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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0/22
    J.D.의 말.
    레이-1
  2. 2005/10/20
    '저는 이건희 회장을 존경하는데요?'(7)
    레이-1
  3. 2005/10/18
    동감합니다.(3)
    레이-1
  4. 2005/10/04
    ‘착하다’ = ‘예쁘다’?!(10)
    레이-1

J.D.의 말.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것은 한 가지 경우뿐이다.

만일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넘을 수 있다면,

죽은 뒤에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빠른 속도로 살아야 한다."

 

요즘 내 메일 시그.

 

"영원히 살 것 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살아라."

 

James Dean. (1931.2.8 ~ 195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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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건희 회장을 존경하는데요?'

떳다! 진보네님의 [트랙-팩 18 : KlN삼성 - "삼성, 됐거덩"]와 관련된 글입니다. 예전에 봤던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삼성, 무서운...]글이 생각나서 이 글도 함께 엮습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한한 착취의 가능성은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본 후의 소감("월간 [사람]의 창간" 포스트)을 통해 한번 얘기 한 적이 있다. 뭐, '가족처럼 대우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 속에 숨겨진 진실은 핏줄을 앞세워 착취를 고스란히 참아내라는 의미와 다름 아니라는 그런 얘기. 근데 요즘 삼성의 카피가 바로 그거라서 더 끔찍하다. '또 하나의 가족'. 젠장. 정말 그 카피가 주는 인상이 강하긴 한가보다. 나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논술학원에서 노는(?)중인데, 대학 입학 면접 시험 기출문제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도덕적이지만 가난한 삶과, 비도덕적이지만 풍족한 삶 중에 택하라면 어느것을 택할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도덕교과서 같은 질문이기 때문에 흔히 아이들은 '가난보다는 도덕이 중요하다!'라고 쉽게 답해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날 내가 만난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윤리의식이 투철한지, '나쁜짓 하면 당연히 벌 받아야죠~ 잘 사는 꼴을 어떻게 봐요?'라는 단순명쾌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네가 생각하기에, 도덕적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누가 있는데?"


"그게 누군데?" "이건희요!" 솔직히, 저 대답을 듣자마자 내 본분도 있고 그녀석 머리를 확 쥐어박을 뻔했다. -_-a (속마음 : 이 자식아~! 너네집 분위기를 알만하다. -ㅅ-;; -> 알긴 뭘 알아.) 근데, 그 다음의 그 친구 답변이 더 가관이었다. 아니, 가관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읊어대는 얘기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최고 연봉을 자랑하는 회사에 노사문제도 없고, 우리나라 경제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는 기업이자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는 등의....심지어 존경까지 한다면서 이렇게 말을 맺는 것이다. '저는 도덕적이지만 가난한 삶이 아니라 도덕적이면서도 부유하게 살고 있는 이건희 회장님을 존경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면접 시험용 말투)' 오 마이 갓. 결국 삼성의 노조탄압에 대한 얘기(분홍마녀님의 '그 해고자' 포스트)를 해주면서 '아니, 그럼 나쁜 놈이잖아요? 저 이제 싫어할래요!'라는 대답을 듣고야 말았지만 =_=;;; 참 많이 섬뜩했다. 정말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삼성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서 무서웠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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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합니다.

marishin님의 [민주노총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에 관련된 글.

"약간의 희망만 있어도 대중은 들고 일어날 것이다."라는 문구를 제외하고는 marishin님의 글에 대부분 동의한다. 저 문구를 굳이 제외한 이유는 '들고 일어날 주체'로서의 대중에 대한 나의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략)...민주노총은 시작부터 개량주의적이었다고 하자. (나는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 하지만 1996년, 97년 노동법 개악에 맞선 대투쟁이 개량주의적 투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이 투쟁의 끝은 지도부의 개량주의 때문에 흐지부지 됐지만, 그것과 투쟁은 구별되어야 한다. (중략) 민주노총 깃발 아래 벌어진 많은 투쟁들은 결코 개량주의적이지 않았다. 문제는 지도부의 개량주의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모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쉽게 나오는 것도, 정파를 이끄는 일부 운동가들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략) 대중에 대한 무시 또는 무지, 관념성은 대안에서도 드러난다. “자본가와 질적으로 다른 새 인간으로의 노동자의 자기변혁”이라니... 최저 임금보다 10원 더 받는다는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은 모르긴 몰라도 매일 매일 자신들이 '자본자와 질적으로 다른 인간'임을 절감할 것이다. 어디 그들 뿐이랴. (중략) 과연 어떻게 자기변혁을 이룰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이 자기변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최저 임금보다 10원 더 받는 사람들, 아니 최저 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일상적 삶과 활동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이 자기변혁이 관철되는가? 진짜 문제는 “잘난 노동운동가들”이 바로 이런 구체적인 대안과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략) 그래서 문제는 운동가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 속에 매몰되어 다툼이나 벌이는 데 있지, 민주노총이 애초 한계가 분명했다는 데 있지 않다. 제대로 된 운동가들이 있었다면 민주노총의 태생적 한계는 벌써 극복되었을 것이다. 약간의 희망만 있어도 대중은 들고 일어날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더 버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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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 = ‘예쁘다’?!

** 월간 인권잡지 [사람] 4호 '이것도 인권이에요'에 실린 글.
 
 
* 당신의 외모차별 지수는? (각 항목에 체크해보세요. *출처 : 여성민우회)

△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의 외모에 대한 인사나 평가를 하는 것은 관심과 애정의표현이다. (  )
△ 살 찐 사람은 솔직히 둔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  )
△ 예쁜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한다. (  )
△ 소개팅에서 상대방의 외모가 맘에 안 들면 외모에 대해 말하는 편이다. (  )
△ 미니스커트 등 몸매가 드러나는 옷은 날씬한 여성만 입어야 한다. (  )
△ 내가 부르는 친구의 별명 중 외모와 관련된 것이 있다. (  )
△ 여학생은 교복치마를 입어야 단정해 보인다. (  )
△ 입사지원서에 키, 몸무게 등의 외모 관련내용을 기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  )
△ 채용공고에 '용모 단정한 자'라고 명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 기업에서 같은 조건이면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게 당연하다. (  )
△ 뉴스의 여성 앵커는 젊고 예뻐야 한다. (  )
△ 여성정치인의 옷차림이나 외모 관련 기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  )
△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물건을 팔면 더 관심이 간다. (  )
△ TV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서 연예인의 외모를 평가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은 재미있다. (  )
△ TV나 영화에서 못 생긴 사람이 주연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  )
△ 성형 부작용이나 무리한 다이어트의 책임은 사회적 영향보다는 개인의 욕심에 있다. (  )
 
** 체크 항목이 0-3개면 '아주 훌륭한 당신', 4-6개는 '아쉽지만 그래도 훌륭한 당신', 7-10개는 '외모차별에 물든 당신', 11-16개는 '외모로 모든 것을 보는 당신'입니다.
 

나는 현재 인권운동단체의 상임활동가이며 여성이다. 당연히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인권침해임을 알고 있다. 내가 위의 외모차별 지수를 체크하면 당연히 ‘아주 훌륭한 당신’의 점수를 얻을 자신이 있다. 적어도 그것이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실제 모습은 ‘아주 훌륭’하기는커녕 ‘외모차별에 물든 당신’의 자리에 있다.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큰 광고판에 세계 굴지의 스포츠용품 회사 나*키의 여성 브랜드 광고가 걸렸다. 발을 힘차게 구르고, 한쪽 팔은 한껏 위로 뻗으면서 운동을 하고 있는 그녀들. 예쁜 보라색 스포츠웨어를 입고 힘차고 밝은 표정으로 ‘따라해보세요’하고 유혹한다. 같이 그 광고를 보고 있던 선배언니의 한마디.
“참 내. ‘예뻐져라’, ‘날씬해져라’도 모자라서 이젠 ‘강해지라’고 까지 하네? 그만 좀 시켜라. 어디 여자들 힘들어서 살겠냐.”
피식 웃어버렸지만 맘 한구석에서는 날씬하고 당당해 보이는 모델들의 모습에 압도되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15년 가까이, 딱 두 번 정도를 제외하고 나는 늘 짧은 커트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긴 머리인 채로 관리하기에는 귀찮은 곱슬머리이기 때문에, 라고 변명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여성적인 외모를 타고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준보다 큰 키, 건장한 체격, 그리고 잘 봐주어도 ‘예쁘다’는 평가보다는 ‘잘 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강한 인상, 55(여성 옷 사이즈, 여성 의류 S 사이즈 정도? 여성 의류는 S와 M 이상의 사이즈를 찾기 쉽지 않다.)사이즈의 옷이라고는 한 번도 입어본 기억이 없고, 66사이즈의 옷을 찾으면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맞는 옷을 찾으면 위안이 된다. 아직 나는 ‘표준’이구나 하는 그런 위안.
특히 건강한 외양 덕택에 남성으로 종종 오인되는 경우까지는 참아줄 수 있지만, 뒤따르는 평가들은 나를 아주 맥빠지게 만든다.
‘머리를 길러보지 그러냐’
‘옷 입는 스타일을 바꿔봐라’
마치 ‘여성적 외양을 가지지 않은 내가 사회에서 차별당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나는 타인에게 외적 기준을 적용하여 판단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나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더 남성적인 외모를 지닌 여성이라고 해서 사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이제 내 주변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외모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나’일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회에서 불편하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도 한국여성 표준(대부분 과소체중)의 몸무게를 가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고, 다이어트 관련 기사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혼자서 거울을 보고 있을 때는 성형수술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게 될지를 고민한다. 차마 입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복권에 당첨된다면 눈/코/입/턱/가슴/지방흡입 등의 전신 성형을 하는 것이 절실한 소원이고, 성형 전/후를 보여주는 광고나 성형수술에 성공한 사례를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며 성형수술 당사자들을 품평한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몰래 **씨의 요가 비디오동작을 따라하면서 ‘완벽한 몸매’를 꿈꾸고 있다.
외모로 인한 차별이 인권침해라는 사실은 이젠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외모를 기준으로 취업시 불이익을 주는 것은 평등권 침해에 위반된다는 국가인권위의 권고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외모차별은 확실히 인권침해가 맞다. 하지만 누구도 이 인권침해에 대해 쉽게 개선의 노력을 보이거나 혹은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도 사실이다.(주변에서 흔히 오고가는 농담 중에 외모를 소재로 삼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요즘 ‘착하다’는 표현은 심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를 평가하는 말로 쓰이고 있을 만큼 우리 사회에서의 외모차별주의는 그 뿌리가 깊다. 특히 남성들보다 높은 사회 진입장벽 앞에 허우적대는 여성들에게 ‘날씬한 몸매’와 ‘호감가는 외모’는 ‘능력’으로서 이 시대 꼭 갖추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차별받지 않을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뒤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나 자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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