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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보고/듣고/느낄 자유는?

* 아르님의 [If you were me 시리즈 - 상영 및 배급 방식의 문제] 글과 관련된 글.

 

인권하루소식 2893호의 [인권, 영화를 말하다] <별별 이야기>를 보고 드는 별의별 생각을 보고 이 부분이 제일 와 닿아서 갑자기 포스트.

 

"한 영화 언론에 따르면 지난 4월 전주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자리에서 제작을 총지휘한 이현승 감독은 "몇 편은 인권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인권'을 단순히 교과서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독들이 느끼는 지점으로 설명하는 영화"라고 말하며 "인권도 중요하지만 영화적인 것에 강점"을 두었다는 말을 관객과의 대화에서 서슴지 않았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인권'영화인지 아닌지는 차후에 논하기로 하자. 그러나 제작 총지휘자가 대중 앞에서 털어 놓은 제작의도의 한 단면은 인권위가 기획하고 있는 '국민의 인권감수성 함양'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의 목적이 실종되는 순간이다. '인권'을 말하는 영화의 완성도가 인권의식과 겉돌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객들에게 인권의 감수성을 불어 넣어주는 완성도 있는 인권영화는

영화적으로도 결코 손색 없음을 감히 장담한다."

- 이현승 감독의 얘기는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창작의 권리를 '권력'으로서

휘두르고자 하는 영화 창작자들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문화에 대한 권리는 일차적으로는 '문화를 향유할 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문화'라는 것이 결국 '자본'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서 창작가능한 것을 생각해 볼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결국 '있는 자'들에게만 열려있는 셈이다. 가장 보편적인 문화예술작품인 영화를 즐기는 것도 두시간에 7000원이라는 돈을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음악 역시도 10000원을 훌쩍 뛰어넘는 음반 가격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야만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상황이고.

(약간 삼천포 -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의 경우 '있는 자'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을 찾아다니기 위한 노력이 든다. 생존의 권리 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은 아직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이건 좀 다른차원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과연 '문화'라는게 재능있는 사람들로 부터만 창작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 그냥 '즐길수 있는'문화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도 많다.)

 

사실 인권하루소식의 기사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덧붙이자면,

 

문화는 '향유할 권리'이외에 '창작할 수 있는 권리'로도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 내 취향이 천박하야 충분히 즐기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는 스스로 즐기고 창작하며 공감하기 위해 곡을 만들고 부르는 재야가수 조약골이야 말로 '문화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라야만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과연 그 '인정'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조약골의 재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이없는 짓이다. 가수가 잘생기고 멋지고 목소리가 좋아야만 하는 거라면, '문화 소비자'들은 평생 '문화권'의 적극적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문화 감수성'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짓밟는 것이, '돈 버는 능력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영화 [형사;Duelist]를 본 이후로, 계속 이런 생각중. 무척 충격이었나보다. -_-a

* 정운영 선생님 별세 소식에 참 가슴이 먹먹하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르고, 그 빠른 흐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도 너무 빨리 가셨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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