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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운동한다는 것

뎡야핑님의 [.] 포스트 일부분에만 살짝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글.

워낙 끈기나 지구력이 딸리는 편이라, 한 가지 운동을 꾸준히 해내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건 가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도움이 될 때라면 아무래도 여러 운동을 접하다 보니 다양한 분야와 관련해서 인권 감수성을 좀 더 구체화 시킬 수 있다는 점이겠고, 독이 될 때라면 아무래도 '이 일도 내 일, 저 일도 내 일'하면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주제에 전전긍긍 발만 동동 구르며 스스로를 타박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는 점일 것이다. 게다가 첫째여서 그런지, 기묘하고도 말도 안되는 책임의식만 높은 편이다. 윤리적/도덕적 기준을 능력 이상으로 높게 잡고 있는 것인지, 어떤 사안이든 스스로 아무런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소위 '혁명을 꿈꾸는 운동가(-ㅠ-;; 토하겠삼)'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일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데도 나는 나 스스로를 슈퍼우먼 컴플렉스 환자로 쑤셔넣는 셈이다. 만약 모르는 문제에 대한 연대 요청이 들어오면 내가 알게 될 때까지는 그 사안을 회피한다. 마치 그 연대 요청을 한 단체나 활동가들로서는 이런 행태(-_-;;)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대신 운동 해 달랬냐고?) 나도 연대 요청을 하면서 누가 내 분야의 활동을 대신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뎡야핑님의 포스트를 보면서 나는 얼토당토 않은 내 도덕관념에 대해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의 당위성을 선전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수 많은 사진들(윤금이씨 사건 사진이나 효순/미선씨 사건 사진들)과 관련한 논쟁을 하면서 나는 약간 어정쩡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진들 속의 피해자는 여성/어린이의 약자였으므로 나는 마이너리티의 입장을 고려하는 듯한 입장을 내세우기가 훨씬 쉬웠다. 그런데 뎡야핑님은 '다같이 괴롭자고 연대하는게 아니라 다같이 즐겁자고 연대하는 것'이라는 말 한마디로 내 고민을 잠재웠다.


내가 묵던 호텔 건너편은 전부 빈민가였다. 아침에 호텔 창문을 열면 빈민가 사람들이 일제히 하천으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내 천박함을 드러내자면, 나는 그 사람들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그리고 쇼핑하는 것 역시도 괴로웠다.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몇 배의 가격을 높여 부르는 모습에서 나는 어렸을 때 악다구니 쓰며 살아왔던 엄마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말로만 들었었지만) 행상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 점 때문에 '이 가난한 사람들'과 가격 흥정을 하고 쇼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누가 내 얘기를 듣고 말했다. '너 진짜 위선자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위선'이라는 말이 내가 아는 그 단어인지가 의심스러웠다. 그 사람은 행복의 질을 생활의 질과 동일시 해서 타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나와, 수해기금 몇푼 내면서 '국민의 고통을 함께 하자'는 권력자들과 다를게 뭐냐고 물었다. 그 말이 맞다. 즐겁게 운동한다는 것,은 내가 운동을 덜 한다거나 내가 가진 신념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더 건강한 상태로 운동을 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착한척 '위선'을 떨어봐도, 나 역시 영구기관이 아닌 이상 나 스스로를 움직일만한 동력이라는 것은 꼭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 동력이 바로 '즐거움'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분노, 동정만으로 운동은 지속되지 않는다. 즐거운 기억은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힘든 기억을 잊기 위해 즐거운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내 일상과 운동이 즐겁지 않다면, 나는 아마 운동이 가져다 주는 삶의 무게와 투쟁의 무게에 짓눌려 결국 아무것도 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이상한 윤리와 도덕에 옭아매는 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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