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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0810120542
샌델이 박원순과 쌍용차 분향소를 방문한 까닭은? (프레시안, 이병창 동아대학교 명예교수, 2012-08-10 오후 5:30:38)
[프레시안 books]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
얼마 전 마이클 샌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합동 분향소에 들러 분향했다는 사실이다. 샌델의 철학적 사유의 핵심에는 사회란 공동체적인 연대 의식 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공동체주의가 있다. 그러니 그가 한국 사회의 사회적 연대가 해체된 결과 일어난 해고 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사건에 공감했다는 것은 충분하게 이해된다. 그런데 누구나 외국 방문 기간에는 여러 가지로 행동이 제약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가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어쩌면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주변적인 사건에 직접 행동으로 참가했다니!
이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철학자들은 원래 자신의 삶과 철학을 일치시키기 위해 고투해 왔다. 샌델 역시 그런 철학자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데 내게 한 가지 의문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왜 그가 박원순 시장을 동반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은 다행하게도 이번에 나온 그의 책을 읽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풀려졌다.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2010년 번역된 이후 국내에 그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왔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강명신 옮김, 동녘 펴냄), <왜 도덕인가>(안진환·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에 이어서 이번에 다시 <민주주의의 불만>(안규남 옮김, 동녘 펴냄)이라는 책이 탁월한 번역가 안규남에 의해 번역되었다.
사실 정치학을 철학적 기초 위에 세우려는 의도에서 철학적인 문제에 골몰하기는 하지만 샌델의 본령은 역시 현실 정치를 개혁하려는 이상주의적인 정치학의 영역에 있다. 기왕에 번역된 책들이 정의와 도덕이라는 철학적인 기초를 논하는 책이라고 한다면, 이번에 번역된 <민주주의의 불만>은 미국 사회의 현실적인 정치적 개혁을 논하는, 어쩌면 샌델의 진면목을 드러내 주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쓰인 시기를 가지고 본다면 이 책은 다른 책들보다 선행하는 책이다. 이 책은 그가 1989년에 노스웨스턴 대학 로스쿨에서 했던 로젠탈 재단 강좌 즉 '법과 정치의 이론 : 자유주의적 전통과 공화주의적 전통' 강좌의 내용을 모아 1996년 출판한 책이다. 샌델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 해당하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년)에서 존 롤스의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을 비판하고 나서, 그 자신의 공화주의적인 관점을 실제 미국의 정치적 현실에 적용하면서 <민주주의의 불만>을 썼으니 이 책은 그의 청년기 열정을 드러내주는 책이라도 하겠다.
이번 책이 미국의 현실적 정치를 개혁하려는 과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라 그런지 샌델은 이 책에서 미국의 역사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그는 미국의 정치 또는 법의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구체적인 일화들을 하나하나 끌어낸다. 이렇게 일화를 끌어내는 그의 능력을 보면 기왕에 번역된 책에서 보여주었던 풍부한 예화의 정신은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정치학에서의 대표적인 논적인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을 두 기둥으로 하여 미국의 역사를 그려내려 한다. 그는 미국 초기 건국의 시기에 공화주의적인 입장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따져 보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자유주의가 승리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마침내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가 지금 커다란 위기에 부딪히고 있음을 경고한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덧 미국 민주주의의 투쟁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전개된다.
그러면 이 책의 근본 입장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샌델은 1930년대 세계 공황 이후 미국이 경제적으로 팽창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미국 사회는 '절차적 공화정'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개인의 권리 의식과 자유로운 선택 의식이 확립되었으며 국가는 어떤 종교적, 문화적, 공동체적인 가치와 단절하여 중립적으로 되었다.
국가는 이제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통해 결정된 내용만을 집행하는 도구가 된다. 샌델은 절차적 공화정이 확립되는 과정이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권력이 비대화되는 과정과 맞물리고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쉽게 말하자면 사회가 너무나 거대해졌기에 전통적인 자치 공동체가 파괴되니 남은 것은 고립된 개인과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샌델은 국제적으로 본다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국내적으로 본다면 1970년대 자원 민족주의 이후 경제적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이런 절차적 공화정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불만은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서 경제적인 권력이 세계적인 규모로 팽창하게 되면서 이제는 거의 위기적인 증상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 시민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확립된 절차적 공화정 즉 미국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 시민들이 느끼는 민주주의의 불만은 무엇인가? 그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하나는 시민들이 이제 미국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민주주의적인 절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미국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샌델은 미국 시민의 도덕적 기초가 붕괴되었다고 한다. 가족은 해체되고 종교적 문화적 공동체, 시민적인 자치는 무너졌으며 그 결과 모든 것은 계약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이 계약은 더 이상 공정하거나 자유롭지 못하며 폭력과 돈, 욕망으로 얼룩진 계약이라는 것이다. 이런 계약의 타락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공동체의 붕괴라는 경험 자체이다. 샌델은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미국 시민들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미국 사회에 대한 샌델의 비판과 개혁에 대한 그의 이상은 마치 2000년 전 플라톤이 공화국을 저술했을 때의 열정을 상기시킨다.
결론에 이르러 샌델은 미국의 정치를 개혁할 새로운 입장은 건국 초기의 공화주의적인 전통을 되살리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화주의적인 전통을 회복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공동체에 내재하는 고유한 가치 즉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공동체를 옹호하는 관점은 공리주의적으로 다수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자유주의자들처럼 다수 대중의 생존권이 자유권의 기초이기 때문도 아니다.
샌델은 공동체 그 자체가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그는 이 가치를 엄밀하게 규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민족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때와 거의 유사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가치는 건강이나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공동체적 가치를 유지 또는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권이나 소유권조차도 일부 희생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그것은 곧 이런 입장이 도덕적 보수주의를 옹호하고 급기야는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를 공화주의 우파라고 명명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자주 소위 개혁적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샌델에게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런 도덕적 보수주의나 국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자 하여 그 대안을 모색했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것이 샌델이 공화주의의 좌파라고 규정한 입장이다. 그는 시민 사회 속에 내재하는 자치의 실험에 주목한다. 자치란 민주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얼핏 개인의 선택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공화주의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참여 민주주의자들이 주로 들고 나오는 것이 이런 주민 자치, 생활 공동체라는 운동이다. 그런데 샌델은 이런 자치가 가능하려면 자치에 참여하는 시민들 사이에 어떤 공동의 가치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같다. 절차적 공화정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은 항상 개인적 이득의 극대화라는 입장에 선다. 따라서 샌델은 자치를 참여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이는 오히려 자치가 추구하는 공동체적 유대에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샌델은 자치의 실험은 공화주의적인 전통이 회복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그는 이런 자치의 실험이 비록 소규모 지역 사회에서 가능하다 하더라도 전 지구적 규모를 가진 경제 권력, 시민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국가 권력에 대항하여 효과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는 자치가 시민의 자치 능력을 회복하는 형성적(formative)인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음에 주목하며 이런 교육이 확산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거대한 국가 규모나 전 지구적 권력에 대항해서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자치의 실험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가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그는 이제 서울시라는, 거의 한 개 국가에 맞먹는 규모의 지역에서 이런 자치의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샌델이 박원순 시장을 동반한 것은 그 자신이 바로 박원순 시장의 실험에 주목하기 때문이 아닐까?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도덕적 보수주의나 국가주의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비록 완전한 해결책을 준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그와 더불어 그리고 박원순 시장과 함께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가 던지는 문제 즉 지구화 시대에 자치적인 공동체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다시금 절박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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