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를 읽고
2007.02.25 17:54에 쓴 글
역사모노드라마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당대, 2005
Marx in Soho by Howard Zinn, 1999
극본 하워드 진, 번역 윤길순, 출연 마르크스
읽은지 한달이 거의 다 된 것 같다. 읽고난 소감글을 쓴다고 했는데 상당히 늦었다. 게다가 서평 같지도 않고...
서울대 도서관에는 Marx in Soho가 없고, 번역본만 있다. 원본이 있으면 좋으련만.
런던의 소호와 뉴욕의 소호.
런던의 소호에 가본 적이 있는데, 어떠했는지 기억에 없다. 역시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가 보다.
하워드 진은 사람들이 거의 모르고 있는 맑스, 가정을 소중히 하는 남자로서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애쓰는 맑스를 보여주고 싶었고, 관객들에게 맑스가 공격을 받고 자신의 생각을 변호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단다.
미하일 바쿠닌이 맑스를 방문한 것으로 나온 것은 뜻밖이다. 기회가 되면 바쿠닌 전기를 다시한번 읽어볼까. 별로 감흥이 없었던 것 같은데...
1인극으로 괜찮았는지는 직접 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이것만으로 별로... 물론 1인극의 극본을 처음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맑스가 자신의 이론이 무자비한 스탈린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왜곡된 것을 보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억압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한 사이비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자본주의의 승리에 자못 흡족해하는 서구 정치가와 저술가들로부터도 맑스를 구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오늘날에도 근본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세계화’라고 하는 것도 맑스는 분명히 예견했다.
→ 하워드 진의 의도는 좋지만, 과연 1인극에서 이런 내용을 다 보여주지는 못했던 듯하다. 단지 그럴싸한 선동에 그치지 않았나. 맑스가 19세기에 말했던 것이 지금 21세기에 그대로 유효하리라 보는 것은 심하다.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이 지금도 관철되고 있다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디 그뿐인가요. 내 엉덩이에 난 뾰루지를 가지고 나를 분석하려는 엉뚱한 시도까지 낳았으니, 허 참.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분노한 것은 뾰루지 때문이래요!"
그럼, 저들은 뾰루지 한번 안 나본 혁명가는 다들 어떻게 설명할까요?
→ 뾰루지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맑스 전기를 몇 개 읽었는데,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이 넘의 기억력은 어디에 써먹나...
여러분은 ”맑스는 죽었다!“고 떠들어대는 저 얼간이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군요. 예, 나는 죽었습니다. … 그러나 죽지 않았지요. 여러분에게는 이 말이 궤변으로 들리겠지만. (pp.31-32)
→ 영화 「괴물」에서 송강호가 “나는 죽었는데, 죽지 않았다”고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들도 언론의 자유를 신봉한답니다…. 하지만 일정한 한계를 그어 놓고 그 안에서만 허용하지요…. 그들은 자유주의자이거든요.
이제 여러분은 “맑스가 돌아왔다!”고 말하고 다녀도 됩니다.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닙니다. (p.36)
나는 『라인 신문』이라는 신문의 주간이었습니다. 별로 혁명적이지도 않은 신문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행위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38)
→ 진실, 프라우다가 진실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80년대 후반 「노동계급」의 학생그룹에서 내던 기관지 이름이 ‘진실’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혁명적일 수 있구나.
내가 (피퍼에게) 물었지요. “맑스주의 협회라고? 그게 뭔데?”
“우리는 일주일마다 만나 당신의 저작을 가지고 토론하기로 했어요. 한 문장 한 문장 큰소리로 읽고 자세히 검토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맑스주의자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당신이 쓴 것은 모두 다 전적으로 믿어요.”
“모두 전적으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요.
“예. 그리고 다음 맑스주의 협회 모임 때는 당신이 오셔서 강연을 해주시면 정말 영광이겠는데요, 맑스 박사님.”
그는 나를 항상 맑스 박사님이라고 불렀지요.
“난 그럴 수 없어.” 내가 말했어요.
그러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더군요. “왜요?”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니까.”
문제는 그의 사고방식이었어요. 참 난감한 사람이었지요. 마치 위성처럼 내 말 주위만 빙빙 돌며, 자기 딴에는 내 말을 세상에 그대로 전한다면서 왜곡하기 일쑤였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그렇게 왜곡시킨 것을 무슨 광신자처럼 무조건 옹호하고 나섰지요. 그걸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은 막무가내 비난하면서 말입니다.
→ 나는 무슨 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게 참 부담스럽다. 맑스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무엇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의 무오류성 같은 것도 당연히 기각되는 것이고, 내가 아는 것 또한 아무리 충분한 근거와 사실, 경험과 이론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일지라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 내가 무슨 주의자를 자처하게 될 때 그게 진의를 왜곡시킬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어떤 현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게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한번은 내가 예니에게 말했지요.
“당신은 내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알아?”
그러자 예니가 말하더군요. “노동자 혁명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니, 혁명은 일어날 거야. 그런데 그것이 피퍼 같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 권력이 없을 때는 알랑거리는 아첨꾼이다가 권력을 잡으면 난폭한 깡패로 변해 큰소리나 뻥뻥 치는 허풍선이가 되는 사람들 말이야. 이런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변한다면서 내 사상을 세상에 해석해 줄 거야. 그리고 새로운 성직 계급을 조직하겠지. 파문과 금서목록, 종교재판, 총살형 집행대가 있는 새로운 위계질서 말이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질거야. 자유가 있는 공산주의는 한 백 년쯤 뒤로 미루어 놓고, 세계를 자본주의 제국과 공산주의 제국 두 개로 나누고 말이지. 그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꿈을 짓밟고, 그 꿈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기 위해 또 다른 혁명을 감행할 거야. 어쩌면 그게 두 번 세 번이 될지도 몰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pp.43-45)
→ 나는 가끔씩 진보, 변혁을 외치는 이들의 행태에 대해 실망할 때가 많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서도 마찬가지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들이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게 될까봐 두렵다. 그 혁명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르는 것들을 정당화하는 모습들,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과는 다른 미래의 씨앗을 오늘 보여주어야 한다. 혁명은 언제 오는 줄도 모르게 갑작스레 올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준비가 없이는 그냥 가버린다. 우리의 삶에서 현실을 지양하고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이 필요하다.
예니는 『자본론』이 꼭 코끼리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은 일반 대중을 겨냥해서 쓴 『공산당선언』이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요. 이것은 분석이니까.
그랬더니 그녀가 말했어요. “누가 분석하지 말래? 하지만 이것도 『선언』처럼 강력하게 외치란 말야.”
… 그러고는 나에게 『자본론』 첫 구절을 읽어주었지요. 물론 나를 고문하기 위해서랍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의 부는 엄청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예니가 그랬지요. “독자들이 읽다가 잘 거야.”
그런데 한번 물어봅시다.
이 책이 그렇게 지루해요? 어쩌면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예니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세상에 조금 지루한 건 없어.” (pp.80-81)
예니는 항상 물었지요. “우리가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다가가고 있을까?” (pp.81-82)
→ 내가 쓴 글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왜 나는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일까. 아마도 글을 쓰려고 했던 주제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자본론』이 어려웠던가. 이 책을 읽지 않은지도 15년이 넘었다. 나는 아는 것도 없이 떠들고 있지 않았는지...
세상에 조금 지루한 것은 없다. 맞는 말이다.
예니는 나의 생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어쭙잖게 고고한 학자인 척한다 싶으면 도저히 참지 못했어요. 그래서 가끔 내게 말했어요.
“지상으로 내려오시죠, 헤어 독토르.”
예니는 내가 잉여가치론을 평범한 노동자들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먼저 노동가치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왜 노동력이 생계유지비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면서도 다른 모든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그것도 항상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특수한 상품인지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어느 누구든 잉여가치론을 이해할 수 없어.”
그러면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안 돼. 당신은 그냥 이렇게만 말하면 돼. 그러니까 여러분의 고용주는 여러분이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임금을 준다. 그러니까 간신히 생존하면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만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고용주는 여러분의 노동력에서 여러분에게 지불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래서 여러분은 계속 가난한데, 고용주는 갈수록 부자가 된다.”
좋아요, 세계 역사에서 지금껏 나의 잉여가치론을 이해한 사람이 백 명밖에 안된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래도 그건 분명히 맞는 이론입니다! (pp.87-89)
→ 위와 같은 대화가 사실이었을지라도 맑스와 같이 강변하지 말자.
예니는 원래 복잡한 사상을 항상 단순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더라, 먼저 학자고 그 다음에 혁명가라고 비난했지요.
그리고 내게 말했어요. “당신의 지식인 독자들은 잊어 버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말해.”
예니는 내가 오만하고 편협하다고 했습니다. “왜 당신은 부르주아 계급을 공격할 때보다 다른 혁명가를 공격할 때 더 격렬해?” 하며 그녀는 내게 물었지요.
예를 들면 프로동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가 『빈곤의 철학』이라는 책을 썼기에 나는 『철학의 빈곤』으로 응수했어요. 당연히 나는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예니는 이런 나의 응수를 무례한 처사라고 생각했어요. (pp.90-91)
→ 나의 화살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예니는 수도가 끊어지고 가스가 끊어지는 더할 수 없이 힘든 상황에서도 살림을 꾸려나갔지요. 그러나 여성해방 문제에서는 결코 지치지 않았습니다. 예니는 여성들이 집 안에만 머물러 밥하고 빨래하느라 생명력이 소진되고 있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집 안에만 머물러 있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론적으로는 여성해방론자이면서 실제로는 여성 문제를 등한시한다고 비난했어요. 그러면서 이러더군요. “당신과 엥겔스는 남녀평등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남녀평등을 실천하지 않아.” (pp.93-94)
저들은 소비에트가 붕괴되었으니 공산주의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엥겔스와 내가 스물여덟, 서른 살에 쓴 『선언』을 읽어보기나 했을까요?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그 사회의 계급과 계급 갈등 대신에, 우리는 각 개인의 발전이 모든 사람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공산주의의 목표를 알기나 할까요? 개인의 자유! 동정심 있는 인간 존재로서 자신을 계발하는 것을!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을 총살하는 것―그것이 어떻게 내가 평생을 바친 공산주의일 수 있습니까? (pp.96-98)
→ 내 말이... 하지만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을 총살했던 것이 공산주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 그렇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바쿠닌에 따르면) 우리가 타고난 부르주아지였답니다! 물론 바쿠닌에 비한다면, 모든 사람이 부르주아지이지요. 바쿠닌은 돼지처럼 사는 길을 택했으니까요. 그래서 만약 여러분이 돼지처럼 살지 않으면, 혹시 여러분의 머리를 덮어줄 만한 지붕이 있으면, 거실에 피아노가 있으면, 신선한 빵과 포도주를 좀 즐기면, 바쿠닌에게는 바로 여러분이 부르주아지입니다.
나도 그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다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야 했고, 그곳에서 탈출하여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혁명을 선동하려고 하면서 돌아다녔지요.
그는 무정부주의 사회를 원했지만, 그가 구축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무정부주의는 다름 아니라 그의 머릿 속에 있었습니다. (pp.101-103)
바쿠닌의 머리에는 무정부주의라는 쓰레기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어리석은 생각이었지요. 나는 바쿠닌을 인터내셔널에서 쫓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니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왜 혁명가 집단은 여섯만 모이면 항상 누굴 제명하지 못해 안달이냐고 말했습니다. (pp.104-105)
“내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뭔지 알고 싶어? 그럼 파리 코뮌을 봐, 그게 진짜 민주주의야.”
선거가 일종의 서커스가 되어버린 영국이나 미국의 민주주의, 사람들이 결국은 구질서의 수호자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어떤 후보가 이기든 여전히 부자가 통치하는 나라의 민주주의가 아닌 진짜 민주주의 말입니다.
파리코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한 합법적인 정치기구였죠. 파리 코뮌에서는 법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부채를 탕감하고, 집세의 지불을 유예하고, 전당포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되돌려 주게 했습니다. 코뮌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빵 굽는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도 줄이고, 누구나 극장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방안도 계획했지요.
코뮌은 학교는 “아이들에게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가르치지요.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정의를 위해 투쟁하라고는 가르치나요?
파리 코뮌을 세운 사람들은 그 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로만 가르친 게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전제 정치의 도구이며, 심지어는 전제적인 혁명 정부의 도구로 쓰였던 단두대를 없애버렸지요.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찼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언제나 토론이 벌어졌지요. 사람들은 서로 나누고 공유했습니다. 그들은 이전보다 훨씬 자주 웃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 친절하고 상냥했지요. 거리에는 경찰의 ‘경’ 자도 보이지 않았지만, 안전했습니다. 예,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였습니다! (pp.110-115)
→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 코뮌을 찬양했지만, 사실 이를 실현한 것은 정치적 국가가 폐기되는 사회형태를 생각했던 프루동파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바로 아나키스트였다.
바쿠닌과 맑스가 논쟁한 것으로 나오지만, 어쩌면 파리 코뮌은 바쿠닌의 생각과 더 가깝지 않았을까.
파리코뮌도 2달만에 독일군에 의해 함락된 것이 아니라 계속 지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라타니 고진이 『일본정신의 기원』에서 언급한 것처럼 관료적인 고정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중앙집권적인 그룹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면서 관료적인 지배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해 좀더 깊게 고민할 필요를 느낀다.
이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노동자이고 따라서 공동의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할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요. (p.131)
새로운 산업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에서 소외됩니다. 그리고 기계와 매연, 악취, 소음이 사람들의 감각에 침투하면서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되지요. 사람들은 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며 서로 적대하면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면서, 서로에 대해 서로 소외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아닌 삶을 살면서, 자신이 정말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면서, 그런 삶은 꿈이나 환상 속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지요. (pp.131-133)
→ 맑스가 『경철수고』에서 소외된 노동을 1)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2) 생산 활동, 즉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 3)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4)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의 형태로서 설명한 내용이 마지막에 나온다. 이게 맑스 이론의 핵심은 아닐 터...
래디컬하다는 것은 바로 문제의 뿌리를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냥 이 지구의 엄청난 부를 인류를 위해 쓰자고 합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도록 합시다. 식량과 의약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나무와 풀, 즐거운 가정, 몇 시간의 노동과 그보다 많은 여가 시간을 줍시다. 그리고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인간은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p.134)
→ 급진적이라는 것은 문제의 뿌리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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