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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를 놓고 이상야릇한 대립구도가 빚어졌다. 애기했다시피 난 이 대립구도에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없다.
난 처음부터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명제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1. 공지영의 <의자놀이>는 진보가 말하는 “배제 서사”의 발전형이다.
르포하면 얼른 생각나는 책이 있다. 귄터 발라프의 <가장 낮은 곳>이다. 이런 책이다.
“『가장 낮은 곳 Ganz unten』은 귄터 발라프 Günter Wallraff가 1983년 3월부터 2년 동안 국적과 신분을 위장하고 터키인 노동자, 알리(레벤트 시니르리오글루)로 살면서 독일 사회와 노동 현장에서 겪은 차별과 착취에 관한 체험르포이다. 1985년 첫 출판 된 이 책은 지금까지 독일어판으로만 35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으며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 출판 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1) 르포 형식의 이 책은 13장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장마다 발라프는 자신의 체험 보고를 묘사하고 다른 동료들이 겪은 체험도 함께 끼워 넣으며 이야기 속의 이야기나 대화체 형식으로 표현하였다.”(서정일(한국외대), 변장과 위장을 통한 사회 비판과 폭로 - 귄터 발라프의 르포 『가장 낮은 곳』, http://brecht.german.or.kr/jungbo.net/Hwizard/contents/ jahrbuecher/22/3-2%EC%84%9C%EC%A0%95%EC%9D%BC.pdf)
이 르포는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폭로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귄터 발라프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라프 르포의 핵심은 [몸소]체험이다. 근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실을 인식 저편의 즉자(an sich)로 규정하고 그걸 꾀를 사용하여 고스란히 취하려는 직관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정신현상학 서론)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헤겔이 행한 비판의 논지는 현실이란 인식 저편이 아니라 대상과 인식이 항상 어우러져 있는 총체성(Totalität)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수고하여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은 ‘까 발라진 팩트’(factum brutum)들이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은 그런 것들을 주워 모아 [인과성에 따라] 엮어 꿰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이란 수없이 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문이란 그런 “원들의 원”(Kreis von Kreisen)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 철학의 정점은 시스템이 아니라 엔치클로페디아이다.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가 처한 현실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탁월한 사람이 몸소(authentisch), 원천에 가서 (originell) 찍어 올리는 factum brutum이 아니다. 이런 총체성들이 현존하는 양식은 자료다. 수많은 신문기사, 법원판결, 병원기록, 경찰서 기록, 이주노동자외국인단체 상근자의 진술, 외국인의 이주노동자의 일기 등등 널리 펼쳐져 있다. 이 걸 “원들의 원”으로 만드는 것이 ‘외국인 이주노동자 현실’의 진리다. 여기에 수고가 있다. 역사를 학문으로 만드는 첫 마당에 이런 수고가 있었다. 진리는 찍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노동의 고삐를 채워”(“ἐπιπόνως”) 수많은 자료를 “탐색하는”(“ηὑρίσκετο”) 과정의 결과였다. (“ἐπιπόνως δὲ ηὑρίσκετο”,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2장).
“[몸소]체험”은 진짜 수고하는 척 한다. 모습뿐만 아니라 말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들여 변장하고 위장하여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찍어 올리지만 이건 "개념의 노동"(Arbeit des Begriffs)이 결여된 놀이에 가까운 것일 뿐이다.
공지영과 휴머니스트사의 <의자놀이>가 최소한 이런 맥락에서 싹수가 있는 것이고 공지영의 “나 고생 했어”는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되는 것이다.
2. 쌍용차 해법을 두고 공지영/휴머니스트사식 르포와 김기원식 학문하기 사이에 진검승부가 있어야 한다.
김기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 “공지영의 ‘의자놀이’와 쌍용차의 해법”에서 하종강으로 매개된 공지영과 이선옥간의 대립을 빗나간 논란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립은 자연 소멸되든지 양자가 소통하든지 해서 암튼 해소될 것이다.
맞다. 쌍용차 해법이 문제다.
이걸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첫째, 경제학 문제다.
우선 경제학이란 게 뭔지 논쟁해야 한다. 경제학이 수학인지 아니면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달려있는 철학이고 정치인지, 다시 말해서 정치경제학인지 사투해야 한다. 실존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정치경제학이 폐기처분된 후 경제학은 수학이 되었다. 근데 그게 가져다 준 게 뭔가? 세계를 말아먹는 금융위기가 아닌가? 정확한 수학에 기댄 경제학이 왜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하는가? 수학에 기댄다는 게 자본에 기댄 것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였나?
둘째, 학문하기 문제다.
여기 진보넷 바깥블로그 <Social and Material>의 heesang님은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기”를 권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학자인가? 수고하여 현실세계의 ‘총체성’들을 “원들의 원”으로 만든 학자다. 10년 이상 별 볼일 없는 상업편지까지 검토해 가면서 자본론을 집필한 학자다. 어찌 보면 공지영이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고 있다. 현실을 직접 찍어주는 뭔가에 의존하지 않고 ‘총체성’으로 널려있는 자료들을 최소한 한 곳에 모은 것이다. 정치경제학 싹수가 있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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