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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2/01 20:18

.광개토대왕시기의 고구려

(아래의 내용은 호태왕비에 수록된 것임)

 

- 남만주 지역에 고구려 건국 100년전부터 중원의 지방정원인 현도군과 요동군 존재.

현도군은 한무제때 조선 동북부와 동만주를 지배. 그 뒤 고구려 판도내에 귀속되면서 혈전.

요동군은 중원 정권의 한개 변방 군현. 고구려에 의해 현도군이 무순으로 쫓기자 요동군이 부분을 현도군에 주고 고구려에 대항(400여년간).

5호 16국시대 모용선비 쳐들어와 미천왕 무덤 유물 도굴당하고 봉호라는 신하호칭 받는 치욕받음.

광개토대왕때 모용선비가 신성과 남소성 침략하자 숙군성 공격하고 요하벌 진출. 이후 북연과 중원들과 화친.

장수왕도 안정 고수. 이후 남방진출 도모

 

- 내몽골 동부 선비족은 거란, 고막해 ->8개부로 발전.

광개토대왕시기 392년 친히 거란 정벌. 포로 500여명. 소수림왕시기의 고구려 포로 10,000여명 귀환.

8개부중 비려가 계속 침략. 395년 다시 정벌.

당시 고구려군은 중국의 富山, 負山 거쳐 염수까지 들어가 무순 이남지방의 비려 3개 부락 600~700영 점령.

그 뒤 거란은 오늘의 대릉하 동쪽에 정착.

 

- 동부여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 초기 강성. 3대 대무신왕에 패해 고구려 부속국으로 전락. 훗날 중원과 연맹해 고구려 견제.

태조왕태 현도, 요동 등의 군현 및 고구려와 대적. 242년 관구검 침입시 위를 도움.

광개토대왕 말년 고구려는 동명왕 때부터 부여가 속국임을 운운하며 410년 국도 함락. 494년 완전 통합.

 

- 311년 고구려의 낙랑군(평양벌) 점유와 백제의 대방군(한강벌) 점유로 국경 접한 고구려 백제 100년간 혈전. 고국원왕때 백제가 평양성까지 침입.

광개토대왕 즉위후 첫해(391) 13개 백제성과 관미성(백제의 북침거점) 함락.

5개성 찾은 백제는 394, 395년 고구려 침입. 396년 고구려는 백제 정벌 단행. 한강 건너 서울까지. 백제는 항복후 1,000명 포로, 베 천필, 58개성, 700여 촌 바침.

황해 남, 경기 북, 서해안이 고구려에 복속됨. 광개토대왕은 백제왕의 아우와 10여명의 대신 데리고 개선.

397년 백제는 왜와 손잡고 398년 한산 북쪽까지 군사 출동. 다음해 신라 공격.

고구려는 신라의 군병 요청에 4000년인 해 50,000 보병과 기병 파견, 신라 구함. 신라는 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찾아가 감사.

404년 백, 왜 연합이 대방지구까지 침입. 적의 허리를 끊는 광개토대왕의 전술로 왜 침은 끝남.

407년 백제 정벌.



.위 기록은 호태왕비에 수록됨

 

- 그러나 중국고서적과 삼국사기사이에 어긋난 점이 있다. 신빙성은 크지만 글자 마모가 심해 해석 논쟁이 끊임없음.

국내성 지역은 청조부터 200년간 봉금지역. 청 말 봉금령 해제되면서 호태왕비 발견됨.

처음엔 이끼로 인해 몇자만 탁본. 초기 쌍구본 탁본 -> 석회탁본 : 학술상 글자 모양 논쟁 조성됨. 의도적 역사 왜곡 논쟁 야기(석회로 글자변조).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가 일본이 왜곡한 왜, 도, 해, 파(矮, 渡, 海, 破) 자를 폭로.

기타 나라에선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백제, 왜, 신라를 파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고 해석.

이 밖에 20년대 초 화재, 관리 부실, 글자체 뒤섞임으로 해석 어려움.

 

 

.호태왕비는 태왕릉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이 없다. 규모 어울림. 태왕릉과 비 사이엔 다름 무덤들이 있다.

묘비석 안치 습관이 광개토대왕부터 무덤위로 바뀌었다는 것이 태왕릉비에 나옴.

태왕릉은 서향, 비는 동남향.

태왕릉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은 고구려 이후 후세의 것. 비와 장군묘 사이엔 큰 개울이 흐름.

무덤이 무너질까봐 비는 평지에 세운 것이다.

방향은 시대적 차이(묘는 광개토대왕 시기, 비는 장수왕 시기)로써 관념이 교체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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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0:18 2005/02/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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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30 19:50

* 오랜만에 1997 중국여행 글 재개...

고구려 문화에 대한 글은 아마도 [고구려 문화유적 산책] (1996,김삼,재단업인 대륙연구소) 내용을 축약해서 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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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集安)

 

 - 고구려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서기 427)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 

고구려의 전기부터 중기,말기 초반까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중국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 행정구역상 길림성 통화시에 소속.

집안은 통구 분지에 위치하였으며 통구분지는 압록강 중류 일대에 위치한 폭이 좁고 길며 비교적 큰 평원이다.

동서 길이 10km 남북 폭은 약 5km이다. 노령산맥에서 발원하는 통구하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른다.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마주하는 집안시는 지리적으로 오랜 동안의 수도로서 입지조건을 완벽히 갖춘 지역이다.

12,000여개의 고분군과 국내성, 환도산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이 있다.칠개정자관액등이 수상통로 통제초소였다.

 

 



. 국내성(황성옛터)

 

- 원래 졸본(요녕성 부근)에 도읍했던 고구려는 주변 세력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자원이 풍부한 내지로 천도.

성터 북쪽은 노령산맥, 남쪽은 압록강이 있는 충적평야, 북으로 5.2km의 환도산성이 있음.

짐승과 야생수곡이 풍부. 수렵경제 발달. 강수량 많고 기온 높음.

통구하와 압록강 합쳐지는 지점으로, 물고기 많고 수상운송 편리.

장수왕의 평양천도전까지 약 425년간.

국내성은 장방형으로, 동벽이 554.7m, 서벽이 664.6m, 남벽이 751.6m, 북벽이 715.2m, 총둘레 2686m.

평지에 있음.

남벽 서쪽은 3~4m 높이로 잘 보존. 동벽은 2~3m 높이로 파손 심함, 가옥이 쌓여있음. 북벽은 밑부분만 곧게 뻗어있다. 성곽은 동북쪽만 둥글고 나머지는 직각.

전국시대 유물도 발견(고구려 이전에 이미 토성 존재). 이는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주장과 한사군의 고구려현 치소라는 주장이 대립중. 유물이 BC 1000년 것이므로(한사군 설치 전) 첫번째 설이 신뢰 감.

고구려 10대 산상왕 때 환도산성을 국도로 정하나 요동 침입. 다시 국내성으로 국도 옮긴 후 고국원왕시 재축조. 또한 후기 태조왕조, 1921년 초기 만주국시기에 재축성.

북벽만 순수 고구려 성곽. 층계식 축조는 고구려식. 크고 육중한 돌로 쌓고 작은 돌로 가공. 축성법. 장방형 석조. 안쪽으로 4m 자연석을 규칙적으로 쌓고 외벽 결구가 치밀. 성벽속에서 동기, 철기, 도자기 조각 발굴. 석재가 불균일하여 위아래 다름.

원래 4방 6개 문 있었는 데 국공전쟁때 소멸. 집안시 주도로인 승리로는 동쪽 집문문과 서쪽 안무문 연결 통로.

길이 8~10m, 너비 6~8m의 치들은 서로간 50~80m 거리 둠(화살 명중거리 계산한 설계). 42개나 있다(높은 방어력).

요동 공손도, 위 관구검(247), 모용선비 진공(342)에 함락.

이후 시대엔 낙랑, 현도, 요동(한반도 북부), 신라, 백제, 왜(남부) 제패하고 부여도 병합, 말갈도 복속시키는 번영 누림. 이러한 고구려 번영설은 일제 사관(만주국의 합리화 위한) 에 의한 과장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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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도와 압록강

 

- 남도, 북도(육로), 압록강(수로)은 국내성의 3통로. 고구려의 혈맥이자 침입경로.

통화->집안까지 버스길은 북로 그대로 사용. 북로는 완만한 반면 남로는 험난.

모용황이 342년 남로로 침입하여 환도산성 함락됨. 고국원왕때이던 이때 북도에서 고구려군 승리(관마산성). 혼강 ~ 국내성 은 90km, 관마산성 ~ 환도산성 53km.

압록강은 동북 -> 서남으로 흘러가는데, 봉오리가 험해져 물살 세짐. 이후 강면 넓어져 유유.

배는 외차하 일대에 정박, 사람들은 달구지로 물건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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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  국내성터 동으로 4km된 우산 남쪽 기슭에 위치.

대지 한가운데 정방형. 방단계단식 석실묘.

2번째로 크며,  장군묘의 5배 크기. 파괴 심함.

첫계단 기단은 6겹 석조로 쌓음. 석조는 2m, 매 계단은 장방형 석조.

위의 석조를 안보다 들여 쌓고 밀리지 않도록 홈과 턱을 쪼아 맞물림. 7층 높이(지금은 소실).

제일 꼭대기 설치된 묘실은 한 변 길이가 2.8 m 인 정방형. 무너져 내려 공간 거의 없음.

묘실내 돌판은 5.4m * 4.2m (이 돌판은 총 13.5m 높이에 있다.)

외장력 방지 위해 화강암 거석 버텼으나 실패(20개 중 7개 소실).

왕릉 남쪽 180m 에 제단으로 추측되는 8각기등 받침과 주춧돌 있음.

[태왕릉이여 산악처럼 견고하라]라고 무늬기와에 쓰여있음

광개토대왕 == 19대 담덕왕 ==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 영락태왕.

호태왕비문 유적을 통해 광개토대왕 무덤임이 증명(태왕 명칭은 광개토대왕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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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  피라미드 모양. 방단계제식 석실묘. 화강암. 토구자산 빠져나오면 보임.

12.4m 높이. 무덤바닥 한변 31.5m. 밑면적 960제곱m, 위면적 270제곱m,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석실묘. 1100여개 석조 사용. 석재량은 6000세제곱m.

이전 무덤이 내부에 강바닥 자갈을 깔은 반면 겉벽이라도 석조로 구성. 묘실은 3층계단에 설치. 무덤길은 5층 계단 가운데 축조.

정방형 묘실. 외장력 고려해 묘실 작아짐. 내벽은 6층 석조로 쌓음. 천정과 어기는 모서리에 각기 큰 석조로 대들보 만들어 1층 겹침 형태로 천정돌과 만남. 천정은 거대한 석판(50톤, 60여 평방제곱m).

관대 2. 유골, 유물 도굴당함. 묘실은 서남향이고 4각은 방위선상 위치.

일출, 일몰 볼 수 있다. 무덤 꼭대기 윗면은 흙으로 다져짐. 변두리 석조 윗면에 일정간격으로 20여개 구멍(기둥박은 흔적). 남벽 (묘문)은 도굴 당시 깨져 바윗돌 형태로 잔존. 묘 동남쪽 20m 에 묘에 고인 물 나오는 함동 있음.

고구려는 일찍부터 무덤을 만드는 풍속 있어 평양 천도한 장수왕 묘로 추정됨. 산상왕 묘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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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단계제석실묘

 

-  정밀가공석조로 기초석 계단 다지고 그 안에 낙석을 같은 높이로 채움.

외관 웅장. 피라미드 모양으로 2~7층까지 쌓음.

4세기 중 출현하여 1세기동안 유행. 4세기 들어 토묘로 교체(평양천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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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

 

-  집안시 동쪽으로 4km거리인 우산기슭 구릉지대 위치. 남으론 압록강, 동으로 용산기슭에 의지해 통구평야 한가운데 위치.

묘역시설이 소멸되어 태왕릉과 별개로 보임.

37톤. 방주형 옹근 통돌 손질. 1775자 새김. 높이 6.39m, 밑부분 너비 1.34 ~ 1.97m. 꼭대기 너비가 1~1.6m.

화강암. 장수왕이 광개토왕 위해 세움.

비의 내용 : 고구려 건국신화, 광개토대왕의 위엄과 영토 확장의 공로, 비석과 능묘 지키는 수면인연호의 내력과 직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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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30 19:50 2005/01/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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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08 09:21

20:10 부터 기차 정류장안의 의자들에 일렬로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팀은 줄을 너무 잘 지킨다. 이 많은 사람이 때거지로 다니는데도 1명의 낙오도 없다니... 오랜만의 줄서기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씻지도 못하고 21:20 열차 탑승.

이 열차를 타고 통화에 가는데 다음날 새벽 5시 반까지...

 

열차안에 들어올때와 침대칸에 런닝셔츠바람의 사람들이 우리를 원숭이 보듯 쳐다봤을때,

우리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 열차는 침대차로, 침대가 세로로 3칸이나 된다.
하지만 외관상으로 느껴지는 거부감과는 달리 3층 침대에 올랐을때 아이처럼 들뜬 마음은 나만의 기분은 아니었나보다. 모두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이야기한다.


열차 1량의 모양

 

맨 위층인 3층에 올라가면 바로 발 밑으로 중형 선풍기가 135도 가 넘는 각도로 돌고 있다.
정체불명의 한국아저씨가 간간히 중국인들과 바디랭귀지로 이야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함께 여행중인 언니는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은데, 3층에서 내려갈 엄두가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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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8 09:21 2005/01/0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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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08 09:13

13:45 북경-> 심양 비행기로 출발, 15:00에 도착했다.
신락유적박물관에 갔다.

신석기 문화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 모든 한자 지식으로 해석한 결과- 원까지의 유물이 있었다. 나는 주로 글씨를 사진으로 찍었다. (*주: 당시 서예 배우고 있었음...)



다음 간 곳은 북릉공원. 원래 이름은 소릉. 18:00까지 있었다.
공원 입구로 들어가면 양쪽에 잔디와 사람들을 지나 큰 호수와 다리가 있다. 서울랜드+올림픽 공원 온 기분이다.
문의 가장 안에 북릉이 있는데 무덤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라 문에, 성벽에, 묘비 모시는 기와집에, 릉을 둘러싼 본성까지 있다.


비 크기는 가히 광개토왕비와 자웅을 겨룰 수준. 릉도 무지 큰데 아직 내부는 볼 수 없다. 시멘트를 잔뜩 발라놨더라...-_-;;

무덤 꼭대기엔 나무가 있는데 그 위에 까마귀가 앉은 걸 보고 명당 자리라고 추정했다고 한다.
릉으로 들어가는 무덤 문 바로 맞은 편엔 제를 올릴 때 쓸 제기가 있고 그 위 기와에는 철로 된 고리와 막대같이 생긴 걸이가 양쪽에 한개씩 있다. 거기에 사람 잡는 괴물을 가둬놨었단다.


북릉공원 전경

 

저녁식사후에 사거리로 나와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건물의 배치나 높이가 마치 언젠가 가 본 일산 신도시와 비슷했다. 비록 낡아보이고 촌스럽지만 왠지 친근한 기분. 사람들 옷차림에선 세련된 여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마치 여러 연대기가 공존하고 있는 기분. 하긴 한국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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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8 09:13 2005/01/0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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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03 22:06

천안문으로 가는 지하도는 평평하고 시원해 걷기에 좋았다.
루를 오를때 요금이 있다더니 받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牛門을 들어가면서 55元짜리 티켓을 받았다.
(국내외인 요금차별이 평등화되어 국내인표는 오르고 국외인표는 싸졌다.)


티켓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차례로 있는 사진이 들어있다.


보화전



태화전

 

중국에서는 태화전과 같이 기와가 많이 휘고 처마 거의 끝에 봉황을 탄 사람 형상이 많을수록 높은 급의 殿으로 친다.
태화전에는 11개의 봉황과 사람이 있다(제일 많다).


태화전 : 황제 즉위, 황후 즉위
중화전 : 태화전으로 나오기 전 황제가 쉬는 곳.
보화전 : 사신 접대 파티와 과거시험 장소.

 

자금성은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이고 가운데 큰 길이 있다. 이 길은 황제만이 걸을 수 있으며, 예외는 황후가 즉위할 때와 장원급제자가 화관 쓰고 들어올 때의 2가지 경우 뿐이다.

중국의 궁, 전은 매우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 무늬가 매우 자잘하지만 규모가 넓어 결코 조잡해보이지 않는다.

 


용무늬가 특히 많은데, 표정들이 각양각색에 너무 귀엽다.
일본만화의 경우 소재만 본뜬 줄 알았더니 얼굴 형태도 그대로 모방한 듯 하다.

궁을 지키기 위한 사자상도 많은데, 외조에 있는 사자상들은 앞발을 들고 뒤는 앉은 꼿꼿한 자세에 머리가 곱슬이다.

 

내정으로 들어가면 사자도 다양하다.

 


특히 마지막 어화원의 사자는 머리가 하늘로 뻗쳤다.

 

황제를 위해 화산에 있던 돌(구멍 많고 구멍끼리 통함)로 쌓고 정자를 세운 곳도 있다. 그 밑의 돌사자는 선반을 받치고 있어 매우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그 정자에서 황제가 술을 밑으로 떨어뜨리면 구멍을 따라 나온단다. 굉장히 멋있다.

 

자금성을 다 돌아보고나서 점심 먹으러 식당 도착. 오리구이, 음~ 맛있어.

12:10에 공항으로 가는 버스 탑승. 또 연희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금성에 (정원 빼고) 나무가 없는 이유?'

첫번째, 나무를 심으면 궁전의 위상이 사라진단다.

두번째, (떠드느라고 못들었음...-_-;;;)

세번째, 자금성은 정방형(口). 그런데 그 안에 木을 쓰면, 곤경에 처할, 갇힐 곤(困)자.

황제가 스스로 만든 궁에 갇힐 순 없잖아?

 

자금성 바닥은 돌이 빽빽히 깔려 있는데, 황제가 누군가 굴을 파 쳐들어올까봐 바닥돌 틈새를 모래로 채웠단다. 그 중 하나만 돌을 빼도 전체가 와르르 무너진데. 그런데 어떻게 깔았나는 떠드느라 또 못들음...-_-;;

 

버스안에서 밖을 보니 옥수수밭이 쫘~악. 역시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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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3 22:06 2005/01/0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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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30 21:07

06:00 기상. 02:00에 자서 05:00엔 도저히 못 일어나겠더라. 06:30에 로비로 내려간 후 큰 짐은 가이드에게 맡기고 2층에서 아침부페를 먹었다.
야채가 부족했고, 빵 종류가 여러가지로 나왔다.
식사후 우체국을 찾으려 했으나 프런트의 도우미가 가리킨 곳으로 갔더니 없었다.
연희씨에게 물으니 우편물은 프런트에 맡겨야 하는데 도착 못할 확률이 많단다.
07:20 역시나 단체라서 20분 지체되었다.


이제 우린 천안문 광장에 간다.



중국노인들은 03:00~04:00 면 일어난다. 그후 공원이나 공터에서 운동(모임이 많다). 그후 시장 가서 아침 장 보고 귀가.


북경엔 2대 붙은 버스가 많다. 거리 깨끗하고 지하철("지철"이라고 함)에는 상점이 붙어있다. 여기선 각자 자전거 1대씩은 모두 가지고 있다(평균 한집당 2대). 옛 북경성터 안(4대문 안 지하철 라인과 비슷)에는 문화재 보호차원으로 고층건물을 못짓는다. 가는 길 버스안에서 종루도 보았는데, 3층 기와로 되어있고 굉장히 높다.

 

 

자금성은 1420년이후로부터 세워지기 시작.
마침 8월 1일이 중국인민해방군 창건일이라 군인이 많았으나, 사진 찍을때 군인 나오면 절대 안된단다. 1997년 5월 15일부터 공공장소에선 일체 흡연이 금지됐다.

드디어 천안문 광장 도착

 

 

광장과 건물들 사이엔 도로가 있다.
인민 영웅비는 생각보다 굉장히 컸다. 영웅비의 글씨("인민영웅영생불멸")는 모택동의 친필. 곳곳에 경찰들이 많았다. 가이드에 따르면 그곳의 경찰들은 배경에라도 자신들이 나오면 필름 압수한단다. 영웅비에만도 2명이 서있었다.



인민영웅기념비와 모택동 기념관

 

인민영웅기념비

 

인민대회당


천안문과 앞의 깃발


천안문광장의 노점상

 


멀리 보이는 혁명역사박물관과 도로

 


천안문 앞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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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30 21:07 2004/12/30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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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23:12

* 참고로요. 이 글들은 모두 97년도 제 수첩에 있던 것들이랍니다. 이런 저런 사실도 다 그때 이야기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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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데다가 휴가철이라 차가 밀릴까싶어 집에서 14:40 출발.
16:00 이전에 가뿐히 김포공항 제2청사 도착.

친구와 16:00에 환전을 위해 만나기로 해서 다행이지.

 

그러나 16:15 이 되어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드는 나의 생각은 내가 서있는 곳이 1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왔다갔다하던 경찰에게 물어보니, 아니나 달라
나는 2층에서 죽치고 기다렸던 것.

허겁지겁 내려가보니 친구는 이미 14:30에 도착했다던데.

그나마 여권이 없어 환전도 못하고... 또 기다림.

16:45쯤 나타난 여행사측은 17:00가 넘어서 여권을 줬고, 19:10 출발이던 비행기는 21:00로 연발.

장장 6시간을 공항에서 시간 잡아먹기중.

 

비행기에 탑승하자 드디어 여권을 사용한다는 기분이 조금씩 났다.



CHINA AIR. 우연인지 몰라도 스튜어드와 스튜어디스의 비율이 같다.
직업의 기회가 균등하다는 사회주의 국가적 특성인가, 혹은 그 사회에서 인정되는 직업이기 때문일까?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북경 도착 22:00(한국시간으로 23:00. 이후 북경시간으로 표기)

원래는 버스 2대로 전원이 호텔에 직행하려 했으나, 공안국의 제재로 인해 도착비자를 가진 9명은 공안국에서 나온 차를 타고 뒤따랐다.


 

22:50 중국식당에서 식사.

이 시간에 웬 식사?

그러나 안주면 화내는 사람도 있다니 먹어야지.

공항내에서 요기, 기내에서 식사, 더이상 들어갈 배도 없지만 한점씩 먹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입맛에 맞다. 괜찮은걸.

그나저나 이번 여행은 희한하게도 **신문사라는 주최와 한민족 문화탐방이라는 껄끄러운 주제로 인해 공안국의 눈총을 받고 있나보다.

9명의 도착비자도 불허된 상태에서 다른 단체의 일행인 것처럼 가장하여 겨우 입국후 해결을 본 것이다. 우리가 여행 다닐때 공안국의 부장급 인사가 직접 따라붙는다던데... 와우! 흥미진진하겠는걸.

 

00:40 호텔 도착.

벌써 8/3(일). 배정된 방은 2인실. 들어가는 순간 와! 4星짜리 호텔(한국의 무궁화 4개의 의미와 같음)이지만 한국의 기준보다 떨어진다더니 그래도 너무 좋아. 샤워하면서 수첩 정리하고 있다.

 

 

아참! 버스안에 있는 동안 재중교포 3세인 최연희씨가 여러 이야기를 해줬다.

 

중국은 중국식 경제 개발을 하고 있다. 이제 사유재산도 가능하고 시장경제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다른 점은 모든 토지는 국가의 것이라는 점. 만약 한 기업이 건물을 짓고 싶으면 정부로부터 토지를 임대받아야 한다. 만약 계약을 했다면 임대료는 일시불로 지불.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간판은 공항에 깔렸고, 한국의 포크레인은 쉴새없이 북경을 빌딩숲으로 만들고 있다.

 

또하나의 이야기. 최연희씨는 연길 사람인데, 연길만이 유일하게 2차, 3차가 존재한댄다.
조선족이 한국으로 취업 가서 안좋은 술버릇만 배워왔다는 소리. 연길 남자는 술과 마작에 찌들어 나이 40엔 이미 바보가 된단다.
반면 중국인들은 일찍 퇴근해 가족과 TV, Video 보거나 산책하는 것이 최고의 낙. 오후 5시에서 5시 반사이에 퇴근하면 6시 반에서 7시에 식사하고, 7시에 저녁뉴스를 본다.
맞벌이는 보통.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저녁 준비하는데 대체로 남편. 아내는 애보다가 설거지를 한다.
중국은 해산휴가가 1년반~2년으로, 유급 100%.

최연희씨는 다같이 가난하지만 모두 행복한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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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23:12 2004/12/28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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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00:13

. 1989년 천안문반란 -

88년까지의 경제위기로 대중불만 고조.

농촌에서의 곡물생산감소 예방을 위한 지배계급의 압박. 예산 적자 증가. 곡물수매가격의 하락. 비료 및 영농자금 공급이 수요에 못미침.

국가 기관에까지 시장심리가 미쳐(능력있는 지방관리가 수매를 많이 함) 수매액을 채우지 못함.

인플레, 사재기 성행. 시장심리와 이윤추구로 인해 사,국기업과 관리부패. 인플레의 해결로 임금인상을 했으나 일부 노동자에게만 혜택 돌아감.

이어 긴축경제정책 취함. 예금인출 제한이 한 방법. 결과 경기 후퇴.

도시거주 농촌노동자가 대거 해고. 고향의 농촌산업의 대부분도 원자재, 자본 부족으로 파산.

1989년초 대다수 주민이 최악의 경제위기에 빠짐. 정부는 긴축경제의 손실을 노동자에게 떠넘김(노동해고).

경제, 정치 위기는 저항의 불씨를 남김.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4월 16일 호요방의 국상에서 인민대중이 천안문에 집결. 호요방 찬양에서 정부에 대한 정치적 요구(민주선거, 언론자유, 집회자유, 관료부패척결, 족벌주의종식등). 학생군중은 등소평에 충성하기위해 불렀던 "인터내셔널가"를 <굶주림에 포로된 자 일어나라! 이땅의 버림받은 자 일어나라! 정의가 해방을 몰고 오도록, 더 나은 세상이 태어나도록>으로 바꿔 부름.

이 시위에 노동자 실업자가 가담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 언론인 참여. 지배층은 유혈학살 승인. 시위지배층내 분열조짐. 5월 4일 정부의 운동해체공작과 내부균열과 잠시 와해.  5월 13일 고르바쵸프의 방문사이에 전열을 다듬어 이붕 파면, 등소평 퇴진 요구 시위 재발발.

지방시위자 가담. 철도노동자, 교사대표단 가담후 노동자 대거 가담. 단식투쟁방식 취함. 5월 18일 부패척결, 정권퇴진을 요구한 시위대에 계엄령 선포. 혁명으로 발발. 바리케이트로 무장봉기. 운동시작후 천안문내에서는 성차별, 인종차별은 찾아볼 수 없었음. 6월 3일 발포. 노동자와 학생간의 논쟁(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노동자의 요청에 학생지도부가 불응. 시위 군중 완전 해체. 패조가 짙어지면서 학생들은 노동자에게 파업을 호소.

그러나 총파업 이루어지지않음. (노동자가 혁명 주체로 서지 못하고 감상적 평화주의 소부르주아계급인 학생이 주도였다는 한계).

 

이를 계기로 강택민이 공산당 총서기에 오름. 학생지도부가 서구로 망명하려했으나 서구에 의해 거부당함. '서구민주주의'의 (학생들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허실을 증명. 학살이후 북경라디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방송.



로자룩셈부르크 -

50년마다 '질서'수호자들의 보도가 세계사적 투쟁의 한 중심에서 다른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기쁨에 찬 승리자는 유혈학살극에 의해 일시적으로만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질서'라는 것이 그들의 파멸로 나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천안문 소요로 대중의 역량이 확인. 사회변화의 잠재력과 위기 폭발의 불씨로 여전히 남아있음.

 

이상의 상황을 겪으며 중국은 '일국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세계 경쟁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가 자본주의를 통해 완전히 경제에 대한 지령 권한을 거머쥐고 있다.

경제통제권은 북경 2,3백명의 최고 관리로부터 상당수의 하위관리와 공장경영자들에게 이전되었을 뿐. 경제의 후진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모택동의 파멸적 시도에 비판적 대안으로 내세운 새로운 [세계화]전략은 세계경제의 불황에 따라 주민 대중에게 더 어려운 생활을 가져다 주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낮은(혹은 높은) 임금, 기업도산, 잠재적 실업, 노동자 해고, 가난의 대물림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경제의 결과를 가져왔다. 빠르고 효율적 성장을 가져올 방식으로 국가와 시장 규제를 결합시킨 나라는 극히 소수, 주민의 빈곤을 피할 수 있는 나라는 더욱 극소수였다.

 

해방은 어떤 지배전략으로도 노동자계급(가장 선진적 계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 노동계급의 연대야말로 해방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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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00:13 2004/12/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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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00:08

. 시장자본주의의 시작 -

4대 현대화 : 토지는 국유. 경영은 각 농가. 농민이 자금을 상호출자하는 향진기업이 사료생산, 식료품 가공업에 등장(1985년 이들이 농업생산의 반이상 차지. 그러나 경쟁력있는 가호연합체 성격. 농촌 불평등 조장). 이로 생산은 늘었으나 일손이 달리는 소규모 농민들 낙후. 국가 생산력도 증가.


시장자본주의 합리화 주장 : 지금까지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평등강조. 자본주의 불평등을 고치는 게 사회주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거지와 부랑자에게 주택과 옷을 줌. 그러나 11억 국민을 먹여살리려면 평등 분배전에 생산 늘려야 함. 4대 현대화는 생산을 늘리는 것. 이를 위해 자유경쟁을 받아들이는 것. 외자본 도입. 자영업 인정. 실적없는 기업 파산. 주식회사제도 도입.
평등보다 자유를, 그러나 누를 위한 자유인가?



. 시장자본주의의 가속화 -

현대적 공장설비와 기술 수입. 수출지향적 산업 발전. 공업과 농업에서의 국가 중앙통제 대신 '시장관계 도입'. 자력갱생, 포위경제, 주의주의적 캠페인(대약진,문화혁명)을 통한 대중동원력을 내세운 모택동주의를 비판하고 국가 기근을 그의 책임으로 돌림. 20여 해안 도시에 경제 특구 제정. 모든 세금 감면. 토지와 건물 무료사용. 저임금제공. 이는 외국인 투자유치로 가능. 그러나 외국인 투자는 기대와는 다르게 하이테크 산업이 아니라 사무실, 호텔, 가공산업에 집중. 주로 홍콩자본이 다수. 소규모 프로젝트 투자. 외국인 투자는 위장 회사 투자가 많음. 중국상사는 외국인 합작회사로 변신, 현지 기업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득 챙김. 문화 개방으로  수입 증가. 통제력 상실. 그러나 국내 경제의 재편 투자. 생산 목표액에 대한 국가 통제 줄임이 빠른 경제 성장을 나음.


농업개혁은 공동 경작지가 개별 가족 경작지로 해체. 농민은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심어 정해진 세금을 내고 일정량을 국가에 팔고, 나머지는 자유시장. 초기 생산증가, 그러나 곡물의 구입가격 오름. 농민의 재투자 없음. 초기의 증가율 감소. 사회복지비 감소(국가투자 부재). 교육수준 하락(자녀를 노동시킴).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한아이갖기 운동. 이는 여성의 지위 하락. 사내아이만 낳으려함. 여영아 살해. 농업개혁이 처음에는 확실히 생산수준을 향상시켰으나 정부투자가 없어 농민이 더 고되게 일함. 인구밀도 높고 비옥한 곳은 생활수준 향상. 낙후지역은 불이익. 농촌불평등. 사적 임금노동이 농촌에서 대규모로 재등장(향진기업). 형식적으로는 국가 소유 토지이기에 이것이 지주제로의 복귀는 아니나 부유해진 농장관리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는 지주에와 같음. 지배층은 생산력 증가를 위해 이 불평등 증대를 환영. 증대된 생산과 시장의 성장 결과, 만성적 인플레 야기. 2배의 물가 증가. 곡물 수확량 하락. 이 하락을 완화하기 위해 더 높은 투자. 자유시장에 내다팔 곡물량이 정부투자로 증가하자 일부 농민은 자기 먹을 식량도 재배하지 않음. 농업정체야기.

 

공업도시개혁으로 공장 경영자는 기업이윤권을 거머쥐고 자체판단으로 이윤재투자 가능. 향진기업은 국가 통제에서의 제외. 공업경제의 무정부성. 경제범죄 등장,만연. 부정부패를 통해 국가 통제를 벗어나 이윤을 극대화. 국가가격 보조금과 사회적 임금의 지급중지는 노동자의 불만 초래.


. 인플레이션과 위기 -

물자부족(원료와 에너지 부족), 산업성장의 극심한 불균형으로 야기된 과잉생산품의 낭비, 수송능력부족등의 이유로 물가 폭등. 공급부족. 상품관리자의 이윤축적은 심각. 인플레를 더욱 부추김. 인플레의 고착은 금융, 은행업부문에도 영향 미쳐 자금비축을 위한 소비재 공급억제를 낳음. 국가투자 단절. 지배층은 이 현상에 대해 논쟁이 일어남. 보수파는 국가계획경제를 표방. 성장속도는 지배계급이 경제의 방향과 발전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주장. 등소평 분파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최우선. 중앙집권은 경쟁에서 뒤쳐지게 함. 분권화와 시장 확대만이 경제역동성을 보장. 경제 통제력 상실은 유감스러운 부작용이라고 주장. 지배계급의 공개적 분열과 지도의 부재. 무리한 경제 개발과 현실사이의 모순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큰 공간을 열어줌.

 

. 소수민족저항 -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항상 소수민족의 언어와 관습을 유지, 발전시키도록 장려. 현실에서는 온정주의에서 노골적 인종주의가 나타남. 이에 경제적 낙후성이 결합해 회교도, 티벳의 저항이 큼. 문화혁명기간동안 티벳문화가 거의 절멸. 그들에게는 잔학한 봉건지배계급이 사회주의로 잘 무장된 잔학한 지배계급의 대처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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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00:08 2004/12/2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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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6 22:06

. 문화혁명(1960년대) -

지배계급의 권력투쟁이 거리로 연장을 위한 명분. 모택동이 희박해진 권력기반을 정비하기 위해 선동한 캠페인.

자유적인 자신의 적들을 "자본주의적 길을 걷는 권력내부의 사람들"로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 (지배자가 허용하는 반란은 정당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이러니를 당시 대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함)란 구호.

의식적으로 조작된 군대 상층부와 홍위병을 기반으로 적들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정권을 다시 잡음. 그러나 문화혁명은 이제 모택동의 의도에서 벗어나 대중의 자생성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 파업까지 이름.

모택동은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군부 투입(혁명위원회). 내전 일어남. 이 혼란으로 하급관리들은 평화와 안정을 원했고, 산업은 심각한 타격받음. 몇년동안 입은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필요.

과학,기술 발전이 완전히 정지(학교 졸업자가 4년동안 아무도 없었고 지식인들은 은둔). 소련과의 국경분쟁압력. 그러자 미국과 일본에 경제개방을 해야 경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옴(문화혁명기간동안 비난받은 사람들이 이들임). 이에 반대하는 분파간의 복잡한 권력 투쟁 양상. 모택동은 그 권력투쟁위에 군림. 주 투쟁은 4인방(보수)과 현대화분파간의 투쟁. 현대파의 임표 제거. 4인방 득세. 노동자 파업으로 이를 막은 등소평 등장(현대파). 4인방에 분노한 등소평지지자들에 의해 천안문소요 발발.


 

. 1976년 4월 천안문소요 -

현대파 지지자의 4인방에 대한 도전. 주은래 추모식으로 발발. 이로 인해 4인방은 권력에서 고립. 모택동의 죽음으로 4인방 체포. 1978년 등소평의 등장. 반대파 제거. 서방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문호개방이 모택동시대의 유산인 정체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 '시장사회주의'발전. 포위경제 포기.


<문화혁명의 종말>

 



*참고1.

핑퐁외교(1971) -

베트남전에서 패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려 함. 중국은 국내의 비판적 여론을 탄압하고 관심을 돌리기 위해 외교긴장 강화. 소련과의 충돌. 모택동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과의 대립 완화를 위해 미국과의 외료를 함. 이로 미국의 예상대로 중국의 베트남 원조 중단.

*참고2.

중소대립 -

소련은 중국 원조 중단. 중국은 대약진구호를 내걸고 자력으로 갱생하려함. 소련이 '미국을 앞지름'을 내걸자 중국은 '영국을 앞지름'을 목표로 내걸음. 그러나 농업국인 중국은 공업화를 위한 자본과 기술 부족. 이 부족분을 노동력과 정신력으로 극복. 자력으로 원폭 개발. 그러나 전근대적 방법으로는 성공 못함. 농업만 황폐화. 이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공산당내 실권 잃음. 문화혁명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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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6 22:06 2004/12/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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