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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게공선과 미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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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6 16:53

      
90년대 초반 읽었던 소설 중에 <게공선>이라는 작품이 있다. 일본의 사회주의 소설들을 모은 작품집이었다.

아래 신 게공선은 이를 미래적인 관점에서 각색한 제리님의 SF단편 소설이다. 제리님은 블로그의 다른 글에 있는 덧글에서 이 작품이 필립 K 딕의 단편 [거짓말 로봇]에서나오는 기막힌 반전에서 모티브를 따왔음을 밝히고 있다. [거짓말 로봇]도 강추할 만한 작품인데, 이게 <임포스터>라는 밋밋한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사실도 밝힌다.

 

아래에 제리님의 소개글과 원문을 담아온다. 다시 읽어보니 나름 재미도 있고, 뭔가 생각할 꺼리도 있어서 담아온 것이다. 요새 TBD라는 말을 아는 20대가 얼마나 될까? 이것도 80년대 후반 원전학습의 산물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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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게공선과 미래의 전쟁

      
신게공선은 내가 스무살이 넘어서 처음 쓴 SF 단편이다. 아직도 갖고 있는, 중 3때의 작품 "Good Bye 아틀라스"와 더불어서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게공선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게공선은 영어로 "Crab factoryship"으로 게를 잡는 원양어선에 가공공장까지 덧붙여진 그런 배를 의미한다. 80년대 말에 사회과학 서점에서 간혹 보았을 수도 있는 작품 "게공선"을 미래적인 관점에서 각색한 소설이라 볼 수 있다.
  
"게공선"은 20세기 초 일본사회주의자들이 정보기관에 잡혀가서 고문 받는 그런 이야기로서 상당히 독특한 작품이다. 만약 21세기에도 사상적인 이유로 정보기관에 의한 탄압이 계속된다면 어떠한 형태를 띄게 될 것인가,하는 것이 이 소설의 화두였다. 다소 온건하면서도 치밀한 수법의 탄압이 사용된다면 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팔목은 꺾어도 의지는 꺽을 수 없다"는 믿음은 새로운 교화 방법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인간의 개조 문제에 초점을 둔 것은 아니다.이미 안소니 버제스가 "시계 태엽장치 오렌지"에서 썼던 그런 내용의 답습은 싫었다. 정치적인 이유든, 개인적인 이유든 범법자들을 다루는 권력의 방식과 그 이유(!)에 대한 고찰은 이미 오래된 논의 과제이다.
   
이 소설은 탄생의 한계상 소품일 수밖에 없다.  미력하나마 내가 표현하려했던 것은 필립 케이 딕의 "거짓말 로봇"에 나오는 그런 기막힌 반전이었다. 군복무중 겨울밤을 꼬박 보초를 서면서 생각했던 결말이지만, 과연 소품으로나마 작품이 가치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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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5
일본에서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이 다시 인기라는 기사가 한겨레에 실렸다. 소설 <게공선>은 1930년대 노동운동을 하던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투쟁중에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문받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직도 인상적인 것은 그렇게 고문을 받으면서 사회주의자들은 적기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를 통해 그리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던 <게공선>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의 워킹푸어나 프리터들이 자신들의 현실이 이미 70년 전에 있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모양이다. 감성이 풍부하다고 해야할지...

 
일본 사회 달구는 ‘프롤레타리아 소설’ (한겨레,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2008-06-01 오후 10:20:27)
특파원 리포트 
 

 
» 도쿄 진보초 서점가의 대형서점 산세이도의 특별코너에 진열된 소설 <게공선>과 관련 서적.
 

29년작 ‘게공선’ 노동투쟁
20~30대 저소득층 공감
올 판매부수 20만 돌파

 
79년전에 발표된 프롤레타리아 문학작품이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이다. 일본공산당원이었던 고바야시 다키지(1903~1933)가 일본 경찰에 고문으로 사망하기 4년 전인 1929년 발표한 소설 <게공선>(蟹工船)이 화제의 작품이다.
 
캄차카 연해에서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게공선’의 가혹한 노동조건에 분노를 느낀 노동자들이 맞서 투쟁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은 올해 판매부수 20만권을 돌파했다.지난 31일 <마이니치신문>은 “예년의 47배 속도로 팔리며, 고전작품으로서는 이례적인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다”고 전했다.다키지기념도서관쪽은 “이것은 고바야시 다키지 학살에 필적하는 문학적 사건”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게공선’의 재발견은 <마이니치신문>이 올 1월9일 게재한 작가 아마미야 가린(33)과 다카하시 겐이치로(57)대담이 계기이다. 두 작가는 대담에서 일본의 워킹푸어(일하는 빈곤층)와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저임금의 비정규 젊은이)의 현실은 <게공선>의 세계와도 통한다고 언급했다. 
 
기사를 본 도쿄 제이알 우에노역 구내의 서점 여직원(28)이 소설을 다시 읽고 “절실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느꼈다고 한다.자신이 지난해까지 3년간 프리터 생활을 했기에 소설의 내용이 더 절실하게 와닿았다.그는 올 2월 “이 현상(워킹푸어)이 혹시 <게공선> 아닌가요”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150권을 쌓아놓았더니 일주일에 한 권밖에 팔리지 않았던 책이 매주 40권 이상 팔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다른 서점들도 하나둘씩 특별코너를 만들어 진열하고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신문들이 <게공선>의 재발견을 크게 다루며 인기에 불을 붙였다.
 
지난해 말에 나온 <게공선> 만화도 한 몫했다. 독자들은 대부분 30대 이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1천만명을 넘어선 연수입 200만엔 이하의 워킹푸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자기책임론’에 짓눌려, 할말을 제대로 못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올초 작가 사망 75주년 기념 <게공선> 감상문 공모에 대상을 차지한 야마구치 사나에(25)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공동의 적에 맞아 함께 싸우는 모습에 부럽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졸업 1년 만에 겨우 정사원 자리를 얻어 바쁠 땐 15시간씩 시간외 수당도 없이 일했지만 전표를 조작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가 즉시 해고당했다고 한다. 



신 게공선
  
 
『 '구슬이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너의 두 다리를 뽑아 버릴테다!' 
'절대로 말할 수 없어요'
  그러자 검은부리 거인은 크고 굵은 팔을 들어 소년의 가냘픈 두 다리를 뽑아버렸습니다. 검은부리 거인은 소년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이래도 말하지 않는다면 네 두 팔과 눈을 뽑아 버릴테다!'
'그 구슬은 우리 마을의 아픈 사람들을 고쳐줄 소중한 물건이어요! 절대 내줄 수 없어요'
  검은부리 거인은 화가 나서 뾰족한 손톱으로 소년의 팔과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검은부리 거인은 씩씩거리며 다시 외쳤습니다.
'이제 말하지 않으면 네 혀를 뽑아 다시는 맛난 것을 못 먹도록 하겠다'
  소년은 미련한 검은부리 거인에게 말했습니다.
'맛난 것은 못 먹어도 좋아요. 하지만 제 혀를 뽑으면 저는 구슬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줄 수 없어요
'검은부리 거인은 자기 머리를 탁 치며 말했습니다. '맞아! 그렇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구나' ..... (중략) .....  』

        "무더운 여름날의 무서운 동화" 제 3권 네번째 이야기
                『예쁜생각』출판사 2095년 제 3판 13쇄 中
  
   1. 보고서
 
   <보고서 양식 제 1호>                           ※ 비밀등급: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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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2095년 7월 21일
   발신: 세계안전기구 부속 심리정화 위원회 연구소 소장
   수신: ## 111
   참조: 안전기구 수사부 정보국 국장
   제목:『다수자의 의지』파 사건 중앙위원 정화 결과
   대상: 중앙 위원 1인 (성명: People Kim)
   대상약력:: 2052년 출생. 한국계 미국인
             2075년 세계 기준 국립대 뇌생리학과 졸업
             2077년 세계 기준 국립대 뇌생리학 석사과정 수료
             2083년 지구 뇌생리학 연구소 박사 학위       
             2084년 중국계 미국인인 준 리와 결혼
             2085년 준 리와 사별
             2088년 뇌신경접합 이론으로 바이오상 수상
             2091년 생물학과 뇌생리학 전문서적을 베스트 셀러로 만듬
             2093년 동화출판사『예쁜 생각』 설립
            
   본 심리정화 위원회 연구소에서는 지난 2095년 7월 1일 세계 안전기구 수사부에서 지명한 폭력혁명 기구 '다수자의 의지'파 중앙위원 '피플 김'을 검거하여 약 20일에 걸쳐서 심리정화 작업을 마쳤다. 이에 일차 심리정화 작업 결과를 공고하며 그간의  작업 중에 있었던 문제점과 성과물, 그리고 차후에 나타날 문제점에 대해 명시하고자 한다.
 
   (1) 이번 정화 작업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차후에 나타날 폭력혁명 배후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대상의 의식속에 존재하는 조직에 대한 정보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이차적으로는 대상이 차후 그같은 사상에 경도되지 않도록 뇌생산 회로의 수정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가지 문제점이 나타났는데 이 문제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수사부 정보국과의 대질을 통하여 밝혀내기로 한다.
  첫째로는 뇌생리학적인 문제점으로서 대상이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며 정체성을 상실하거나 상실하려는 과정에 있는 환자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따라서 대상의 뇌수 속에 존재하는 정보 역시 신빙성이 있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이것은 대상이 저명한 뇌생리학 교수라는 사실로 볼 때 이례적인 것이다.
  둘째로는 대상의 뇌리속에 불법 혁명활동이나 혹은 그에 관련된 정보가 거의 들어있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안전기구 수사부의 해명이 필요하다. 12일간의 철저한 조사 결과를 볼 때 대상은 과거 자신의 아내로부터 혁명 및 불법적인 사고에 관한 자극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혁명 활동 및 그에 준한 어떠한 사고활동도 활발히 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 뇌파 분석 별첨 자료 제 1부 참조 ○
 
   (2) 정화 작업의 결과에 대해서는 화학적 반응을 기록한 별첨 자료 제 2부 참조 바람.
    정화 작업은 대상의 뇌수 속에 존재하는 폭력 혁명의 불씨를 제거하는 회로 재구성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회로 재구성 작업은 과거의 호르몬 주입 방법(호르몬을 주입하여 대상을 극단적인  조증이나 울증에  몰아넣거나 과거의 경험과 사실에 대한 격렬한 반발 행위를 유발케 하는 방법을 말한다)에 비하여 효과는 점진적이나 부작용이 거의 미미하고 대상의 기본적인 사고 패턴을 해치지 않아 타인에게 발각될 우려가 전무하다. 연구팀은 대상의 기억중 몇가지 부분을 변조하거나 중요한 이성 회로와 논리방식 회로에 수정을 가하여 예고된 답변을 내도록 했다. 또한 대상의 행동에 근간을 이루는 동기(무의식 구조)를 해부하여 그 기억에 몇가지 수정을 가하였다. 그 주요 부분은 대상의 과거 아내에 대한 기억으로서 무의식 안의 침전물인 아내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대상이 실제로 혁명기구 중앙위원이든 아니든 간에 앞으로도 그럴 만한 가능성은 모두 배제되었다.
 
   (3) 대상의 의식구조에 대한 의문점
  대상은 일반인들과 다른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인간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기억구조이다. 우리는 무의식의 패턴을 따라가던 중에 대상의 기억에 '암흑'이라 일컬을 만한 결절점이 나타남을 알았다. 이 결절점은 주기적인 파동이라 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대상의 기억속에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부분(그러나 분명히 어떤 행동을 이루었을 시간동안의)이 존재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신병 요소의 발견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뇌세포의 수가 다른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과거 뇌수술을 받은 경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뇌세포의 수가 절대치에 미달한다(물론 이것이 대상의 뇌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보다 오분의 일 정도의 용량으로도 정상적인  뇌활동에는 지장이 없다)
 
   (4) 대상은 현재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연구소 부속 병원에 송치중이며 마지막으로 무의식 패턴 확인 과정을 거치고 있다. 하루 한번의 뇌검색 과정을 거치며 전문의와 상담중이다.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어 이틀 후면 과정 종료가 가능하다.
 
                  【 예상되는 문제점과 해결책 】
  본 연구소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타진해 본 결과 대상이 실제로 혁명 기구의 중앙위원일 경우 뇌검색을 피하기 위하여 일정부분의 기억을 스스로 삭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따라서 그에 수반되는 복귀책도 가능하므로 이것에 대한 고려도 해보았다. 일단 무선 조종에 의해 자신의 기억정보를 수신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신체에 숨겨진 통신 기구및 부품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보았다. 결국 아무런 기계장치도 갖고 있지 않음이 판명되었다. 다른 정보수신망에 대한 조사로서 가택을 철저히 조사했으나 단서로 불리워질 만한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 관련된 모든 정보는 비밀 정보망을 통하여 차후 송신될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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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의식 정화 연구소
 
   사내는 유전자 인식 시스템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문 오른쪽의 파여진 홈에 엄지 손가락을 대자 파란 불이 깜빡였고 이내 문이 열렸다. 그가 들어선 넓은 홀은 눈부신 흰빛의 계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연구실이었다. 희고 번쩍이는 가운을 입은 직원 몇명이 그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연구소의 직원들과는 달리 검은양복에 붉은색 무늬가 그려진 넥타이를 메고 있었으며 마치 감독차 들른 공장장처럼 느긋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탄탄한 몸매는 그가 강한 성품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억센 완력의 소유자임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사내는 갈색 피부와 여윈 뺨을 가져서 다소 깡마른 듯한 느낌이 들었고, 굵은 눈썹과 이마 위로 한줄기 그어진(성형 수술도 마다한)긴 상처가 냉철한 인상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눈빛이 날카로운 오십대로 보이는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흰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자신의 앞에 무례하게 나타난 삼십대 후반의 사내를 경멸스러운 듯 흘낏 쳐다봤다.

  "브레인 박사를 찾고 있습니다.”
   인상과는 달리 깍듯한 말투에 흰 가운을 입은 중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브레인 박사요. 당신이 정보국장입니까?"
  사내는 잠시 찡그리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난 국장이 보낸 사람입니다. 이번일로.. "
   사내가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면서 침을 삼켰다.
   "국장에게 어떤 문책이 주어진다면 내가 대리 임무를 맡게 되어 있소."
   브레인은 사내의 위치가 자신에게 위협적이 아님을 깨달아서인지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잘 오셨소. 마침 수사부에 여러가지 정보를 요청할 참이었소. 당신은 정보검색 면허를 가지고 있을 테니 협조가 가능하겠군요. 흔히들 정보국과 연구소의 관계를 빗대어 개와 고양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나는... 이런 사건들의 궁극적인 해결은 이 두 기관의 긴밀한 협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브레인은 앞장서서 천천히 걸었다. 그의 주위로 굵은 동력 파이프가 연결된 컴퓨터 3대가 스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치과 의자 같은 긴 의자 몇개가 나타나고 그곳을 가로질러 브레인은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은 낯선 방으로 들어갔다. 왼편으로는 방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평면 모니터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의 긴 침대에 삐쩍 마르고 거무튀튀한 색깔의 손이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묶여진 남자의 머리에는 거대한 오토바이 헬멧 같은 것이 씌어져 있었는데 침대 오른쪽의 작은 다섯개의 화면으로는 대상인 남자의 뇌파가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뛰고 있었다. 남자는 자는 듯이 보였다. 뇌파를  검사하기 위해 강제로 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양복의 사내는 문득 자신의 옆에 매우 완고하게 생긴 한 명의 사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사내는 가운의 앞에 '부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검은양복은 문득 이 사람이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인물임을 상기했다. 부소장은 대상이 그려내는 곡선에 정신이 팔려서 자신이 검은양복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루터씨 이 분은 정보국에서 오셨소."
  갑작스런 브레인의 말에 루터라 불린 부소장은 고개를 들어 멍청히 입을 벌린 채로 검은양복을 노려 보았다. 검은양복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난 루터라고 하오, 정화 계획의 발안자이지. 당신 성함은.. 참, 정보국 사람들의 이름을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어쨌거나 아무런 호칭이라도 좋으니 뭘로 써야할지 알려주시오"
  "그냥 A라고 부르십시오"
   루터는 예쁜 여자에라도 홀린 듯 뇌파 곡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좋소 A 씨.. 난 당신 같은 무지한이 내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대해선 달갑게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일에 관한 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겠소. 단, 당신에게 몇가지 권한이 있다면 내 빌어먹을 상관이 내가 말하는 것을 억압하지 않도록 해주시오"
   검은양복은 씁쓸한 인상을 짓고 있는 브레인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매우 좋습니다. 박사가 내게 원하는 정보를 주기만 한다면..  ## 111 에 관련된 것만 빼놓곤 뭐든지 가능하게 해드리겠소"
 
   브레인이 나가자 루터는 기분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가에 다가가 앉았다. 사실 지하 500m 깊이에 만들어진 이 연구소는 안전기구와 마찬가지로 가장 은밀한 장소였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브레인이 태양의 광도를 흉내낸 창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검은양복은, 음모적인 냄새가 풍기는 브레인에 비해 바로 앞의 사내가 훨씬 다루기 쉬운 인간형임을 직감했다. 과학자로서는 뛰어날지 모르지만 조직의 관계나 조건에 관해서 무지한 이 사내가 왜 연구소의 소장이 못되었는지 이해가 갈 듯했다.
   "내가 묻고 싶은 부분은..."
   촌스런 지역의회 입후보자와 같은 말투로 루터가 말문을 열었다.
   "대상의 아내였던 준 리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지금껏 조사한 바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바지만 대상의 상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준 리에 관한 정보가 더 필요하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상의 아내에 대한 정보 접근이 일반 회선으로는 단절되어 있소."
   "좋은 질문입니다. 일단 준 리에 관한 개략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대상보다 다섯살이 어리고 중국태생입니다. 미국으로 국적을 옮긴 것이 스무살 때이고.. 세계 기준 국립대 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그리고 스물 일곱이 되던 해에 국제 혁명 그룹 TBD 사건으로 구속되어 교수형 당했습니다.  TBD 그룹은 그해 최악의 사태를 만들어냈는데 국제 기업 환경오염 사례를 일반 정보 회선망으로 동시전송하여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어냈던 거죠."
   "뭐라고요? 티비디?"
   "레닌주의의 마지막 그룹이었죠. TBD는 'What is to be done'의 끝 음절의 약자입니다. 이 조직은 국제적인 통신망과 조직망을 가진 초유의 그룹으로 총 17000명 규모에 달하는 국제 조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직구도가 파악된 후 전향하지 않은 중앙위원 모두가 내란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아하.. 십년이나 지난 얘기로군요,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 한데..  그럼 준 리 라는 이 여자도 같이 교수형을 당했단 말이오?"
   "바로 그겁니다. 총 32명의 중앙위원 중 27명이 교수형을 당했죠. 그 중에는 준 리 도 섞여 있었던 겁니다."
   "내가 의문을 가지는 부분은 그거요, 당시 피플 김은 박사학위를 갓 딴 전도유망한 학자였소. 그런 그가 상대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겠소? 빌어먹을, 혹 그럴지도 모르지. 과학자들 중에는 종종 생활방면에 관해서는 멍청한 족속들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피플 김과 준 리의 결혼은 균형이 안맞는 것 같소. 당시의 그들은 너무나 다른 이상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조사한 의식속의 자료가 그걸 말해 주고 있소. 당시 피플 김과 준 리의 관계는 정신적인 교류는 거의 배제한 성적인 부분으로만 일관된 관계였소. 이게 얼마나 오래갈 거라 생각하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어떤 부부도.. 그 이상을 바라는 경우는 드물죠"
   검은양복은 냉소어린 웃음을 입가에 띄운 채 대답했다.
   "좋소. 그런 것들을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그럼 대상이 여자와 사별한 이후에도 계속 여자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 것 같소?"
 
   검은양복은 문득 예정된 장난기 어린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이 일 년이 채 못되었다는 것은 서로가 맞지 않아도 충분한 싫증을 느끼기엔 좀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리움이 십년을 넘게 간다거나 하는 것은 현대의 경우엔 좀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당신의 말은 그들의 관계에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고 추측하는 거군요."
   "나는 모르겠소. 예상대로라면 그래야 되는데 수치나 해석으로는 대상의 감정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주어지지 않고 있소. 적절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감정의 결과는 앙금처럼 남아 있는데 그 감정을 생성시킨 기억이나 유인들이 머리 속에서 삭제되어 있는 것이오."
   "나는... 당신의 전공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즉, 과정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알아낸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죠."
   검은양복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연 담배를 꺼내어 피워 물었다. 
루터는 잠시 담배와 환자를 번갈아 보며 저지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당신이 발안한 정신정화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도 알아야 하며, 지금 이 대상의 의식 속에서 어떤 정화를 이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듣기로는 일차적으로 대상이 가질만한 불법 혁명의 불씨를 제거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효과는 확실한지.."
 
   검은양복은 문득 생각 난 듯 주머니에서 작은 홀로그램용 컴퓨터를 꺼냈다. 그는 기계의 전원을 작동시키고는 자신의 작품을 관찰하는 예술가처럼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홀로그램은 루터박사의 눈앞에 작은 입방체의 공간을 만들어냈고 그 공간 안의 물질들은 희뿌연 안개처럼 흐릿하다가 이내 비정상적일 정도의 선명함으로 입체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 공간에서 약 칠십여명의 관중을 눈앞에 두고 연설을 하는 피플 김의 모습이 확대되었다.
   "이건 세계 노동절 기념 대회를 앞둔 그의 연설 광경입니다. C-5 주거지구에서 자동화 노동자 그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죠. 이보다 확실한 자료는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그가 사용한 낱말군의 그룹을 한번 검색해보면 아시겠지만..  그는 '사회 일탈 사전'에 나오는 낱말의 3퍼센트를 이 모임에서 사용했습니다. 또한 또 하나의 자료는 '다수자의 의자'파가 불법성을 보이기 이전의 창립회의에서 그가 대표 발기인 연설을 맡았던 것입니다. 이 자료들은 불충분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TBD' 그룹을 와해시킬 때도 이 정도로 확실한 자료는 없었죠."
   "난 당신들 정보국은 그 이상의 자료를 갖고 있는 줄 알았소. 생각보다 형편 없구만."
   검은양복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현대로 올수록 사회일탈적 그룹들의 활동이 비밀스러워지고 있다는 겁니다. TBD 그룹때만 해도 우린 육체적인 고문으로 필요한 정보 이상을 빼내고 또..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엔 그런 방식도 소용없게 되었죠.  적들은 정보를 뇌 깊숙이 감추기도 하고 검거시에 특수한 약물로 정보자체를 녹여버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대응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정보를 빼내고 그들을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죠."
   "좋소. 난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수백 명의 대상들을 그들 스스로도 모르게 착한 시민으로 변화시켰소. 근데 이 '다수자의 의지'파 사건 이후론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생겨났소. 그건 이 그룹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정상적인 뇌활동의 소유자가 아닐 뿐더러, 내가 예견한 패턴에 역행하는 요소를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오."
   "그건 당신이 갖고 있는 학설의 문제점이 아닙니까?"
   루터 박사는 상대방의 공격성 어린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만큼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그럴런지도 모르지... 아뭏든 난 최선을 다했소."
   "그건 그렇고 대상의 의식 속에서 변경을 가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변경의 효과는 어느 정도입니까"
   "음... 당신은 전공자가 아니니 비유를 들어 간단히 설명하겠소. 우리는 그의 뇌 전극에 천 이백개의 전극섬유를 연결했는데 이 섬유는 각각 오백개의 독립된  전극관을 가지고 있소.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의식패턴을 추적하고 하나의 질문이 화학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의 모형을 만들어 낸 것이오. 그리고 그 모형의 회로에서 일부분으로 수정하여 다른 모형회로와 접지를 시키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대상은 이전에 해왔던 대답과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오. 그러나 문제점은 뇌가 단일한 연결선과 회로로 구성된 기계가 아니란 것이지.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할 경우 의식은 수많은 우회로를 선택할 수 있고 소규모 회로를 수정한다 해도 그 회로의 이질성을 무시한채 다른 방법으로 자기 길을 갈 가능성이오. 따라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강력하고 넓게 개통된 길을 화학적, 생물학적 처리에 의하여 생산해냈소. 그리고 우리는 이 작업을 가능케하기 위해 약간의 리셉터를 개조해냈소. 개조된 패턴을 무시하고 다른 길을 택할 확률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0.7 퍼센트 정도요.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상은 분명한 혼란을 느끼기 때문에 결국엔 그 '다른길'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다분하오. 결국 대상은 주어진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못한채 포기하고 마는거지.“
 
   "피플 김의 경우는 어떤 부분을 개조해낸 겁니까"
   "우린 그의 의식 속에 있는 죽은 아내에 대한 우호성을 제거했소. 이 작업은 무척 힘이 들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지. 그리고 혁명사상에 대한 부분인데 우리는 그가 공동체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부정적인 것으로 손질해놓았지. 또 하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를 뒤틀린 콤플렉스로 바꿔치기 해버렸소. 그리고..."
   "또 뭡니까?"
   "난 같은 뇌생리학자로서 그와는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지. 대상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판단해보건데 나는 그가 별볼일 없는 과학평론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검은양복은 과시욕에 젖어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터를 바라보며 콧웃음을 치고 빈정댔다.
   "당신은 안전기구가 준 시간을 또 쓸데없는데 소비했군요. 이젠 뇌생리학에 관한 한 당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남의 뇌속의 지식을 도적질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미 당신은 이 분야의 독보적 위치를 공고히 했으니..."
   루터 박사는 상대방의 냉소어린 칭찬에 어린 아이처럼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 확인 과정만이 남아 있소. 이쪽으로 오시오"
 
   3. 브레인스코프
 
   박사는 잠자는 듯 누워 있는 환자를  보더니 거대한 회색 기계 장치의 전원을 올렸다. 막대한 파워가 상승하는 듯한 곡선을 보이더니 계기류가 정상이라는 신호를 내고 출력이 100퍼센트라는 것을 화면에 명시했다. 검은양복은 하나의 벽면 전체를 덮은 감청색 평면 브라운관 앞에 서서 물끄러미 화면을 응시했다. 박사가 복잡한 계기류의 스위치를 모두 점검한 뒤 모니터의 화면을 작동시키자 흐릿한 영상이 화면에 나타났다.
   "지금은 대상의 램수면기요. 우리는 그의 꿈속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영상들을 확인할 수 있지. 이건 내가 만든 브레인스코프라는 기계요"
   "선명도가 좀 떨어지는 것 같군요"
   "사실 이게 검색의 불편한 조건이오. 말하자면 일종의 불확정성의 원리랄까. 세부를 선명하게 만들면 전체적인 배경이나 다른 부분들이 더 흐릿하게 나타나지. 마치 시각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만약 선명한 상을 얻기 위해 부분부분을 포착해서 하나의 사진으로 만든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뿐더러 변화하는 의식을 한낱 정지된 것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소. 그러니까 이건 동화상(動畵象)을 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지요 "
   "지금 확인하려는 것은 뭡니까?"
   "내가 의문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이 대상의 정체성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아주 단순하고 유아적이라는 것이오. 무의식의 세계는 피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가장 무게 있고 충격적인 것들이 프라스크 속의 침전물처럼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이오. 무의식을 이루는 인자들은 끄집어내기도 힘들 뿐더러 알기 힘든 연관성을 가지고 모여 있소. 이것은 언뜻 보기엔 가장 비중이 큰 핵페기물을 담은 그릇 같은 거지. 잡동사니처럼 널려있기도 하고 일부분은 놀라우리만치 논리정연하기도 하고. 또 하나는 대상이 갖고 있는 의식의 결절점들, 마치 동양의 명상처럼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시간대, 그리고 분명히 의식이 살아있는 시간대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문이오."
 
   박사가 예정된 스위치를 누르자 화면은 밝은 색에서 점점 어두운 색으로 변해갔고 몇 분이 지나자 어두운 동굴에서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 광경이 흐릿하게 비쳐졌다. 박사는 이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대상이 가진 무의식의 중요한 부분이오."
   검은양복은 유심히 관찰했지만 도대체 어떤 광경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작게 움크린 물체는 언뜻 보기엔 사람과도 같았지만 그것조차 확신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물체는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는 듯 움찔거렸다. 대담한 성격의 그 조차도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괴기스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침묵을 깰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잠깐 루터 박사가 생각보다 천재적이고 광적인 인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박사는 화면을 분석하기 위해 몇가지 화학작용을 동반한 명령어를 기계에 기입했다. 그러자 화면 속의 동굴 위로 희고 춤추는 듯한 영상이 흔들거렸다. 순간 검은양복은 머리털이 쭈삣 서는 공포감을 느꼈다. 화면엔 교수형을 당한 한 여자의 흔들거리는 시신이 나무를 배경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검은양복은 직감적으로  그게 죽은 준 리의 영상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 영상은 대상의 무의식 속에서 조합된 것일 뿐 실제의 것은 아니었다. 검은양복은 준 리가 교수형 당할 때의 모습과 자료가 담겨진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교수형 기계는 일반인들에게는 공개가 되지 않은 것으로 금속제 의자와 목부분을 두르는 플라스틱 섬유가 튀어나온 장치였다.
 
   박사는 검은양복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그의 굳어진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동굴 속에서 울고 있는 유아의 영상이오. 그는 울면서 죽은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나는 맹세코... 이처럼 단순한 무의식의 창고를 본적이 없소. 비유를 들자면..."
   잠시 입을 다물더니 박사는 불현듯 불화가 치밀어 중앙에 놓여진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우리는 심해를 탐사할 수 있는 훌륭한 잠수정을 겨우 만들어서 오백년 전에 침몰한 해적선을 찾아 내려간거요. 모진 수압도 견디고 길고긴 여로 끝에 겨우 바닥에 와 닿았단 말이오. 그런데 그 바닥엔 아무것도 없고 이런 낙서만이 써 있는 것이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이 멍청이들아!'라고. 나는 피플 김이 왜 어린아이용 동화 출판사 같은 것을 찾아서 안주하려 했는지에 대한 간단한 답을 찾아냈소."
   검은양복은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물었다.
   "이 영상이 의미하는 바가 뭡니까?"
   박사는 검은양복의 질문을 무시한 채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 영상을 찾기 이전까지 우리는 그의 뇌속에 있는 수만개의 방을 뒤졌소. 그것을 기록해 놓은 종이의 분량과 정보량은 이제 웬만한 백과사전을 넘을 정도란 말이오. 그런데 결과가 고작 이거요... 방금 뭐라고 하셨소?"
   "이 영상이 주는 정보가 뭐란 말입니까?"
   "그건 아주 단순한거요.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지. 이를테면...."
   "이를테면?"
   "그건 '분노'와 '공포'요"
 
   4. 변절자
 
   피플 김은 병원의 독실에 혼자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자신이 22일전 졸도를 해서 병원으로 실려왔다는 것과 긴 시간동안 치료를 받아서 치명적인 뇌출혈이 성공적으로 완치되었다는 것을 들었고, 수술의 결과에 대해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보호자도 없이 독신인 그를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따뜻한 눈초리로 대해주었고 아주 오랜만에 평화스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쯤 열려진 창으로는 한여름의 무더운 공기를 가르며 뛰노는 아이들의 외침이 경쾌하게 들려왔다.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였기에 그런 모든 풍경들이 단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윽고 작은 노크 소리가 나더니 그의 주치의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주치의는 오십대 중반쯤 되보이는 인물로 백발에다 흰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아주 온화하게 보이는 인물이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아주 좋아요. 모든 게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럽습니다"
   "사실은 몇가지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김선생님의 뇌활동은 극히 정상이지만 우리로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이런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뭔가요?"
   "신경복구 테스트라고 하는 거죠"
   "아... 뭔지 알겠습니다"
   "하하. 저보다는 김선생님이 더 잘 아실테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주치의는 잠시 설문지를 들여다보더니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이런, 인턴들이 짓궂은 문제를 만들어 냈군요. 김선생님이 유명인사인 것을 시기하나본데."
   "하하. 아무래도 좋습니다."
 
   "첫번째 문제는 이겁니다. 당신은 현재의 환경오염과 그 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제 전공분야가 아닌데. 환경보건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죠. 무지를 무릅쓰고 말해야 한다면 이번에 환경국에서 내놓은 안건에 거의 찬성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자본기업의 트러스트가 자동화 공정에 편입된 노동자들을 기계 부품화하는 현실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피플 김은 잠시 이마에 주름을 모으더니 혼란스러운 듯 대답했다.
   "문제가 현실을 정확히 지적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전 세계의 단일화 자동화 공정은 피할 수 없는 과학 기술의 미래입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비인간화가 진행될 수도 있다는 보지만 그건 구조적인 문제는 아니지요.  언제나 인간의 지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요"
   "아주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자본 트러스트로 이룬 국제 자본연맹의 과학기술은 모든 존재를 상품 이미지화시키고 물신화시켰다'라는 명제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은?"
   "일고의 가치도 없군요. 저는 사회학적인 전문지식은 없지만, 아마도 과학적 발전과 사회구조의 재편이 가소화됨에 따라 동반되는 가치관의 혼란, 더 정확히는 사회집단적인 신경증에서 나온 말처럼 보이는군요."
 
    마지막 말에서 피플 김은 약간의 두통이 오는지 더욱 인상을 쓰고 이마의 주름을 모았다. 그러자 주치의는 상대방의 말을 확신시켜주려는 듯 과장된 제스츄어로 무릎을 쳤다.
   "호오. 김선생님의 생각은 저와 아주 비슷하군요. 이렇게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드문 일인데.. 검사 결과는 곧 통보해 드리지요. 개인적 소견은 불필요하겠지만 제 사견으로는 아주 정상적입니다"
   "고맙습니다"
   "김 선생님, 선생님은 혼자의 몸입니다. 건강을 돌볼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신경을 써야 하는데 현대와 같이 정신없는 사회에선 그게 힘들죠. 어차피 자기 건강은 자기가 돌보아야 하겠지만. '나는 혼자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정기적인 진단을 받거나 주치의를 정기적으로 만나보십시오"
   순간 피플 김은 전기에라도 감전 된 듯 몸을 움찔했다. 주치의로 가장한 루터는 깨닫지 못했지만 피플 김의 뇌리 안에선 섬광처럼 한 문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문장은 『광역 언어 검색 결과 주어진 신호가 안전지침 1호의 조건에 불충분합니다. 연결회로를 다시 폐쇄합니다』라는 것이었다. 피플 김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냉정히 자신을 둘러보았다. 순간적인 착각이었을까. 피플 김은 두려움과 당혹감에 젖어서 돌아서는 주치의의 등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퇴원하여 자신의 낯익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피플 김은 가방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방을 나오기 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와도 같은 초박형 통신 모니터는 여전히 켜놓은 채였다. 문득 중앙의 소파 위에 걸린 죽은 아내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는 낯설은 감정에 충격을 받았다. 다부진 입매무새를 가져서 강인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귀엽고 예쁜 인상의 아내가 왠지 역겨운 감정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은 맹세코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그의 뇌리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이내 머리속을 가득 메웠다. 피플 김은 아내의 사진을 떼어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그는 외투를 벗어서 소파에 집어던진 뒤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저 여자를 잊지 못하여 아직까지도 사진을 걸어 놓았던 것일까. 피플 김은 눈을 지긋이 감고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10년동안을 한결같이 침묵을 지켜온 아내를 버린 것은 우연한 사건처럼 느껴졌지만 의혹을 지울 수는 없었다. 피플 김은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한 뒤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혼자군."
   이 중얼거림은 그의 혀의 굴곡을 타고 흘러 강력한 접점을 자극시키고 잠재워 두었던 의식의 핵을 일깨웠다. 그의 의식의 정수, 혁명사상과 뇌생리학의 고등지식, 그리고 복잡한 무의식과 아내에 대한 연민을 담은 뇌의 핵은 혀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순간 패쇄되었던 회로가 연결되는 강한 자극이 그의 몸을 경련시켰고 그의 머리 속에는 밝고 강한 문장이 지나갔다.
   
  『광역 언어 검색 결과 안전지침 1호에 부응하는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패쇄된 신경회로를 개방합니다』
 
   그는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고 20여일간의 납치의 진상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굳게 잠겨진 욕실 옆의 철문으로 걸어갔다. 그 문을 열자 창문도 없고 이렇다 할 가구도 비치되지 않은 넓은 방이 나타났다. 문을 닫자 방은 곧 완벽한 암흑에 잠겼다. 그는 방의 중앙에 놓여있는 점자판 책들을 헤집고 조그만 스위치가 연결된 기계 앞에 익숙하게 앉았다. 이내 피플 김은 뇌활동을 거의 정지시키는 명상에 들어갔고 혀 안에서 맥박치는 뇌핵과 뇌핵에 연결된 유일한 신경원이 숨겨진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스위치 위에 놓았다. 하나의 촉각과 그것을 잇는 뇌핵만이 또렷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피플 김은, 환희에 찬 어투로 자신의 동료들에게 모르스 부호를 보냈다.
 
   『 20일간 정신정화 위원회에 납치되었었음. 조직의 보위에 관련된 사항은 전혀 누설을 하지 않음.  차후에 있을 중앙모임에 참가 가능할 것임』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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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5 02:50 2007/04/25 02:50

6 Comments (+add yours?)

  1. 그유 2007/04/26 03:00

    재미있게 읽었어요.
    역시 혀는 중요한 것이여..

     Reply  Address

  2. 그유 2007/04/26 03:09

    근데 TBD가 뭔가요? 제가 아는 TBD=TO BE DETERMINED인데..

     Reply  Address

  3. 새벽길 2007/04/26 03:17

    TBD는 'What is To Be Done?'의 약어예요.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의 영어제목이죠. 80년대에 운동물을 먹었던 사람들은 다들 맑스-레닌주의 원전학습을 했는데, 이 책을 빼놓지 않고 읽었어요. 백두라는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듯 하네요. 보지 않은지 십오년도 넘었는데...

     Reply  Address

  4. 지드 2007/04/27 10:43

    요즘 뻠(firm)에서온 턴트(consultant)들은 To Be developed라고들..하더라고요.. 빈 장표에 빼곡이 들어있는 TBD들.. ㅡ,.ㅡ;;

     Reply  Address

  5. 새벽길 2007/04/28 18:41

    아마 찾아보면 TBD가 나타내는 원래 말이 상당히 될 듯해요.

     Reply  Address

  6. 새벽길 2008/06/05 04:2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290990.html
    일본 사회 달구는 ‘프롤레타리아 소설’ (한겨레,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2008-06-01 오후 10:20:27)
    특파원 리포트

     Reply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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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적기가의 추억 Tracked from 2008/06/05 04:36

    민지네 알리미에서 채팅을 하다가 적기가 얘기가 나와서 그에 대해 설명을 하긴 했지만, 왠지 부족해서 이에 대해 찾아보았다. 실미도에 이 노래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언급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만 미디어오늘(http://mediatoday.co.kr)에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가 그 역사와 유래에 대해 자세히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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