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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검진하는 날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아 좀 쉬고 있었는데 노과장이 감기가 단단이 걸렸다 하여 지원나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과로를 했을 노과장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게 의사 한 명 충원 신청 하자니까. 노과장은 수익을 따지는 병원에서 한 명 더 늘려줄 가능성은 희박한 것을 알기에 그냥 이대로 가자는 것이고 나는 우는 아이 젖준다고 꾸준히 요청해서 티오를 받아보자는 쪽이다. 그건 과장이 할 일이니 내가 과장이라면 부담스러워서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다. 



 우리는 검진준비하는 것을 ‘상 차린다’고 표현한다. 검진은 보통 회의실이나 식당에서 한다.  오늘은 식당 검진. 최대한 수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상에 포를 깔고 스크린을 친다

짧은 의사 진찰 시간에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보건교육자료도 준비했다. 

 

  오늘은 예상수검인원이 168명이라 의사가 2명 나오기로 했는데 4년차 전공의란 놈은 검진시작 25분후에야 불쌍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한 번 째려보아 주었다. ‘끝까지 속썪이네’. 그래도 이 자는 말귀는 잘 알아들어 예쁜 구석도 있다. 잘못해놓고 하나도 안 불쌍한 표정으로 나타나는 놈도 있는데 그러면 더 밉다. 그 자는 일년차가 되어 첫 출근 다음 날 지각하여 오후에 나타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뒤로도 계속 뭔가가 삐걱거린다. 예쁜 구석이 발견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전에는 눈물이 쏙 나오게 야단을 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나이 서른이 다 된 사람들 붙들고 잔소리하면서 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학교다닐 때 나도 지각대장이었지만 인턴 생활하면서 좀 고쳤고, 내 이름 걸고 밥 벌어 먹고 살게 되면서는 고칠 수 밖에 없었으니 이 사람들도 그렇게 되겠지, 뭐.

 

치과 진찰. 치과든 우리 과든 늘 사람들이 밀린다. 기다리면서 수다떠는 건 좋은 데 너무 시끄러울 때는 조용히 해달라고 당부해야 할 때도 있다.

 

  오늘의 최대 중환은 40대 남자. 작년에 종합검진에서 고혈압, 당뇨병, 원인미상 혈뇨가 있었으나 그냥 지냈는데 오늘 검사에서 혈압이 210/130, 220/120, 요당 4+, 요단백3+, 요잠혈 3+이다. 신장내과에 진료의뢰서를 써 주면서 당장 병원에 가도록 했고 절대 과로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이 환자는 지난 번 방문에서도 정밀검사와 약물치료의 필요성을 설명했는데 흘려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과거 상담기록을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 딱 잘라서 말했다.  이럴 땐 긴 침묵이 효과적이거든. 삽십만원도 넘는 종합 검진은 챙겨받으면서 막상 질병이 있어도 치료는 받지 않는다는 게 이상해서 자세히 물어보니 종합검진후 가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고 추가검사를 했는데 일단 정기적으로 추적 검사를 하자는 말을 들었고 그 뒤로 바빠서 못 갔다고 한다. 

 

   이 회사는 소음 노출의 정도도 심하지 않고 화학물질 사용량도 많지 않으며, 생산직은 전부 불법파견이고 이직이 잦아서 그런지 심각한 직업성 질환의 징후가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뿐하게 검진이 끝나가는데 한 젊은 남자가 염색한 머리를 찰랑이며 와서 내 앞에 앉았다. 은은한 샴푸냄새가 난다. 몸을 가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오랜만에 출장을 나와서 가볍게 몸을 푸니 기분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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