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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유적존재에 관하여...[희망의 공간]

  • 등록일
    2009/08/17 12:42
  • 수정일
    2009/08/17 12:42

아직도 희망의 공간을 가지고 헤매고 있다.

가급적 내일까지는 다 읽자라는 나름 굳은 결심을 해본다...크크

(야 ! 제발 질질끌면서 책읽지 말자...제발,,,,낼까정 꼬옥..꼭.....다 읽어 ....알았쥐..?..다짐다짐...크크)

 

어제 저녁 출근전에 잠깐 읽은 한구절이 내내 머리속에 남았다.

 

...'우리의 유적존재'에 관한 개념화...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에 의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우리의 능력에 관해 말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임의적으로 제약된 상상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자신을 어떤 종으로서 이해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의 특정한 능력과 힘(맑스가 설명하는 '잠재의식적 힘'을 포함하여)을 이해하는 어떤 방식을 전제 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 가지는 변증법적이고 신진대사적인 관계와 그 관계를 통하여 다시 인간 본성(특수한 성질과 의미를 가진)으로 되돌아오는 관계는 우리의 미래와 운명의 건축가로서 우리가 다성할 수 있는 것의 밑바탕에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계와 신진대사적 관계를 가지는 감각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활동과 노동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수정하고, 또한 그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 다른 모든 종처럼 우리는 종 고유의 특별한 능력과 함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사회 조직에 대한 우리의 형태를 바꾸고 적응해나가는 능력

(예를 들어 노동의 분업, 계급구조와 제도의 창출 등)

언어를 통해 오랜 역사적 기억을 조성하는 능력,

미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서 우리에게 가능한 지식과 이해를 축적하는 능력,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우리 자신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했했던 것 그리고 행하고 있는 것에 관해 반성하는 능력,

그리고 우리의 특별한 솜씨 덕분에 우리 자신의 신체적 구성에 의해 주어진 생리적 제약을 넘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종류의 부속품(도구, 기술, 조직 형태, 통신체계)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능력 등이다.

그 결과는 문화적,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진도와 방향에 매우 민감하도록 우리의 유적 존재와 우리 종의 환경에 적응하고 또한 이를 변화시키는 속도와 규모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배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역동성에 따라 생산하고 행하는 것의 대부분(모두는 아니더라도)을 이룬다......

 

 

...................................

 

내가 인간이라는 유적존재로서 생물학적 종으로서

이런 능력을 가지고

무엇인가 생산하고 관계된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을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수 있을까 ...?

 

물론 피상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지만

스스로는 개인적으로 아 !! 반성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런 유적존재 혹은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 자칫

인간의 교만 혹은 자연지배력으로 분출될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다시한번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나의 모습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잠재의식적인 능력과 힘을 가지고

어떤 식의 삶들을 살고 있는 것일까 ?

대다수 종으로써의 인간은 이러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더욱더 인간을 인ㄱ나으로서 살지 못하도록 하는 시공간들을 창출하는 데

경쟁적으로 뛰어들며 체제들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국 가진것에 비하여 이루어 놓은 것이 빈약한 사회가

점차 우리들을 인간이라는 종으로써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살짝...이 모든 인간의 종으로서의 능력과 힘들에서...

실은 이 모든 능력들을 망각하고 무능력하게 적응하는 자장 무서운 능력또한

우리에게는 있는 것처럼도 생각되어진다....^^;;;......

 

음...인간으로서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지...모르겠다....라는 생각을 미친놈처럼  밤새 일하면서 했다.

손발은 돈벌기 위해

머리는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그렇게 밤은 더웠고 지치고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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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의 노동...

  • 등록일
    2009/08/14 14:40
  • 수정일
    2009/08/14 14:40

데이비드 하비의 [희망의 공간]을 두번이나 연속해서 읽고 있으면서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피곤한 몸 핑계대면서 실은 머리가 쉬고 싶은 거까 ?...싶다.

 

요 며칠

실은 일도 안하고 있다.

 

...우리가 도시의 미래를 숙고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과업의 속성'에 관한 우리의 의미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혼란시키기도 하는 광범위한 감정적, 상징적 의미와 항상 싸워야만 한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우리의 도시를 생산하는 것처럼, 우리는 집단적으로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

따라서, 우리의 도시가 어떠하기를 원하는가에 관한 프로젝트는 인간 가능성에 관한 프로젝트,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또는 보다 요령있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에 관한 프로젝트이다.

우리 가운데 어떠한 개인들도 이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야 할 어떤 것을 가진다. 따라서 우리의 개인적 및 집합적 상상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도시화의 노동을 정의하는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에 관한 비판적 반성은 우리가 거주하는 제도적 및 상상적 세계의 '무력한 꼭두각시'라기 보다는 운명의 의식적 건축가로서 행동하기 위하여 숨겨진 유토피아주의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이를 부활시킴을 의미한다.

 

만약 '사화란 만들어지며 상상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도시가 '다시 만들어지고 다시 상상되도록'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희망의 공간 (p219-220)

 

공간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특히, 건축적 관심이 폭주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어쩌면 [유토피아]에 관련된 징후인듯싶다.

내가 꿈구고 상상하는 어떤 공간을 실현하고픈 욕망이 넘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런 공간적 상상이 건축물처럼 단순한 공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시공간적 과정에 집중하려고 스스로 노력중이긴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가 행하고 만들고 꿈꾸는 모든 것들은

단순한 결과무로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재구성되고 재발결ㄴ되면서

유동적으로 변화한다고 생각되어진다면

결국 남는 것은 과정으로서의 공간적 유희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책읽는 내내 했었다.

 

가령 한옥이 몇 백년간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 뼈대의 이야기 일뿐 실은 몇십년마다

살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를 겪는다.

 

한옥답사를 가 보아도

2-300년된 한옥이라고 해서 당시의 부재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다만 그 건물을 지은 사람의 마음만이 남는달까 ?

 

아무리 구운 기와라도 5-60년 이면 지분의 기와와 올려진 흙을 갈아주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고

벽채의 흙들도 50년 정도마다 헐어내고 다시 치대어 쓴다.

결국 우리가 만들려는 공간에서의 공동체 혹은 공간적 유토피아 또한 결국

사람의 세대가 변하면 언제나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겠고

그렇게 변화한 공간에서

여전이 유의미하게 살아남는 것은 삶의 과정과 우리들 실행하고 재구성하려 했던

상상의  집단적 과정은 아닐까 ?

 

여러모로 복잡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스스로 과정으로써의 공간적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지난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아마도 공부가 부족해서 그럴까 ?

 

여튼

두번째로 다 읽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 보아야 겠다

이 책 읽다보면 묘한 매력이 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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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2)..영은묻고 나 답하기..

  • 등록일
    2009/08/13 14:51
  • 수정일
    2009/08/13 14:51

으으.... ...뭐야.....

영은 너무하는 거 아니야...이건....흑흑흑..

이건 뭐랄까 ....영은이 땜시

완존 내가 숙제하는 기분이랄까...?

이렇게가지 해주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인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겨우

가물가물한 기억력 몇 가닥인데

이처럼 마구마구 숙제를 던져주면...난...난....흑흑흑

으아아아앙......

 

옆에 혜린샘이나 종민샘 있으면 대신 답하라고

강요하고 싶어질 정도군....크크크

 

여튼

이렇게가지 영은이가 정리했는데

밍기적 거릴 수 도 없고....그렇다고 걍 가물가물한 기억을 믿고

부정확하게 답할 수 도 없고

진짜로 난감하군....갸갸갸갸....

 

여튼

나 진자로 기억이 잘 안나...하는 자기방어적 변명을 먼저 하고 싶어진다...ㅎㅎ

진짜로 머리가 딴나라로 놀러 갔다는 것 이해해주고 읽어주길 바란다....ㅎㅎ

 

나중에 네가 책 돌려주면

제대로 나두 정리해 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단다...ㅎㅎ...물론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히히힛

 

여튼

네가 묻고 있으니 외면할 순 없고

뭐...여튼 답은 해 볼 요량....ㅎㅎ

 

악과 공포

 

 

영은

악과 공포는 샴쌍둥이에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악이고 악이라고 하는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래요. 근데,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모두가 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죽음도 악인가요?

여기서 악은 설명 할 수 없는 것, 이해 할 수 없는 것, 칸트에 말로는 인간이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닌 예지계에 속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지계에 있는 것들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존재를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여기서 궁금한건 앞에서 악이라는 것이 설명 할 수 도 이해 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뒤에서는 계속 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읽으면서 종종 그래서 도데체 악이 뭔데? 하는 생각이 들고 악이란게 정의 되지 않으니까 뭔가 계속 한편에서 납득이 잘 안간달까.. 그래요.

 

=>

음 말그대로 악과 공포는 샴쌍둥이가 맞는 듯 하다.

다만 한몸이면서도 다른 존재랄까 ?

결국 우리들을 공포스럽게 하는 것...그렇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써

즉, 두려워하는 존재로써 우리들은 악을 상정한다는 거겠지.

결국 공포가 오면 우리는 그 공포를 우리에게 주는 어떤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데 그것이 곧 악이 아닐까 싶구나. 그렇니까 공포가 오면 악도 따라서 온달까 ?.....ㅎㅎ

내가 칸트는 잘몰라서 말하기 많이 망설여지지만 생가해 보면 우리 인간이 상정하는 악이라는 것은

어쩌면 구체적인 현실 혹은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 상징처럼 보인단다.

즉,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악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지.

따라서 성서에서 예언서들이 하는 역할 즉, 보여주고 현시하도록 해주는 것이 아닌 막연하게 던져주고 그 공포감을 가지고

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공포를 만났을때 막연히 그 공포를 받아들이든 저항하든지 간에

그 공포를 주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악이라고 상정하고 혹은 명명한다는 것처럼 보인단다.

따라서 이렇게 악이라는 것 자체에 이해불가능성을 상정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해 혹은 납득할 만한

무엇으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 악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영은

이성은 보편적이고 사라지지않은 것이에요. 이성이 어떤 것을 이해할때는 도구상자와 작업방식에 있어요. 도구상자와 작업방식이 발달 될 수록 이성이 점점 약화된데요. 악을 이해할때요. 왜 그런거에요?  [이성의 작업방식이 더 효율적이 될수록, 악에대한 잡업만큼은 더 부적절해지고 분에가 많기 된다.]라고 나와요. 악이 이해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서 그럴까요? 그럼 왜 악이 설명되거나 이해 될 수 없을까요? 죽음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잖아요.

 

=>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선은 악이라는 것이 이해불가능한 어떤 것들로 우리가 상정하는 그 출발에서 문제가 있는듯 싶구나

이성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들은 어떤 대상 혹은 실체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이성적인 작업을 통해서도 납득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우리는 악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사용한다고 치면

결국 이런 악을 상정하는 것 자체를 이성적 작업을 통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수록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거나 더욱더 부적절한 어떤 것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지/

결국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들을 악으로 상정한다는 것.....

이런 문제가 아닐까 ?

 

 

 

영은

과거에는 이해불가능성 띈 악의 관념을 표면화하지 않았어요. 악이란 죄를 짓게하는 것이였고 죄를 진 죄인은 벌을 받아야 했죠. 그래서 고통(벌)을 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고백하고 회개하라고 강요했어요. 정신분석가들은 현재의 고민이나 문제는 어린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어요. 그렇기에 계속해서 앞에 처럼 인식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의 경험을 찾으려 하기도 하죠. 악에 대해서 죄를 찾는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 지 못하죠. 그리고 악과 죄에 대한 관련이 있는 것 조차 의심없이 믿고 있구요. 오히려 빠져나갈 곳을 찾기위해 원죄같은 걸 만들어 놓기도 하죠.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욥기라는 것이에요. 욥기는 성서에 한부분으로 욥이라는 아주 신실하고 착하고 아무튼 벌을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나와요. 그런데 그 사람은 계속 벌을 받게 되는 거죠. 기독교는 착한 사람이 복받고 나쁜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교리가 있잖아요. 욥기는 이걸 깨고 불분명하게 하죠. 재밌어요. 여기서 재미있는 해석은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자신의 힘이 공포스럽기 위해서는 예측불가능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는거에요. 욥이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근대인이 아니라서 구요.

 

=>

과거에는 악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었던것 같다. 다만 그 받아들이는 것을 악과 죄라는 것을 통하여 실행하려던 것도 같다,

즉, 우리에게 설명되어지거나 이해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그에 따르는 벌을 가하는 것으로

그 악을 제거했다고 생각하였다는 거다.

딱히 설명되어질 수 없는 악에 대하여 그렇게 원죄까지 들추려고 했었던 것은 결국 과거의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악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적당한 벌을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겠지...

 

여기서 문제는 악에서 죄를 찾는 것...에 있는 듯 싶구나.

절대적으로 상정된 악이란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한다고 치면 결국 악은 죄와 다른 측면이 있는것이다.

우리가 죄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구체적인 ㅅ니체를 가진 무엇이라고 상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결국 인ㄱ나이 지배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실체를 지녔다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악을 제거하기 위한 죄의 설정은 그 죄를 벌할 수 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죄라고 상정한다면 차라리 죄를 벌과의 상관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를 듯..

하지만 악은 우리가 벌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하는 것으로 보인단다.

따라서 악에서 죄를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무엇인가를 찾지 못한다는 것인 아닌

악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악은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를 띄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여기서 한가지...

용기는 일종의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단다.

즉, 우리가 신의 섭리라는 권선징악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였을때

빠지게 되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욥기인것 같다는 거다.

즉,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신은 어쩌면 자신의 변덕으로 치부하면서

오히려 그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인간들에게 이해하려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욥기의 원칙이라는 것이지

이렇게 보면 이해불가능성에 기반한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신]과 [악]은 동일한것 같다.

즉, 차라리 [악]은 이해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제거하여야 하는 대상으로서

보다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들을 반영하는 반면에 [신]은 인간 자체를 수동적이고 그저 공포를 받아들이는 미미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는 거다.

결국 동전의 양명처럼 [신]과 [악]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른 곳을 보는 것이겠지...ㅎㅎ

 

 

 

영은

근대 철학은 리스본의 재해에서 부터 시작됬다고 하네요. 근대철학은 불규칙적인 자연재해와 의도적이고 목적성 있는 도덕적인 악으로 나뉘어 져요. 자연재해도 죄와 관련있다고 생각했던 생각에서 독립한거죠. 변신론이라는 신의 결정은 모두 선한 동기가 있다는 신을 보호하는 거에요. 그것을 깨게 된것이죠.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 자연재해의 이유를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으로 루소. 그리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악을 제거 하자는 말이 나왔어요. 과학과 기술이 있으면 인간이 악을 제거 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지고 또한 모든 악을 제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 제거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악은 자연적 악이에요? 이 때는 인간적 악이 크게 문제되던 시기가 아니니까, 자연적 악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겠죠?

 

=> 근대철학은 리스본의 재해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드디어 자연이나 신이 아닌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든단다.

즉, 이제가지의 고대 철학들이 자연을 이해하거나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불가능한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면

이젠 그 한계에 다다른 철학이 드디어 리스본 재해를 통하여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근대철학의 시작이라는 의미겠지.

결국 악의 제거라는 것을 단순하게 자연을 이해하거나 혹은 신의 섭리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거고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가지 가능성이 인간에게서 찾자는 것이 근대철학의 방식은 아닐까 ?

결국인간을 바라보면서 근대철학 혹은 근대과학이 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불가능성이라는 것을 통하여 상정된 악을 이제는 이해하게 됨으로서 악의 지위에서 내려와 과학의 위치로 바꾸어 준 것이겠지.

이제가지 알수 없어서 악으로 치부해 버렸던 것들이

과학을 통하여 그 원인을 이해하면서 드뎌 과학적으로 규정되면서

우리들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악을 제거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따라서 이제 문제시 되는것은

우리 인간의 문제 즉 인간적 악의 문제라는 것으로 시선이 모아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결국 근대철학은 인간적 악을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라고 볼수 도 있다는 것이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욱더 알수 없어진 것인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겠지.

자연을 과학을 알아갈 수록 인간을 더욱더 모르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런 인간들에게 더 큰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근대철학의 암울함이랄까 ?

 

 

 

영은

근데 이제 인간적 악이 문제가 되기 시작해요.아우슈비츠 사건이에요. 아우슈비츠 사건은 유태인 대학살을 이야기해요. 인간적 악이 자연적악처럼 무시무시해 지는 거죠. 아무튼. 아우슈비츠 사건은 변신론이 리스본 사건으로 무너지고 나타난 변신론을 대신하던 것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 주었어요. 그렇다면 변신론을 대신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앞에서 나온 것 처럼 인간이 악을 제거 할 수 있다는 믿음을까요? 신이 죄를 짓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선한 동기라는 변신론이 무너지면서 인간은 예측 할 수 없는 벌의 공포를 가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악을 과학의 힘으로 제거? 아니면 근대의 모든 법률이 가지고 있는 가정, 모든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일까요?

 

=>

철학의 시선이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이 인간으로 돌아오면서

문제는 그 시선의 주체이면서 객체가 되어버린 인간의 몰이해성이 더 큰 공포를 준다는 것이겠지.

가령 자연의 이해불가능성은 어쩌면 쉽게 잊어버릴 수 도 혹은 신의 섭리로 알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 외면할 수 도 있었던 문제들이

인간의 시선에 포착된 인간은 그런 외면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겹치면서

우리에게 더 큰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인것 같다.

 

 

영은

아이히만의 얘기로 넘아갈까요? 아이히만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사람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아이히만에게서 이야기기 해야 할 것은 관료제에요. 아이히만은 관료제에 충실했던 것 뿐이라는 거죠. 악. 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사람은 아주 평범하고 우리와 다를것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인 거죠. 다만 아이히만은 특별한 상황이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이익 추구로 부수적피해가 일어난 것이구요. 그리고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에 대한 의도가 없어었죠. 다만 조직의 윗사람의 명령에 따른것 뿐이고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앞에서 얘기 했던 모든 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라는 가정을 위협하게 해요. 그러한 가정을 위협하는것은 관료제에 있어요. 관료제는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않아요.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바뀌니까요. 다만 복종을 요구할 뿐이죠.

관료제에 있는 악은 두가지 특징이 있어요. 악의 평범화와 합리성이 있어요. 관료제에 있는 사람들의 의도와 동기를 모르는 체 악이 될 수 있어요. 이것이 악의 평범화 아닐까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관료제 안에서 동기가 없는 악이 되는 것이죠. 근대 사회에서는 이미 악의 없이도 악을 행할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합리성은 관료제 안에서 위에서 오는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관료제에서의 악은 평범화보다 합리성이 두드러 진대요.

 

=>

관료제라는 것이 어쩌면 근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것처럼 보인단다.

그런 의미에서 관료제라는 조직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지...ㅎㅎ

어떻게 보면 아이히만은 가장 두드러진 근대를 대표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단다.

즉, 단순히 조직에 대한 충성과 충실한 가족의 구성원..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   랄가 ?

 

신자유주의라는 것의 추종자였던 영국의 총리 대처라는 사람이 한말이 있단다.

 

"사회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 있을뿐..."

 

결국 관료제로 대표되는 아이히만은 어저면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한단다

(나의 생각일뿐...ㅎ)

 

즉, 모든 판단과 결정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런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에 충실하기만 하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겠지.

명령과 사회적인 악 사이에서 결국 그는 조직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결정한 것일텐데

이런 것들이 결국 현재 우리들이 겪는 사회의 문제가 아닐가 싶고

또한 우리가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인ㄱ나적인 악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행태가 아닐까 싶다는 것이지.

악의 없이도 악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서 이해할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해불가능성...???

각 개인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와의 관계 혹은 사회라는 체제속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파편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느 악의없이 악을 행한다고 보는 것은 아닌지 싶구나....ㅎㅎ   

 

영은

인간의 이성이 근대적으로 쓰이면서 인간은 긴 우회로를 달리고 있었어요. 가면 갈수록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원래로 돌아가게 되죠. 우회로. 우리는 지금도 자연적인 악, 재해를 막지 못하고 있고 위험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죠. 실은 인간적인 악이라는 자연적인 악만큼이나 예측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무시무시한 재해를 만든 것인지도 몰라요.

인간이 만든 악은 자연적인 악만큼이나 예측불허해요. (왜?) 그리고 자연적인 악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악을 예측하지 못해요. 이런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면서 외면하고 고개 돌리기도 하구요.

칸트의 정언명령이 나와요. (윤리선생님도 어려운거라면서 잘 설명해주시 않은게 기억나더라구요.아무튼,)"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이거죠.  사실 이부분이 잘 이해가 안가요. 보편적 입법원리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구요. 보편적 입법원리와 대립하는 이중 잣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런건가.. 생각하긴해도 전혀 맞는 것 같지도 않구요.

근대에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배타성을 확보하는데 있어요.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거나 다른사람들 (우리와 다른)를 배제하는 것에도 쓰이고 그것을 문제 삼지도 않아요. 근대적 이성은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소유물이라고 해요. 하지만 근대적 이성은 이러한 보편성 보다 특권을 위해 봉사해 왔어요,

그리고 인간적 공포가 무시무시하게 확대됨에 따라 생긴것이 있어요. 바로 신뢰성의 상실이에요. 아이히만이 지극히 정상이였던 것 처럼,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언제 악이 될지 모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오류가 있어요. 분명 많은 사람들은 악을 싫어하고 거부하겠죠. 하지만   적당한 조건이라는 것이죠. 적당한 조건에서 우리는 악이 될 수 있는 거에요. 그렇기에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모두를 의심해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해겠죠. 아.. 인간관계의 아슬아슬함을 말해요.
 

==>

결국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유동하는] 세상을 이야기하고픈 것이겠지.....ㅎㅎ

근대 이성이라는 것이 철저한 각 개인성을 기반으로 한 고립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란다.

즉, 모든 것들 실은 굉장히 사회적인 문제까지도 

이 사회에서는 그저 각 개인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책임으로 돌려 놓으므로써

더이상 [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제거하려는 노력들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란다.

결국 과거의 [신]처럼 어쩌면 세상은 

[자본]이라는 것을 신의 위치로 삼고 수동적 인간...그저 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이겠지

이는 근대철학의 문제이기도 한것 처럼 보인단다.

인간이 가진 시선이 인간을 주체 겸 객체로 만들고 다른 모든것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순간

인간들은 헤어나올 수 없는 딜레마에 갇혀서 허우적 거리게 된것처럼도 보인다는 거지

 

최근

이런 개인성 혹은 개별화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쉽게 볼 수있는 것 같단다.

사회전체 혹은 공동체의 문제마저도 등한시됨녀서

철저하게 개인의 관심사 혹은 개인의 문제가 오히려 공공의 논의들에 자주 등장하고

나아가서 그 해결과 책임도한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것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저 리얼리티 쇼 처럼 그저 방청객이면서

마치 참여자로 착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회

더 나아가 자신들이 행하는 악의없는 악에 대하여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마는 자기사면의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었단다....ㅎㅎ

 

===>

두서 없이 말만 한것 같아 미안하구나....ㅎㅎ

처음에도 이야기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ㅎㅎ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이런 유동하는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고립된 개인의 사회에서

우리는 그저 가벼운 네트워크 정도의 관계들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범죄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을 했었던 것 같다.

 

아이히만처럼 

우리는 어쩌면

공포를 상정하면서 그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그저 [신]처럼..자본주의의 신인 [자본]에 맹목적으로 온몸으로 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더 나아가 애초에 공포를 이해하려기 보다는 모든 것들을 악으로 간주하고

그 악을 단순히 미워하는 선에서 모든 문제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고 있었던 듯 싶기도 하구나....ㅎㅎ

 

영은이가 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길 바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읽고 좀더 개별화되는 사회에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함개 살아간다는 것에대한 공부들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싶구나...ㅎ

뭐...나보다 바쁜 고딩이니 그러기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네가 사회 혹은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질땐

항상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단다.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공포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말이다....ㅎㅎ

 

여튼

약속대로 미션을 수행했으니

음....주기로 한것은 주지....푸하하하

 

곧 감행하기로 한 1박 2일 가출을 멋지게 성공하길 빈다....

여행에서 가출에서 보자....수고  

 

(아차차...생각해보니 칸트 이야기를 빼먹었군....캬캬캬

음 정언명령이니 하는 문제는 잘 모르겠고

아마도 도덕적 의무감인가..? 싶다.

도덕적 이성으로써 해야한다고 판단된 것은 해야한다는 것...이겠지.

감성 혹은 동정 혹은 감응 등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감으로서 

해야 할일들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듯 싶구나....ㅎㅎ

뭐 자세한 것은 나두 칸트를 좀 만나보고 이야기 해주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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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1)..영은 묻고 내가 답??

  • 등록일
    2009/08/12 14:52
  • 수정일
    2009/08/12 14:52

음..

한 두달전인가에 읽은책인데

나름 재미나게 읽었던 터라

영은이에게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나름 미션을 달았었다.

읽긴 읽되 나에게 설명해 보라고...ㅎㅎ

 

언제나 변함없이 읽어내는 영은이가 결국 시간내에 읽고

설명 겸 답을 해왔다.

음...그래서 읽고도 정리하지 않았던 책을 뒤늦게 정리할 까 싶기도 하다....ㅎㅎ

실은 읽고도 정리하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뭐...다음에 시간되면 그때하지 하는 게으름으로 뭉게고 있었는데

영은 덕에 스스로 반성하기도 했다....ㅎㅎ

 

근데 기억이라는 것이 요상해서

아 ! 잼나게 읽었었지 ? 하는 생각은 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까마득하다....

그래서 영은이가 묻는 것에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고 막막하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이 나에게 없고 영은에게 있어서..

책 다시보면서 생각할 나름 빠져나갈 구명이 막혀 있다....갸갸갸갸

여튼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부족하지만

생각나는대로 써볼까 싶다.

 

 

[즉음의 공포]

 

영은

죽음의 공포는 리얼리티 쇼로 시작됩니다. 리얼리티 쇼로 추방, 해방, 사면 등의 단어들을 설명하고 있어요. <빅브라더> 는 한번에 한명씩 '추방' 해야하는 리얼리티 쇼에요.

 

여기서 추방이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의미로 설명되어있어요.

추방을 피하고 살아남을수 있는 확실한 길은 없고 정당한 추방도 없어요.

다만 추방해야하기 때문이에 추방하는 사람이 생기는것 뿐이죠.

근데 정말로 '추방'이라는 것이 그렇게 결정되고 성립되는지는 확신가지 않아요.

추방이라고 불리는 모든 경우에 수에 해당되지는 않다는 생각이에요. 

 

해방으로 넘어가면 해방이란 <빅브라더>가 가지고 있는 진실에 있어요.

그 진실을 <빅브라더>를 시청하는 사람들과 공유되고 있고 <빅브라더>라는 것으로 정당화되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느낌이나 의심, 예감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게 되죠.

그러면서 '해방'이라는 단어가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진실은 뭐라고 설명 가능할까요?

 

사면으로 가요. 사면도 '해방'하고 비슷한가 싶어요.

사면은 퇴향적이면서도 전향적이에요.

이 말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죠.

그리고 전향적이라는 것의 그 사람들의 잘못들이 용서되면서 정당화 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의 용서도 어제 읽은 그 용서와도 관계있는것 같아요. 

이러한 리얼리티 쇼에서의 메세지는 혹은 진실은 주기적인 추방 과정에 얽힌 애환을 최대한 밑바닥까지

파헤쳐 보여주는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음...

[지그문트 바우만]이 설명하고 있는 추방, 해방, 사면 등등의 단어들은

내 생각에 [근대적 시공간]이라는 시간성 혹은 역사성안에서 설명되어지는 것 같단다.

즉, 네가 계속 의문스러워 하는 것 즉, 우리가 인문학 수업을 하면서 단어자체가 가지는

의미들을 깊게 생가해 보는 것...특히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단어들을 재음미해보는 것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단어 설명들을 이해하면

약간씩 동의하기 쉽지 않은 것...어긋나는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거다.

 

가령 네가 [추방]이라는 단어설명에 가지는 의문도 실은 

[추방]이 갖는 사전적 의미 혹은 네가 생각하는 역사적 단어의 의미들로 보면 약간의 의문

즉, 모든 수에 해당하는 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는 할거라는 거다...ㅎㅎ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은 

시청자들이 열광해서 시청하는 [리얼리티 쇼]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것 같다.

즉, 리얼리티쇼가 보여주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상징성이랄까 ?

 

우리의 실상적 삶들이 일종의 일얼리티 쇼라면

우리가 이런 리얼리티 쇼에서 이루어지는

추방, 사면, 해방 등등에 대한 반응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참여과정들로써 우리들의 근대적 삶들이 설명되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단다.

 

즉, 우리가 인정하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추방은 실제로 현실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

왜 ...?

그것은 사람들이 각각의 개인으로서 판단하고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한 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된것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책임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가 근대라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개인적 판단, 결정,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

따라서 부당하고 불편한 규칙일 망정 사람들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동조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거다

 

심지어 해방조차 

해방을 위한 자신들 즉, 개인들의 변화된 무엇인가를 스스로 의심, 판단, 결정 책임지기보다는

그것이 잘못되었을지 몰라도 

구체적이고 눈에보이게 제시되어지면 대중이라는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거다...ㅎㅎ

( 아 ! 물론 그 대중들이 무식하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동의하고 마는 것...

이 무서운 진실을 리얼리티 쇼아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ㅎㅎ)

 

 

영은

 고대의 교훈담은 권선징악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요.교훈담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승리자는 추방에서 모면된 사람이고 복을받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아요.

<빅브라더>와 <위키스트 링크>같은 리얼리티 쇼와 아주 비슷한 맥락이에요.

이렇게 이런 고대의 교훈담은 유동적 근대사회에서 수용되고 있어요.

근대사회에서 근대의 교훈담이 아닌 고대의 교훈담이 수용되고 있는 이유는

공포에서 눈돌리는 방법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사실 근대 교훈담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요.

 

두번째는 착한일과 나쁜일, 복과 벌의 관계과 뚜렷하지 않아요.

이것은 추방에 특성에 있어요. '정당한 추방'이 없다는 것, 추방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추방으로 이루어지는 교훈담이 착한일과 나쁜일, 복과 벌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죠.

근대의 교훈담은  복불복이에요. 복불복으로 추방과 벌이 떨어져요. 이유도 설명도 없이요.

 

(근대의 교훈담은 죽음의 리허설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것은 뒤에 나오는 죽음의 평범화와 관련이 있을까요?)

 

[지그문트 바우먼]이 보기에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은 결국 유동한다는 것...즉, 액체의 성질처럼

고정적인 형태를 가지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유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거다

변화가 눈에 보이는 구체성을 가지고 우리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거다.

즉, 우리에게 점점더 정해진 규칙, 규율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에 있어서

스스로 그 규칙들을 만들어가고 새롭게 변형해야 한다는 것이 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철저하게 각 개인의 책임으로 혹은 개인들이 치루어야 하는 일들로

부여됨으로써 각 개인들은 엄청 당혹하거나 과거 지향적이 되거나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고대 교훈담을 수용하는 방식이고

근대의 교훈담이 복불복 처럼 되는 이유이고

또한 그런 교훈담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은 아닐까 ? 싶단다...ㅎㅎ

 

영은

죽음은 다른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있어요. 완전한 상실. 끝이에요.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공포가 되요.

원초적 공포.

모든 생명체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요.

그거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지만요. 러한 공포를 회피 할 수 있는 방법이 몇가지 있어요.

 

첫번째는 죽음을 종말이 아닌 종료로 생각하는 것이에요.

죽음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거죠. 그렇기에 현생의 삶을 더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구요.

오히려 죽음을 매순간 기억하라는 '메멘토모리'라는 말이 생겼죠.

죽음의 의미를 거꾸로 뒤집는다고 그러네요.

엄청난 공포를 엄청난 삶의 의욕으로요.그런데 이것의 변형판이 있어요.

자신의 삶을 불면성을 위해 사는거에요. 지속적 효과에요.

자신의 삶의 업적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불멸하는 것이죠.

이것의 자신의 삶이 덧없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줘요.

이 지속적인 효과는 두가지로 나누어져요.

 

첫번째는 개인적불멸성이 에요. 개인적불멸성은 개인성이 있어요. 특별해지고 유명해지죠.

여기서 자기만의 공유적 자아가 확보되요. 공유적자아란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자아에요.

개인성이 강조되니까 공유적자아보다는 자기동일적자아가 더 강하지 않을까 하는데

왜 공유적 자아를 강조하는 거죠?

보통 공유적 자아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지니까 확실하지않고 모호하고

여럿 다른 성격의 자아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수히 넓게 확산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개인적불멸성은 공유적 자아가 혼동되거나 혼란되어 있지 않고

'자기만의' 공유적 자아가 있다는 것일까요?

아무튼 개인적 불멸성은 역사속에서 기억될만할 업적을 남기는게 중요해요.

그만큼 삶을 열심이 힘들게 살아가야하는 거죠.

여기서 개인적불멸성은 명성은 불운 중 하나라고 얘기해요. 그렇다네요. 그리고

 

개인주의 혹은 개인성에서 왜 자기동일적 자아가 아닌 공유적 자아를 강조하는가 ...?..는 문제는

음...책을 읽으면서 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군....ㅎㅎ

생각해 보면 개인주의에서 강조되는 것 그리고 리얼리티 쇼에 사람들이 광분하고 마치 함께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개인주의일수록 네트웍크 즉, 관계맺음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인것 같다.

즉, 보다 사회주의적인 삶에서는 관계자체가 일상적인 측면이 있어서 각 개인들이 관게맺는 것

즉, 공유된 자아에 대한 추구들이 적어지지만

반대로 개인주의에서는 공유된 자아가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도 보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개인의로서의 자아라는 것은 실은 모든것들이

결국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처럼도 보인단다.

즉, 개인만의 자아라는 것도 어차피 타자와 관게맺는 속에서 발견되고 체화되는 것이라는 거고

다만 문제는 그렇게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자아라는 것이

자신의 내부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자아동일적 자아일테고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공유적 자아가 되는게

아닌가 싶단다...여기서도 결국 명성 혹은 역사적 업적이라는 것도

실은 고립된 자아에서 생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공유된 자아에서만이

생길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단다.

음...업적이라는 것은 겱구 남이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 역사적으로 다른 사람들이기억해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자신의 불멸성으로 삼는 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진 어떤 자아가 남들과  상호 관계맺어야 가능...즉 공유된 자아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

갑자기 네가 질문해서 짧게 나마 생각해 보았단다....ㅎㅎ

 

영은

두번째로 몰개인적불멸성이 있어요. 몰개인적불멸성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얻어야해요.

그리고 이러한 몰개인적불멸성은 국가에 의해 이용되었어요.

이러한 불멸성은 그사람들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그들은 죽음으로서 평가되고 그들의 삶이 더욱 높게 평가되요.

 

이러한 불멸성은 사실 눈가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짐, 끝에서 오는것인데

그저 자신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잊으려는 발버둥? 이 아닐까요?

죽은 후의 불멸성때문이 지금 사는 삶을 바친다는건..... .....

그만큼 불멸성에대한 욕망이 크다는 것일까요?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두번째 방법은 종말에 대한 고민을 축소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방법의 죽음의 해체와 평범화로 이루어져요.

죽음의 해체는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죽음이 예방가능하다고 가정하면서 시작되요.

그러면서 신적인 거대한 죽음의 의미가 축소되죠. 그러면서 죽음의 평범화가 와요.

죽음의 평범화는 죽음을 일상적인 영역으로 들여오면서 죽음을 평범하게 만들어요.

죽음의 경험. 2인칭의 죽음이 있어요.

3인칭.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의 죽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상실의 의미를 주진않아요.

하지만 자신의 친한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상실을 알게하죠.

공유적자아. 그사람과 공유했던 자아. 내 마음속의 그 사람의 부분이였던 것의 영원한 상실.

무엇으로도 대체할수없는 상실을 알게 되겠죠.

그러면서 죽음을 경험하게 하죠.

 

그리고 '두번째 걸러낸 죽음'의 경험이 있어요.

이건 관계에서의 상실이에요. 유동적 근대에서 인간적관계가 계속 약화되죠.

계속 약화되는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가 계속 형성되고 또 관계가 계속 무너지죠.

이건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신안으로 생각하는 것 때문이것도 같아요.

그런데 두번걸러낸 죽음이 정말 죽음의 평범화에 기여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2인칭의 죽음과 함께 세계의 상실을 알려주는 것 맞는데 죽음의 공포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상실의 공포이잖아요.

잘 들여다보면 죽음의 공포가 정말 평범화 되어 있을까요?

또 다른 공포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다고 피할수 없는 공포도 아니지만요.

 

그런데 '생명의 유한함은 인간관계의 깨지기 쉬움과 분별적 경향에서 여실이 나타난다.'라는

무슨 말인지 잘모르겠어요.

그런데 두번째 걸러낸 죽음은 추방과도 관련이 있어요.

인간관계의 상실이 살인. 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살인을 통해 인간관계의 상실에서 이익을 챙기는 사람과 희생자가 생겨요.

이익을 챙기는 사람은 인간관계의 상실이 하나의 해방으로 받아들이고 희생자는 추방으로 받아들이죠.

근데 여기서의 해방과 추방은 앞에서 얘기했던 해방과 추방과는 같은 맥락인가요?

사실 앞에서 추방과 해방등의 얘기가 나올때 이게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면서 의아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나와서 그런가 했는데 사실 앞에서와 것과는 좀 차이가 있는 것같아요.

여기서의 추방은 추방의 이유가 있잖아요.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구요.

 

ㅎㅎ...

[지그문트 바우만]이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그런 관계의 상실일것 같단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죽음의 공포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져왔던 근원적 공포라면

결국 인류의 시작 즉, 태초부터 있어 왔었던 공포일텐데

왜 우리는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 아닐까 ?

즉, 오랜 역사만큼이나 실은 죽음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을 듯 한데

유독 바우먼은 리얼리티 쇼를 가지고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일까 ?

그것은 실은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포들을 체화하고 극복하려는 우리들 각각의 개인들을 바라보는 어떤 시각이 있는 듯 하단다...ㅎㅎ

결론은 네가 본 것과 같단다.

 

영은

 근대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한데요. 행복에서는 불편함에서의 자유가 있어요.

실은 처음봤을때는 불편함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인줄알았어요.

아무튼.. 불편함에서 자유. 불편함을 추방하는 것이잖아요. 이것에 대해서는 궁금해요.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해소할 수 는 없고 다만 피하고나 미루는 일이라는 것이죠.

결국 죽음과의 전쟁에서도 패 한다는 것이구요.

 

결론은 그렇다는 거다

근대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패할 거라는 거다. 아무리 발버둥처도...?...ㅎㅎ

왜...?

근대에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행복한 결국 불편함에서의 자유라는 거고

그 불편함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향이라는 거다.

이것이 근대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 혹은 근대의 표상이라는 거다.

결국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들의 상태가

유동하는 사회에 기반하다보니

미쳐 준비될 수 없는 다양한 불편함들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당혹, 불편함들이 결국 각각의 개인들에게

스스로 죽음을 회피하고 그저 리얼리티 쇼처럼

맹목적으로 동의하며 살아가는 삶으로써의 선택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가 우리에게 묻는 것이 아닐까 싶다....ㅎㅎ

여튼 그의 관심사는 유동하는 공포에서 [유동하는]이 상징하는 근대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ㅎ

 

여튼 여기가지는 나도 허겁지겁 두서없이 답해 보았다....ㅎㅎ

 

영은이가 조금 더 생각하고 정리하고 물어본다면

나의 밑천이 바닥나겠지만

나름 그래도 재미난 책일고 정리하는 것은 될 듯해서 좋긴 하구나...ㅎㅎ

네가 분발하는 만큼 나도 분발해 보도록 하쥐....크크

 

다음에 네가 책 돌려주면 조금더 살펴보고

진지하게 답글을 써 볼께

우선은 그저 얄팍한 답변(?...맞는지도 헷갈림...크크)으로 만족하고 기다려주길 바란다...ㅎㅎ

 

여튼 영은 홧팅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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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식의 재구축이라.....

  • 등록일
    2009/08/03 15:59
  • 수정일
    2009/08/03 15:59

[소비에트 건축 : 구성주의 건축운동].....아나톨 콥 지음.......발언

 

7월의 거의 끝자락에 읽게된 책이다.
건축 혹은 공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지 몇년이 흘렀는데

 

(한옥답사를 다니면서 가지게 된 건축에 대한 관심이

결국 한옥 만드는 목수 일을 배우게 되고
지금은 공간 혹은 건축을 가지고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싶은 욕구에 까지 다다랐다.
 

어찌보면 나의 집착일 수 도 있지만 그만큼 공간 혹은 건축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내가 꿈구는 어떤 삶들을 구현하는 데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인가를 던져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음...단순히 인문 혹은 철학관련 공부만으로 해소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꿈들을
건축 혹은 공간을 공부하면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어떤 시사점들을 발견하게 해준 달까..?

결국 [하비]가 이야기하는 지적 비관주의를 넘어서서 낙관주의로 나아가는 길에서
건축 혹은 공간 공부는 나에겐 새로운 에너지이다.)
 
그렇게 공간에 대한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서 혼자 공부한지 몇해동안

나름 잼나고 나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주던 책은 몇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소비에트건축이라는 책은

전혀 다른 식의 즐거움을 주는 책인것 같다.

뭐랄까 ...?...

건축관련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인문학 책처럼

내가 똑바로 던지지 못했던 궁극의 질문들을 던져주는 책이랄까 ?

가끔 술한자 하면서 던져보던 질문들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건축적으로 실현시키려 했던 그들... 19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가들의 삶에서

나름 아 !...하는 전율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는 책이었다. 

이렇게 재미난 책을 이제서야 읽다니 하는 반성을 무쟈게 하면서
책을 읽었다.

 

19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고민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다.
뭐 구성주의하면 미술에서의 칸딘스키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건축에서의 구성주의자들을
알진 못했었는데 새삼 나의 무지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고민들이 여전히 유의미함을 넘어서
지속적인 실천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미술에서의 한 조류로 평가받는 구성주의라는 전문적인 미술사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구성주의자라는 것으로 묶여 있던 당시의 새로운 활동가들의 이야기이다.

즉, 혁명이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고 재구축하여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현실화 작업을 고민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볼세비키 혁명이 있은 후 러시아에서
긴즈부르크를 필두로한 구성주의 건축가들이
사회주의의 삶으로써의 재구성을 위한 다양한 기획과 노력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단지 종이와 그들의 삶에 대한 에너지 뿐이라는 사실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어쩌면 구현될 수 없었던 꿈을 그렇게 치열하게 삶의 과정으로 구현하려는 건축의 힘들을

느끼도록 해주는 듯 싶다.

 

건축가는 더이상 자신이 삶을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조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긴즈부르크

 

이말처럼 그들은 결국
현실화된 혁명이후의 삶을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건축을 통하여 재조직하려 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러시아
이제 막 혁명이 성공했지만 그 혁명세력인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도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였던 계급평등사회를 구현할 어떤 물적 토대도 가지지 못했던 그 시절에
아니 다들 구시대의 삶으로의 회귀나 혹은 구시대적 삶의 형태들을 답습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들은 건축 혹은 예술을 통하여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
그것도 강제가 아닌 환경의 변화가 그런 삶들을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밀고 나가는

그들의 혁명에 대한 자세는
오늘날에도 많은 생각거리들을 주는 듯 했다.

 

특히 당시 구성주의자들이 가진 생각들 중에서
 

" 구성주의자들은 합리화의 분야에서 새로운 사회적 필요를 규정하는 것과 같은 어떤 선동도 조심스럽게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어떤 마력이나 계급적 자각을 통해서 내부의 지식을 유도해낼 수 있다고 보지않았고, 프롤레타리아의 자연발생적인 창조성을 믿지 않았다.

암암리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발표에 찬성하였다.
 

노동대중들은...합리화하는 것을 찬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합리화를 시작하는 의미와 중요성을 계속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이미 성취된 결과와 성공들을 노동대중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노동대중이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의 주체 혹은 창조적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은 환경의 변화 그리고 대안적인 삶의 구현 혹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노동대중의 혁명적 삶들이 가능하리라는 생각들을 한 것 처럼 보인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은 생각과 일종의 에너지 혹은 슬픔 등...
일종의 전율 같은 감응들을 가진 것은
그들이 가진 질문인듯 싶다.

 

- 인간은 경제적인 일에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존재하기 위해 경제와 노동을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경제적 과업은 우리의 최종 목적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루나챠르스키

 

- 공동체의 과업은 사회주의의 적극적인 옹호자이면서 사회주의의 창조자인 새로은 집단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의 과업 중 하나는 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일상생활, 활동, 노동은 새로운 사회주의 삶의 방식에 대한 건설을 추구하기 위해 더욱 바람직한 조건을 지향한다.
  경제의 급격한 변동, 사회적 관계의 격변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을 도입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을 통하여 그것을 선전해 나가는 수단이다.....

               .................소르킨과 마르코비치

 

-우리는 가끔 명령을 부여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 명령들은 읽혀지고 받아들여지고 얘기될 것이다. "삶의 방식의 재구축에 대하여"라는 말은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것은 몇 개의 단어로 구성된 전체적인 혁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이 확고한 기반에 근거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겁은 주지만 작동하지 않는 총에 불과하다. 
그리고 "삶의 방식의 집단화를 위한" 명령은 진지하게 계획을 세우고 공동체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위와같은 총임을 입증할 것이다

                                   .....붉은청년학생

 

-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삶의 방식의 재구축을 추구하는 건물의 새로운 형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거주지를 창조해나가야 할 필요성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지역계획에 관한 마르크스적 기본원리에도 동의하고 있었다.
도시 거주자들과 농촌거주자들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관점에서 동등한 생활조건을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논제는 앵겔스의 주장 그자체이다.
"도시와 농촌 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농업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것처럼 공업생산에도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아울러 공공위생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간의 융합만이 현존하는 대기, 토질, 그리고 수질오염을 제거할 수 있다.
오직 이 방법만으로 우리는 도시의 나약한 대중을 일으켜서 더 이상 그들의 오물이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농업생산에 기여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반듀링론  "

 

- 모스크바 지하철과 같이 공공복지를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가 계획되었다. 우리는 수많은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개인주택과 조합주택의 건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과연 계속 진행시켜 나가야 하는가 ?'
'과연 우리는 자본주의 도시가 이미 걸었던 길을 통해서 발전과정을 따라잡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
'아니면 우리는 몇 년 후에 우리가 파괴해야만 하는 건물을 짓고 있지는 않은 가 ?'
'우리는 우리 경제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들고 값비싼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 가 ?'
...............사브소비치

 

- 개인주의적이고 쁘띠부르주아적인 삶의 방식을 혁파하기위해서 우리는 욕구충족을 집단화시켜야 한다..... 쁘띠부르주아의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은 집산화의 결과로 차츰 소멸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유형의 도시 중심부가 삶의 방식의 집단화를 그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기존의 도시, 촌락, 마을을 대체하게 될 새로운 도시 중심부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사브소비치

 

- 긴즈부르크는 기존의 풍습과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것이고,
삶의 방식의 집단화는 격려되어야 하는 것이지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론적으로 반도시주의자들이 공동체 속의 개인을 강조하고 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옳으나 현실적으로 그들은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역할을 자신들의 계획에서 잊고 있다.
반도시론자들에 의해서 제안된 인간주거에는 개별주택의 급증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공동체를 해체하며 인위적으로 개인을 소외시키며 사회적 본능을 질식시킨다.
우리는 소위 반도시주의자들의 역사적 전망에 반대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적 미래는 현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미래를 계획하나 명쾌하고 경제적이며 정당화될 수 있으며 지금 적용가능한 현실적 상황과 가능성은 전혀 의식하지않고 있기 때문이다....하이거   
 
==========

이들 1920년대 러시아구성주의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것은 

혁명이라는 현실이었다.

 

모든 것들이 주어지지 않은 

최소한의 생필품도 부족한

따라서 건축이라는 것을 시도해 볼만한 어떠한 경제적 기반도 없었던

그러면서도 그런 것을 받아들여서 건축을 해야하는 

종이와 연필만 가진 건축가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지금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이 권력의 강요나 명령이 아닌

우리들 각자의 격려와 삶의 에너지로 실현하려는 방식은 무엇이고

그것이 일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

 

나는 이 문제에 답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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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일과 공동체...너무덥다.

  • 등록일
    2009/06/24 12:30
  • 수정일
    2009/06/24 12:30

너무 덥다.....

완전 덥다.....

그래......

덥다.......

 

제 4장 일

-- '진보'는 역사의 특징이 아닌, 현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가장 심오하고 아마도 유이한 진보의 의미는 두가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믿음,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믿음과

    그리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라는 믿음으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믿음은 공존 공생한다.

    그리고 이 둘의 공존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어떤 일을 이루어지게 할 힘이 있는 한 계속 유지된다 .

    알랭 페르피트는, "가나안 땅의 황무지를 변화시킬 유일한 자원은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갖는 확신이며

      그들이 공유하게 될 미래의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이다"라고 적고 있다.

 

-- 변화를 만들어 낼 힘이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 '진보'는 자명한 것이다.

    반면에 일이 자신들의 손을 벗어나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진보란 개념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며 어쩌다 그런 말을 들어도 비웃어 넘길 것이다.

 

-- 지금 시대는 '현재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는 확신감이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자리할 유일한 기초라면,

   우리 시대에 믿음이 불안정해지고 취약해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먼저 '세상을 앞으로 가게끔 하는' 힘이 뚜렷하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해답이 요원한 질문은 (세상을 더 나은,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이다.

   두번째로, 실천주체가--어떤 실천주체이든지 간에-- 세상을 개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자꾸만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 확실히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이 아닌 실재

      즉,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할것인가 혹은 누구랑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같다.

       특히, 지방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실행의 주체의 문제가 언제나 운동/활동 전체의 문제로 둔갑하고는 한다.

      할수 있고 해야할 일들이...이런 기획들과 아이디어가 부족한 적은 없다.

      언제나 부족한 것은 "누가"이고 "누구"이다.

 

 

-- 진보 역시 '개인화'되었다.

    좀더 핵심을 말하자면 진보 개념에서 공적인 성격이 빠져나가고

    사적인 것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 그것은 이제 공적인 성격이 사라졌다.

    이는 지금 현실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제안들이 다종다양해졌기 때문이고,

    기발하고 새로운 것이 정말 개선을 의미하는가라는 논쟁이

    그것이 도입되기 전후로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고

    선택된 연후에조차도 논박당할 여지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개선이란 문제가 이제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기획이 되었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제 자신들의 지혜와 자원과 근면함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좀더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끌어 올리고,

    불쾌한 현재의 조건들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바로 개개 남녀들이기 때문이다.

 

==> 최근 지역의 활동가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과거의 지인들을 만나면 공통된 현상이 이것이었다.

       우리가 추구하던 '진보'라는 것이 사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는 거다.

       심지어는 요즘 무엇인가 함께하고자 하는 나의 주변 지인들마저도

       이렇게 '진보'를 사적인 것 화...개인화하여 다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처럼 강박일 정도의 공공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진 않더라도

       이렇게 개인화하는 진보란 실은 자기만족을 위한...자기방어의 목적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보이고 심지어는 칙칙한 패배자의 이미지마저 묻어나는대도

       개인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이들마저 질리게 만드는 경향인 것 같다.

 

--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부여잡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를 고수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설계도에서 '미래'를 포용할 여지는 적어진다.

 

-- 통상 '중심'을 전적으로 지배하게 된 경향은

    '주변'에 속한 곳들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탐지되고 가장 분명하게 발언된다.

    문명의 중심 그 외곽지대에 산다는 것은 현상을 분명하게 관찰할 만큼,

    그것도 현상을 '객관화'해서 볼 만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 인식을 개념화하여 빚고 응축시키기에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 이 중심을 주변에서 파악하는 문제는 새삼스럽진 않다.

        우리 개인들의 삶속에서도 충분이 눈치챌수 있는 보편화된 현상이랄까...?

        이 중심을 주변에서 파악해 보는 것때문에 요즘 내가 힘든 것 같다.

        ...??......??.....^^;;

        그냥 우연찮게 주변에서 서성이다보니 보인다는 거다

        그 활동 혹은 삶의 중심적 경향이.....ㅎㅎ

        그래서 걱정하고 우려하고.....나까지 힘들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ㅎㅎ

         이런 나를 보면서 가끔은 이게 뭐하자는 거냐..?...싶어진다.....크크크

 

-- 현재의 일상은 (지위와 자격과 생계의) 불안정과

    (이것들이 지속되고 미래에도 안정적일지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일신상의,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

    즉, 소유물, 이웃, 지역사회의) 불안함을 결합한 것이다.

 

-- 유대와 동반관계는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5장. 공동체

 

--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달리 표현한 것 자체에 때로 신랄한 실용적 여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나는 '[현재] 그러함'의 담론을 측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것은 '되고 있음'의 담론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 필리페 코엔은 당대의 삶의 고난들에 대한 치유책으로

    그들이 고아원, 감옥, 혹은 정신병동같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코엔의 말은 타당하다.

    해방의 가능성은 공동체주의자들의 관심사였던 적이 없다.

    장래의 공동체가 치유하길 바라는 고난들은 바로

    해방의 과잉, 안락함을 누리기에는 너무나도 큰 해방의 가능성이 누적되어 생긴 침전물이다.

    자유와 안전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오랜 기간 결론없이 모색하면서,

    공동체주의는 후자의 편에 확고히 서 있다.

    인간이 소중히 여겨온 이 두가지 가치가 서로 충돌하고 반대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

    한 쪽을 맛보려면 다른 쪽의 일부, 아니 어쩌면 큼지막한 부분을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 가지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파고들어가게 되면 인간 전체의 안전의 합이 늘어날 수도 있고,

    자유와 안전이 상호 공존 속에서 각각 증대됨은 물론이고

    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새삼 등장한 몸의 우선성은

    공동체 이미지(확실성을 겸비한 안정감을 주는 공동체, 안전의 온실과도 같은 공동체)를 형성할 때

    몸이 이상적으로 보호되는 유형을 따르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경향에서 반영되고 있다.

 

 

====

우하핫 ...드뎌 정리 끝...^^;;

읽으면서 그때 그때 재빨리 정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읽자마자 정리해야 머릿속에 그나마 잠깐씩이라도 떠돌던 생각들을 남겨놓을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시차를 두고 정리하다 보면

점차로 그저그런 생각들만 머리에서 맴돈다...

그러니 결국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도 시간에 따른 부지런함이 있어야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다....ㅎㅎ

 

분발하자....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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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4)..시공간에 대하여

  • 등록일
    2009/06/23 12:44
  • 수정일
    2009/06/23 12:44

정리가 서서히 지겨워진다.

이 책 읽기는 다 읽었고 재미도 상당했었는데

문제는 정리하는 것이 지겨워지는 거다...ㅎㅎ

 

뭐 딱히 이걸 왜 정리하려고 할까 하는 의구심도 뭉게뭉게 피어난다...ㅎㅎ

게으른자의 최후처럼 하기 싫으니까 온갖 핑계거리들이 마구마구 쏟아진다...ㅎㅎ

 

하지말까..?

 

3장. 시공간

 

-- 도시라는 것은 이방인들이 서로 마주칠 만한 장소를 뜻한다.

    덧붙이자면 이 말은 이방인들은 이방인으로서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 등장 뿐 아니라

    사라짐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상대를 보호해주면서 상대와 즐길 수 있게끔 하는 활동, 가면을 쓰는 것이 예의의 본질이다.

    각각의 가면들은 그 가면을 쓴 이들이 권력과 불쾌감, 개인적 감정과는 거리를 둔 순수한

    사회적 친분을 가능케한다.

     예의의 목표는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목표는 자신도 그만큼 보답을 받으리라는 희망속에서 추구된다.)

 

-- 예의의 기술을 개인적으로 습득하여 실천하기 전에, 그것은 우선 배경이 되는

    사회의 특성이 되어야 한다.

    만일 어느 도시의 주민들이 예의의 그 지난한 기술을 터득하려 한다면,

    예의바른 것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 도시의 환경인 것이다.

 

-- 그리하여 개인이 아닌 '공공의 가면'을 쓰는 것은 일종의 적극적 결속과 참여 행위가 된다.

    즉, 가면을 쓰는 일은 상호 교류하고 관련을 맺는 삶에서 이탈하여

    그냥 나를 좀 가만 내버려두라고, 그냥 이렇게 살자는 식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거나

      '진정한 자아'를 몰수해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 결국 액체근대에서 각 개인들이 선택할 문제는 각 개인의 가면을 쓸 것인가

        아니면 공공의 가면을 쓸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와 예의바르게 되기위하여

        나 자신을 바꾸어 갈것인가 아니면 도시를 예의바른 환경으로 만들것인가 하는 문제인 듯 싶다.

        액체근대 즉, 유동하는 근대에 있어서 지나치게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파편화되는 일상들을

        어떻게 공공의 문제로 집단화 할것인가가 첨예한 문제라면

       우리는 언제나 적극적인 결속과 참여의 방식으로써의 공공의 가면을 고민해 봐야 할 듯 하다...ㅎㅎ

       가면 무도회라도 열어보아야 하는 것일까...?...푸하하하

 

-- 공적 공간이면서도 예의바르지 않은 두번째 공간은 소비자들을 위한 역할, 정확히 말해서

    도시 거주자들을 소비자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소비자들은 흔히 별다른 실제적 사회 교류 없이도

    물리적 소비 공간을 서로 공유한다. 그러한 공간들은 상호적이지 않은 행위를 장려한다.

 

-- 쇼핑은 기본적으로 공간 여행이며 시간 여행은 부차적인 것이다.

    카니발은 변형된 도시, 더 엄밀히 말하면 변형된 도시가 원래의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동안의 시간의 틈이다.

 

-- 카니발은 현실이 겉으로 보는 것처럼 가혹하지는 않으며,

    도시가 돌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소비의 사원들은 일상적 현실의 무미 건조한 견고함과 난공불락의 성격말고는

    어떠한 본질도 드러내주지 않는다. 소비의 사원은 미셸 푸코의 '보트'처럼

    "홀로 존재하며 문을 닫아건 동시에 망망대해의 무한함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부유하는 공간의 조각이자 장소 없는 장소이다"

 

==> 소비 혹은 쇼핑에 대하여 좀더 많은 고민들을 해야겠다.

우선 소비는 자본주의의 내성, 본질로서의 [교환]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한 것 같고

쇼핑은 공적공간 혹은 자본의 공간에대한 점유 형식으로서의 고민들을 해봐야 겠다.

음....아무래도 조금은 무거운 공부가 되려나 ...?....ㅎㅎ

어쨋든 열공....ㅎㅎ...언젠가는....ㅎㅎ

 

-- 공간은 그것이 통제될때 진정 '소유되었다'.

    그리고 통제는 무엇보다도 '시간을 길들이는 것',

    시간 속에 존재하는 역동성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었다.

 

-- 시간의 새로운 즉시성은 인간의 공존 양식을 바꾸어 놓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인간이 공동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

    (혹은 때에 따라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방식),

     인간이 어떤 일들을 공동의 일로 만드는 방식(혹은 그렇게 하지 않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 즉시성의 시대에 '합리적 선택'은 결과를 회피하면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결과가 내포하고 있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의 만족을 위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내일 만족할 기회를 저당잡힌 것이다.

    지속은 자산을 부채로 바꾸어 놓는다. 

   모든 육중하고, 고체이고 무거운 것들--이동을 가로막고 제한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시간, 즉시성, 저당잡힌 시간에 대한 고민은 진즉부터 했었다.

        시간이 현대인들 특히, 우리같이 마을의 새로운 생성에 대한 고민들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듯 싶다.   

        특히 시간을 기록하고 그 속의 사람들의 공존의 방식들을 탐구한다는 것은

        보다 엄밀한 시간에 대한 분석들을 필요로 하기때문이다...ㅎㅎ

        이래저래 공부할 것들만 풍족해지는 삶이다...아니 나의 시간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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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3)]..무거움과 가벼움..ㅎㅎ

  • 등록일
    2009/06/22 13:10
  • 수정일
    2009/06/22 13:10

작정하고 정리는 하는데 더워지는 만큼 귀찮아지는 듯...ㅎㅎ

읽는 재미는 솔솔했는데 막상 정리하려니 조금은 귀찮아지는....ㅎㅎ

아마 더위 탓이겠지...?....ㅎㅎ

 

2장. 개인성

-- "생각하는 자에게 이 세상은 한편의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 이세상은 한편의 비극"...호레이스 월폴

 

--"수단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목적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확실성이다....게르하르드 슐츠

 

-- 새로운 상황에서 어려운 점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돌아볼 것도 없이 자명한 목적들을 위한 수단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선택할지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보내게 될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대조적이게도, 가벼운 자본주의는 가치-강박적일 수밖에 없다.

    '구직란'에 나온 출처가 의심스러운 작은 광고 -- "차를 가져라, 그러면 여행할 수 있다."--는

    오늘날의 과학기술 연구기관들과 실험실의 총수들이 던지는 질문인

    "우리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니 이제 문제를 찾아보자"라는 말과 나란히,

    새롭게 등장한 삶의 문제점을 집약해주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어떻게든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제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왜소화시키고 밀어버렸다.

 

==> 무거운 자본주의, 무거운 근대를 대표하는 양식인 포드주의에 대하여 좀더 고민해 봐야겠다.

   여하튼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혹은 근대의 삶이 포드주의라는 갇힌 구조와 연결된 사슬안에서

   강한 고리들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레 수단들에 집중된 삶의 방식이었다면

    가벼운 자본주의, 유동하는 근대는 결국 목적을 잃어버린세대...그럼으로써 목적들을 찾아가는데

   막대한 삶의 에너지들을 소비하도록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결국 이런 목적들을 상실함으로써 근대체제에 저당잡혀버리는 삶은 어떻게 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집단적인 삶의 목적들을 상정할 수 있을까..?

 

-- 그들의 사적인 문제들,  그와 비슷한 내 자신의 문제들은 공적으로 토론하기에 적합하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공적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정확히 사적이슈라는 테두리안에서 토론된다.

 

-- 공공의 의제에서 '사적이지 않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 과거에는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대중적, 공개적 표출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문제들이 공적 영역을 식민화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의 그 악명 높을 정도로 쉽게 이동하는 경계를

    단지 새롭게 재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 드라마가 상연되거나 공개적으로 전시되고

    관람되는 영역으로 재규정하는 문제이다.

    대중매체에 의해 유포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널리 용인되고 있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말의 현재 정의는 그러한 드라마를 공개석상에서 상연해야 할 의무와

    그 공연을 관람할 대중의 권리를 지시하고 있다.

--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잘못된 것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라는 것,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자신들의 수단과 노력으로 뜯어고쳐야만 한다는 말을 매일 듣는다.

     따라서 이들이 어떻게 도구를 사용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것이

     '사정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가장--아마도 유일하게--쓸모 있게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울 것이 못된다. 이들이 '사정을 아는'사람들한테 거듭 들은 말은,

     그들 각자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렇게 가벼운 자본주의하에서의 개인성은 결국 사적인 영역의 공적영역에서의

        일방적인 소비인것 같다. 교류 혹은 공유가 아닌 개인적 사적 영역들의 소비...

        가장 끜직한 이런 상황들이 결국 공적영역의 결핍으로 나타나고

        이런 결핍이 더욱더 개인들을 고립/파편화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의 침탈을 막는 방식은 무엇일까..?

        과거로...무거운 근대로...혹은 잘 짜여진 포드주의적 삶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식의 구현은 무엇일까...?

 

--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면 두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달아나고 있는가...?

    소비....

    건강한 몸과 균형잡힌 몸

    쇼핑에 대한 고민들....

-- 오늘날 기준에 대한 복종을 얻어내는 것은 강제가 아닌, 유인과 꼬드김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하나의 압력임을 드러내기보다는 마치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것처럼 위장된다.

 

==> 결국 우리는 따로 떨어져 쇼핑한다....

 

요약 하자면 이렇다.

'쇼핑하고 다니는'식의 삶을 특징짓는 정체성의 이동성과 유연성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고,

자유의 재분배이다.

때문에 이러한 삶은 절반의 축복이라 하겠다.

그것은 불쾌감이 들고 두려운 만큼이나 달콤하고 갈망의 대상이 되는,

그리고 가장 모순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축복이다.

이 축복은 앞뒤가 안 맞고 거의 신경증적인 반응을 낳게 되는, 지극히 모호한 가치이다.

소르본의 철학자 이브 미쇼의 표현대로

 "기회들이 과도해짐에 따라 파멸과 파편화, 해체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제는 첨예하게 분열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이 과제가 갈등의 초점이 되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충동들을 촉발한다.

모두가 이러한 과제를 떠맡게 되지만, 문제의 해결은 각 개인들이 대단히 다른 환경에서

제각기 구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협력과 유대를 발생시키는 쪽으로 인간조건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인간의 처지들을 분할하고 흉포한 경쟁들을 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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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2)]..사적인것의 공적공간 침탈...^^;;

  • 등록일
    2009/06/21 10:11
  • 수정일
    2009/06/21 10:11

이어서 정리....ㅎㅎ

 

1. 해방

-- 장 폴 샤르트르가 언명했듯이 부르주아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르주아로 살아야만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 내가 누군가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근대적인 삶을 특징짓는,

    오직 근대적 삶에만 존재하는 요소이다.

-- 계급은 신분과는 달리 "합류"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구성원들은 매일의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확인되고, 시험되어야 했다.

 

==> 결국 현대사회에서의 계급은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신분제적 질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생각해 보면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은 어쩌면 노동자 계급으로써 살아가면서

       스스로 매일매일을 지속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소위 잘나가시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위치로보면  노동하는 계급이지만

       비정규직,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만나는 순간 어쩌면 스스로 부르조아계급화되는지도 모른다.

       결국 스스로 노동하는 계급임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몫으로 남아 있는 측면이 있는것 같다.

       우리가 일상에서 비정규직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볼때 어떻게 바라보고 함께 하는냐가

       언제나 입으로써의 계급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위치로써의 계급을 결정짓는 것 같다.

 

-- '공적인 것들'은 '사적인 것들'에 위해 식민화 되어 버렸다. '공공의 이해'는 공적인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격하되고 공공생활의 기술은 개인사의 공개적 나열과 사사로운 감정의

    공개토로(내밀할 수록 더욱 좋은)라는 협의의 의미로 축소되었다. 그러한 지위 격하에 맞서는

     '공적인 현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그들을 공적무대에 오르게끔 촉구하는 것은 공공의 대의명분을 모색하거나 공공의 선

    혹은 공동의 삶을 영유하는 원칙이 의미하는 바를 조정하는 방안을 찾기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네트워크'에 대한 절실한 필요이다.  리처드 세넷이 줄곧 지적하듯이,

    친밀함을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가장 선호되고, 아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방안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건설하는 기술은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지고

    오락가락하는 정서반응들처럼 나약하고 단명하는 '공동체들'을 양산한다.

     그 공동체들은 변덕스럽게 한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이동하며 정착할 항구를 찾아

     결론이 나지 않는 탐색을 하며 영원히 또도는 배와 같다.

     근심 걱정을 나누고, 고뇌와 증오도 나누지만 각각의 공동체들은 수많은 고립된 개인들이

     그들만의 고립된 개별적 두려움을 매달아 놓은 말뚝주위로

     일시적으로 집결한 '말뚝'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 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수 있는 광경인 것 같다.

     최근의 시민사회단체의 행사들 그것도 진지한 토론의 자리에 가보면 결국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삶의 내밀함들이 너무나 쉽게 고백처럼 떠돌아 다니지만

     그런 고백들이 결국 공동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 같은 공적인 처리가 아니라
     그저 각 개인 스스로가 그저 공적인 영역에서의 자신에 대한 공감정도..?...그렇게   

     소비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가장 많이 당황스럽게 하는 측면인데

     가령 함께 수업하였던 어떤 교사 혹은 다른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누군가를 만나다 보면

    너무나 쉽게 자신의 힘든 점들을 이야기하고 나로 하여금 공감 혹은 지지를 바라지만

   언제나 그것은 거기까지 이다, 그 해결을 위한 어떤 시도를 나름 구상하는 순간

   그 개인은 무척 당황하고 언제나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풀겠다고 냉랭하게 가버린다.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이야기 나눌 무엇인가의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적인 것에서 끝난다는 것...

  즉, 모든 과제와 책임은 그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갈 뿐이다.

   항상 그정도의 연계만을 바라고 그렇게 사는 것이 쿨한 세상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래서 힘들어지는 자신의 삶은 또한 자신의 몫이라고 자조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이 사는 모습은 아닐까..?

 

-- 자기주장을 할 권리와 그러한 자기주장을 실행 가능한 것 혹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사회환경을 조정하는 능력간에 도사리고 있는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유동적 근대의 주요모순 -- 우리가 시행착오와 비판적 사고, 과감한 실험을 통해

    그것과 집단적으로 대결하는 법을 역시 집단적으로 익혀야 할 필요가 있는 -- 인 듯 보인다,

--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효과적인 '체제모순에 대한 전기적인 해결책들'이 없기 때문이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효과적 해결방안이 부족한 것을 상쇄하기 위해 상상의 해결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상상에 의한 것이든 진정한 것이든 모든 '해결책'이 합리적이고

    실행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그 과제나 책임에서 '개인화'와 한편이거나

    동등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두려움을 느끼는 개인들이 비록 짧은 순간이 나마

    그들의 두려움을 집단적으로 의지할 어떤 개별적 말뚝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 개인의 입장에서, 공적 공간은 사적인 근심거리들이 더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게 되거나

    새로운 집단적 특성을 획득하는 일 없이 투사되는 거대한 은막에 지나지 않는다.

    공적 공간은 개인의 비밀이 공개적으로 토로되고 친밀감이 형성되는 곳이다.

    마치 가이드를 따라 정해진 관광 일정을 밟는 식으로 이러한 나날의

    '공적'공간을 여행하고 난 개인은, 법률상 개인의 위상이 더 강화되는 한편,

    그들이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다른 모든 개인들이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비틀거리고 (일시적이라면 다행) 패배를 감내하고 있다는 

    확인을 새삼 갖게 된다,

 

==> 이 부분에서 아 !!....하는 감탄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는....ㅎㅎ

  결국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고백이라는 것들을 지나치게 쉽게 행하고 그것을 통해

  감정적인 지지들을 받아가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점차 그들은 개인화되어버린다는 거다

아 !! 누구나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지면서

내일부터 나도 더 철저히 개인화되어 살아가야 겠다는것을 재확인하고 강화해 가는 식으로

공적인 영역들을 사용해 버린다는 거다.

물론 이런 것들이 온전히 개인의 탓이 아니라 유동하는 근대가 우리에게 숙명처럼 안겨줘 버린 

체제의 모습이 그렇다는거다.

그렇게 유동하는 근대의 체제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이 어저면 

그런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집단적 모색과 집단적 해결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럴때 우리가 보심해야 하는 것 또한 그런 개인화 하려는 경향을 어떻게 공동화 할 것인가 이다.

이런 공공 혹은 공동의 해결모색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무척 불편하게 만들고

또한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공동체에서는 어떤 집단적 실험들이 가능할 것인가..?

 개인화 해버리는 경향을 버리고 어떻게 집단적 모색과 해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 통찰하지 않고도 사는 법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통찰이 시작되는 것을 달콤한 해방의 전망으로 환영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순진함때문에 가장 괴롭고 반역적인 친숙한, 그리하여 확고한 어떤 것으로 보이게 된다.

    또한 그런 악조건이 근거한 빈약한 발판을 꿰뚫어 보는 그 어떤 통찰도

    불신임, 의혹, 불안의 전조가 되며 이를 즐거운 기대감으로 맞이할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입장에서는, 비록 손쉬운 성공을 예언해주지는 않지만

    통찰에 대한 널리 유포된 적개심은 오히려 길조이다.

    순진한 이들의 속박은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고립"이 훨씬 용이해진다.

    "아무도 사지 않을 독특한 어떤 것을 팔려고 내놓은 자는 자신이 뜻하지 않는 경우에도

     교환으로부터 자유롭다." 이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교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원형적 조건으로서의 망명에 대한 생각이다.

     망명이 제공하는 상품은 어렴풋하게나마 사고 싶어하는 이가 있을 턱이 없는 그런 것 들이다. .....

     ...사유하는 사람의 초연함, 그의 일상적 생활방식이 생존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망명속에서다. 

 

==> 결국 망명이라는 것이 체제에서의 일종의 불구적 삶이라면 어저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그런 망명의 조건이라는 것 같다. 즉, 기거이 망명하려는 자,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자여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순진한(?) 사람들이 통찰...사회/체제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러워하고 불편하고 힘들어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행운일 수 있다.

그런 행운들 ....순진함 사람들에게 그런 불안/당혹스러움을 주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교육이 아닐까 싶다.

 

-- 실행하라는 명령도, 실행을 거부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전자는 불가피하게 지배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

    결과에 대한 공리주의적 고려가 동기라는 윤리적 원칙을 앞지르고

    자유에 대한 갈망이 희석되고 왜골될 것이라는,

   새로운 억압들에 수반되는 모든 공포들이 자유에 부과된다.

   후자는 아마도 타협하지 않는 순수성이 자아도취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러한 사유는 비효율적이고 황폐한 것으로 방치될 것이다.

-- 사유하는 삶과 행동하는 삶 사이의 딜레마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점에서만 닮았다고 할

    두가지 전망중 택일을 하는 문제로 응축된다.

    사유를 통해 유지되는 가치들을 타락으로부터 잘 보호할 수록

    그들의 삶에 봉사해야 할 가치들이 그들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꾸만 축소된다.

    그 가치가 그들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클수록

    혁신을 촉구하고 장려했던 가치들에 상응하는 개선된 삶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 자유로운 수행자의 운명은 그 얽힌 양상을 풀기는 커녕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운 이율배반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인정맏을 만큼 견고해야 할 스르로 주조한 정체성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덕스러운 상황속에서 미래의 활동에 대한 자유를 해치치 않을만큼 만 유동적일 때 생기는

    모순을 생각해 보자. 혹은 이전보다 유례없이 커진 기대감이란 짐을 지게 된 사람들간의 협력에서

    드러나는 위태로움, 즉 제도적 뒷받침이 변변치 않아 더 커진 기대에

    맞서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 그렇다.

    혹은 무관심과 강압의 험준한 암벽들 사이로 위험한 항해를 해야하는,

    다시 되찾은 책무가 처한 딱한 난관이 그렇다.

    혹은 의지할 데라곤 행동하는 자의 열정과 헌신밖에 없는데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그 행동의 완전함을 유지해줄 좀더 지속적인 접착력이 요구되는 모든 공공행동의 허약함이 그러하다.

    또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일관한 삶의 경험을 공공의 의제에 걸맞게

   공공 정책 문제로 일반화시켜 가다듬는 지독하게 어려운 일도 그렇다. 

 

-- 개인의 의지, 욕망, 목표가 어떻게 기능하고 그 용도와 의도는 무엇인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는 경향인 창조적 능력과 창조적 리비도,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저 바깥에 떠도는 수많은 자원들이거나 어떤 경우에는 장애물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 '소극적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이에서 승리했지만, 무게중심이 '적극적 자유',

   즉 선택의 범위와 선택과 관련된 의사일정을 결정할 자유로 옮겨지자

   투쟁은 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공적 권력은 그것이 지녔던 애초의 근사함을 잃고 억압적 가능성에 분개했지만

   합법화하는 그 능력의 상당부분 역시 잃게 되었다.

   해방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진척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 공적 권력은 권력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서

   힘껏 파괴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을 소생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영역'과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 결국 결론은 공적 영역에 침투하는 개인화하려는 경향 혹은 '사적영역'의 공적 의제화를 막는 것

        지나친 사적 영역의 범람에 대하여 공공의 혹은 공동의 논의/의제/활동 을 복원하는 것이리라

        더이상 개인화해버린 개인들의 감정적 지지가 아닌

        그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제들을 공공 혹은 공동의 의제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들 공동체에서도 우선은 이러한 개인화 하려는 경향들을 공공/공동의 행동 혹은 이야기로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 그 방식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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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1)]..사적인 것의 공적공간침탈..??

  • 등록일
    2009/06/19 17:20
  • 수정일
    2009/06/19 17:20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는 중이다...ㅎㅎ

 

처음에 액체적 공포...한국 번역본 이름은 [유동하는 공포]라는

책을 저번달에 읽었었는데

책읽고도 정리하지 않은 것이 찜찜하기도 하고.....ㅎㅎ

 

무슨 의무감에 꼭 정리하자는 것은 아니고...ㅎㅎ

  나날이 감퇴하는 기억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 가급적 정리하자는 결심을 했더랬다...ㅎㅎ

그런데 실은 제대로 집행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짜증내고 있다 는...ㅎㅎ

한달에 10 여권을 읽는 편인데 문제는 맨날 읽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ㅎㅎ

읽는 순간에는 잼나게 신나게 읽는데 나중에 조금은 사용하려면

다시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ㅎㅎ

그래서 가급적 메모...정리...발제...?....뭐든 기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자는 생각을 했었다.

.......ㅎㅎ

 

여하튼 그래서

[유동하는 공포]를 정리할까 하다가

날도 덥고 몸도 피곤하고...ㅎㅎ...뭐 그런 핑계로 에어컨 찾아 서점에 도망왔는데(..??..ㅎㅎ)

우연찮게 이 책을 보아서 충동구매를 했다는 거다....ㅎㅎ

 

 

그래서 약간은 어이없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ㅎㅎ...의외로 너무 재미있는 거다...ㅎㅎ

 

간만에 월척을 건졌다 싶은 마음에 신나게 읽어 가다가

갑자기...아 !!...정리정리...?....ㅎㅎ

그래서 다 읽지도 않았는데 정리하기 시작했다....ㅎㅎ

 

실은 책이 무척 쉽기도 하고

나름 최근 고민하던 것들을 다른 측면으로 해석해 볼 수 있어서 좋은데

어렵지 않은 만큼 대략적인 내용 파악이 쉬운 편이다...ㅎㅎ

 

그래서

그냥 편한 마음으로 정리하자...싶은 마음이다.....ㅎㅎ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가 고정된 고체적 상태에서 유동하는 액체의 상태로 하였다는 것이고

현대의 문제는 바로 이 액체화 되었고 액체와 되어가는

모든 사슬과 규제와 억압들이 녹아나고 있는데서 발생한다고 본다.

기존의 비판철학 혹은 현대의 문제점들을 사고하는 철학들이 당면한 문제 또한

바로 고체화된 형식인 전근대 혹은 초기 근대의 문제의식 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발생한다는

그래서 이젠 액체화 된....유동적이고 규칙 등이 없는 아니  형태화 되지 않는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거다....

 

전체적으로

이런 문제의식이 바우만의 특징들은 아닌듯 하지만

(들뢰즈 등에서 이미 그 모습을 확인....조금은 익숙한 개념...ㅎㅎ)

그의 통찰력 중 개인의 문제....개인화하는 경향에 대한 인식은 많은 생각과 고민거리를 던져 주었다.

아니 고민거리를 주었다기 보다는

내가 정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정리의 방향들을 암시해 주었다는 생각이다...

 

--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각본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결과는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체제'가 사적영역을 '식민화'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의무를 덜어준 결과이다.....체제와 자유로운 행위자들이

근본적으로 결속을 끊고, 서로 만나지 않고 스쳐갈 수 있도록 해준 기술들의 산물이다.

 

-- 유동적 근대성의 시대인 현재까지도 계속 녹고 있는 중인 견고한 것은 바로

    개인의 선택들을 집단적 기획들이나 행동들과 연결시켜주던 유대관계들

    - 개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상호조절을 할 수 있게 해온 패턴들-이다.

 

-- 자유로운 개인들이 직면한 과제는 그들의 새로운 자유를 이용하여 알맞은 장소를 찾아 그 곳에

   순응하며 정착하는 것이었다. 그 위치에 걸맞고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규범과 양식을

   충직하게 따름으로써 말이다.

    오늘날 점점더 공급이 부족해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순응하고 안정적 지향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인도해 줄 수 있는 그러한 행동 유형들, 규약들, 규칙들이다.

 

-- 그결과 우리 시대는 개인화되고 사적으로 변한 근대,

    유형을 짜야하는 부담과 실패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개인의 어깨위에 떨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 결국 현대는 액체화 한다는 것...이는 결국 우리들을 속박하는 것에서 벗어난

무제한의 자유를 주지만 그 자유란 결국 철저한 개인화라는 거고

이러한 개인화의 자유는 모든 선택과 그 책임도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

결국 권력이 지배는 하되 책임지지 않는 것...이  모든 책임을 선택하는 자에게 주어버린

사회라는 분석이다. 즉, 현대는 그래 마음놓고 선택하라...대신 모든 자유와 책임은

모든 각 개인의 능력이다...사회는 없다...공동체도 없다...다만 개인만 있을뿐....^^;;

이렇게 바라보는 것일까...?

 

우리를 압박하고 속박하던 것들을 풀어주는 대신에

모든 책임과 선택조차 상호작용에 의한 공적 영역이 아닌 파편화된 개인의 사적영역으로

부과한다는 것이 현대의 시대적 욕망이라는 것...자본의 욕망....^^;;

결국 개인화와 함께 지워진 이런 고립된 사적 영역의 과도화가 문제라는 것일까..?

 

개인화...사적영역....고립과 파편...그리고 부과된 책임과 불안한 선택....^^;;

 

이런 사회에서 혁명 혹은 진보는 가능할까...?...방식은...?

 

1. 해방

-- 마르쿠제에게 문제가 된 것은 우리가 기필코 해방을 이루고 반드시 '사회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상품을 배달하는'사회에만 생기는 현상, 즉 해방을 이루어야 하는데

'대중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해방되길 원하는 사람이 드물고,

그러한 소망에 따라 행동에 선뜻 나서는 이는 더더욱 없다는 것,

아니 그 어떤 사람도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기왕의 처지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 지식인들을 근심케 하는 더욱 암울한 예감은 자유를 실행하는데 야기될 법한

   여러 곤경을 놓고 볼때, 사람들이 자유로움 자체를 싫어하고

   해방의 전망에 오히려 분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진 전대미문의 자유는 전대미문의 무능을 동반하고 온것이다.

 

==> 결국 현대인들의 문제는 절대적 자유가 주는 공포, 불편함을 싫어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불편/불안때문이라도 절대적 자유나 해방의 전망을 애써 외면하면서

스스로 어떤 집단적 최면에 스스로를 자리매김 시킨다는 것 같다.

결국 자유를 얻기위한 활동 즉, 목표 목적 등 고정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체로써의

사회가 제시되었을때 까지의 운동에 대한 열망이 액체의 즉,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성으로서의 운동에 직면하는 순간 갑자기 보수화 혹은 스스로를 속박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 생성에는 물론 수많은 것들에 대한 선택의 불편함...매순간의 결과에 대한 책임 등등이

뒤따른다는 거고 그러는 순간 그들은 혁명을 배신한다는 것일까..?)

 

현재 우리의 상황이 새롭고 다른 이유

-- 우리가 밟는 길에 끝이 있다는 사실이 사라짐

--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 결국 공동체가 사라지고 개인만이 남았다는 것 같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 혹은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한 공동체의 상실과

그러한 모든 과제와 책임들이 사적인 영역으로 변함으로써 생기는

각 개인들의 어려움이 겹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인 것 같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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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정리하다 보니

이제 밤근무 준비할 시간이 되어 버렸군....크크

내일 낮은 수련회로 바쁠 듯....ㅎㅎ

바로 정리해야 하겠는데 또 다시 며칠 씩 늦추어질 듯도 싶군....^^;;

여튼 필받았을때 정리하자.....홧팅....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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