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_1997 - 2005/01/30 19:50

* 오랜만에 1997 중국여행 글 재개...

고구려 문화에 대한 글은 아마도 [고구려 문화유적 산책] (1996,김삼,재단업인 대륙연구소) 내용을 축약해서 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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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集安)

 

 - 고구려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서기 427)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 

고구려의 전기부터 중기,말기 초반까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중국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 행정구역상 길림성 통화시에 소속.

집안은 통구 분지에 위치하였으며 통구분지는 압록강 중류 일대에 위치한 폭이 좁고 길며 비교적 큰 평원이다.

동서 길이 10km 남북 폭은 약 5km이다. 노령산맥에서 발원하는 통구하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른다.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마주하는 집안시는 지리적으로 오랜 동안의 수도로서 입지조건을 완벽히 갖춘 지역이다.

12,000여개의 고분군과 국내성, 환도산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이 있다.칠개정자관액등이 수상통로 통제초소였다.

 

 



. 국내성(황성옛터)

 

- 원래 졸본(요녕성 부근)에 도읍했던 고구려는 주변 세력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자원이 풍부한 내지로 천도.

성터 북쪽은 노령산맥, 남쪽은 압록강이 있는 충적평야, 북으로 5.2km의 환도산성이 있음.

짐승과 야생수곡이 풍부. 수렵경제 발달. 강수량 많고 기온 높음.

통구하와 압록강 합쳐지는 지점으로, 물고기 많고 수상운송 편리.

장수왕의 평양천도전까지 약 425년간.

국내성은 장방형으로, 동벽이 554.7m, 서벽이 664.6m, 남벽이 751.6m, 북벽이 715.2m, 총둘레 2686m.

평지에 있음.

남벽 서쪽은 3~4m 높이로 잘 보존. 동벽은 2~3m 높이로 파손 심함, 가옥이 쌓여있음. 북벽은 밑부분만 곧게 뻗어있다. 성곽은 동북쪽만 둥글고 나머지는 직각.

전국시대 유물도 발견(고구려 이전에 이미 토성 존재). 이는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주장과 한사군의 고구려현 치소라는 주장이 대립중. 유물이 BC 1000년 것이므로(한사군 설치 전) 첫번째 설이 신뢰 감.

고구려 10대 산상왕 때 환도산성을 국도로 정하나 요동 침입. 다시 국내성으로 국도 옮긴 후 고국원왕시 재축조. 또한 후기 태조왕조, 1921년 초기 만주국시기에 재축성.

북벽만 순수 고구려 성곽. 층계식 축조는 고구려식. 크고 육중한 돌로 쌓고 작은 돌로 가공. 축성법. 장방형 석조. 안쪽으로 4m 자연석을 규칙적으로 쌓고 외벽 결구가 치밀. 성벽속에서 동기, 철기, 도자기 조각 발굴. 석재가 불균일하여 위아래 다름.

원래 4방 6개 문 있었는 데 국공전쟁때 소멸. 집안시 주도로인 승리로는 동쪽 집문문과 서쪽 안무문 연결 통로.

길이 8~10m, 너비 6~8m의 치들은 서로간 50~80m 거리 둠(화살 명중거리 계산한 설계). 42개나 있다(높은 방어력).

요동 공손도, 위 관구검(247), 모용선비 진공(342)에 함락.

이후 시대엔 낙랑, 현도, 요동(한반도 북부), 신라, 백제, 왜(남부) 제패하고 부여도 병합, 말갈도 복속시키는 번영 누림. 이러한 고구려 번영설은 일제 사관(만주국의 합리화 위한) 에 의한 과장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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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도와 압록강

 

- 남도, 북도(육로), 압록강(수로)은 국내성의 3통로. 고구려의 혈맥이자 침입경로.

통화->집안까지 버스길은 북로 그대로 사용. 북로는 완만한 반면 남로는 험난.

모용황이 342년 남로로 침입하여 환도산성 함락됨. 고국원왕때이던 이때 북도에서 고구려군 승리(관마산성). 혼강 ~ 국내성 은 90km, 관마산성 ~ 환도산성 53km.

압록강은 동북 -> 서남으로 흘러가는데, 봉오리가 험해져 물살 세짐. 이후 강면 넓어져 유유.

배는 외차하 일대에 정박, 사람들은 달구지로 물건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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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  국내성터 동으로 4km된 우산 남쪽 기슭에 위치.

대지 한가운데 정방형. 방단계단식 석실묘.

2번째로 크며,  장군묘의 5배 크기. 파괴 심함.

첫계단 기단은 6겹 석조로 쌓음. 석조는 2m, 매 계단은 장방형 석조.

위의 석조를 안보다 들여 쌓고 밀리지 않도록 홈과 턱을 쪼아 맞물림. 7층 높이(지금은 소실).

제일 꼭대기 설치된 묘실은 한 변 길이가 2.8 m 인 정방형. 무너져 내려 공간 거의 없음.

묘실내 돌판은 5.4m * 4.2m (이 돌판은 총 13.5m 높이에 있다.)

외장력 방지 위해 화강암 거석 버텼으나 실패(20개 중 7개 소실).

왕릉 남쪽 180m 에 제단으로 추측되는 8각기등 받침과 주춧돌 있음.

[태왕릉이여 산악처럼 견고하라]라고 무늬기와에 쓰여있음

광개토대왕 == 19대 담덕왕 ==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 영락태왕.

호태왕비문 유적을 통해 광개토대왕 무덤임이 증명(태왕 명칭은 광개토대왕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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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  피라미드 모양. 방단계제식 석실묘. 화강암. 토구자산 빠져나오면 보임.

12.4m 높이. 무덤바닥 한변 31.5m. 밑면적 960제곱m, 위면적 270제곱m,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석실묘. 1100여개 석조 사용. 석재량은 6000세제곱m.

이전 무덤이 내부에 강바닥 자갈을 깔은 반면 겉벽이라도 석조로 구성. 묘실은 3층계단에 설치. 무덤길은 5층 계단 가운데 축조.

정방형 묘실. 외장력 고려해 묘실 작아짐. 내벽은 6층 석조로 쌓음. 천정과 어기는 모서리에 각기 큰 석조로 대들보 만들어 1층 겹침 형태로 천정돌과 만남. 천정은 거대한 석판(50톤, 60여 평방제곱m).

관대 2. 유골, 유물 도굴당함. 묘실은 서남향이고 4각은 방위선상 위치.

일출, 일몰 볼 수 있다. 무덤 꼭대기 윗면은 흙으로 다져짐. 변두리 석조 윗면에 일정간격으로 20여개 구멍(기둥박은 흔적). 남벽 (묘문)은 도굴 당시 깨져 바윗돌 형태로 잔존. 묘 동남쪽 20m 에 묘에 고인 물 나오는 함동 있음.

고구려는 일찍부터 무덤을 만드는 풍속 있어 평양 천도한 장수왕 묘로 추정됨. 산상왕 묘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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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단계제석실묘

 

-  정밀가공석조로 기초석 계단 다지고 그 안에 낙석을 같은 높이로 채움.

외관 웅장. 피라미드 모양으로 2~7층까지 쌓음.

4세기 중 출현하여 1세기동안 유행. 4세기 들어 토묘로 교체(평양천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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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

 

-  집안시 동쪽으로 4km거리인 우산기슭 구릉지대 위치. 남으론 압록강, 동으로 용산기슭에 의지해 통구평야 한가운데 위치.

묘역시설이 소멸되어 태왕릉과 별개로 보임.

37톤. 방주형 옹근 통돌 손질. 1775자 새김. 높이 6.39m, 밑부분 너비 1.34 ~ 1.97m. 꼭대기 너비가 1~1.6m.

화강암. 장수왕이 광개토왕 위해 세움.

비의 내용 : 고구려 건국신화, 광개토대왕의 위엄과 영토 확장의 공로, 비석과 능묘 지키는 수면인연호의 내력과 직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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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30 19:50 2005/01/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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