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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에 대한 내 코멘트

구르는돌님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꼭 사서 봐야할 이유.] 에 관련된 글.

 

 

 

 

현재 알라딘에서 <삼성을 생각한다> 출간 기념으로 "삼성,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는 이름으로 이벤트를 진행중이다. "삼성의 공과를 당신에게 묻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생각을 간단한 댓글로 올리면 되는 이벤트인데, 아래는 거기에 내가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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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TV에서 김용철 변호사 관련 뉴스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보시던 식당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저 놈 아주 나쁜 놈이야, 괜히 삼성 배신해 가지고 주가나 떨어뜨리고..." 그런데 이번에 나온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이 아주머니의 말씀이 정치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떠나 기본적인 사실관계의 측면에서도 완전히 틀린 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그의 양심고백이 있은 후 오히려 삼성의 주가는 더 올랐다고 한다.

물론 이 아주머니에게 사실관계의 정확성을 따져보고 말하라고 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주머니는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를 포함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삼성은 누구로부터도 상처받아서는 안될 말 그대로 '물신'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이 상황에서 물어야 할 것은 김용철 변호사의 발언으로 우리가 공포를 느끼게 되는 감성의 주된 영역이 왜 우리사회의 '무너진 도덕성'이 아니라 '떨어지는 주가'가 되어버렸는지에 대한 것이다. 시장에서 팔려나갈 우리의 가격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양심, 가치, 도덕, 윤리 쯤이야 시궁창에 처박아도 된다는 우리의 '상식'(Common Sense).

굳이 삼성의 '공'(功)을 말하자면 바로 이 점, 우리 모두에게 도덕과 양심, 그리고 윤리적 관계의 시체 위에 삼성제 가전제품이 딸린 아파트 한 채씩 쥐어주고 '여전히' 식민지적인 착취의 성과물들을 포식(飽食)할 권리를 분양해 줬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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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

 

 

요새 한창 박영균의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와 이진경의 <역사의 공간>을 읽고 있다. 또한 웹서핑 차원에서 이러저런 블로그에 들어가는데 그 중에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블로그도 있다. 의도적으로 이들을 비교해 봐야겠단 생각은 없었지만, 독서의 와중에서보니 이들의 차이점과 교집합이 조금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다. 일단 그 첫번째로 박영균의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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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는 08년 말쯤에 산 책인데, 50페이지쯤 읽다 포기해 버렸었는데 그 새 내 머리가 좀 컸는지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도 되면서 그럭저럭 읽고 있다. <진보평론>등에서 그의 논문을 몇 번 보긴 했는데, 이 책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앞으론 별 두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맑스주의 '정통'의 붕괴라는 이론적 조건에서 마주하게 되는 '탈현대적 맑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 및 수용하면서 맑스 사상 속에서 이러저런 방식으로 왜곡되어 왔던 변증법과 유물론을 저자 나름대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사실 저자는 좌파 이론 진영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Orthodox한 맑스주의를 고수하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포지션의 사람들은 스피노자, 니체 등으로부터 연유하는 탈현대적 맑스주의 비판을 그간 적지 않게 해 왔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이 책은 참 식상한 면이 있다. (박영균의 주장과는 많은 편차가 있긴 하지만) 나름 Orthodox한 맑스주의를 고집한다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자면 이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좀 짜증나는 구석도 있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이들을 두고 농담조로 던진 한 마디가 생각난다. "걔네들은 메이데이날 공장가서 기도나 올리라 그래라."

 

그러나 적어도 박영균은 이런 비판을 들어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는 서론에서 "오늘날 많지 않은, 그렇지만 탁월한 탈현대적인 맑스 철학의 모색이 몇몇 논자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최종적으로 결여하고 잇는 것은 맑스 철학의 근본적인 지반이다. 그것은 맑스 철학의 정체성이 아니라 탈현대적 기획과 흐름들에 정세적으로 묶여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경우, 맑스는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여러 시체들의 얼굴들을 짜깁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지적인 공포를 유발한다. 맑스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를 지적인 공포가 방향을 잃은 담론들의 난무와 지적 진지함에 대한 의욕 상실을 낳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맑스 철학의 '근본'을 옹호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러한 옹호는 맑스주의자로서의 원칙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보여진다. 한편 그는 탈현대적 맑스주의 근저에 있는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편한대로 넘겨짚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보고 평가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의 실천'과 그람시의 '실천의 철학'이라는 철학의 두 계기와 스피노자의 유물론과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이라는 두 계기를 설명하는데, 난 이 부분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힘겹게 읽으며 참 공부 제대로 했다. -_-;; 사실 Orthodox한 맑스주의자들의 글에서 이렇게 성실하게 탈현대적 흐름을 분석한 경우는 처음 본다. 그래서 이 책에 좀 고마웠다.

 

그는 끊임없이 맑스와 알튀세르, 맑스와 그람시, 맑스와 스피노자, 맑스와 들뢰즈를 대면시키고 대질심문한다. 그래서 그가 도출한 결론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포스트적 담론들의 과학 비판과 해체는 윤리학적 문제설정이나 윤리적인 실천을 넘어서지 못하고 적대적 실천의 장으로 집중되는 정치를 해체하는 효과를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2p)는 지적이었다. 이 점은 나도 얼마간 고민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요즘 이러저런 문화평론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공허감 같은 것을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아래 문장에서는 그가 세운 '원칙'이 잘 드러난다.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포스트적 담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어떻게 사람들은 파시즘을 자신의 욕망으로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표상하고 욕망을 그런 식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물질적 토대가 무엇인가'이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 토대의 효과가 어떻게 사람들의 욕망을 채취하고 굴절시키며 지배 권력으로 절합시키는가'를 찾아야 한다. (233p)

 

그러나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그러므로 우리가 근본 변혁적 실천을 모색한다면 그것은 이 토대 중심성과 그 중심성에 의해서 제시되는 현 지배체제의 외부를 극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적대성을 내재하고 있는, 그리하여 자본의 외부를 생성하는 운동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계급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그가 세운 원칙의 타당성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토대중심성에 대한 철학적 의문?) 특히 다음의 문장을 읽고 난 이후로 난 갑자기 이 책의 결론이 예상이 되면서 급 실망 모드로 돌아섰다.

 

우리는 부-자, 부-부의 관계맺음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노/자의 관계맺음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관계맺음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자, 부-부 관계 또한 이런 본질적인 강제력에 의해 그 차이 또한 변형된다. 차이는 적대의 질서를 따라 절합되고 구획된다. 내가 아무리 선한 아버지라도 아들을 대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와 봉건제에서 다르다. 부-자 관계에 의해 노/자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 관계에 의해 부-자 관계는 변형된다. (222p)

 

이런 (내가 보기에는) 황당한 결론을 내기 위해 400페이지 넘는 책을 썼단 말인가? 과연 우리는 부-자, 부-부 관계 없이 살 수 있는가? 난 저자의 결론을 반박하기 위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쓰진 않겠다. 이런 결론을 내기 위해 400페이지를 달려나간 저자에겐 이를 반박하기 위한 실증적, 논리적 반박 모두 무의미하게 들릴것만 같다. 왜냐면 사실 그 자신도 노/자 관계가 왜 우선인지 '증거'를 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탈현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차이의 존재론'과는 다른 맑스의 '모순의 변증법'과 '역사 유물론'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차이의 존재론은 차이 그 자체로 모든 운동을 '생성'으로 일반화하지만 모순은 그렇지 않다. 생성운동은 '구별'이 아니라 '대립'에 있다. 대립을 통해서 포착되는 '모순'은 운동이 하나의 강제적인 힘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존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223p)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이 말 어디에도 그 모순의 중심이 노/자 관계라고 나와 있지 않다.

 

게다가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해방 주체를 찾고 그 존재를 노동자계급으로 설정한 것은 진정한 운동운 불가피하게 강제되었을 때에만 성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라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는 수동적/소극적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불가피하게 강제'되었을 때에만 성립하는 운동을 과연 진정한 운동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이론적 논의 속에는 대중의 자율적 의식화의 가능성, '불가피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운동으로 조직화시킬 가능성에 대해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책의 평론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읽었기 때문에 저자가 제기한 쟁점에 대해 가타부타 따지고 들어갈 여유 또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왜 그는 모순의 담지자를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고, 그 관계를 체현한 존재라면 오히려 그 존재를 존재 가능성을 변화시키는 관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순의 중심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중심되는 모순이 어떤 것인지는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도 변화 가능한 것이고, 모순의 과잉 또는 과소 결정되는 지점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차별화는 노/자의 계열화 속으로 절합되며 이주노동자는 노/자의 계열화 안에서 이중적인 차별화로 강제되며 특이성 자체를 변형한다"(232p)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하간 이 책은 나름 '학습의 기쁨'과 함께 실망도 함께 준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이 현 시점에서 Orthodox한 좌파가 보여줄 수 있는 발전된 논의의 최대치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고마움과 씁쓸함을 함께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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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연대'에 대한 한 우려

'무상급식연대'에 대한 한 우려

 

- 이명박에겐 없지만 박근혜에겐 있는 것을 생각하자 -

 

 

 

 

이명박에겐 없는 것

 

대략 2000년 이후, 정치인이 특정 이념을 내걸고 나서는 것은 매우 촌스러운 짓이 되어버렸다. 대신 모든 정치적 가치, 이념은 '경제'라는 지상명제에 왕좌를 내주고 말았다.

 

그런면에서 이명박은 꽤 세련된 존재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의 입장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고양이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인데, 그래서 경제라는 고양이를 잡기 위해 일견 그와 안어울리게 보이는 뉴딜이란 용어도 쓰고 케인지언이라는 정운찬도 총리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이념도 이념 나름이다. 정치인은 학자가 아니니 보수주의니 근본주의니, 또는 자유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하는 특정이념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지만, 대중에게 지지받을 수 있는 생각의 좌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그것도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이념은 이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전'이라 해야 맞겠지만...) 이것은 정권에 대한 지지기반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작업인데, 이에는 타 정치세력의 동의를 얻어 광범위한 지배블록을 형성하는 것도 포함된다.

 

헌데, 그런면에서 보자면 이명박은 참 촌스럽다. 그는 입만 열면 '선진화'를 부르짓지만 여러모로 구린 면이 많다.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선진화'라는 나름대로의 역사적 비전을 뽐내고 있긴 하지만, 이 비전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 '선진화의 이명박식 실천방식'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존재한다. 말하자면 자기가 볼땐 흑묘백묘인지 몰라도 남이 볼 땐 아전인수라는 거다. 최근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 수정안 반대 의원들을 향해 '보스따라 입장이 바뀐다'고 공격한 것은 전형적인 자기중심성의 발현, 즉 '내 생각만 선진화'라는 식의 주장이다. '선진화'야 말로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보수가 장기집권을 노리는데 가장 훌륭한 브랜드인데, 현 정권의 유딩스러운 자기중심성 때문에 이미지를 깎아먹고 여당의 분열마저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에겐 있는 것

 

이 시점에서 박근혜에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명박이 경제를 '짱'으로 여기는 데에는 '세련'됐지만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한 비전제시에는 촌스러운 반면, 박근혜에게는 이명박의 한계를 넘어설 뭔가가 있는 듯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친박이 현재 사실상 야당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종시 정국에서 수정안 반대파의 최고 골잡이는 누가 뭐래도 정세균이 아니라 박근혜다. 이로써 박근혜는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수사의 민주당 독점권을 빼앗아 왔다. (지금부터는 나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휘됨을 염두해 두시고...) 만약에 여기에 박근혜가 지방선거를 겨냥해 무상급식을 추진해 보겠다는 발언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사실 무상급식은 김문수와 경기도의회가 과도한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여서 그렇지 그렇게 급진적인 공약도 아니다. 실제 다른 시도에선 실시하는 곳도 있고, 원희룡도 무상급식을 받아 안았다.

 

게다가 박근혜는 육영수의 핏줄인 만큼 자신을 '국모'의 이미지로 형성화할 강력한 자원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박근혜가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하진 않겠지만, 만약 그런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이 어린아이들의 밥을 무상으로 챙겨준다? 내가 볼땐 박근혜로서 필승의 카드다. 심지어 박근혜는 지난해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 행사 때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습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 그토록 노력하셨지만, 경제 성장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괜히 한번 해 본 소리가 아니다. 박근혜는 최근 자신의 키워드를 '복지'와 '행복'에 두고, 사회복지기본법 개정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박근혜 복지법'나온다>, 매일경제, 09.12.30) 이로서 박근혜는 유신공주 이미지를 벗고 지역균형발전과 복지국가를 두 축으로 반MB전선의 수장이 될 준비를 끝내놓고 있다. (그래서 이번 세종시 논란에서는 박근혜가 지난번 미디어법 사태에서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무상급식은?

 

박근혜와 무상급식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전적으로 내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전혀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원희룡의 무상급식 공약 발언 이후, 노회찬은 적극적으로 '무상급식연대'를 제안했다. 그 동안 반MB전선의 '내용'을 강조해 온 진보신당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원포인트 연대'가 진보신당으로서는 최악의 수가 될 수 있음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이번 무상급식 논란은 어느 순간부터 문제의 본질인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의 대립이라는 문제를 벗어나 정치인들의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이 상황에서 무상급식 문제를 통해 진보적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매우 허망한 일이 될 것이다. 만약 '무상급식연대'가 성사된다고 한다면 노회찬은 무슨 근거로 서울시장 선거를 완주할 것인가?

 

논리전개를 위해 박근혜 얘기를 주로 했지만 진짜 문제는 박근혜가 아니다. 사실상 이미 무상급식은 진보정당만의 것이 아니다. 원희룡의 말대로 그것은 "따뜻한 보수"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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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에 대한 코멘트 한 가지 더.

구르는돌님의 [이계삼 저,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에 관련된 글.

 

 

교사들은 대개 모범생입니다. 교직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임용고사 제도가 생긴 이후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지만, 교사들은 다채로운 인생체험이 없고, 임용을 위해 몇년간 애써 터득한 기술 말고는 별로 가진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사들의 신분에 대한 자긍심 -- 안도감이라 해야겠지만 -- 은 걱정스러울 만큼 높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다양하고 난해한 존재입니까. 그래서일까요, 교무실에서는 교사의 지도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을 탓하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동병상련의 정들을 나누는가 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사는 스스로가 이미 학교 교육이라는 폭력의 일부임을, 자신의 내면에도 폭력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바탕에서 아이들과 세상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중.고교시절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 '범생'이었지만, 대학 시절 4년 내내 열등생으로, 방황하는 영혼으로 살 수 있었음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임용고사에 탈락하여 패배자의 자리에 서 본 기억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같은 시련을 겪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런 상황을 이미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잇는 아이들의 아픔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50p

 

나는 어차피 교사도 아니고 앞으로 교사가 될 사람도 아니기에 위의 글이 나와는 하등 상관 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슨 글을 읽든지간에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습관 때문에 그저 이게 남 얘기 같지는 않다. 이걸 보고 있자니 괜히 내 학생운동 경험이 생각났다.

 

사실 나 때도 그렇고 지금 학생운동이란 걸 하고 있는 이들은 (교사가 그런 것처럼) 대개가 다 모범생이다. 옛날에는 전문대에서도 학생운동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가끔 언론에 오르내리는 학생운동 집단들은 서울의 몇 개 '명문' 대학에 근거를 둔다. 간혹 지방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지역을 대표한다는 국립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좀 억지스럽게 해석해 보자면 지금의 학생운동은 고딩시절 선생님 말 가장 잘 들었었고 사교육도 받을만큼 받은 얘들이 자신이 받은 혜택을 부정하겠다고 나서는 행동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모범생들이 모여 하는 운동이라는게 강의석처럼 튀는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작정하고 투쟁적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마음맞는 얘들끼리 모여 쿵짝쿵짝 세미나 몇 번 하다가 끝나기 십상이다. 실제로 나는 내 자신이 그런 식의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내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그런 경험을 '운동'의 경험으로 기억(또는 추억)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상처받아 본 적 없을 것처럼 한없이 밝기만 한 후배들을 대하는게 힘들었다. 나는 여태 한번도 내돈 주고 사 신어본적 없는 10만원이 넘는 신발을 예사로 생각하는(가끔 그런 신발을 모으는게 취미라는 얘도 있었다) 얘들도 있었는데, 그런 얘들은 우리의 운동을 이러저러한 소비활동의 하나 쯤으로 생각했던 것만 같다. 그런 아이들과 노동자 농민 철거민의 아픔과 고통에 연대하자고 말하는건 어쩌면 아이티 지진참사에 봉사활동 가자고 말하는 것 정도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얘들 데리고 다니려면 가장 만만한게 그저 세미나 였다. 그러나 세미나에만 몰두하는 것만큼 자폐적인 짓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일에 몇명을 동원했는지로 내 활동을 자족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무슨 영업사원도 아니고....

 

학생운동이 '모범생운동'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즈음에 활동을 빈곤아동 공부방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활동을 너무 평가절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와 나를 규정했던 집단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말을 걸 수 있도록 시선을 외부로 향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외부가 나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도록 문을 열었어야 했다. 한때 내 주변에 진보적인 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이 대학원 진학을 많이 하는 걸 보는데,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얼마간 우리는 '모범생'이라는 정체성을 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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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저,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곧 있으면 신참 교사가 될 석돌이에게 줄 선물로 산 책인데, 선물 주는 사람이 먼저 읽어보고 소감을 말하면서 건내주는게 예의일 것 같아서 어제 밤 1부만 읽어봤다. 2부의 분량이 더 많기에 서평이랍시고 벌써 몇 마디 떠드는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1부 내용만으로도 뭔가 저자의 말에 대답하고 싶어지는게 생겨버렸다.

 

일단 내가 다닌 고등학교 얘기 몇 개부터 하고 시작해야 겠다. 그 학교는 대전 최고 명문 고교였다가 90년대 후반부터 대전 서구, 유성구에 신도심이 활성화되면서 쇠락한 학교이다. 특히나 학교 선생님 중에는 동문들도 꽤 있었는데, 자신들의 잘 나가던 옛날을 생각하면서 찌질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제자들을 구박하길 밥먹듯 했다.

 

그런데 어느날 영어선생이란 놈이 수업시간에 이런 소리를 한다. 자기 반 학생 부모들 중에 대학 졸업한 사람이 2명 밖에 안된다고... 그러니 얘들 수준이 그 모양 아니냐... 저 서구에 XX고, ○○고에 가면 대졸 이상이 한 반에 2/3 이상이다. 내가 이딴 똥통학교에서 얘들을 가르치다니... 어쩌구 저쩌구..

 

얘들 앞에다두고 이런 저질스러운 소리나 해대는 인간을 선생으로 두고 살았던게 우리네 고딩시절이었다. 내가 보통 악몽을 꾸면 그 중 열에 아홉은 고등학교 시절이 배경이다. 모의고사를 보고서 내 라이벌이 나보다 점수가 더 잘 나올까봐 걱정하고 있다던지.... 그런 꿈 꾸고나면 아침부터 기분이 더럽다. 실제 내 고3시절은 그게 병적인 수준이었고,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자살하지 않은게 다행이란 생각도 '아주 가끔' 한다. ㅋㅋㅋㅋ

 

내가 학창시절에 전교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앞의 영어선생과 다른 사람이다)이 했던 소리가 전부다. 그 양반은 한때 전교조 조합원이었는데 탈퇴를 하고 수업시간에 전교조의 '전'자도 못들어 본 얘들한테 전교조 욕을 했다. 전교조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야 하는 얘들 망치는 집단이라고...

 

그 선생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또 있다. 체력장을 했던 날이었는데, 그 다음시간이 영어였다. 체력장에서 검사해야 할 항목이 워낙 많기 때문에 체육선생님은 기록을 적는 일을 대충 몇명 아이들 뽑아서 시켰다. (구체적으로 어느 대학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체력장 점수를 입시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록을 조작하려 했다. 그런데 이 영어선생이란 작자는 대놓고 좋은대학 가고 싶으면 그런 것 쯤은 좀 올려서 적으라고 당당히 말하는 거였다. 내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그건 나쁜일 아니냐고 했더니, 대학가는게 중요하지 그런게 대수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안 좋다. 이런 나에게 이계삼 선생님의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은 내 고교시절을 더욱 서럽게 느끼게 만드는 책이었다.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 줄 수 있는 '전교조 선생님' 한 분만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내가 1학년 말에 문/이과 선택할 때 이과 선택했다가 문과로 바꾸겠다고 했을 때, 그 때 내 담임이 했던 "문과 가봤자 취직할데도 없으니까 이과로 가 임마!"같은 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모의고사를 보기 전 날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힐 듯 해서 잠도 못 자고 날밤을 샜을 때, 내 얘기를 한 마디라도 더 들어주려 하는 사람 덕분에 난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을 텐데... 그 때 내 얘기를 들어준 것은 상담실에 배치되어 있던 대학원생 학교사회복지사 뿐이었다. 아래 구절을 읽으면서 그 기억이 아프게 떠올랐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과 관련하여 엄청난 오해와 왜곡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제 교육의 장(場)은 변인들을 조작하여 프로그래밍화한, 이를테면 파블로프가 개를 가두어놓은 실험상자 같은 것이 되었다. 골방에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어설픈 인생상담은 점점 비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교육받은 전문 상담사가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진행하는 상담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다. 체험학습 -- 체험도 학습하는 것인가 -- 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전문 지도자가 아이들의 체험을 안내하고 조직화한다. 그리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전문적인 '평생교육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공적 영역이건 사적 영역이건, 수없이 교육기관을 전전하며 끝없이 무언가를 배운다.

- 27~8pp

 

내가 학교 상담실을 찾아가서 딱 두번째 만남이 있었을 때, 그 사회복지사는 내게 홀랜드 진로심리검사 용지를 들이밀었다. 내가 미래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긴 했지만, 내가 불안해 했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 때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그 사회복지사 뿐이어서 고맙게 생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난 결국 학교 상담프로그램의 개입 과정에 따라 변화될 '종속변수'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             *             *

 

 

내 고딩때 얘기는 대충 끊고, 책에서 인상깊었던 구절과 이에 대한 간단한 생각들을 정리한다.

 

1부 글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좋은 언어'와 관용의 정신>이었다. 제목은 약간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 글은 논술교육에 관한 글이다.

 

한가지 인상 깊었던 체험은 첨삭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할 무렵에 겪은 일이다. 그때 논제가 대략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생태론적인 대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손에 들어온 첫 답안지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 학생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심층샌태주의로 규정하고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론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었는데, 한창 입시준비에 몰두하고 잇을 수험생이 어떻게 머레이 북친과 그 당시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호지 여사의 책을 읽었을까,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장두장 첨삭을 계속하다가 그 감동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어버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북친과 호지의 입장을 논거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어기 때문이다. 그 학원의 논술강사가 모의고사를 앞두고 수업해준 내용을 천편일률적으로 옮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더 읽다 보니 생태론의 기본적인 가정, 즉 현대사회의 지속불가능성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이나 이해도 없이 SF영화 같은 감각으로 황당한 가설을 늘어놓는 답도 적지 않았다. 나중에는 몹시 짜증이 났고, 이런 답안을 작성한 학생들의 지적 수준마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첨삭을 마치고 답안지를 들고 그 학원 논술실로 가서 답안지를 작성한 학생들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이들은 그학원의 지역 분점인 강남 D학원생들로,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제일 높은 집단이며, 대부분이 이른바 SKY대학 이상으로 진학한다는 거였다. 상당히 놀라웠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 논술교육의 본질을 아아챌 수 있었음에도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다.

- 55~6pp

 

 

논술고사의 파행은 극히 단순한 사실에서 연유한다. 논술고사의 도입 자체가 극히 반교육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기 대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능시험이 도입된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내신-수능-대학별 고사가 대입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내신과 수능의 오랜 갈등, 사교육의 팽창과 공교육의 위축, 수능의 난이도 논란, 내신의 변별력 논란 속에서 상위권 대학은 대체로 수능과 내신을 기본 요건으로 하면서 논술 및 면접 고사로 변별력을 찾게 되었다. 이 속에서 손 안대고코 풀련느 격으로 다양한 학생선발 방식을 개발하지 않고 우수한 학생을 손 쉽게 독점하려는 대학의 욕심이 깔여 있고,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을 독점한 상류층과 어떻게든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보려는 차상위계층간의 쟁투와 상호타협이 깔려있다. 요컨대 논술고사는 대학입시제도를 둘러싼 제 요소, 제 세력들 간의 혈전의 역사가 잉태한 기괴한 사생아이다. 논술고사는 오직 상위 30퍼센트 이내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해(변별력을 얻기 위해) 도입된,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상위 30퍼센트 '인적 자원'의 등급을 감별해내기 위한 기제일 뿐이다.

아무리 대학 입학고사라 하지만, 논술은 중등교육에서 이루어지며 중등교육의 성과를 측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논술이 중등교육으로 담아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담보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변별력' 획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 한국 교육의 현실이 이렇다. 내신에서 수능으로, 수능에서 내신으로, 이제는 논술로, 아이들이 대학 입학을 위해 점령해야 할 각개전투의 고지는 계속 늘어난다. 이제 또 무슨 고지가 새로 솟아오를 것인가.

- 62p

  

그러나 진짜 주목해 봐야할 부분은 다음에 있다.

 

인터넷으로 논술강좌를 들은 한 아이와 대화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사 선생님이, 토론도 그렇고 논술도 그렇고, 중간 지대는 없고 오직 찬/반 두개밖에 없으니깐,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르더라도 일단 어느 한 입장을 정해서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 공격해야 하는 거라고, 어떤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왜'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 답변을 갖춰 놓지 못하면 결국 지고 마는 거라고..." 그 아이는 논술과 토론이 몹시 두렵고 공포마저 느껴지는데, 아마도 강사 선생님이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 64p

 

위와 비슷한 경우가 내게도 있다. 예전에 이와 관련한 포스팅을 올린적이 있는데, 바로 100분토론과 관련해서다. 08년 말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100분토론에서 이를 다룬 것을 인터넷으로 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을 지나가던 다른 공익 얘가 뭐보냐고 묻길래 100분토론 본다고 말해줬다. 그러더니 그 놈이 하는 말. "누가 이겼어요?" 나는 좀 당황하긴 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야, 토론에 이기고 지는게 어딨어? 다 서로 다른 의견 주고받는 건데..."  그러나 그 놈은 또 말한다. "에이,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 놈한테 토론이라는 것은 어떤 합의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대화의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스포츠였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의 내용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란한 말빨과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언사로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청중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기술'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100분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은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우리사회에 부정적인 효과를 만들어낸 면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부정적인 면을 바탕으로 밥그릇 챙긴 대표적인 인물이 진중권이 아닌가 생각도 들고...

 

우리는 이렇게 대화와 토론 조차도 당장의 승자와 패자를 가름해야만 하는 아주 고약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             *             *

 

 

아래도 그냥 인상깊었던 구절.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며, 생과 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의 바깥을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를 살면서 '저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한 개체에게 죽음이란 말하자면, '있음'이 어느 순간 '없음'으로 화(化)하는 것일진대, '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 이 기막한 변화를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생에 집착하고 생을 사랑할 수록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나 또한 저렇게 죽어갈 것이라는 공포가, 함께 자라난다. 결국 이것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 -- 신앙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인간은 지난 수천년간, 종교(宗敎) --으뜸가는 가르침 -- 라는 이름으로 이 신앙의 체계를 일구어왔다. 이것은 생과 사의 신비에 맞닥뜨린, 인간 존재의 가장 치열한 정신활동의 결과물이다. 놀랍게도 세상 모든 종교들은 하나같이 '저 세계'는 '이 세계'의 앞뒤에 잇닿아 있지 않다고 가르쳤다. '저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생산과 노동, 이 모든 억조창생들과의 관계맺음이 결국 '저 세계의 전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영원한 삶은 바로 이 현재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자기가 바로 빵이자 포도주인, 육화된 진리라고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더불어 빵을 떼었고, 그곳이 곧 하늘나라임을 선포했다. 공자는 가장 그리운 모습을 '불빛 아래 둘러앉아 같이 밥을먹는, 대동(大同)의 사회'로 표현했다. 해월 선생은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므로 사람은 곧 밥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밥 한그릇에 세상의 이치가 다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빵과 밥이 부족했던, 이른바 낮은 생산력의 징표가 아니라, 인간의 숙명임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진리에 고개 끄덕인다면, 이제 이런 질문들이 생겨난다. 밥을 위한 노동, 밥을 위한 희생, 밥의 나눔, 거기에 깃드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우정과 사랑, 이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사람이 밥을 위해 살지 않고 휴대폰과 컴퓨터와 자동차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어떤 세상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발전된 세상'이라고 굳게 믿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 70-1pp

 

 

이거 다음 다음 페이지에 어떤 아이가 일기처럼 쓴 글이 인용되어 실려있었는데 대충 내용이 이렇다. 산골마을에 사는 일근이라는 아이가 옆 동네 놀러갔다가 그 동네 춘근이라는 아이랑 싸웠는데 춘근이가 먼저 "야이 씨발놈, 개새끼야, 좆만새끼, 호로자석..." 뭐 이런 욕을 했댄다. 그런데 여기에 대꾸하는 일근이의 욕이라는 것이 고작(??) "야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밤나무야, 옻나무야..." 이었단다. 이걸 보자니 또 생각난게 있었다. 얼마 전 새로 들어온 공익 얘랑 짱게를 먹으러 갔다가 맘에 안다는 공무원 흉을 같이 보고 있었는데, 그 놈이 갑자기 욕이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다들 대가리에 뻐큐를 처박아야 돼"였다. 나는 한편으론 처음들어보는 이 프리스타일 욕에 감탄하고, 그 아이의 뛰어난 '창조력'(??)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그 아이의 눈에 일근이 같은 얘가 눈에 띄었다면 그저 밥맛없는 꺼벙이 쯤으로 여겨졌을까?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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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추가)

 


"(...) 여하튼 '디워' 논란이 상당히 재미있는 소재임은 분명해 보였다. '논객'이라는 신종 검투사들과 '네티즌'이라는 관객들이 펼치는 말들의 전투, 혹은 말들의 향연, 말들의 소용돌이, 의미없는 증오와 분란, 행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는 동의와 깨달음, 나는 인터넷이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268p)

 

"지난 2007년 3월, 택시노동자였던 허세욱 선생이 분신하고서 며칠 뒤 운명했던 날, 내가 사는 지역에서 언제나 해오던 한미FTA 반대 선전전에서 그분이 환히 웃고 있는 영정을 들고 거리에 서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 그러나 그런 애틋한 감상은 서둘러 접어야 했다. 이 자리는 절박한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열명도 되지 않는 우리 대오를 바라보았다. 그날, 허세욱 선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고, 대신 인터넷을 켰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것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고, 대신 방구석에서 인터넷을 하기 때문이다." (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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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잘한다!!!

제목만 보면 손호철을 비꼬는 말처럼 들릴수도 있겠는데, 그런거 절대 아니다.

손호철의 발언들이 너무 에누리 없이 톡톡 쏘는 맛이 있어서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거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면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류의 발언들을 대놓고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난 예전부터 이명박 정부에 맞서는 투쟁을 하려면 이명박 정부보다는 민주당을 두들겨 패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삼국시대에 백제는 왜 망했을까? 고구려에 맞서는 투쟁을 잘 하지 못해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초딩들도 다 안다. 백제는 신라한테 뒷통수 맞아서 망한거다. 반면 신라가 백제를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구려와의 결투가 끝난 뒤 전리품을 나누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 놨다가 백제의 몫을 다 가로채 가버렸다는데 있다.

 

진보는 백제가 될 것인가 신라가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지금 진보의 행태는 고구려와의 싸움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미 백마강에서 삼천궁녀와 풍악을 울리며 니나노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면에서 손호철의 멘트들은, (약간 투박한 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진보의 진짜 적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라는 점을 명확히 해 준다. 그리고 실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신라를 두들겨 패고 있다.

 

손호철은 그 중에서도 정세균을 주요 타겟으로 잡은 듯 하다. 얼마전에 그가 민주당 주최 토론회에서 제출한 글을 참 재밌게 읽었었는데, 이에 대한 민주당 측의 대응, 그리고 그에 대한 손호철의 반박이 참 재밌기도 하고 씁쓸하다.(관련 글) 민주당은 도대체 몇 대를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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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민주당은 한나라당보고 '삽질정권'이라고 욕한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에 대전시장 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전 의원 김원웅은 시장 출마가 거론되는 사람 중에 처음으로 대전-금산-옥천 통합추진을 공약했다. 이에 대해 우리 동네 헬스장 아저씨들은 "그거 빨리 돼야 그린벨트 풀려서 땅값이 오를텐데..."라고 말했다. 그 아저씨들 말이 정확한 예측을 담고 있건 아니건 간에 요런 정황만 봐도 삽질정권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대상이 꼭 하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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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써도 되는 걸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에 서울행 기차를 탔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사회복지사 시험 때문에 기차 안에 몸을 실은 2시간 동안

계속 1주일 내내 정리한 요약노트를 보고 있었다는게 서울역으로 향하는 사람의 태도로서

좀 민망하긴 했지만, 여하간에 난 그날의 학살이 일어난 지 1년이 되어서야 그들을 만나러 왔다.

 

원래 계획은 노제까지 가서 용산 참사 현장을 내 눈으로 보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날 그렇게 아팠던 분들과 마음을 함께하는(??)

거였는데, 그냥 영결식만 보고 돌아왔다.

 

뭐 어디 깃발 밑에 있기도 뭐한 형편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재빨리 얼굴을 돌리고,

엉겹결에 또 얼굴을 마주친 사람들과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뭐 이런 일들을 3시간 넘게

하고 있으려니 그것도 참 불편한 일이었다.

 

3시간동안 만난 사람중에 어색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바로 옆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두더지'를 만났는데, 그 놈은 아직 졸업을 안 하고 있댄다.....는 말에 좀 반가웠다. ㅋㅋㅋㅋㅋ 1년 동안 여행을 다녔다고... 그래서 아직 졸업하려면 1년이나 남았단다. 이런식으로 '젊음'의 기간을 억지로 연장시키는 부류가 나 말고도 또 있다는 사실에 오랜만에 누군가와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는 것도 나름 소득이라면 소득이겠지...

 

집에 다 와서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장군님이었는데, 아까 서울역에서 나를 봤댄다. 너무 멀리 있어서 부르지는 못하고....

그래서 답장을 해줬다. 뻘쭘해서 일찍 내려왔다고. 다들 슬픈데 나만 바람쐬는 기분으로

와 있는게 민망하기도 했다고...

그랬더니 장군님은 그래도 내가 그런데 안 오는 놈들보다는 낫댄다.

 

이거 그냥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말이겠지?

요즘 너무 외부의 감정적 자극으로부터 극도로 민감해진 상태여서

나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평가를 담은 말을 들을때는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

어쨌든 한 5분쯤 생각한 뒤 장군님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이제 9개월 가량 남았다.

거의 3분의 2가 지났다. 힘든건 없었지만 엄청남 지겨움과 살짝 느껴지는 외로움 정도가 그 기간동안 나와 함께 했다. 9개월 뒤, 나는 장군님의 말에 어떤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어쨌든 1월 9일같은 상황에서 그런 어색함은 다시 느낄 일이 없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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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 시험이 끝나면 읽어달라고 줄 서 있는 책들이 너무 많다.

일단 소문만으로도 너무 사람을 긴장시키는 이갑용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부터 읽어야겠다.

앞으로 노동조합 활동가를 할지 말지 뭐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은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형편

이지만, 어쨌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문제들로부터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독서 목록 1번에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 동안 숙원사업을 해결해야겠다.

신영복의 <강의>와 기세춘의 <예수와 묵자>를 시작으로 동양고전 독파에 들어간다.

올 해 안에 기세춘 선생이 완역한 <묵자>, <장자> 등도 완독해야 겠다.

올 해가 지나가면 아마 손도 못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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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서경식 <만남> 중에서

김상봉 : (...) 사실 6.10의 아들인 노무현을 보자면 절망감을 안 느낄 수가 없지요. 5.18부터 6.10으로, 그리고 그 이후 세대를 이어온 민주화운동의 흐름이 현실 권력의 최고 지위에 부상했음을 알려주는 표상이 바로 노무현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절망적인 사례를 들자면 한이 없어요. 그런 걸 보고 역사라는 것이 늘 이렇게 배신당하는 거구나 한탄할 필요도 없고요. 왜냐면 원래 그런 것은 그저 끝없는 바다 위에 흩어지는 포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싹이 올라오고 태풍이 다가오고 있거든요. 우리 역사에서는 씨알들이 때가 되면 지각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지도부는 더러 변절하고 더러 도망가고 했습니다만, 밑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올라오고 있었던 거지요.

 

서경식 : 제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이 그것인데요. 그런 자신감과 낙관의 원천 말이에요.

 

김상봉 : 무작정 낙관하는 건 아닙니다. 변절자들을 보고 염려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그 변절자들이 마른 풀입처럼 날아간 자리 밑에서 뿌리를 보는 것, 그 씨알들이 대지에 움터 올라왔을 때 우리가 줄 수 있는 물이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제가 늘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때에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잘하는가 못하는가, 변절했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방관자들의 관심입니다.

때가 되면 묻는다니까요. 땅 밑에서부터 올라와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 누군가가 여기에 물을 다오, 우리의 요구에 응답해다오'라고요. 그때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문제지요. 그것을 느끼고 있어야죠. 지금 표면을 보고 저놈들이 잘한다 못한다 하며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은 모두 타자적 시선일 뿐이에요. 그것이 제가 씨알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때가 되면 이들이 치고 올라와서 선생님을 부른다니까요. 응답해달라고

역사의 결실을 제 주머니에 집어넣고 멋대로 향유하고 잇는 자들이 누구이고 또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따지는 것은 부차적입니다.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아요. 역사의 수레바퀴 주변에 떨어진 콩고물을 주워 먹고 사는 자들이야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요. 역사를 끌어왔던 것은 밑으로부터의 부름이었어요. 지금은 가만히 있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겨자씨처럼 밑에서 올라오는 씨알의 부름에 따로 목숨을 걸고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엄숙하고 두려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18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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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우주최강 찌질이들

최근 민주대연합, 진보대연합과 관련된 논의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10년 넘게 재탕 삼탕되는 이 난제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민주당을 뺀 진보대연합' 발언과 이에 대한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의 반론, 그리고 여러 학자들의 논쟁이 있었다. 논쟁의 당사자인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당내 미묘한 입장 차이들 때문에 말을 아끼고 있다는데, 그 때문에라도 나 같이 두 당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별 영양가 없는 말이라도 보태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BS 주말 드라마 중에 <그대 웃어요>라는 게 있다. 자동차 재벌 회장집 아들이었다가 사업을 쫄딱 말아먹어 빈털털이가 된 서정길(강석우 분)의 가족들이 자기 아버지 개인 기사로 일했던 강만복(최불암 분)의 집에 얹혀살게 되는(사실상 가택침입에 상습적인 기물파손과 사생활 침해)게 주요 스토리다. 그런데 서정길은 빈털털이 된 주제에 아직도 자기가 회장님댁 왕자님인줄 알고 자기 아버지뻘 되는 강만복에게 꼬박꼬박 '강기사'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 자기 아버지가 지금까지 강기사 먹여 살렸으니까 강기사가 나 먹여살리는 건 당연한 거라고 뻔뻔스럽게 말한다. 그래서 심지어 강만복이 운영하는 카센터도 자기한테 물려줘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 내가 설명한 서정길의 모습이 민주당하고 완전 닮았다고 말하면 당사자들께선 많이 기분이 나쁘시려나?

 

 

'묻지마 연합'의 꼬라지들

 

민주당이 진보정당들을 향해 '민주대연합'을 요구하는 모양새가 딱 그렇다. MB정권이 독재정권이고 한국사회를 과거로 회귀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MB로 뭉쳐야 한다는 말은 슬로건일 뿐이다. 사실 속내는 '2010지방선거 승리'와 '2012대권탈환' 딱 두마디로 요약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런데 왜 진보정당들이 민주당에게 힘을 보태야 하는가? 언제 돈 꿔준 적 있나? 당사자들은 또 노발대발 하시겠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세력에게 '트로이의 목마'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노무현이 집권했던 5년은 그야말로 '배신의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07년 대선에서 참패했다. 그런데 그들은 또 남 탓을 하고 싶은걸까?

 

민주당 세력이 지난 10년간 개혁에 실패한 것이 진보정당이 안 도와줬기 때문인가? 왜 자기들이 무능력해서 '자멸'해 놓고서는 엄한데서 삽질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리는 시애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여기다 대고 민주당을 거들고 나선 정상호 교수는 노회찬의 발언이 연합정치의 산통을 깨는 거라는 식으로 말한다.

 

자, 그럼 다시 앞의 드라마 얘기로 돌아가보자. 강만복이 서정길과 힘을 합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강만복이 서정길네 식구한테 잘못한 것도 없을 뿐더러 지금껏 할만큼 했다. 자린고비 정신을 바탕으로 자수성가하여 알부자가 된 강만복의 상황은 지금 진보정당과 좀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비슷한 처지다.

 

진보세력은 민주당-자유주의 세력에게 딱히 잘못한 것도 없고, 할만큼 해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권영길 의원이 스스로 증명하지 않았나? 97년 대선때 자기가 당선될 가망이 없는 걸 진작에 알고 마음 속으로 김대중이 당선되길 바랬다고... 대통령 후보가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 했겠는가? 솔직히 그 당시 진보세력들 중에 겉으로는 권영길 지지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김대중 되길 바라고, 실제 김대중 찍었던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었다는 건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렇게 '자기 존재 근거 까지 부정'해 가면서 도와줬으면 그 쯤해서 고마운 줄 알고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생각해야지 어디와서 또 행패냐 이거다. 초등학교 반장선거 할때 뭣도 없는 놈이 나와서 "야, 작년에 우리 같은 반이었잖아. 그러니까 나 찍어"하는 것만 같다.

 

 

곗돈 갖고 날른 놈한테 돈을 빌려주라고?

 

4대강 사업 반대하니까 힘 합쳐야 한다고? 이 말이 뻥카라는 사실을 최근에 자신들이 예산안 타협과정에서 폭로해 버리고 말았다. 난 지금까지 4대강 반대한다는 사람 중에 보의 높이만이 문제였다고 말하는 사람 한 명도 못봤다. 어디서 사기질이야?

 

오늘 기사를 보니 추미애 의원이 한나라당과 문 걸어 잠그고 노조법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프레시안 기사) 이쯤 되면 민주당에서 추미애 의원을 제명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민주당에 그나마 희망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이정희 의원처럼 민주당과 '묻지마 연합'을 해야 한다면, 그거야 말로 강만복이 서정길에게 카센터 물려주는 꼴이다. 드라마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정길은 강만복이 삼시세끼 밥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당은 여기다 대고 '내가 부도난건 당신들 책임도 있어. 왜냐면 우리 옛날에 한 솥밥 먹었으니까'라고 말하는 꼴이다. 서정길이 지가 흥청망청해서 부도낸 걸 강만복에게 갚아달라고 하는 꼴이다.

 

민주당은 한반도 남녘에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세상에 그런 찐따들을 제1야당으로 모셔주는 국민들인데, 참 너그럽기도 하셔라.

 

오늘 레디앙에 기고된 박노자의 글에 100% 동감하는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명박이 독재라고 하려면 박정희처럼 자기 지시 한 마디로 국회의원 뱃지를 뺏을 수 있어야 한다. 국회도 해산하고... 지금 그게 가능하다고 보나? 아니, 박노자 말대로 이명박이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민주당이 이명박보고 그의 '야당을 무시하는 통치' 때문에 독재라고 하려면, 예전에 김영삼이 YH노조 농성 때문에 두드려맞고 의원직 박탈 당했을 때 만큼의 탄압을 받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뭐하냐고 대체? YH노조 사건과 맞먹는 용산참사가 일어났어도, 용산에 가는걸 마치 시장통 민생탐방하는 것 정도로 여기고 있다. 고작 한명숙이 고소 당하니까 벌떼처럼 일어나서 거품 물고 앉았고... 혹시나 김영삼이 91년 3당 합당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그를 '반(反)민주 인사'로 치부한다면, 민주당은 무(無)민주, 몰(沒)민주 집단 쯤 되겠다.

 

이쯤되면 민주당은 우주최강 찌질이라고 할 만 하다. 그들의 속내는 그저 한나라당처럼 되고 싶은데 그러기엔 과거가 캥기는데가 있고, 그러다 보니 괜히 엄하게 자기보다 힘없는 군소정당 두드려 패서 반사이익이나 얻으려는 간신배들이다. 국민참여당이라고 해서 다를까?

 

민주대연합을 하고 싶나? 그러면 지금처럼 협박하지 말고 '유혹'해 보라. 달콤한 꿀과 향기가 있는 꽃이어야 벌과 나비가 꼬일 거 아닌가? 지금 민주당 꼬라지로는 열흘 굶은 소도 안 쳐다 볼꺼다. 근데 이런 찌질이의 러브콜을 받아주려는 민주노동당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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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한 마디로, 열등감 팍팍 느껴지게 하는 책이다.

저자 한윤형은 기껏해야 나보다 학교를 2년 일찍 들어갔고,

나이는 83년 생으로 겨우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것 뿐인데 (아마 빠른 83인 듯...)

그가 이 책에서 펼쳐보이는 지적세계는 나와 적어도 10년 이상 차이 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기왕에 고등학교때부터 조선일보-서울대 주최 논술대회에서 대상을 먹을 정도로

글빨 날리시던 분이기에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당췌 용납이 안되는 수준이다.

책에 나온 참고문헌 제목만 보고 판단하건데

그는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5권 모두를 독파한 것은 물론

서중석, 윤해동, 한홍구, 박노자 등 국내 역사학자들의 수많은 연구성과를 섭렵하고,

또 뉴라이트들의 관점을 담은 온갖 출판물들을 쥐잡듯이 파헤치며 읽어온 듯 하다.

 

이 책의 부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가 보여주듯이

이 책은 전문-학술적인 연구서라기 보다는 역사학자, 정치인, 언론 등에서 제기된

온갖 자료들을 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새롭게 직조해 내어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적 개혁진영

모두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게 당췌 보통 내공을 가지고는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실 그가 참고한 책들이 고매한 학자분들 처럼 어려운 학술논문이나

해외 문헌들은 거의 없고, 기왕에 알려진 대중 역사서적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실 누구라도 이 책들을 좀 읽어봤다면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져봤을 법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져봤을 법 한 거랑, 실제로 그걸 글로 재구성할 능력이 있는 거랑은

다른 거다. 그런 면에서 이 양반은 사람 기가 눌려 버리게 하는 데가 있다.

제기랄....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뉴라이트-민족주의자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입장은 예전에 장석준씨가 주대환의 '대한민국 긍정론'에 대해

반박하면서 쓴 '진보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라는 글과

김상봉 교수가 경향신문에서 박명림 교수와의 서면 대화를 통해 밝힌 공화국 논의의 필요성과

여러 모로 접속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의 논의를 잘 버무리면

진보좌파에게 어울리는 '대한민국론'을 정초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주대환에 대한 입장에서 장석준과 한윤형이 조금 갈리는 것 같긴 하지만... 뭐 둘 다 동의할 만한 입장이긴 한데, 내 생각으론 주대환이 뜬금없이 뉴라이트 편을 들면서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도가 과히 불순하여 얼마간 장석준의 입장이 더 옳은 것 같기는 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들러의 개인심리이론에 기초하여

'열등감과 보상'을 통해 지적 성장을 이루고자 하시는 20대 여러분은

꼭 이 책을 읽기를  강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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