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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령옥 - 관금붕(1991)

 

배우 완령옥

 

영화를 본 후, 완령옥은 전통적인 여성상과 신여성 사이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어간 배우라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시작부분 사우나탕의 부르주와 남성들간의 대화장면에서, "야한 역은 완령옥이 제격이지"라는 말은 데뷔초기 완령옥의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는 말이다. 완령옥은 풍부한 표정연기(당시에는 무성영화의 시대였으므로)를 통해 요염한 첩, 상류층 여성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이후 완령옥은 사실주의적인 극영화에 출연하면서 강인한 신여성의 이미지로 변화해간다. "강인한 공장여성노동자역할을 해낼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표하는 감독에게 립스틱을 지우며 "할 수 있다. 내가 책임진다"며 완령옥은 배역을 따내고 <현대3여성>, <신여성> 등의 작품에 출연한다.



신여성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극 중의 "신여성"이라는 것이 요즘 우리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너무 어설퍼보이는 전근대여성으로 그려진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당시와 현재 사이의 엄청난 사고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한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영화속의 "신여성들"은 비극적인 최후(자살하거나, 맞아죽거나, 병으로 죽거나...)를 맞는다.

 

영화속의 완령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하녀로 일하는 부잣집 아들인 장달민과 어린시절부터 동거해 왔으나, 그의 도박, 술, 여자문제로 지쳐서 그를 떠나 부유한 영화제작자인 당계산과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여성>의 감독인 채초생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장달민, 당계산과의 스캔들사건이 터지자 자살하고 만다.

 

완령옥이 주연하고, 채초생이 감독한 <신여성>은 스캔들로 자살한 한 여배우의 일을 극화한 것인데, 채초생은 "신문기자들이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며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 바 있다. 당시의 사회나 현대의 사회나 "착한 여성상"에서 벗어난 여성은, 특히 그녀가 공인이라면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완령옥은 이런 사회분위기 때문에 많은 상처를 입은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당시 "완벽한 가정(남편, 아내,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가족?)"이라 간주된 가족형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달민과 결혼하지 못하자 양녀 소옥을 입양하여 키웠고, 장달민 혹은 당계산과의 결혼을 원하기도 했다. 자신의 욕망이 사회적 편견과 맞부딪쳐 힘들고 지치고 자신감이 없어질 때마다, 친구들에게 "제가 좋은 사람인가요?"라고 되물었던 건 아니었을까?

 

완령옥에게 자신을 구원할 새로운 남성을 찾지말고 혼자서 저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너무 무리한 부탁일까? 에혀~

 

못난 남성 장달민 + 바람둥이 당계산 + 소심남 채초생

 

영화에는 3인의 남성이 등장하는데, 그 중 장달민은 가장 황당한 인물이다. 누가 뭐라 말려도 난 얘만큼은 용서가 안된다. 얘는 한마디로 무뇌아다. 부잣집 도령으로 태어난 이 인간은 집이 몰락하자 완령옥과 살게 되는데, 완령옥이 벌어오는 돈을 도박과 술, 여자에 탕진하며 살아간다. 이에 지친 완령옥이 당계산과 가까워지자 "돈주면 헤어지겠다"고 말하며 돈을 뜯어간다. 마지막에 스캔들을 터뜨려 완령옥을 궁지에 몰아놓고는 "아직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또라이다. 완령옥이 자살하자 완령옥, 장달민, 당계산 3인의 이야기로 극본을 써서 팔아먹고, 영화화시키기도 한단다. 그나마 이런 인간이 폐암에 걸려 일찍 죽은 건 인간세상에서 더이상 민폐끼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었겠지?

 

영화제작자로 등장하는 당계산은 돈많은 부르주아이며 소문난 바람둥이이기도 하다. 완령옥 가족에게 돈으로 환심을 사고 정성을 보이지만, 본부인과 이혼할 마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업에 완령옥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완령옥은 이런 당계산을 정말 사랑했을까?

 

남자배우중에 가장 괜찮은 놈이 채초생이다. 완령옥을 죽음으로 몰고간 영화 <신여성>의 감독이기도 한 채초생은 대사나 행동, 이후의 행적을 보면 사회주의자일 것 같다. 하지만 검열에 걸려서 영화의 일부를 자르라는 당국의 명령에 순응하기도 하고, 같이 홍콩으로 도망가자는 완령옥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인상깊은 점 : 다큐멘터리기법을 곁들인 점

 

장만옥, 유가령, 양조휘 등이 당시의 일을 극으로 재현하는 것이 중심기둥이기는 하지만, 중간중간 관금붕감독이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당시 배우로 활동했던 실존인물들의 인터뷰내용이 흑백톤으로 삽입되어 있는데, 이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특히, 완령옥을 데뷔시킨 손유 감독이 완령옥의 앨범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다. 조선인 배우 김염처럼 문혁때 고생했었고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중풍을 심하게 앓아서 말을 할 수 없는 감독 손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완령옥 :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채초생을 바라보며) 그렇게 앉는 걸 좋아하나요?

-채초생 : 중국인들의 2/3는 이런 습관이 있지요. 나리들이 일을 보러 들어가면 이렇게 문간-에 앉아 기다리다가, 때리기라도하면 그냥 앉아서 맞는거죠.

-완령옥 : (웃으며) 그리고 그렇게 앉아서 쉬기도 하지요.

-채초생 :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앉아보았죠?

-완령옥 : 데뷔했을 때요. 저는 단역이라 제 차례가 올 때까지 그렇게 앉아 기다리곤 했지요.

-채초생 : 한번 이렇게 앉아봐요.

(그리고 나란히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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