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살아간다는 것 조차 투쟁인 세상

지랄공주님의 [김원호 성폭력사건 그후 3년, 내 이야기 2] 에 관련된 글.

+ 이 글을 읽는 내 지인들에게 부탁. 당신들이 느끼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예의를 보여주세요. 트랙백도 좋고, 덧글도 좋습니다. 그냥 읽고 지나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죽어있다는 느낌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에게도, 생존자에게도 당신들의 애정이 필요해요. 거부감도 아니었고,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생각하기가 싫었다. 무관심이라기 보다는 무심함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성폭력 사건이로군..'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미 너무나 비일비재한 일이어서, 그런 사건을 전해듣거나 알게 될 때 느낄 비참함과 절망감, 패배감을 또 마주하기에는 아직 내 신경이 그리 무디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한 낮에 사무실에서 혼자 소리없이 울게 될 상황따위는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아마도 혼자서 울어본 사람은 알고 있으리라. 그게 어떤 이유였던건 간에, 운다는 것은 그만큼 아프다는 것이다. 분노 때문이건, 슬픔 때문이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나 비참함, 타인에 대한 연민이거나 어줍잖은 동정심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운다'라는 행위의 공통점은 '아프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울어봤던 상황들을. 똑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분명 당신이 울었을때는 그만큼 아팠기 때문일거다. 존경하는 선배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때도 나는 울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 조차 '그 상황과 성폭력 사건을 보고 우는 것은 다르다'며 나를 무시하거나 질책하는 인간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대체 '아프다'는 느낌이 어떻게 다를 수 있나. 가슴이 먹먹하고 머리는 멍해있고 이성으로 통제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하는 그 느낌의 공통점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나. 감성에 호소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다. '너 피해생존자 만큼 아파봤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인간에 대한 예의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똑똑하고 잘난척 하지만, 그건 노력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본성적인 것은 아니다. 노력에 대해 칭찬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노력 이전에 사람 개개인은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말도 안되는 천부인권따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건 공산주의건간에 그 기반은 공동체 성원이 될 수 있는 '인간'들이 있어야 가능하고, 그 인간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 애정이 필요한 것이다. 나 역시 피해생존자이다. 나는 이 사건의 생존자만큼의 생존에 대한 의지가 없다. 몇 번 내가 생존자였다는 사실을 밝힌적이 있으나, 그 뿐이었다. 내가 생존했다는 것과 이번의 생존자가 말하는 생존의 개념은 다르다. 나는 풀이나 나무처럼 그냥 죽지 않았을 뿐이며, 그녀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인간이다. 나는 아직 내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누구에게 분노를 느껴야 할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걸 되돌아보는 과정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덤덤해지는 것이 내가 치유되는 과정이라고 믿고 싶었다. 내가 지극히 정상인것 처럼 보여지고 '생존자'라는 딱지를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아직 죽어있고, 얼마나 더 죽어있게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도 삶에 대한 의지를 세울 수 있을지도 가늠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쉽게 슬퍼하고, 슬퍼해줄수 있다. 성폭력피해자(아직 부활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적 살인을 당한 사람이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슬퍼해줘야 한다. 생물학적 죽음만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은 동물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전적 의미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것이 고상한 행위인양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에 공감해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