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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행위는
즉 개인의 신앙적 행위나 종교적 의례를 통한 신과의 접촉을 통한
즉각적인 개인이해나 경험에 입각한 신학과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사려깊게 연구하는 신학은
신학하는 방법이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다.
개인의 즉흥적인 이해신학과 그것을 재이해하는 신학의 차이는 신학방법의 차이이며,
신학방법의 지향하는 목적의 차이일수 있다.
신학적 방법과 목적에 따라 신학적인 접근법은 달라질수 있다.
인간세상에 신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표현하는 방법으로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에 따라,
자신의 믿음에 영감을 주고 자신의 신이해에 즉흥적이지만,
순간성에 따른 순발적인 믿음의 활달성이 따라올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적인 이해와 표현방식은 신의 포괄적인 통치와 그의 성품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은 자칫 신을 알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추구에
치우친 이해와 편견에 빠질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나 신학의 단체적인 연구나 접근을 통해
신이해나 경험을 추인받으며,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신은 초월자이면서, 세계에 편만한 존재로
인간사회에 모든 분야에 관여하며, 신의 존재와 섭리에 있어서,
신과 인생사이에 놓여있는 모든현상에 대해 신학적해석을 추구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세계에 통치하는 신의 성품이나 역활등을 이해하며,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을 따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흥적인 신학방법은 개인의 인간속에 이해되고 경험되어진 내재적이며,
인격교류적인 신경험을 표현하는 신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경험을 표현하는 개인신학의 추구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목표를 통해 신학의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로서 신학적인 표현을 추구한다.
사변적인 신학방법은 즉흥적인 경험가운데에 얻은 정보들을 분류하고, 판단하여,
그 정보들을 체계화하여 그 신학적인 체계안에서
신이해를 종합적으로 세워 갈수 있을 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그런 즉흥적인 신이해나 경험을
신중한 사고적인 이해를 통해 체계적인 신학관을 세워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이해는
경험적인 신학사고와 사변적 신학사고에 따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종합적이해를 가질수 있다.
기도를 할때에나, 설교를 들을때에,
받은 평신도들의 신학형성에 주로 영향을 주는 신학방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접촉하는 신경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이루는데 주된역활을 하게 된다.
섭리는 종합적인 신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신의 성품이나, 신의 통치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여 신의 움직이는 활동이나,
삼위일체 신의 삼위의 성부, 성자, 성령의 각자의
활동이나 역활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요청이 된다.
사변적인 신학은 사람의 신역사의 경험이나 신역사의 이해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신학적인 관점을 갖게하는 것이다.
섭리는 신의 통치의 신정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의문이 제시되고 있으며,
악한 세력의 선한 인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유대인학살들에 대한 이해등도,
신이 과연 살아계시는 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며,
편견이나 일변도적인 주관적인 신이해에 머물게 하는데.
사변적인 신학사고는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게 한다.
즉흥적인 신학관점은 우리들에게 신학적인 영감이나,
실생활에 우리에게 자신의 신이해나 경험에 도움을 주어,
자신의 신의 역사나 섭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사변적인 신학관점은 우리에게 진지한 신학추구를 통해 체계적인 신이해를 갖게하며,
신학의 종합적인 관점을 통해 신학의 자신의 신앙수립에 도움을 갖게 한다.
통합된 신학적인 개념은 신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나 이해일 뿐 아니라,
신에 대한 대응적이며, 대화적이며, 그리고 공동체적인 신학 사고과정를 통해 형성이 된다.
그 신학적인 사고의 모델은 건강하고 논쟁과 창조적인 긴장이 있는 감상을 허락하는 대화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해를 구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신학은
신학자로서 크리스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는 것과 그 메시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혹은 계획적이든, 계획적이 아니든,
매일의 셀수없는 접촉에 의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해 믿음을 배운다.
교회에서 전파되고 교회교인들의 매일의 삶에 의해 이해되는 믿음을
추구하는신학이 즉흥적신학방법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터득하는 주관적인 신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인 가정과 사회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로 자기결정을하게 된다.
크리스챤들은 믿음의 세계가 현실생활과 다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합당하게 교류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이해한다.
주관적인신학은 예배에서 다른 사람들과 문제제기 함이 없이
자기만의 신앙(신학)적인 말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편안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형성한다.
사변적인 신학은 주관적인 신학의 확신하는 것들을
다시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사변적인 사고는 제이의 신학적 사고과정으로
자신의 절대적인(자신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함)
주관적 믿음에 대해 다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사고관점을 다시 객관적인 사고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변적 사고는 짐짓 하는 사고이지만,
그것은 해석의 대안적인 것으로 가능한 일치적인 것과
분명하게 확인된 믿음의 이미를 구성하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신학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나,
신학이 깊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요받는 혹은 감동되는 신학적인 시도가 아니다.
사변적인 신학적 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의 불분명할때에 시행된다.
진지하든 아니든, 주관적인신학은 실수나 혹은 잘못 알려진 내용들로 그 신학의 위기나, 논쟁을 통한 사변적인 신학사고를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다.
믿음안에서의 자극(신학적인 인식)은 사려깊은 신학적사고를 요청한다.
그 자극(인식)은 의식화이다.
그 자극은 신앙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깊은 단계의 감정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믿음의 깊이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인식되어지는 과정으로 그 자극은 흐릿한 믿음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역활을 한다.
의식화된 믿음의 자극(인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한다.
주관적인 신학관점과 사변적인 신학관점의 구분은 역사(시간)를 통해 검증되며,
새롭게 하는 신학적인 확신들에 위한 힘든 첨예화된 신학검증의 가치를 통해 나누어 진다.
목회자에게 주는 도전은 믿음의 이미를 연구하는 것인데,
신학적인 사변적 사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연결되게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목회자의 설교는 첫번째 신학사고인 주관적인 신학에서 나오지만,
그러나 두번째 신학사고인 사변적인 사고의 보다 힘든 과정을 통과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변적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을 검증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아버지와 세상의 아빠의 이메지의 차별화에 대한 믿음의 충분한 이해를 제공한다.
크리스챤들이 믿음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믿음의 확신을 갖게하는 것의
의미하는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한다.
어떤 크리스챤의 믿음의 이슈도 신학자의 연구에 참여하게 한다.
즉 믿음에 대한 어느 것도 신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안에 건전한 성장을 하도록 하는 소명을 이루는데는
자신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주관적이고 기초적인 이해를 고치고,
깊게하며,확장하는 신학적인 사고 시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세상천지에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자신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현주소일 것이다.
고마웠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자신에 대해 흐믓하게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아끼고, 나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누군가가
나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어린아이가 집에서 나가 골목에 있는 동네의 아이들사이에 있을때에,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며, 즐겁게 놀수 있으며,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혼자 덩그러니 자신만 있고,
누구도 자신과 함께 놀아주지 않으면 심심하며,
동네를 빙빙돌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다.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어딘가로 길을 걷고 있을때에,
많은 군중들이 분주히 자신의 일들을 보기위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자신혼자만이 덩그러히 서있으면,
갈데없고,만날사람도 없으며, 시간을 보낼만한 일들도 없다면,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러울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없고,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자신들일때에,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타는 가 보다.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다가,
보아도 보아도 계속되는 정보의 홍수에
사람들이 자신의 정을 붙일때가 없으며,
다만 문자와 이메지와 사운드의 교류속에서
사람들사이에 연결되는 따스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을 때에,
사이버의 고독이라 할까 생각이 든다.
자신을 도울 지원자를 찾지 못하고,
그저 자신혼자 외로이 인생을 살아가느라 아둥바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늘을 향해,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며,
자신에 대해 도움은 커녕, 고독과 불안을 느낄때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우울증에 빠진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아무에게도 도움받지못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 대해 걱정과 불안과 절망이 밀려들때에,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부모나,
고향이나, 혹은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노출된 자신의 나약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과 함께 머리를 맛대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놀아주고, 즐겨주는 무엇이 없다면,
더 서글픈 자신의 삶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인 신이 보고 안타까워 하는 것은
인생이 고아와 같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그런데, 신은 그런 인간을 향해 도움을 주며,
나약한 존재인 인생들을 붙들어주려는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생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니,
살다가 지쳐 자신의 삶을 한하며,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내가 눈을 산을 바라보는데, 나를 도움이 어디서 오는고 생각해보니,
나를 도울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는 하늘과 땅을 지은 신이었으니,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신을 발견했을때에,
기쁨이 넘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점의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을 도울 신앞에,
자신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는 말을 되새기며,
도움과 지원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인생이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인생의 삶의 도전들(나약,실망,실패, 배신당함,사건 사고,
자신의 스캔들로 인한 설자리를 잃음, 목표미달에서 오는 좌절,
불안에서 오는 절망,알수 없는 고난,
매섭고 몰아친 고통, 엄연한 현실로 다가올 죽음 등)을 끝내 극복하고 승리하며 나갈 것은
신이 자신의 도움이며 자신을 지키는 자로 자신의 옆에 있기에, 그렇다.
인생이여, 도움을 얻으소서
역사의 시간속에 여러가지 동기로 전쟁이 일어난다.
침략의 동기로 혹은 나라사이의 갈등이 동기로 아니면,
혹은 악한세력의 폐해를 막기위한 선한동기로 일어난다.
악을 제압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선한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은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적인 현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구약은 마치 하나님이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실제, 하나님은 인간사회이 악을 심판하고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셨다.
인간사회에 나타난 전쟁은 인간사회의 타락의 하나의 현상으로
여러가지 동기로 인간사회에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투쟁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인간사회의 악한 횡포로서 일어나기 도하며,
양육강식의 논리로 일어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삶의 필요악으로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 힘의 균형이 깨어지며,
질서가 무너지고, 약자가 고통을 당하며,
평화가 무너지면 정당방위의 전쟁은 일어난다.
악이 힘이 있으면 그 악이 약자를 괴롭히며,
그 약자를 희생물로,이땅에 많은 악이 만연하며,
악인의 힘이 강해져 세상전체의 평화를 깨고, 뒤엎기 때문에,
선한세력의 선한동기는 약자를 보호하며,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정당방위의 전쟁은 그 동기에 있어서, 요구총족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전쟁의 목적수행에 있어서
정당한 요구충족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악에 대한 선의 징계로서 나타나야 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악을 제압하고,
악의 세력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며,
선한 세력이 통치하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선한세력의 편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폭력사용은 사용하는 자의 동기나 방법이나,
목적에 따라 바르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폭력사용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의 사용이 되어야 하며,
인간사회에 비폭력사용을 따르는 정신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구축에 더 힘을 쓰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갈등이나 투쟁이 일어날때에,
우선적으로 비폭력을 따르며, 비폭력의 방법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의 더 큰 폭력의 폐해가 일어나는 경우는
선한세력측에서 정당한 폭력사용을 통해,
인간사회의 악의 영향을 제압하며, 평화의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전쟁은 폭력사용의 전형적인 실례이며,
폭력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평화는 상대적인 평화주의와 절대적인 평화주의가 있는데,
상대적인 것은 악의 실재와 공존 할수 밖에 없는 제한된 선의 평화이며,
그 평화가운데에는 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며,
선과 악의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상대적인 평화의 개념은 악을 제압하기 위한 제한적인 폭력사용이 허용되어진다.
절대적인 평화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악을 다 몰아내어,
선한 세계를 이룬 상태일 것이다.
절대평화주의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의 표현이나
그의 사역의 표본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것 같아,
이세상에서의 악을 이기기 위한 선한 의도로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이땅에 평화의 상징인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보이셨다.
평화는 선한세력이 힘이 있을 때에,
인간사회에 악의 상징인 폭력이나,
불합리한 모순핍박을 물리치고,
사람을 존중하는 선한 사회을 이루어낼수 있다.
사실 절대평화주의는 악이 이지상에서 다 사라지기전에는 이룰수 없으며,
악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지상에 선과 악의 불균형이 깨어져,
선한 세력의 통치하에서, 평화가 이루어 질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주님의 가르치심은
그가 이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으며,
오히려 그가 세우시려는 하나님나라는 전투적인 정신속에서,
하나님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면서,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선을 이루는 상징으로
비폭력이나, 사랑을 내세우셨다.
그렇지만, 그의 가르침안에 있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정신인 전투적이며,
영적인 전쟁이며, 악에 대한 선의 투쟁으로 이해되어진다.
주님이 이 땅에 검을 쓰는 자는 망하리라 하셨는데,
이말씀은 검을 가진자가 악을 행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 쓰일때에,
주님이 검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으며,
이말씀의 배후에는 악한 세력에 대한
선과 악의 전쟁으로서의 징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며,
어두움의 세력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또한 어두움의 세계에 대한 빛의 세계의 도전이며, 영적인 전쟁이다.
크리스챤은 절대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전쟁에 대해서도, 선한세력의 정당방위의 전쟁을 부인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 비폭력적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입장에서,
악을 이길 선을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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