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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1/10
    홈씨어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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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1/01
    미안한데 그럼 니들이 딴거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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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10/30
    아버지를 보고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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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10/26
    이제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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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10/16
    슬픈 결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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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10/08
    중성화 수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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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10/06
    노트북 모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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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0/03
    장만하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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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9/26
    노인의 생활철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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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9/20
    안본다고 없어지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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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씨어터

홈씨어터를 구비하기 위한 비용에 하한선은 있어도, 상한선은 없어 보인다.

홈씨어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대형 TV(또는 나처럼 프로젝터와 스크린), DVD 플레이어, AV리시버, 5.1 채널 스피커

이렇게 갖추어야 하는데 가격이 정말 천차만별이다.

DVD플레이어는 5만원짜리부터 수백만원짜리까지 있다.

리시버나 스피커는 더 심해서, 난 고작해야 둘다 포함해서 30만원짜리인데, 잡지에서 본 건 스피커 한짝에(세트도 아니고) 2천4백만원 짜리도 있다.

 

나야 그렇게까지 들일 돈도 없고, 행여 있다해도 그럴 마음이 없다. 내가 무슨 대형 아파트의 커다란 거실에 홈씨어터를 꾸민 것도 아니고, 작은 내 방에선 이 정도만 해도 만족스럽다. 아주 나중에 프로젝터만 자작이 아닌 메이커 제품으로 바꿨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내 친구의 이모가 제법 잘사는데 얼마전에 5천만원을 들여서 홈씨어터를 꾸몄다고 한다. (나? 130쯤 들었다. 대형 TV 한대 값도 안되는 돈이다. 이 것도 누구에게는 엄청 큰 돈이겠지.)

친구가 보기엔 이모네 식구들이 영화를 거의 안보는 거 같아서 "영화도 안보면서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들였어요?"라고 했더니 이모 왈

"근사하잖아"

그래, 돈 많으니까 5천만원 짜리 인테리어 한거겠지.

골프 많이쳐서 경제 활성화 하자는 꼴통같은 소리를 했던 이가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 이렇게 있는 분들이 그렇게 돈지랄 해주면 경제가 살 지 또 누가 알아?

 

근래에 리시버와 5.1스피커를 들여왔는데, 하는 거 없이 바빠서 아직 그걸 이용해 영화를 보지도 못했다. 이번주 안에는 볼륨 왕창 올리고 꼭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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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그럼 니들이 딴거해!

작년 봄쯤인가 팔자에 없는 '1인시위'라는 걸 한 적이 있다.
소심하고, 꽤나 비겁하기까지 한 내가 그냥 집회참석도 아니고, 1인시위씩이나 하게된 이유는 그놈의 연줄^^ 때문이다.

아는 분의 부탁으로 했는데 세종대에서 해직된 김동우 교수의 복직을 촉구하는 1인시위였다.(김교수는 날 모르겠지만 난 그를 알고 있었다.)

해직된 사유는 간단하다. 조소과 교수였던 그 분이 학교측의 의뢰로  '모자상'을 만들었는데 재단 이사장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모자상의 어머니를 팔등신으로 고치라 했고 김교수는 그걸 거부한 대가로 재임용에서 탈락됐다. (황철민 감독이 '팔등신으로 고치라 굽쇼?'라는 다큐로 만들었다.) 그 학원에서 재단 이사장은 '제왕'이었다. 온갖 비리와도 연루되어 세종학원을 창립했던 그의 부모로부터 고소를 당한 상태였다.

 

사학법 개정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말과 논리들이 있지만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가장 근본적인 인식 차이는 이거 아닐까?


사학측은 "내 돈으로 내가 만든 학교를 내 뜻대로 못한다는 게 말이되냐?"는 것이고, 그 반대쪽은 "다른 것도 아니고 교육에 관련된 것을 니들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면 안된다" 뭐 이런거 아닌가?


얼마 전에는 사학의 짱들이 떼거지로 모여서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폐교하겠다"고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사학법 개정이 우리나라를 '사회주의화'하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그걸 수구꼴통 신문은 '대혼란이 예상된다'며 같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나?)

 

그 정도가 사회주의면 전세계는 이미 수십년 전에 사회주의화 된 것이고, 자본주의의 첨병인 미국도 이미 사회주의 국가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계'를 끈질기게도 '자유민주주의 체계'라고 불러대는 인간들은 무식한 거 자랑하는 건지, 국민들 무지한 거 믿고 쌩까는 건지.

 

100% 순수한 자본주의 국가는 전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보자. 내 돈으로 내 기업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왠 노동3권? 감히 피고용자 주제에 파업을 해? 지들이 싫으면 나가야지. 자본주의 체계에서 말이나 되는 거야?
그런데 파업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 노동3권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다. 그들 논리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진작부터 빨갱이 국가란 말이다.

당신들 혹시 반체제 세력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헌법에 분명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나와 있는데 그걸 부정하는 소릴 자꾸 하는 게 이상하잖아. 솔직히 말해봐. 당신들 '공화국'이란 말 뜻도 모르지?


 교육자입네 하고 제발 개폼 좀 잡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기들끼리는 점잖아 보이고 폼나 보이는지 몰라도 옆에서 보기 정말 민망하다. 괜히 괜찮은 교육자들까지 욕보이며, 묻어갈 생각 그만 하고 제발 딴거해!

 

 

* 비리 저지른 게 발각돼서 물러났다가도 몇년 지나면 다시 복귀하는 걸 보면 딱 '조폭두목'이다. 사고치고 몇년 썩는다 해도 빵에서 실질적으로 조직을 다 관리하고, 나와서는 다시 제자리 찾아가는 조폭 말이다.

 


 


잘 좀 찍어주시지^^ 구도가 맘에 안든다. (귀찮아서 모자이크 생략)





꽁지머리 한 사람이 황철민 감독


1인시위가 시작되고 설치됐다는 감시 카메라.

이 분이 김동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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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보고 있다.

아버지가 병이 난 후 침대를 못벗어나게 되자

아버지를 위해 뭘하면 덜 지루해 하실까 고민했다.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고 말이다.

흔히 말하는 '시한부 인생'

담당의사는 6개월 정도 남았다고 했다.

생이 6개월 남으면 뭘할 것 같은가?

드라마 보면 대개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던데 실제로도 대부분 그럴까?

 

꼼짝도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를 찍기 시작했다.

형이 갖고 있던 8미리 비디오 카메라로  아버지의 살아온 얘기를 듣기로 했다.

 

가장 큰 목적은 아버지의 지루함을 덜기 위한 것이었고

그에 더불어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을 당신 스스로 되새겨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 때 찍은 걸 지금 DVD로 굽고 있다.

집안 도처에 아버지 사진들이 있지만 사진을 보는 것과 아버지의 움직이고 말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은 많이 다르다.

 

일제시대 지지리 가난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옛날 얘기를 하다 울먹이고, 그걸 보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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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뭐하나?

아직 정리가 다 되진 않았다.

장례는 치렀지만 대전 국립묘지에 모셨기 때문에 임시 봉안만 했고 안장은 다음주에 한다.

가장 기본인 듯 보이는 사망신고도 아직 하지 않았다.

내가 가서 하려 했는데 호주승계 받을 사람이 와야 한다고 해서 아직 못했다.

없어질 그놈의 호주제, 대체 입법 때까지는 지켜야 하나?

나혼자 하는 거라면 호주승계 안하고 사망신고만 하겠건만...

 

상속을 정리해야 하는데 아는 법무사 사무실이 문을 닫았다.

물론 흔한 게 법무사니 아무데서나 하면 되긴 하는데, 귀찮아서 안알아 보고 있다.

어차피 사망신고를 해야 상속절차도 밟을 거고 말이다.

 

아버지 짐은 거의 모두 정리했다.

140만원 주고 산 전동침대만 남았다. 꼭 필요한데 형편이 어려워 못사고 있는 사람이 있다기에 그냥 가져 가라고 했는데 한 발 늦어서, 연락한 바로 그 날 전동침대를 들여왔다고 한다.

 

의료기 업자가 10만원 줄테니 달라고 하기에 됐다고 했다. 공짜로는 줘도, 업자에게 10만원 받고 팔 생각은 없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 졸지에 불교신자가 되버렸다.

국립묘지에서 안장의식을 하는데 필요하니 종교를 정하라고 했다.

'무교'라고 했더니 그건 안된단다. 젠장. 죽은자에겐 종교의 자유도 없나?

그럼 '유교'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 하셨던 걸 보면 유교가 종교라는 생각도 든다.)

예상했던 데로 유교도 안된다고 한다.

기독교는 정말 아니니 할 수 없이 불교로 했다.

 

하긴 억지로 하면 불교신자라고 못할 것도 없다.

형이 결혼하고 5년동안 애가 생기지 않았는데 하도 갑갑해서 고모가 다니는 절의 스님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스님 왈 "조상이 배가 고파"

 

큰집이 기독교라 제사를 안지낸지 20년이 넘었다. 아버지는 그걸 무척 안타까워 하셨는데 마침 스님께서 조상이 배고프다는 말을 하니 그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던 거다. 제사밥을 못얻어 드셨으니 조상님께서 얼마나 배고프셨겠는가! 우리 아버지는 또 얼마나 죄스러웠겠는가.

 

그 이후로 명절이나 제사날에 큰집에 가는 대신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냈고, 재미있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애가 생겼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더더욱 조상님을 믿게 되었고, 그렇게 하라고 일러 준 스님도 신뢰하게 되었다. 불교를 믿지는 않지만 스님은 믿는, 다소 요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장례 끝나고 친척분들과 삼오제(삼우제)로 할 것인지 사십구제로 할 것인지를 얘기했다. 사십구제는 불교에서 나온 것이고, 기간도 너무 길고 해서 대개는 삼오제로 끝낸다는 장의사분의 얘기를 했더니 고모께서 언짢아 하셨다.

"삼오제만 지내고 니 아버지 내치겠다는 거냐?"

 

그렇게 해서 사십구제로 결정났다.

사실 그런 게 뭐 중요하나?

 

이번 장례를 치르면서 짜증났던 일을 얘기하자면 시리즈로 나올 정도로 얘깃거리가 많다.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라고 짜증나게 만들었나?

떠나신 아버지를 추억하고 애도할만한 틈을 좀처럼 주지 않는 이놈의 장례문화.

 

 

그나저나 정작 이제부터가 문제다.

이제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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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결정

아버지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며칠 사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이젠 입으로 거의 못드실 지경이 됐다.

오늘은 딸꾹질이 몇시간씩 계속됐다.

 

다시 콧줄을 껴서 음식물과 약이 들어가면 또 조금은 나아져서 한동안 가겠지만

그것이 더 아버지에게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맞이할 죽음인데, 그리고 아버지는 아직도 의식이 조금 있는데

죽음의 공포를 연장시키는 것이 잘하는 건지 회의가 들기도 하고.

어차피 조금 나아진다 해도 여전히 아버지는 사지를 움직일 수 없고, 말도 못하고, 의사소통도 안된다.

 

살아있는 사람 마음 편하자고 억지로 붙잡고 있던 그 끈을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이제 놓아드리기로 했다. 저런 아버지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게 어머니로서는 커다란 고통이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깼는데 어머니 모시고 일요일에나 갈 수 있는 인근 산행을 빼먹을 수가 없어 다녀왔다. (다해봐야 한시간 남짓 걸린다.)

산에 가면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게 되는데

어머니께서 이번엔 작심 하신듯 강경하게 콧줄 끼는 걸 반대하셨다.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늘 어머니 말씀 중에 가장 씁슬했던 것.

"니 아버지가 요즘엔 왜 그렇게 이뻐보이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겠다.

앞으로 감당해야할 일들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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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화 수술

 [개같던 냥이들]은 결국 입양이 안됐다. 예전에 비해 냥이 기르는 것도 유행이 좀 됐나보다. 전에는 냥이 관련 사이트에 입양시키겠다는 글을 올리면 연락이 꽤 왔다. 입양글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말이다. 요즘엔 입양시키겠다는 글이 차고 넘친다.

 

딱 하나 대학생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데려가기로 한 날 문자가 왔다. 안되겠다고.

할 수 없이 누나가 키우게 됐다.

 

그 녀석들을 오늘 중성화 수술 시켰다.

 

냥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중성화 수술이 '동물학대'처럼 느껴지기 쉽다. 인간을 위해서 동물을 제 마음대로 하는 거 말이다. 아니면 '왜곡된 사랑'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냥이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중성화수술은 너무나 당연시 된다. 그 수술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어쩌면 도시화가 낳은 비극일 수도 있겠다. 예전처럼 농사짓는 시골에서 냥이를 기른다면 중성화수술이 무슨 필요 있겠는가. 발정기 때가 되면 지가 알아서 나가 짝짓기 하고 왔겠지.

그런데 도시에서 냥이를 풀어놓고 키운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에 가깝다. 일단 대부분의 주택구조가 냥이들이 들락날락 하기 불가능하고, 행여 그렇다 할지라도 자동차에 치어 죽거나 병에 걸릴 위험이 너무 크다.  돌아다니는 냥이들을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다.

 

집냥이의 수명은 평균 10~15년인데 반해 길냥이는 2년 정도밖에 안된다. 너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러다보니 냥이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문단속 철저히 하고, 냥이들 자신도 영역에 집착하는 본성이 있어서 문 열어놔도 밖에 잘 나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발정기'

 

인간은 특이하게도 1년 365일 내내 발정기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발정기가 따로 있다. 대부분의 개, 고양이가 발정기 때 집을 많이 나간다. (특히 수컷)

 

수컷은 다 자라게 되면 스프레이를 하는데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다. 동물의 왕국 같은데서 보면 호랑이가 나무 같은 곳에 꼬리를 치켜들고 분비물을 뿜어낸다. 소변을 보는 것과는 별도로 지독한 냄새를 뿜어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다. 그걸 냥이가 집안에서 한다고 생각해 보라. 난 직접 맡아 본 적은 없는데 사람들 말에 따르면 엄청나다고 한다. 즉 절대 집안에서 같이 지낼 수가 없다고 한다.

 

암컷은 스프레이는 안하지만 발정기 때 울어대는 게 장난이 아니다. 발정기는 일년에 크게 두번 작게 대여섯 번 정도 온다. 그 때는 단순히 크게 우는 게 아니라 괴기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소리를 낸다. 같이 사는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웃에게도 피해가 되고, 냥이들 자신도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때때마다 짝지어줄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짝짓기를 해준다 하더라도 정해진 기간(열흘 정도) 내내 우는 게 멈추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기른 콩콩이를 수술시키고 나서 '정말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수컷 수술은 비교적 간단한 편이지만 암컷은 배를 가르고 난소와 자궁을 모두 제거하는 큰 수술이다. 힘들어하는 콩콩이를 보며 같이 너무 힘들었다. 콩콩이가 낳은 꼬맹이도 나중에 이 수술을 시켜야 할지 회의가 들 정도였지만 결국 꼬맹이도 수술 시켰다. 두번 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녀석들을 안스럽게 쓰다듬어 주다가 심하게 물렸다. 그래도 그러고 나니 약간은 덜 미안하더만.

 

개같은 냥이들은 수컷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암컷이었다. 냥이는 암수구별이 참 어렵다.

이 녀석들은 콩콩이나 꼬맹이 때에 비해 회복이 느려 애간장을 태웠다. 먹지를 않아서 영양제도 두번씩 놓아 주었다. 다행히 이젠 사료도 잘 먹는다.

 

냥이들은 주로 냄새로 상대방을 구별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고 나면 서로를 못알아 본다. 소독약 냄새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큰 수술을 받고 안그래도 죽겠는데 생판 모르는 냥이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꼴이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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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모델?

가게 문 닫고 내 방으로 올라오면 나비가 내 옆에 온다.

가끔 노트북을 가져오면 약간의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몇 장.

 


내 컴터 바탕화면은 나비다.

마치 자기 모습을 보고 있는 듯.

 

여기서 퀴즈 하나!

- 나비는 자신이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을까? (답은 제일 아래에)



뭔가에 기대는 걸 좋아하는 게으른 나비. 그러니까 살이 찌지.

 

퀴즈 정답)

알아 볼 수 없다.

이런 걸 '자아가 있다, 없다'로 말을 하는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동물은 그리 많지가 않다. 개나 고양이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대개 아무 반응이 없고, 가끔은 낯선 상대인 줄 알고 적대시 한다.

 

원숭이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난리가 난다. (당연하지. 생전 처음 보는 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니)

돌고래나 영장류 중에서도 지능이 높은 침팬지 정도만이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본다고 한다.

 

 



 나비와 나의 사진이 실렸다. 교차로가 단순히 사고 파는 내용을 탈피해서 지역 정보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직접 찾아와서 이것 저것 묻고 갔다.

나의 상반신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기에 셀카를 했는데, 나비도 없이 혼자 쌩쑈하려니 무지 웃기더만. (결국 이 사진은 안실렸지만)

내 방에 있는 영화포스터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보는데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 ^^



생전 안보던 교차로를 집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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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하다!!

요즘 블로그에 잘 안들어 왔다.

 



프로젝터를 장만했다.

아는 게 없어서 인터넷을 뒤져 프로젝터에 관한 사이트들을 수없이 들락 거리고 이것저것 검색하고 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만원짜리라면 그냥 지르겠지만 한두푼 하는 게 아니라서.

 

상용 프로젝터는 가정용이라해도 백몇십만원 하지만 내가 산 것은 자작 프로젝터(컴퓨터로 치면 조립PC 같은 거다) 69만원.

 

스크린을 따로 구입하여 설치하고 자리배치 하는데 꽤 머리를 굴려야 했다.

여러 번 시행착오 결과 셋팅된 모습은

 

원래 생각한 위치는 여기가 아닌데 스크린이 너무 무거워 천장에 달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벽에 못질을 했다. 영화 볼 때만 스크린을 내린다.

 

어제 용산에 케이블 사러 갔다가 산 불후의 명작 '지구를 지켜라' 요즘 인터넷에서 영화를 다운받아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런 좋은 작품은 정품을 사주고 싶었다. (병구가 외계인의 교신을 막으려고 준비한 신경차단 물질 '물파스'를 꺼내는 장면)

 

그런데 이렇게 스크린만 보여주면 이게 얼마만한 화면크기인지 보여줄 수 없어서 내가 들어갔다.



내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 ^^

노트북에 연결해서 다운받은 영화를 볼 수도 있다.


 

프로젝터 자리잡는 게 가장 골치거리 였다. 천장에 달면 가장 좋지만 다는 과정도 만만치 않은데다 얇은 합판으로 된 천장이 버텨주기에는 프로젝터가 너무 무겁다.

그렇다고 방 한복판에 두면 방이 너무 엉망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굴린 잔머리의 결과는

'이동식'

 

잡동사니를 넣어둔 플라스틱 박스에 바퀴가 달려있어 이걸 이용했다. 평소에는 벽쪽에 붙여놓고, 영화 볼 때만 당겨서 꺼낸다.


비싼 상용 프로젝터는 불을 켜놓고도 볼 수 있지만 자플은 밝기가 약해 불을 꺼야 보인다.

난 어차피 TV로 영화 볼 때도 불을 끄기 때문에 상관없다.

이게 영화 볼 때의 자세다. (물론 연출이지. 불 키고는 못본다니까^^)

누나네서 쓸모 없게된 소파를 가져왔는데 나비가 무지 좋아한다. 나비와 같이 앉기에는 좀 좁은데 그래도 같이 이렇게 있으면 흐믓하다.

 

어렸을 때부터 난 화면 크기에 좀 집착하는 편이었다. 영화관에 가서도 가능하면 앞자리로 달라고 했다. 돈 많은 사람이야 대형 TV를 사겠지만 난 돈이 많다해도 프로젝터를 이용할 것이다. TV는 커봐야 40~50인치이고 값도 몇백만원 한다. (60인치 LCD TV는 1500만원 정도 하더만) 난 지금 대략 90인치 정도로 보고 있다. (스크린은 100인치 짜리)

 

소리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어차피 아버지가 누워계신 동안엔 밤 늦게 가게문을 닫고 나서야 내방에 가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그 시간에 볼륨을 올릴 수도 없어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는다. 그러니 5.1채널로 그럴듯한 사운드 구축해봐야 그림의 떡이다. 돈도 제법 들고 말이다.

 

현재는 그냥 쓰고 있던 엠프(이것도 누나네서 안쓰고 있는 걸 가져 온 것)에 연결하고, 컴터용 우퍼스피커를 추가 연결해서 5.1채널은 아니지만 앞뒤좌우 써라운드는 된다.

 

내가 만일 현재의 이 상황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홈씨어터에 욕심을 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예전엔 한달에 서너번 정도는 영화관에 갔고,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게 좋았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재미 붙일만한 것이 영화밖에 없다보니 이번에 일을 저질렀다. 쿄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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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생활철학

여든이 다 되신 이모부께서 예전에 아버지 보여드리라고 주신 A4용지 한장에 담긴 글.

정리하다 나왔는데 그냥 버리려니 아쉬워서...

내용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

 

 

노인의 생활철학

 

1. 젊어서 돌보지 않은 몸, 늦었다면 지금부터 확실히 관리하여 아프다 소리 마소.

2. 늙으면 설치지를 말고, 미움 살 소리 군소릴랑 말고, 그저 남의 일에 칭찬만 하소.

3. 묻거들랑 가르쳐주되, 알면서도 모르는 체 어수룩하소.

4. 모든 일에 이기려 하지 말고, 져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이, 원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5. 돈,돈,돈의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해도,

   죽으면 가져 갈 수 없는 거라오. 죽기 전에 많이 베풀고 덕을 쌓으시구려.

   그러나 돈은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고 계시구려.

   돈이 있음으로써, 나를 돌보고 받들어 모셔 준 다오.

6. 왕년의 일일랑 다 잊고, 잘 난 체 자랑이랑 하지를 마소.

7. 내 자식 내 손자와 이웃 누구에게도, 존경받는 좋은 늙은이로 사시구려.

8. 멍청해도 안 되오. 그러기 위해 한 가지 취미라도 갖고, 즐겁게 밝게 사시구려.

9. 항상 신변을 깨끗이 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멋있게 건강하게 사시구려.

10. 생각을 깊게, 마음은 원만하게, 화를 내지 말 것이며,

    말을 조심하면 오래 살 수 있으리라.

 

 



1. 환갑(61)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 부재중이라 하소.

2. 고희(70)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이르다 하소.

3. 희수(77)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지금부터 생을 즐긴다 하소.

4. 산수(80)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이래도 아직 쓸모가 있다고 하소.

5. 미수(88)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쌀을 좀 더 축내고 간다고 하소.

6. 졸수(90)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마라 하소.

7. 백수(99)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때를 보아 내 발로 간다고 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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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본다고 없어지나

뻐꾸기님의 특정한 글은 아니고 [공장의사 일기] 에 관련된 글.

 

다른 다큐를 보면서 그런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칠레 전투'를 보면서는 정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젠 힘든 것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칠레 전투가 워낙 속상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그 즈음 힘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게다.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그렇다고 화학이나 화공에 대해 물어보지 마시라. 쥐뿔도 모른다.) 화공과 출신 상당수가 그렇듯 공장에 들어갔다. 내가 있던 부서는 우리 회사 제품을 쓰고 있는 다른 공장에 갈 일이 무척 많았다. 포항제철이나 삼미특수강, 현대 자동차 등 작업조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곳도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정말 열악한 환경의 작업장들이었다. 난 아직도 어쩌다 쇳가루 냄새를 맡으면 그 때 생각이 난다.  어설프게나마 '노동자성'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나 자신이 물론 노동자였고,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뒤늦게 맑스에 반한 나에게 '노동자'란 말은 최소한 그 당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였다. 보는 월간지도 '말'에서 '길'로 바뀌었다. "너 같은 녀석은 직장생활 6개월 이상 못할거야"라는 친구들 말과는 달리 2년반을 다녔다. 직장생활 자체는 별로 힘든 것이 없었는데 각 공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와는 상관없다. 흔히들 하는 고민 "이렇게 평생?" 뭐 그런 거였다.)


관리직인 내가 우리공장의 생산직 사원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도 무척 힘들었고,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과 대면하는 것은 더 복잡했다. 다른 공장의 관리직도 상대하고 생산직도 상대하는데 우리 회사의 이익과 상대편 공장 노동자의 이익이 (또는 상대공장 관리직과 생산직의 이익이) 서로 꼭 부합하는 관계가 아닌지라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제일 괴로운 건 이것저것 떠나서 "어떻게 이런 데서 일을 하냐?"라고 느껴질 때다. 환기시설이 엉망인 곳에서 그 많은 분진을 잘난 3M 마스크 하나로 막아내고(나도 써봐서 알지만 분진을 막아주기엔 형편없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을 뿐이지) 소음은 또 얼마나 심한데...  환풍기 두어개만 틀어놓고 도장을 하는 곳은 페인트 냄새에 취한다. 휘발성 용제 때문에 아마도 애들이 본드 흡입할 때의 효과 비슷한 게 생기지 않을까 싶다.

 

 

뻐꾸기님의 공장의사일기를 보다 보면 그 때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 때 생각이 안나더라도 그냥 내용 자체가 힘든 경우도 많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때도 있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 "힘든 것 이젠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 "어, 이 생각 언젠가도 했던 것 같은데"

    => "그래, 칠레 전투!"

 

그러던 즈음 신문에서 9월 11일이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진 날이라는 칼럼을 봤다. 칠레전투가 바로 그 내용이다. 1부 마지막에 쿠데타 군이 카메라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리고 카메라가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카메라맨이 총에 맞고 죽은 것이다. (미국의 사악함은 정말 종류도 다양하고 끝도 없다.)

 

그래도 내가 공장에 다니던 시절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그 이전에 비해서나 현재에 비해서 꽤 나은 편이었다. 일단 해고의 불안에 떠는 일이 별로 없었고, 비정규직 문제도 없었다.(있기야 했겠지) 고생한만큼은 아니지만 임금도 그리 형편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 때도 대기업 하청 노동자의 처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했고,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러고 어떻게 사나"하고 안스러워 하기도 했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더 나아지기는커녕 비정규직의 삶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고, 전선이 확실했던 그 당시에 비해 이젠 피아의 식별 문제도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밥.꽃.양>을 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만 해도, 그게 극히 일부노조만의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억지로 믿어보려 했는데...

 

하여튼 2005년, 내 상황도 우울하고, 대한민국도 우울하고, 참 엿같다.

칠레전투 이후로도 속상한 다큐를 계속 보듯, 공장의사 일기도 계속 보게 되겠지. 가끔은 꿍얼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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