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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식?

이 모든 일은 한 혼동에서 시작되었다. 검지손가락과 약손가락의 혼동으로. ‘열린 공부방’을 친 사람은 ‘열린 공부방’을 치지 않았고 ‘열린 공부방’을 치지 않은 사람은 ‘열린 공부방’을 쳤다. 이상을, 더욱이 김 연수를 흉내낼 생각은 전혀 없는데 결국 흉내내고 말았다.

 

화면에 뜬 문구는 ‘열릴 공부방’이었다. 며칠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럴듯해서 그냥 두었다. 내가 진정 치려고 했던 문구가 ‘열린 공부방’이었는지 아니면 ‘열릴 공부방’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이런 복잡한 물음 그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키보드에 올려진 열손가락 중에서 왼손의 약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검지손가락에 앞서 키보드를 눌렀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오식일 수도 있단 말이다.

 

파우스트의 <헌사>에 등장하는 ‘Leid’가 ‘Lied’인지, 아니면 ‘Lied’가 ‘Leid’인지 구별할 수 없다. 원래는 ‘Lied’였었는데 인쇄판을 뜨는 과정에서 <i> 와 <e>가 도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그 오식이 그럴듯해서 그냥 두었다는 것.

 

왜 ‘열릴 공부방’이 되었는지 그 바탕을 파 헤쳐 볼 순 없지만, 아무튼 이 문구는 나름대로 나의 게으름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비교적 꾸준하게 진보넷에 포스팅를 하게 되었다. 무슨 약속이나 지키듯이. 어쩌면 ‘Leid’와 ‘Lied’는, 우리 생각에 앞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통로를 통해서 이미 내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릴’과 ‘열린’이 문법의 엄연함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듯이.

 

내가 글을 쓰는 것인지, 아니면 글이 나를 찾아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글이 손님으로 나에게 오는지, 아니면 내가 글의 손님이 되는지. 내가 내 자신이 아니라 단지 내 자신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의 손님일 뿐이 아닌지. 그리고 손님이 주인행세하게 내버려두는 그 무엇은 도대체 무엇인지. ‘열린 공부방’을 키보드에 내리치는 동시에 ‘열린 공부방’을 내리치지 않는 나와 나 사이에 진실이 있을 것 같다.

 

한밤에 찾아온 글을 깨어나 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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