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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5
    단편과 테제(2009/8/18-24)
    redbrigade

단편과 테제(2009/8/18-24)

  • 등록일
    2009/08/25 10:54
  • 수정일
    2009/08/25 10:54

- 조정환에 의하면 문제는 '조직화'가 부재하니까, 조직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미 네트워크 조직이 있으니까 새로운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미네르바의촛불] p. 274). 앞의 '조직화'와 뒤의 조직화는 다른 의미다. 상당히 진일보된 관점임에 틀림없다. 이 관점을 일단 수용하고 나면 이제 남은 일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네트워크 조직화를 급진적으로 일구어낼 인식론적, 존재론적 정당성을 발굴하고, 그를 통해 직접행동을 촉발하는 것이며, 한편에서는 기존의 네트워크에 이러한 직접행동을 강령화하면서 실물 수준에서 각 노드들(nods)에 활력을 흘려 보내는 것이 병행되어야 하겠다. 어디서 이에 대한 최신의 메뉴얼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싸빠띠스따? 시애틀? 프랑스 반CPE투쟁? 우리의 촛불들? 이 모두? 아니면 전혀 새로운 것?

 

- '촛불조직화'라는 대의는 촛불 다중 내부와 그 내부로 끊임없이 진입을 시도하는 지식인-지도부들이라는 양방향 화살표로 대변될 수 있다. 이 양방향 화살표는 필연적으로 벡터 합력 제로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또한 비극적인 것이고 말이다. 사실 이 합력을 제로로 만드는 것은 다중 쪽이 아니다. 이 지식인-지도부들의 둔감한 정세판단력과 조직화(Organisation: 이는 작은 조직들을 의미하는 organs와는 다른 의미로 난 쓸 것이다) 가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주범이다.

다중은 이들을 지도부로 인정할 것이다. 여기에 단서가 달리는데, 오직 '우리 옆에' 있으라는 것이다. 즉 '함께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도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리딩'하고자 하며, 전체를 유기체로 만들려고 하고, 절합(articulation)이 아니라 통합(unification)하려고 한다. 그것이 사단이다. 옆에 있으면서 부르면 지도력(오히려 전문성)을 발휘하라는데 자꾸 선을 넘는다. 조언을 하지 않고 명령한다. 입으로는 동지를 말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 뽄새는 상전(상집?)이다. 이들은 촛불조직화의 그 조직을 organs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대문자 Organization으로 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의 무능력이고, 그들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 '운명' 자체가 운동의 질곡이 되고 있는 상황, 그것이 현재 한국사회 운동의 현실이다.

 

- MB정부의 분열증시작-김대중 서거: 내 생각에 여기서 부터다. 중요한 것은 이 분열의 탈주선이 정국주도권의 재탈취 과정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 정치의 향배는 촛불로부터 시작된 다중주도권이 저들에게로 넘어 가는 반경이 큰 전환국면이라 하겠다.

 

-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충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 다중을 계급계념만으로 즉 공시적으로만 분류하는 것은 반드시 편벽한 결과를 낼 것이다. 다중의 변수에는 시간성이 필연적으로 부가되어야 한다. 척도 없는 영원성을 기반으로 하고서야 다중의 표현이 가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다중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함께 고려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활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이 정당화 과정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시간, 그리고 스피노자의 기호에서 직관, 지복으로의 시간에 의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할 수 있음’(can)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역량(potentia)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can이 must로부터 나오진 않는다는 게다. 오히려 전자가 후자를 포괄하며 후자는 전자의 부정적 효과 안에서 긍정될 뿐이다.

 

-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방벽에 막혀 왜곡되었다. 그런데 이명박의 끝물 신자유주의는 전세계적인 공황에 의해 폭력화되었다.

 

- 이제 더 중요한 것은 플라톤에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반대의 꼬리를 붙잡고 플라톤의 위대함을 재전유하는 것. 이로써 플라톤 자신뿐만 아니라 중세 전체가 이제 머리로 서기를 그만두고 두 발로 걷게 될 것이다.

 

- 한국 트로츠키주의 진영의 기관지라할 수 있는 [레프트21]에 흥미로운 주장이 실렸다. 옮겨본다. “따라서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에 가해지는 보수적 압력에 맞서고 이를 상쇄하기 위한 독립적 움직임이 중요하다. 이는 현장노동자들의 지지와 행동을 조직하는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 현장노동자와 투사들의 네트워크 ....” 그런데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은 이런 네트워크 건설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사회주의자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 모두 개입해야 하고 두 투쟁을 연결하여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 함께 연대해서 싸울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와 조직을 발전시켜야 한다.” 네트워크의 필요성에서 시작하여 정치조직으로, 연대에서 개입과 운동을 발전시켜야 하는 선도적 역할로. 흔들리는 젊은 사회주의자들. 이들이 비로소 언급한 바, 후자의 요소들의 가치를 과평가하는 것을 그치고, 전자의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긍정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광기는 이성의 넓적다리에서 태어난다(제우스와 디오니소스). 광기는 그 추종자들에게 살해당하지만 끊임 없이 재생한다(디오니소스와 여신도들). 하지만 광기가 태어난 자리에 상흔을 안고 있는 이성은 끝내 감염되고 미치며 스스로를 혐오하면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며, 동시에 현대의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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