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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우화 (정운영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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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스크랩해놓았던 신문쪼가리를 정리하다가 정운영 선생의 1998년 글을 발견했다. 나는 이 때의 한겨레를 정말 아꼈는데...

  

당시 한참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신공공관리(NPM)가 IMF 경제위기의 바람을 타고 한참 유행을 하려던 차여서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정운영 선생의 글을 함께 공무원시험 공부를 하던 다른 친구들에게도 읽어보라고 한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바로 그 시대의 우화가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정운영 선생이 돌아가신 현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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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우화 (정운영 에세이)  
한 겨 레  1998-07-08  06면  ()  판  칼럼.논단  2460자
   
4358명의 교통부 직원을 57명으로 줄였다는 뉴질랜드 정부의 개혁 소문이 내게는 무슨 끔찍한 괴담처럼 들렸다. 그 나라 국민과 정부의 지능지수가 두자릿수가 아닌 바에 57명이 할 일을 4358명이 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공무원을 그렇게 줄이면 정부 서비스도 그만큼 줄게 된다. 그것이 그냥 없애도 좋은 서비스가 아니라면 민간이 대신 맡고, 그 제공과 수혜는 수익성의 원리에 지배된다. 그래서 적자노선은 즉각 폐지되며, 그 결과 오지의 기차 통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낙도의 주민이 병에 걸리면 ‘곱게’ 죽어야 한다. 그런 끔찍한 일을 과연 개혁의 이름으로 찬양해야 하는가?
  
○끔찍한 ‘극단적 시장경제’ 전염
정부 개입은 악이고 시장 방임은 선이라는 ‘극단적 시장경제’ 전염병이 우리 사회에 유행하면서 뉴질랜드의 경험을 마치 신줏단지처럼 받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기업 민영화는 탕아를 회두시키는 최고의 처방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씀이다. 정부 운영에 시장원리를 들이대는 행위는 국정을 이윤 동기에 내맡기는 처사다. 공기업은 본래 공익을 위해, 국가의 경제 안보를 위해 이윤 동기를 부분적으로 거부하고 세운 기관인데, 거기 수익성의 척도를 갖다대는 시도는 설립 취지 자체를 부정하는 잘못이다. 뉴질랜드 모형이란 요컨대 ‘정부의 시장화’다. 생선을 파는 것이 주민등록표를 떼어주는 일보다 수입이 많다고 동사무소를 어물전으로 바꿀 수 없다면, 정부의 몫과 시장의 몫을 가르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일정한 실적 계약으로 행정장관을 임명하고, 그 목표 달성 정도에 따라 보수와 재계약 여부를 결정한다는 뉴질랜드의 희한한 ‘장관 임용시험’ 역시 내게는 순리 아닌 억지로 느껴진다. 실제로 각료의 보수 격차가 1:2.25에 이르렀으니, 혹시 장관들 사이에 임금 투쟁과 재임용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지 모르겠다. 문제는 이런 구차한 얘기가 아니고 정책 갈등이다. 예컨대 물가 억제 계약을 맺은 장관이 투자든 고용이든 모두 제쳐놓고 물가만 잡으려고 나설 경우 과연 그것이 국민경제를 위한 최선의 길인지 의문이려니와, 투자와 고용을 맡은 장관 역시 자신의 실적을 위해 이에 맞설 경우 그 마찰을 어떻게 푸는지도 적잖게 궁금하다. 정부의 일은 출발부터 독점적이며, 그것은 경쟁의 효율을 위한다고 대통령을 복수로 뽑지 않는 것과 같다.
  
정부의 효율을 작으냐 크냐로 따지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큰 정부보다 작은 정부가 좋고, 정부보다 시장이 낫다는 신앙은 이 시대의 우화일 뿐이다. 그것은 정부가 제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대한 야유이고 복수이겠지만, 그렇다고 시장이 정부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제통화기금 개입을 자초한 일만 하더라도 시장의 자유가 과도했기 때문이지 정부의 통제가 과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위기 극복을 위해 공기업 매각을 도마에 올리는 것은 더욱더 잘못된 선택이다. 몇푼의 달러를 위해서든, 외세의 압력에 굴복해서든, 시장경제 신조에 충실해서든 전력을 넘겨주고 제철을 팔아치우려는 결정은 지금의 고통보다 더 혹독한 후환을 남길지 모른다. 은행 난립을 부추긴 6공의 금융 자유화가, 국제통화기금 환난을 불러들인 문민정권의 세계화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보복하는지 목숨마저 버리며 잔인하게 체험하지 않는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주장은 큰 것에 대한 반발일 수는 있어도 진리는 아니다. 크고도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의 하나가 스태그플레이션 불황을 감내한 스웨덴의 경험이다. 경쟁력 잃은 ‘한계 업종’ 조선공업을 살리기 위해 스웨덴 정부는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 따위의 설교를 일절 거절한 채 1977∼79년 조선 근로자 전체 임금의 120%를 업계에 보조금으로 주고, 실업 대책으로 정부 고용을 늘린 결과 87년 전체 근로자의 33%를 정부 부문에서 흡수했다. 스웨덴 정부는 사람을 앉혀놓고 돈만 뿌린 것이 아니다. 그들을 복지 요원으로 돌려서, 이를테면 노약자의 가정 진료 횟수를 종전의 곱으로 늘렸다. 반면 인원 감축으로 그런 서비스를 없애버린 것이 뉴질랜드 개혁의 ‘효율’이다. 바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저술한 에른스트 슈마허가 기업의 인수합병을 고발하고, 인간 중심의 경제학을 강조한 점은 여기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하다.
  
○장관 수입으로 높인 경쟁력이
정부의 낭비를 묵인하고 공기업의 비효율을 방치하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정부든 공기업이든 낭비와 비효율을 과감히 도려내는 수술의 필요를 난들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장만이, 민영화만이, 외국인한테 하는 매각만이 살길이라는 고함소리는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곤란을 틈타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외세의 덫이 거기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복지 파괴에 따른 생활의 불안을 절감하고, 개방과 경쟁의 논리로 장관조차 외국인을 채용하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똑똑한 젊은이들의 이민이 늘어난다는 뉴질랜드 우화도 우리가 배울 모범이 아니다. 장관마저 수입하여 경쟁력을 높인들, 청년들의 탈출로 나라가 빈다면 그 경쟁력이 무슨 소용인가? 우화는 우화로 족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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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03:57 2007/03/14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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