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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한걸음

쿨하게 한 걸음  by 서유미

 

'스타일'이 너무 스타일리쉬해서 질린 나머지,

서른 세살, 직업도 없고 연애도 없고 아버지 환갑잔치 해 드릴 돈도 없고

'따뜻하고 달콤한 카라멜 라떼'만이 삶의 존재 한 가운데에 있는 여자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었다.

 

머리에 염색하는 아버지를 보고 저러다 검정 매직으로 대머리 부분 칠하면 어쩌냐는 어머니와

멀쩡히 대학 졸업하고도 이력서 백만번쯤 쓴 동생과

오랫만에 구립도서관에서 만났다 했더니 공무원 시험준비하는 동창과

대학 다닐때는 제일 보헤미안처럼 살더니만 결국엔 의사와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와

어릴때 발랑 까져서 남자나 사귀고 팔레레 돌아다니다가 시집잘가서 떵떵거리고 사는 '엄친딸'  사촌동생.

 

그리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장을 관둔 것도 모자라

도통 떨떠름한 남친과 헤어지고

엄마 앞에서 직장 관둔 것도, 헤어진 것도 이야기를 못하는 서른 세살의 나.

 

소설 제목은 '운수 좋은 날'처럼 반어법이었다.

 '쿨하게'는 커녕 예전 애인을 어쩌다가 길에서  만났을 때 절대 입고 싶지 않은

무릎나온 고무줄 추리닝 같구나.

소설의 대사처럼 '무슨 인생이 평생 삼재냐, 지겹다, 지겨워'쯤 되시겠다.

 

소설상황과 비스꼬롬한 '똥구리' 미스인 내 마음은 소설을 읽으면서 안타깝다 못해 찢어졌다.

(울엄마가 남들 딸은 골드미스네, 실버미스네 하고 있는데 넌 '똥구리 미스'구나, 라며 내 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엄마, 난 '친환경 스댕steinless 미스'거등, '똥구리'가 뭬야 구리게시리.)

그래서 작가의 말을 읽는데

작가가 서른 세살이 약간 넘은, 게다가 결혼해서 남편도 있는 분인 것을 알고 뭔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주발도 작가가 싱글이 아냐, 라면서 볼멘 소리를 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에 ET가 손가락을 맞대는 것처럼

감정을 잇대고 들들들 재봉틀로 박아버렸던 것이다.

열심히 박음질 하고 났더니 천을 뒤집어서 박어버린 듯한 이 배신감.

 

흥, 그래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짠했지만 위로받았고 스스로에게도 '화이삼'이었다.

소설의 결말은 공무원 시험 패스도 아니고 영화비평상 당선소식도 아니고 하다못해 고만고만한 연애도 아니었다.

연애는 커녕 주인공은 서른 세살에 이런 말까지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조바심도 사라졌다. 억지로 사랑해야 할 필요는 없다."

결론은 정말로 '쿨하게 한걸음'이었다.

따뜻하고 달콤한 카라멜 라떼 한 잔에 위로받으면서.

그게 이 소설의 진정성이었다.

 

평론가의 말처럼 너무 평범하고 정직하고, 연필로 꾹꾹 눌러쓴 느낌의 착한 소설이었다.

문체도 그랬다.

요새 너무 멋부리는 소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촌스럽게 잔잔한 소설을 많이 안 읽어서인지

평범해서 참으로 좋았다.

그 평범함이

"그래, 오래 흔들렸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그래, 오래 서러웠으므로 너는 아름답다."

에서 나온 것이라서 마음 깊이 아름다웠던 것 같다.

(구광본 ‘오래 흔들렸으므로’ -소설 뒤 평론가의 글 중에서 발췌)



 

 -같은 싱글의 입장에서 내 마음은 안타깝다 못해 미어졌다.

순간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애세포나 노처녀 히스테리 이야기는 이 생각에 비하면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희주가 거품을 물며 불만을 토로하는 동안 내 머릿 속에는 유방암과 자궁암이 쌍둥이빌딩처럼 우뚝 솟아올랐다.

삼십대 환자 급증. 특히 출산은 커녕 모유수유 경험이 없는 미혼여성에게서 발병률이 높다는

뉴스와 신문기사가 슬라이드처럼 착착 장면을 바꿔나갔다.

출산은커녕 당분간 결혼계획도 없는 늙은 싱글들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자 혼자서 나이 들어간다는 건 이렇게 위험부담이 큰 건가.

p44-45

 

-사십대를 기대하기에는 인생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자식 자랑을 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부모가 불쌍했고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머저리 같은 자식들도 불쌍했다. 150

 

-열심히 해 보고 또 그 때 가서 생각해보면 된다.

실컷 자고 나서도 여전히 뭔가를 저지르고 싶으면 뜨거운 캐러멜라떼를 한 잔 하시며 길거리를 쏘다닌다.

 

-죽음 앞에 치통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런데도 타인의 죽음은 개인의 치통을 뛰어넘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그걸 순순히 인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242

 

-따뜻하고 달콤한 캐러멜라떼

아, 캐러멜 라떼, 그걸 보는 순간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커피는 참으로 삶의 한가운데 있는 존재 같았다.

입 안으로 넘긴 커피가 하도 달콤하고 따뜻해서 왈칵 눈물이 났다.

동남은 이제 이렇게 맛잇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팠다. 245

 

 

-작가의 말 중에서

 

미혼의, 게다가 애인도 없고 실업자이며 은행잔고마저 넉넉지 않은 여성이 바라보는 자본주의 사회란 두려움 그 자체다.

돛단배를 타고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가진 것도 없고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경험조차 없으니

풍문만으로도 두려워지고 자꾸 다른 사람들을 힐끔거리게 된다.

그 막막함과 상대적 빈곤감 같은 걸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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