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나마 성과조차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물론 실현의 관념적 과도기였다.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
  
  후진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마르크스주의의 얼굴을 덮고 있던 카리스마 가면이 벗겨졌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에 접근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다함께처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Return to Marx)"가 바른 길은 아닐 듯 하다.
  
  마르크스로의 복귀 또는 그의 수많은 문헌에서 그럼직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고순도의 결정을 얻기 위해 알코올 램프의 불꽃을 돋우는 아편쟁이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 짓은 마르크스 훈고학(Marxolgy)이지,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아니다. 체제가, 매순간마다 재생산되는 물질과 의식의 최후 종합이라는 점에서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 모두를 안다.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 J. Gould)는 진리를 찾는 도상에서 인류가 지표 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적절한 가르침으로 코코란 선장의 말을 인용한다.
  
  "아직 멀었다."
   
 
  이재영/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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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동지들을 보면서

  • 등록일
    2007/02/06 10:33
  • 수정일
    2007/02/06 10:33
얼마 전 법원에서 이주노조 설립은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판결이 났고,
참세상에 이주노조 총회 기사도 실렸다.

내가 정식 연대활동을 통해 처음 이주노동자 동지들과 맞닥뜨린 것이 2003년.
그때 활기차게 활동하던 동지들 몇몇은 여전히 활발하게 노조활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단속과 추방 압력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
대부분이 불법체류로 사실상 '비합법'신분으로 언제 들려 나갈지 모르는 와중이지만
꿋꿋이 움직이는 동지들을 보면, 나의 결의가 참 부족한 것 같아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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