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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별로 없는 날

  때로 사업장에 가서 할 일이 별로 없을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할 일이 없다기 보다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 경우이다. 오늘 돌아본 사업장은 형식적으로 법적인 기준을 잘 준수하고 있고 각종 서류는 훌륭하게 꾸며져 있지만 참으로 찜찜한 곳이다. 대기업 협력업체들인데 그 관리자들은 '우리는 매인 몸이니 어쩔 수 없소' 하고 본사 담당자는 번지르르 말만 한다. 



  작업중 건강상담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면 작업자들이 젊고 건강해서 요구가 적은 것이라고 하면서 점심시간을 이용하라고 한다. 10시간 2교대 근무에 한시간도 안되는 점심시간, 밥먹고 쉬기도 바쁜데 건강상담하러 사무실에 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밥 안 먹나?

 

  보건교육을 하자고 하면 자기들이 알아서 다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식인데 소위 매일 5분 안전교육이라 하여 5분씩 한달을 모아서 120분을 만든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가서 물어보면 조회시간에 '이거하지 마라 저거하지 마라' 이런 잔소리만 한다고 하고 작업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다고들 한다.

 

  작업환경개선에 대해서 말하면 종합계획이 수립중이라고 하고 해가 바뀌어도 같은 대답이다. 개선을 한 것도 있기는 하다. 입식작업에 대해서 매트를 제공했는데 세상에 그걸 인간공학적 매트를 사다 깐 것이 아니고 허접한 재료를 사다가 작업자들더러 직접 만들어서 깔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도 그렇게 안하는 데 대기업에서 하는 짓 치곤 정말 심하다.  그래도 오늘 만난 작업자는 그 매트라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 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그게 없는 공정도 있는데 거기서 3시간만 일하면 허리가 아프다고....끙~

 

  이런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다. 법정 산업보건이 갖는 한계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업장에서는 심각한 질환 발생에 대한 감시(모니터링)라는 최소 목표만 설정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정리하지만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사업장에서 우리한테 바라는 것은 차 한 잔 마시고 서류작성하고 가라는 거 뿐이다.  무서운 것은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생각같아서는 확~ 계약해지 해버리고 싶지만 그나마 감시라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참는다. 감시라도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음...... 이미 길들여진 거 아닐까?  ........헷갈리지 말아야지.

 

  이럴 땐 몇년전 한 소기업 작업장 개선 프로그램 워크샵에서 들은 동경산업안전센타(일본의 노동보건운동단체)의 한 산업위생사의 말이 생각난다. 그 이야기 듣고 충격을 받았고 진로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는 제도권 산업보건 25년만에 이게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위 재야활동으로 돌아섰다고 했다. (25년만에 돌아설 수 있는 용기도 감동적이었음)

  동경산업안전센타의 슬로건이 뭐냐면 '저항없이 안전없다'이다. 백번 맞는 말! 

그러나 저항할 주체가 아무리 늘려잡아서 10%를 조금 넘게 조직되어 있는 사회에서 치고 빠지는 '기동전'과 같은 활동이 갖는 한계 또한 명백하다.

......

그렇고 그런 제도권 산업보건에 몸담은 것에 대한 회의가 밀려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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