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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친구여, 이제 네가 점심 사라

<전문노련> 기관지 1993년 3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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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이제 네가 점심 사라

-이 성 우(유전공학연구소노조 조합원)

 

얼마 전의 일이다. 고교 동창 녀석이 우리 연구소를 찾은 적이 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손님 대접한답시고 유성에 가서 점심을 사고,

커피 한잔 마시며 지난 얘기들과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나누고 있던 중에,

그 친구가 불쑥 물었다.

 

"여기서 월급은 얼마나 받냐?"

"......"

"먹고 살 만큼은 주니?"

 

우물쭈물하다가, 이윽고 궁색한 답변,

"월급에다 보너스에다 이것저것 잡다한 것 합쳐서 대략 천 삼, 사백 될 것 같애.

 먹고 살 만큼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둘다 실험실에서 지내다 보면 생활비가

 서울보다는 덜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럭저럭 사는 거지 뭐. 3년 전, 1500만원에

 세들어 살던 서울 상도동의 전셋값이 지금 아마 3000만원 정도 할텐데, 난

 그보다 넒은 집에 아직도 천오백에 살고 있거든."

 

이런, 목소리가 점점 기어드는 것이 답변이라기보다는 숫제 변명에 가까왔다.

친구가 덧붙이기를,

"쬐금 힘들겠다!"

 

-그래 힘들다, 임마, 어쩔래, 그나저나 내 작년 연봉이 정말 1300이나 되었나 모르겠다.

적당히 둘러붙인 건데...

 

그리고 얼마 있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서랍 속에 간직해 둔, 정말이지 받고 나서

그 동안 한번도 눈여겨 보지 않은 연말정산서(공식 이름은 '소득자별 근로소득 원천

징수부'라고 되어 있다)를 꺼내 보게 되었다. 그 서슬퍼런 문서에 가로되,

"KIST 유전공학연구소에 다니는 주민등록번호 6*****-1******인 이성우는 1993년

 한해동안 급여총액 11,307,868원, 상여총액 1,880,000원으로 계 13,087,868원의

 소득을 올려 513,352원의 세금을 국가에 충실히 납부하였음"

을 훌륭히도 증명하고 있었다.

 

흐음, 그래도, 1300만원대는 되는구나, 하고 짐짓 흡족(?)해 하고 있다가, 아니 50만원

이라니, 내 세금이 50만원이라니? 벌떡 일어나서 지난 해의 같은 문서를 꺼내어 비교해

보았다. 역시 가로되,

"위 이성우는 91년 한해동안 급여총액+상여총액 = 계 11,362,600의 소득으로

 130,791원의 세금을 냈노라!"

 

뒤늦게 꼼꼼히 계산해 보았다. 내 연봉은 작년에 15.2%가 올랐다. 총액 5% 지침에

저항하여 92년도 기본급을 동결했는데도 15%나 올랐다는 건, 내가 일을 잘한건지

(능률평가수당 등), 출근이라도 열심히 한 건지(연월차수당), 아니면 호봉 승급이

그만큼 되었다는 건지(?!) 아무튼 잘 모르겠지만, 올랐으니 흐뭇하다치고, 그 오른

금액 170만원(정확히 1,725,268원)의 22.2%(382.561원)를 세금으로 거두어가는

정부의 횡포는 도대체 뭐냐? 말이 인상분의 22.2%이지 91년도 세금에 비해 무려

292.5%가 오른 것 아닌가, 이런......(이하 줄임, 고운 말을 써야 할 것 아니오.)

 

다시 그 친구와 먹은 점심값을 생각해 보았다. 돌솥밥 1인분에 5000원, 그래 삼년 전에

우리가 대덕벌에 처음 왔을 때, 그 때는 3000원이었어. 세금보다는 덜 올랐군, 어디

다른 집들 한번 보자. 가끔 들러서 소주 한잔에 곁들이는 할매낙지, 그 매콤한 낚지볶음

한접시에 3000원이다(삼년 전에는 1500원), 먹는 것만 그러냐, 서울가는 고속버스는

2000원도 안했는데 3년만에 3000원이 넘어섰고, 우리 집에서 연구단지 들어오는

택시비는 작년만 해도 3000원이면 떡을 쳤는데, 이제는 5000원, 그나마 교통이 막히던

어느 날에는 8000원을 주었다는 내 아내의 푸념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에고에고 친구야, 이게 내가 그럭저럭 사는 거냐, 정말 3%만 올려받고도

백일도 안된 딸까지 먹여 살릴 수 있는 거냐? 조용한 웃음 뒤에 안스러워하던 그 표정의

의미, 이제야 바로 알겠구나. 이제 니가 점심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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