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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29
    '제대로' 보고/듣고/느낄 자유는?
    레이-1
  2. 2005/09/18
    명절의 의미?(2)
    레이-1
  3. 2005/09/17
    예술의 의미. (2005/09/27 수정)(2)
    레이-1

'제대로' 보고/듣고/느낄 자유는?

* 아르님의 [If you were me 시리즈 - 상영 및 배급 방식의 문제] 글과 관련된 글.

 

인권하루소식 2893호의 [인권, 영화를 말하다] <별별 이야기>를 보고 드는 별의별 생각을 보고 이 부분이 제일 와 닿아서 갑자기 포스트.

 

"한 영화 언론에 따르면 지난 4월 전주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자리에서 제작을 총지휘한 이현승 감독은 "몇 편은 인권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인권'을 단순히 교과서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독들이 느끼는 지점으로 설명하는 영화"라고 말하며 "인권도 중요하지만 영화적인 것에 강점"을 두었다는 말을 관객과의 대화에서 서슴지 않았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인권'영화인지 아닌지는 차후에 논하기로 하자. 그러나 제작 총지휘자가 대중 앞에서 털어 놓은 제작의도의 한 단면은 인권위가 기획하고 있는 '국민의 인권감수성 함양'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의 목적이 실종되는 순간이다. '인권'을 말하는 영화의 완성도가 인권의식과 겉돌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객들에게 인권의 감수성을 불어 넣어주는 완성도 있는 인권영화는

영화적으로도 결코 손색 없음을 감히 장담한다."

- 이현승 감독의 얘기는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창작의 권리를 '권력'으로서

휘두르고자 하는 영화 창작자들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문화에 대한 권리는 일차적으로는 '문화를 향유할 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문화'라는 것이 결국 '자본'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서 창작가능한 것을 생각해 볼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결국 '있는 자'들에게만 열려있는 셈이다. 가장 보편적인 문화예술작품인 영화를 즐기는 것도 두시간에 7000원이라는 돈을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음악 역시도 10000원을 훌쩍 뛰어넘는 음반 가격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야만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상황이고.

(약간 삼천포 -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의 경우 '있는 자'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을 찾아다니기 위한 노력이 든다. 생존의 권리 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은 아직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이건 좀 다른차원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과연 '문화'라는게 재능있는 사람들로 부터만 창작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 그냥 '즐길수 있는'문화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도 많다.)

 

사실 인권하루소식의 기사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덧붙이자면,

 

문화는 '향유할 권리'이외에 '창작할 수 있는 권리'로도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 내 취향이 천박하야 충분히 즐기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는 스스로 즐기고 창작하며 공감하기 위해 곡을 만들고 부르는 재야가수 조약골이야 말로 '문화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라야만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과연 그 '인정'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조약골의 재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이없는 짓이다. 가수가 잘생기고 멋지고 목소리가 좋아야만 하는 거라면, '문화 소비자'들은 평생 '문화권'의 적극적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문화 감수성'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짓밟는 것이, '돈 버는 능력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영화 [형사;Duelist]를 본 이후로, 계속 이런 생각중. 무척 충격이었나보다. -_-a

* 정운영 선생님 별세 소식에 참 가슴이 먹먹하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르고, 그 빠른 흐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도 너무 빨리 가셨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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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의미?

** MI-RING Blog "추석이 돌아왔다"와 관련된 글. ** 사실 이 글을 쓰고 나서 MI-RING Blog를 보고는 트랙백 걸었음. 오다가다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공익광고 같은 내용이 흘러나왔다. (MBC 라디오를 듣다 보면 '잠깐만~'하는 언니들의 노래와 함께 유명인들이 한마디씩 좋은 얘기하는 그것과 비슷한 것..) 내용은 대략, '명절은 좋은 것이여~' 그런데, 그 좋은 의미라고 설명한 내용이 왠지 씁쓸하다. 명절은 개개인의 과거의 삶과 현재와 미래가 함께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하는데, 그 순간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누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지? 나는 현재 비혼이고 이후로도 별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 우리 가족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기독교이기 때문에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 집안에서 노닥대며 놀기에는 우리 가족이 그렇게 따뜻한 분위기도 아니고 해서 누군가 같이 놀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혼여성인 선배들에게는 전화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친정에 있다면 뭐 '잘 놀다 와요~'라고 말했겠지만 만약 시댁이었다면? 대놓고 '고생좀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게 될 내 선배들 시댁이 그렇다고 무서운 곳은 아닐것이다. 뭐 시댁 때문에 고생한다는 얘기는 사실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시댁은 시댁이니.. 당연히 명절때는 찾아뵙겠지..) 명절은 늘어가는 식구들과 새로운 식구들을 만나고 또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시작으로서의 기쁨을 가져다 준다 - 라고 생각하는 쪽은 아마 대부분 아들 가진 부모들(특히 아버지들)아닐까? 요즘 분위기가 아무리 좋아졌다 해도 아직도 며느리를 사위 모시듯 하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는 분위기는 아직 남아 있어도 말이다. 늘어가는 식구(손주)들과 새로운 식구(며느리)를 만나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주체는 시부모쪽이지 결혼한 며느리 당사자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결혼한 여성 스스로가 그 명절을 통해 자신의 과거/현재/미래를 확인하기는 아마 요원한 일일 것이다. ** 그냥, 지나가다 들은 한 마디 얘기가 무척 서글프게 느껴졌다. 다음 달에 결혼하는 내 친구가 시댁과의 관계가 좋기를 바랄 뿐이다. 그 친구는 시댁과의 어렵지 않을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절때 자신의 과거/현재/미래의 삶을 예측할 수 있을 상황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잘된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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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의미. (2005/09/27 수정)

* 동동이님의 [창작] 포스트에 글을 엮으며 9/27에 글을 덧붙였음. 수정내용은 아래 '계속 보기'에. :)

 

참 내. 제가 이런 포스트를 할 줄 정말 상상도 못했네요.

음악시간 음치라 완전 가성으로 간신히 평균아래-_ㅜ 점수를 건지고, 미술시간 원근감을 이해 못해 완전 수학시간 도형그림 마냥 평면도를 그렸던 바로 이 사람이(게다가 색에 대한 감각도 없어서 스스로 내 그림을 보고 있으면 파레트에 색색깔로 섞어놨던 물감들에게 미안할 지경;;;)!!!!

 

근데 확실히, 고민하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인 듯.

 

[형사 Duelist]에 대한 나름의 감상을 적고난 후, 운동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것은 사실입니다. 디자인을 하는 친구 하나는, 인권하루소식에서의 픽토그램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고 상업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대안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하더군요.

 

'예술'이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저는 제 소질에 대해 고민하며 그것에 대한 어떤 평가도 내릴 수 없는 '수동적 수용자'의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 순간 작동하는 기준은 오로지 100% 개인의 '취향'이 되지요. 하지만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과연 온전히 '개인의' 취향이 될 수 있을까요? 워낙 문화영역에 대해서는 취미가 없으셨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과학과 수학의 '논리 정연(!)'한 매력에 빠져들어 이과생의 길을 선택했으며, 활동 과정 속에서도 '논리'를 앞세워 '대중적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 머리 싸맸던(이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너무 게을렀지만;;;)것을 생각해본다면... 명시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 의미를 해독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저와는 좀 덜 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저 같은)사람도 있고, 이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 상징에 대한 독해력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또 다른 방편의 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겠지요.(영화 Cyclo에서 시인(양조위)이 그랬었죠. 보통사람들과 다른 감성언어를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적응하지 못했던;) 그래서 예술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이해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결국, 소통에 대한 '방식'의 차이로 예술을 이해한다면, 운동의 가치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예술 - 민중가요, 민중시 등등'의 방식으로 말이지요. 그 민중예술이 얼마나 질적인 수준을 확보해서 그 나름의 효과를 얻게 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요.

 

제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스스로 예술을 해석하는데 있어 인권/반차별/폭력적이지 않은/비착취의 관점으로 대상을 봐야 한다는 것. 어떤 작품을 보면서 불편하다고 느낄때 그것이 단순히 편견인지 아니면 활동가로서의 관점에서 불편한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하겠다는 것이죠.

 

** 이미지가 주는 효과 때문에 선정적 사진을 선전물에 활용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하는 고민이 이 포스트에서의 저의 고민과 맞닿을 수 있는 것일지도.

** [형사 Duelist]와 관련한 포스트에 달린 siwa님의 덧글에 대한 답변이 될 수도 있겠네요. ^^

** 갑자기 어색한 존대말은 그냥 글 분위기에 따른 것입니다. ^^a

 



(여기서부터는 반말로. ^^a)
 
천재적인 예술가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걸까? 우리가 '재능'을 인식하게 되는 기준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한 개인이 자라는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통해 어떤 사물/상황에 대한 판단 기준을 형성해나간다고 본다면, '창조적 탁월함/재능'이라는 것은 그 재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은, 보편적인 감수성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능력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예술에 대한 내 생각은(현재로서는) '창조적 탁월함'에 대한 인정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서의 인정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돈이나 물질로서 그들의 재능을 인정하는 형태보다는 명예와 지지로 '천재'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올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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