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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6

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18
    가까운 끝.
    ninita
  2. 2005/06/17
    혼잣말.
    ninita
  3. 2005/06/13
    고란 브레고비치 공연..(2)
    ninita
  4. 2005/06/08
    수청동 다녀옴.(4)
    ninita
  5. 2005/06/08
    음악바톤...(4)
    ninita
  6. 2005/06/07
    으으으...(3)
    ninita
  7. 2005/06/04
    나에게,(2)
    ninita
  8. 2005/06/03
    내 인생의 모호한 일부에게,(1)
    ninita
  9. 2005/06/0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ninita
  10. 2005/06/02
    형편없이, 동의해.(2)
    ninita

가까운 끝.

절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끝이라는 건.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한다.

 

당신 뒷모습이 무척 쓸쓸했어요,

나는 안타까워 했지만 그건 나를 벗어나지 못한 메아리일 뿐.

그림자 발끝에라도 가까스로 닿기를 소망하지만,

그 끝에 닿는다 하여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만나지는 건 아니다.

 

피로한 얼굴로 안녕.

 

어른들의 삶에 희망은 없다.

 

2월쯤 느꼈던 절망감을 되감기하고.

 

- * -

 

요즘 들어..

재작년 가을쯤, 약 때문에 관절까지 아팠던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

걷는 것조차 힘이 들어 오르막길 가운데쯤 주저앉아 버렸던..

 

관절까지 아픈데,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완만한 경사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 * -

 

탕.

 

탕.

 

표정은 총을 쏘고 있었다.

 

다시,

끝이라는 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

 

올해 들어 벌써 몇 가지의 '끝'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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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어제그제부터 불안불안하다.

당장이라도 전화기를 들거나

가까운 곳으로 달려갈 것만 같은,

불안함.

 

하지만 잘 제어하고 있다.

불안함을 잠재울만큼 큰 벽.

그걸 매일 같이 확인하고 있는 덕에.

 

밤 11시쯤,

버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신산했다.

뺨에 감기는 차가운 바람,

그 바람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한 1년 만에.

또르르르, 딱 턱까지만.

 

보고 싶어서,

조만간 난 그가 있는 곳 가까이에 갈테지만,

그가 아닌 친구를 만나고 돌아올 생각이다.

택시를 타고 새벽을 건너기엔 택시비도 너무 많이 올랐다.

 

세 사람의 기억이 한데 모이곤 한다.

이제는 구분도 가지 않는 길, 기억, 느낌.

이 길을 걷다가 엉뚱한 이를 떠올리곤 웃기도 한다.

 

세월은 이렇게 흐르고,

기억은 이렇게 뒤섞이는구나.

결국 진심도 흐려지고,

나에게 남은 기억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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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브레고비치 공연..


 

 



어디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집시 음악을 좋아한다. 집시들이 나오는 영화도 좋아한다.

그래서 고란 브레고비치의 공연에 안 갈 수가 없었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언더그라운드><아리조나 드림> 등에서 영화음악을 맡았던 고란 브레고비치...

 

그의 음악은 단지 '집시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무언가가 많이 뒤섞여 있다.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세르비아 출신 어머니에 무슬림 아내,

유고슬라비아 시절에 태어났지만 더이상 그가 태어난 나라는 없는 시대.

그의 음악은, 다국적인 배경만큼이나 복잡하지만 아름답다.

 

 

(앞줄 왼쪽부터, 불가리아 출신 여성 코러스 3인, 알렌 아데모비치(아코디언과 북을 주로 연주하면서 노래도 했다. 어찌나 멋진지 그의 두 손목을 보호하고 있던 까만 손목 보호밴드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줄곧!), 고란 브레고비치(때때로 전자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도 많이 했는데, 다양한 창법을 구사했다), 뒷줄은 웨딩 앤 퓨너럴 밴드(집시 브라스 밴드다))

 

언뜻 눈에 띄는 악기만 보더라도, 브라스와 전자기타와 아코디언과 불가리아 여성들의 애절한 목소리... 이 조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단언컨대, 정말 훌륭하다.

애절하고 아름다운가 하면, 흥겹고 떠들썩하고, 장중하면서 슬펐다가, 다시 기쁘고 즐거운.

정신없을 정도로 인간의 모든 감정을 순식간에 넘나든다. 주로는 집시 음악일 것이나, 고란 브레고비치 자신이 록밴드 출신이듯 록음악부터 시작해서 그가 섭렵한 문화의 다양한 음악 양식이 모두 섞여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과 사랑, 열정, 죽음, 모든 경험을 다 하게 된다. 그냥 그렇다고 말로 표현하는 건 정말이지 한계가 있다.

 



 

쩍벌남 자세는 맘에 안 들었지만 ~.~ 그가 브라스 밴드를 지휘하는 손모양들은 아주 느낌이 좋았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아 온, 동구권 사람들이 춤출 때 취하는 손모양. 팔의 움직임. 수도 없이 봤다. 게다가 옆자리에 함께 온 단원들인지 국내에 살고 있는 발칸 반도 사람들인지, 어찌나 신나게 박수치고 소리지르고 춤을 추는지, 덩달아서 더 신났던 것 같다.

 

팜플렛에서 몇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을 추려보자면,

 

- 고란 브레고비치가 20대 초반부터 16년 동안 비옐로 두그메라는 록그룹을 이끌었으며, 80년대 동안 150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릴 만큼 유명했다는 사실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비틀즈라고 불렸댄다.

 

- 전쟁 시, 군악대를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집시들에게 악기를 나눠주는 것이었단다. 특별한 가르침 없이도 어떤 악기든 잘 다루는 집시들은 곧 뛰어난 군악대가 되었고, 트럼펫을 이용해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음악을 연주하곤 했단다.

집시 브라스 밴드도 훌륭했지만, 언젠가는 집시 바이얼린 공연을 꼭 보고 싶다.

엘지 아트센터 같이 집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고급스런 공간이 아니라,

어느 식당이고 들이닥쳐서 연주하고, 침도 찍 뱉어가면서 춤도 춰가면서 연주한다는, 그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공간에서. 아. 별 수 없다. 여행 가야지.

 

그러고 보면 참 웃기다. 그 지역에서는 서민적인, 너무나도 서민적인 음악이며 밴드일 터인데, 극동의 한 나라에 와서는 최소한 3만원 이상 내야 볼 수 있는 고급 공연으로 탈바꿈하다니. 사진도 찍을 수 없고, 그래, 연주자들이 바닥에 침도 찍 뱉을 수 없는 그런..

 

- 고란 브레고비치가 한 말 중에 제일 맘에 드는 건, "집시 브라스 밴드 안에서 튜닝 되지 않은 인간적인 어떤 것을 찾고 있는 중이고 그들이 이를 실현시켜 주리라 믿는다"고 한 부분이다.

(자신이 실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현시켜 주리라' 믿는다는 표현..)

 

튜닝 되지 않은 인간적인 어떤 것, 막연하지만, 직관적으로, 알 것 같지 않은가.

그 날 공연에서 들었던 인간의 목소리만 하더라도,

불가리아 코러스는 무엇보다 애절하며 아름다웠고, (집시의 시간에서, 노을에 젖은 집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는..)

고란 브레고비치의 목소리는 힘있고 멋있다가도 능청스럽고 느끼했고(섹스라는 노래에서, '스스스스스스 섹스' 할 때의 느끼함이란.. 우아.. 장난아니었다. ㅋ) 신났다.

알렌 아데모비치의 목소리도 참 아름다웠고, 트럼펫 연주자의 낮은 음색은 강하고 장중했다.

깔끔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으되 각자 지닌 아름다움은 충분히 어우러졌고 감동적이었다.

악기 연주도 뭐.... 트럼펫은 어느 순간 태평소 소리를 내고 있었고, 알렌의 북 연주는 특이하게도 장구 치듯 북의 양면과 옆면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기발함,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고란 브레고비치 음악의 매력이었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 한 게 매우 아쉬웠고....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과...

고란 브레고비치의 모든 음악을 들어보고 싶다는...

 

2년 만에 본 공연이었는데, 대만족. 굶어도 좋아~

 

ps. 연극 '신곡'의 음악도 맡아서 했다는데,
찾아보니 이 연극, 이미지가 장난 아니다.
거의 피터 그리너웨이 영화를 연상시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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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청동 다녀옴.

경찰이 행한 '진압작전'이라는 이름의 강제철거가 끝나고,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기자들만 남았을 때.

 

mbc 라디오 방송에서 나온, 앳되어 보이는 한 기자가

카메라 기자들 앞에서 귀엽고 낭랑한 목소리로 자기자랑을 하고 있었다.

 

저, 여기서 다 땄어요!

서장님도 인터뷰 안 해 주려고 하는데 떼써서 했어요!

서장님이 저보고 떼쟁이래요~

 

...

 

역겨웠다.

 

가뜩이나 경찰서장에게 '감사합니다'고 허리 숙여 절하는 주공 관계자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분개하고 있었는데.

 

30명에 이르는 철거민들이 경찰특공대 진압봉에 두드려 맞고 떠나간 자리,

살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공권력에 의해 힘없이 떨려나간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하호호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최루액 탄 물대포를 맞고, 눈 주변이 시뻘개져 있던 그들의 얼굴을 보기는 했던가.

 

나풀거리는 치맛자락만큼이나 상큼한 미소는,

일요일 오후 놀이공원에서나 행복하게 흘리란 말이다.

 

...

 

발목까지 시큰거려 절뚝이며 현장을 나서는데,

주인 잃은 어린 코카 스패니얼 한 마리가

겁먹은 맑은 눈을 하고서 길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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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바톤...

1. 컴퓨터에 있는 음악파일의 크기.  

    1.27GB  

 

2. 최근에 산 음악 CD

    루시드 폴 _ 오 사랑

    러브 사이키델리코 _  early times-the best of love psychedelico

 

3. 지금 듣는 노래

   peter, paul and mary _ puff the magic dragon

   이야기가 있고,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슬픈 노래라서 좋아..

 

4. 즐겨 듣는 노래 혹은 사연이 얽힌 노래 5곡

    그다지 사연이 얽힌 노래 같은 건 갖고 있지 않고..

    즐겨 듣는 노래는 5곡만 꼽기엔 너무 많지...

 

   1) ennio morricone _ cinema paradiso

   2) camel _ long goodbyes

   3) the alan parsons project _ time

   4) 어떤날 _ 오후만 있던 일요일 ('그런 날에는'이랑 뭘 할까 고민하다 결국 수정)

   5) 윤상 _ 소년

 

5. 다음 바톤을 이어갈 분들..

   아무나, 누구나, 혹은 어느 누구도.

 

   역시 어려워. 그래서 미뤘던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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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여행.. 카메라.. 편집시스템...

 

비빔국수..

제대로 된 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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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타인이란,

절벽이다.

 

절벽 위에는 기댈 곳도, 붙잡을 무엇도 없다.

 

떨어질 생각만 하는 나에게,

절벽은 차라리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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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모호한 일부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지금은 쓰지 않을 테지만,

언젠가는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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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실 난 이 영화가 좋지 않았다. 관념에서 관념으로.

결국 소통하기 어려운 또하나의 '실험' 혹은 '스타일'

늘 궁금했다. '실험적인 영화'는 왜 그 자체로 말할 뿐, - 도저한 자기반영? 켁.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 하거나 소통하기 어려운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반전집회에서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고 스탭들이 그를 좇고 그 모습을 또다른 시선이 포착하고, 일종의 퍼포먼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선을 모두 보여주는 씬이 있는데, - 관객이 보는 감독의 카메라는 분명히 주인공의 뒷모습을 좇고 있지만, 편집된 장면에는 그 장면도 있고, 주인공이 빠진 빈 공간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관객들에게 있어 감독의 카메라가 주인공을 좇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으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실은 그것만일수도, 혹은 그 이전의 것이나 이후의 것일 수도 있다. 감독이 어떤 의도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했는가에 따라.

그것이 다큐멘터리 '만들기' - 즉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다큐멘터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충실하다 못해 과다하게 인용했다 느껴지는. 펩시콜라는 오바잖아.. - 에 대해 관객들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굳이 반전집회라는 공간이었어야 하는 이유다.

그 이유에 대해 나에게 말걸기가 되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했듯이 그러지 못 했고, 감독이 '액티비즘적인 다큐'와 그 자신의 다큐를 나누어서 말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형식실험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했다고나 할까. 

 

물론 이 작품의 감독들이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며(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다음 작품은 이 의미있는 시행착오를 넘어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포스트를 끄적이다가, 그리고..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해 진 건,

이들 작품에 레퍼런스가 되었을 만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다. 일견 도식적으로까지 보이는 나의 해석이나 반응과 달리 즐거운 무언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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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이, 동의해.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인간의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 볼 뿐이다.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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