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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 <시차적 관점>,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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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주장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09-04-03 오후 05:57:44)
‘변증법적 유물론’ 퇴출과 연관지어
실패한 혁명의 새로운 길 찾아보기
〈시차적 관점〉슬라보예 지젝 지음·김서영 옮김/마티·3만7000원
 
 
<시차적 관점>은 지은이 슬라보예 지젝이 스스로 ‘대작’이라고 부른 책이다. 한국어판으로 840쪽에 이르는 이 최신작(2006)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이은 네 번째 주저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 그는 이 책에서 앞에 쓴 모든 저작의 문제의식을 종합해 변혁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 보려고 한다. 출판사에서 붙인 한국어판 부제는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인데, 현대 철학의 최전선에서 그가 찾는 것은 철학적 돌파구라는 형식을 빌린 정치적 돌파구다.
 
이 책은 지젝의 다른 어떤 책보다 까다로운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추천글에서 테리 이글턴은 그 까다로움과 관련해 “지젝의 글이 가끔 이해가 안 된다면, 이는 그의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이지 결코 잘난 척해서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런 까다로움은 일차로 이 책의 비체계적 서술에 있다. 지젝은 형식상 3부로 나누어 철학적·과학적·정치적 분석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서로 겹치고 섞인다. 지젝은 철학·종교·문학·영화·예술, 그리고 온갖 일화와 사례를 동원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 나간다. 그리하여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의 접합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콜라주가 된다. 그는 모든 통념·관습·도그마를 분쇄하고자 하고, 더 나아가 도그마에 도전하는 생각들 자체의 맹점을 지적하고 깨뜨리고자 한다. 지젝의 발본적이고 급진적인 사유는 책의 전편에 지뢰처럼 매복해 있다.
 
이 책의 출발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2001년 저작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다. 지젝은 가라타니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쓴다.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기여는 여기서 그친다. 지젝은 가라타니가 제시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발상만 수용할 뿐 그의 나머지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라타니는 그의 책에서 헤겔을 거부하고 칸트를 사유의 거점으로 삼는데, 지젝은 가라타니와는 반대로 칸트를 기각하고 헤겔을 승인한다. 헤겔주의자답게 그는 헤겔의 사유를 갱신하고 진척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정치적 난국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런 노력의 한 양상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재사유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패퇴해 철학사의 한 장으로 축소돼 버린 것이야말로 전망 부재의 오늘 현실을 보여 주는 철학적 사례로 이해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패배는 마르크스주의 혁명, 더 구체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궁극적 실패와 같은 선상에 있는 사건이다. 러시아혁명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도 함께 매장된 것이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퇴출당하고 난 뒤 좌파적 사유에 남은 것이 ‘부정 변증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 ‘부정 변증법’은 진정한 혁명을 사고할 수 없다는 치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부정 변증법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현실)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다.” 부정 변증법만으로는 현실의 극복과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복권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시 러시아 혁명의 긍정적 핵심을 복권시키는 일과 연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과거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발상은 러시아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근본적 이유를 따져 보고 거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있다. 그런 사유를 요약한 말이 ‘시차적 관점’이다. 여기서 ‘시차’(視差, parallax)란 천문학에서 쓰이는 용어를 빌려온 것인바, 관찰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주체가 어떤 위치에서 보는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 바로 시차이며,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낳는 관점이 ‘시차적 관점’이다.
 
지젝이 사례로 제시하는 것이 러시아 10월혁명 때 함께했던 혁명가 레닌과 모더니즘 예술가들의 경우다. 화가 말레비치나 시인 마야콥스키 같은 전위예술가들은 혁명 초기에 열광적으로 레닌의 혁명을 찬양했다. 그러나 이 예술가들은 1920년대 이후, 특히 스탈린 시대에 모두 제거되거나 좌절하고 말았다. 이것은 스탈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스탈린에 앞서 레닌과 전위예술가들 사이에 있었던 근본적인 ‘시차적 관점’의 결과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레닌이 좋아한 것은 고전 예술이었다. 그는 결코 전위예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전위예술가들은 낭만적인 혁명 열정은 좋아했지만, 그 뒤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이 다른 시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 대한 아주 긴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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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한겨레21 2009.04.17 제756호, 로쟈 인터넷 서평꾼)
[출판]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아주 겸손한 학문이에요. 철학은 단지 ‘네가 이것이 참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게 뭐냐?’라는 식으로 질문할 따름이지요. 그런 겸손함이 역설적이지만 철학의 위대성입니다”라고 답한다. 지젝 스스로 자신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은 <시차적 관점>(마티 펴냄)은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에 충실한 책이다. 그는 지금까지 제기해온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로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서 재정의하며 재구성한다.
 
변증법의 전복적 핵심을 간파하는 열쇠
‘시차’란 과학 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하게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각각 한쪽씩 가리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가 시차다. 서로 다른 시각(관점)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시차라고 하면,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신경생물학에서 의식현상과 회백질 더미,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 정신분석학에서 욕망과 충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성적 삽입의 대상이면서 출산의 기관이기도 한 질(바기나)의 시차 등등.
 
지젝은 이 책에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는 시차적 간극들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궁극적으로 변증법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된다. 그가 보기에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를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2001)에서 얻어오지만, 칸트주의를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 달리 헤겔적 사유에 접목시킨다. 그가 보기에 헤겔의 근본적인 교훈은 존재론의 핵심 문제가 ‘현실’이 아니라 ‘현상’이라고 본 데 있다. 흥미롭게도 지젝이 들고 있는 다양한 사례 가운데는 분단 한국의 상징적 장소도 포함돼 있다. 바로 비무장지대 남쪽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다. 이 ‘극장’ 같은 건물에는 ‘스크린’ 같은 창이 설치돼 있고, 북한의 ‘현실’을 전시 가옥들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저녁에는 동시에 불이 켜지는 집들이다. 여기서 현실은 틀에 맞춰진 외양(현상) 그 자체다. 아르헨티나의 사례도 흥미롭다. 2001년 12월 반정부 시위 때, 특히 시위 군중의 표적이 됐던 경제부 장관 카발로는 그를 조롱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던 자신의 가면을 쓰고 집무실에서 탈출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최상의 가면이라는 정신분석적 교훈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순수한 차이는 한 요소와 다른 요소 간의 차이가 아니라 한 요소와 그 자체와의 차이다. 여기서 시차는 서로 대칭적인 두 관점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이 있을 때 그것을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그 첫 번째 관점에서 볼 수 없던 무언가를 채우게 된다. 예컨대 지젝은 마르크스의 시차를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라고 본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레닌을 반복해야 하는 이유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펴냄)에서 지적한 대로,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다. ‘레닌을 반복하라!’는 그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차적 관점은 두 겹의 싸움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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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자본주의 시대, 다시 혁명을 말하다 (서영찬기자ㅣ경향신문, 2009-09-04 17:22:50)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슬라보예 지젝 | 그린비 | 박정수 옮김. 3만5000원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징후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근 20~30년 동안 자본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실질적’으로 흔적을 감췄다는 사실이다. 몇몇 고루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빼곤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반(反)세계화 혹은 반신자유주의라는 용어에 바통을 넘겨준 형국이다. 반세계화는 제국주의를 겨눈다. 노동착취 같은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타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 미국’을 적으로 삼는 경향이 농후하다.
 
저자는 이러한 반세계화를 자본주의의 교묘한 기획으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돌아올 칼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좌파로 분류되는 철학자 상당수도 자본주의 전략의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자의 해부로 드러난다. 자크 랑시에르와 안토니오 네그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개념을 비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향은 ‘후쿠야마적’이다”라는 지젝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유토피아 논의를 압도하는 듯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논의가 자본주의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현실에서 지젝은 ‘혁명’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혁명은 우리가 잃어버린 ‘대의(Cause)’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책은 자본주의의 실질적 비판이 여전히 필요하며 혁명의 중요성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저자는 ‘디카페인화된 혁명’ 즉 ‘혁명 없는 혁명’을 제시하는 어설픈 좌파나 자유주의자의 논리적 무기력함을 예리하게 간파한다. 지젝은 마르크스 사상과 로베스피에르의 ‘폭력적 혁명’을 옹호한다. 폭력은 유혈 충돌이나 물리적 테러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폭력은 단번에 비민주적인 것을 제압할 수 있는 방식에 다름아니다.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하듯이 말이다.
 
자유주의적 관용보다 적대감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책은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한 모색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신이 서있는 자리, 즉 계급적 시선을 거두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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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깊이읽기] ‘청바지 입은 좌파’ 지젝이 본 ‘자본주의 너머’ (중앙, 조우석(문화평론가), 2009.09.05 01:31)  
  
무엇보다 그는 좌파다. 이 책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끔찍한 악몽의 (좌파) 호러 쇼”로 보여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태연히 던진다. 현실사회주의 몰락 20년인 지금 그는 둘 중 하나다. 시대착오적 몽상가이거나, 뭔가 철학적 배경을 가진 희귀종이거나…. 여러모로 보건대 뒤쪽이 맞다. 
   
헤겔·마르크스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비판철학), 포스트모더니즘 까지 철학적 배경을 깔고 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변혁에 경도됐던 80년대 한국사회의 냄새가 난다고 해도 ‘구호꾼 386’과는 다르다. 700여쪽 분량의 논문모음집인 이 책은 ‘지젝 읽기 종합세트’인데, 종래 단행본에서 했던 주장이 좀 더 쉬운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글은 책 제목대로 ‘인간해방의 기획’이라는 대의(cause)에 대한 강력 옹호로 모아진다.

그는 탈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다니엘 벨이나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대척점에 선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체제이자 기본 조건이라는 전제부터 반대하기 때문이다. 도구적 이성 비판에 그치는 프랑크프루트학파나 칼 포퍼, 레비나스 등과도 다르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일단 수용했으며, 지젝의 표현대로 ‘전복적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반면 그는 ‘자본주의 너머’에 대한 구상을 총체적인 대의 복원이라고 본다.

헤겔이 구현했던 의미·진리의 총체성을 21세기에 감히 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학 사무라이’가 분명한 지젝은 당연히 ‘부드러운 디카페인 혁명’을 반대한다.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없는 혁명을 주창하는 가짜혁명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성(靈性)회복이나 생활혁명을 외치는 것은 좀상스러운 ‘뉴에이지 운동’에도 코웃음을 친다. 대신 ‘세상이 망하더라도 진리를 구하라’라고 했던 프랑스혁명의 조타수, 로베스피에르를 찬양한다.

그런 지젝을 어찌 봐야 할까? 서구 지성사의 적자(嫡子)인 정통 철학자인 것은 분명하다. 19세기 신념이 때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동유럽 출신으로 동서의 구분을 뛰어넘은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사족. 지구촌 60억 인구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삶의 지평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래서 ‘왕 돈키호테 지젝’을 읽는 일은 일단 즐겁다. 그러나 TV예능프로의 단골 자막대로 굳이 그를 따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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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해방은 어떻게 이룰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09-09-18 오후 07:27:53)
자본주의 한계 극복엔 혁명적 단결뿐
‘전체주의’ 비난에 변혁 피해선 안돼
‘빈민 민주주의’ 차베스의 실험 주목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최근작이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급진적 견해가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과격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머리말에서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주장을 비웃지만, 지젝이 보기에, 후쿠야마의 테제는 지금의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진보·좌파가 저마다 대안을 이야기하지만, 그 대안이란 것들이 근본적 변혁을 포기한 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하려면 ‘신념의 도약’, 다시 말해 그 상식의 지평에서는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젝이 이 책에서 굳건한 연대의식을 보이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발언은 지젝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대중적 규율을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은 오직 자신의 규율만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아무런 재정적·군사적 수단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지닌 것은 규율과 단결력뿐이다.” 지젝은 이런 ‘스파르타적’ 요소야말로 변혁의 거점이라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군사적 규율 안에는 해방적인 고갱이가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의 어려운 시기에 소비에트연합을 ‘프롤레타리아 스파르타’라고 부른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주장에 당장 ‘전체주의·근본주의 아니냐’는 힐난이 날아들 것이 분명하다. 지젝은 이런 비난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라는 비난이 두려워 근본적 변혁을 회피해서는 진정한 해방의 지평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신념이다. 그런 신념에 입각해서 그는 스스로 ‘악몽의 호러쇼’라고 부르는 이름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진리를 앞세워 폭력과 공포를 휘둘렀던 혁명적 실험들, 곧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러시아혁명과 스탈린 체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참조된다. 이 실험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해방적 고갱이’가 있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지젝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악몽이라 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적극적 검토의 대상으로 세운다. 그가 보기에 나치즘은 단순히 정치적 일탈이나 변종이 아니었다. 나치즘의 핵심 요소들은 좌익 혁명운동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근본적 변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지젝은 벼랑까지 사고를 밀어붙인다. “미친 주장일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연하면,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히틀러는 과격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비겁해서 비난받는다.
 
지젝은 나치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나치 참여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끌어들인다.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 철학이 나치즘과 무관하다거나, 그가 한때 나치였지만 실체를 알고 거리를 두었다거나, 처음부터 나치가 아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변호한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는 나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에 참여했을 때 올바름에 가장 가까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틀렸을 때, 다시 말해 그가 나치에 참여했을 때, 그는 가장 진실에 근접했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통한 근본적 변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 변혁의 내용이 좌익적 변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젝은 일화를 들어 말한다. “1968년 독일 학생운동 대표가 하이데거를 방문했을 때, 하이데거는 자신은 학생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이렇게 파시즘을 뒤집어 해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곧 총체성·규율·집단성 같은 것들이 애초에 파시즘과는 무관한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그것의 본디 창조자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것을 훔쳐내서 자기화한 것이다. ‘원파시즘적’ 요소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일본 파시즘의 원형으로 묘사되는 ‘죽음을 초월한 사무라이 정신’도 파시즘과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파시즘적 군사주의의 일환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입장의 구성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지도자라는 범주도 “대의를 향한 열광을 촉발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그는 말한다. 파시즘 운동의 특수한 접합이 이 모든 것들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비틀었을 뿐이다.
   
지젝은 이런 검토 위에서 과거 혁명들이 수행했던 것들, 다시 말해, 진리의 정치, 당-국가-지도자 정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시 과감하게 실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지젝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목한다. 차베스의 정치는 여러 가지 약점과 결점이 있지만, ‘자기 몫이 없는 자들’ 곧 빈민들과의 특권적 연대라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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