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의 천국은? <천국을 향하여>
어제, 아니 오늘 새벽 우연히 TV에서 지난 2005년 제작된 영화 <천국을 향하여>(Paradise Now)를 보게 되었다. 유선방송을 달지 않은 관계로 TV상태가 영 아니었지만, 잘만 연결하면 윤곽은 보였기 때문에 심심풀이로 켜놓고 있다가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테러집단으로 낙인찍혀 있는 팔레스타인 청년의 시선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테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정작 총쏘는 것이나 폭탄 투척과 같은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전쟁과 폭력, 테러의 무모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테러가 나오면 대부분 악의 이름으로 나왔고,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당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테러범'들이 왜 그 테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그 테러가 사실은 무모한 행동이며 그와는 다른 방식의 투쟁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테러범'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전쟁의 일환이며, 전투기나 탱크가 없기 때문에 하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이것이 성과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면 그저 휴머니즘 영화일 뿐이겠지만, 영화는 더 나아가 테러를 저지르게 하거나 테러가 무모한 행동임을 입증시키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상기시킨다. 테러보다 테러저지의 명분으로 자행되는 이스라엘의 폭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이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至殺人也 罪益厚於竊其桃李 殺一人謂之不義
今至大爲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謂之義
此可謂知義與不義之別乎 (非攻)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그것을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묵자가 소염편에서 한 말이다.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보면서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게 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테러든, 전쟁이든 이를 수단으로 무엇을 달성하려 해서는 안된다. 내가 '정의의 전쟁'이라는 개념에 대해 반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배우들은 처음 보고 듣는 이들이다만, 그들의 연출이나 연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팔레스타인 청년, 자이드와 할레드라면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이성적으로는 할레드의 선택이 맞다고 보는데, 자이드가 걸어간 길도 이해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남은 사람들에게 순교자 또는 영웅으로 받들여지겠지만, 그게 그들이 원하는 삶이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지옥같은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보다 알라신의 곁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인 죽음이 천국이었으리라. 그러한 선택의 상황에 부딪히지 않은, 아니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내가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41527
줄거리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두 명의 팔레스타인 청년.
신의 진리를 쫓아 자신의 몸을 불사르려던 그들에게
진정한 천국은 과연 어디일까…?
이스라엘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그들의 압제와 차별정책, 절대적 빈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젊은 청년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자신의 온몸을 산화시켜 이스라엘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뿐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자이드’와 ‘할레드’도 어느 날 저항군 조직의 부름을 받고, 기꺼이 “순교자”의 소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막상 가슴에 폭탄 띠를 두르고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로 향하던 두 청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이드를 사랑하는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여성 ‘수하’가 그들의 계획을 눈치채게 되는데..
지옥 같은 현실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것보다는, 영웅적인 죽음을 택해 천국으로 가고자 했던 그들. 그러나 과연 끊임없이 죽이고 죽고, 보복에 보복을 거듭하는 이 저항방식이 그들이 원하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인가, 그들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 그들을 주저하게 만든다.
삶의 마지막이 될 48시간, 그들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Hot Issue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상영되지 못하는 <천국을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는 이스라엘 정부의 영화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이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이고 아랍어 영화라는 점에서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대부분의 대형 개봉관에서 상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 전세계 60여 개국에서 상영되고 있거나 앞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실패, 그 진실은 ?
얼마 전 진행되었던 제78회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천국을 향하여>는 노미네이트 되었을 당시 유대인들의 반발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으며 심지어는 유대인 로비스트들이 <천국을 향하여>의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수상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도 로이터 통신을 통해 전해진 바 있다.
스필버그의 <뮌헨>에 이은, 그러나 그와는 다른…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뮌헨>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폭력, 테러에 대한 부분을 문제 삼는다. 과연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피의 보복이 진정으로 원하는 최선의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바라봤던 <뮌헨>과 달리, <천국을 향하여>는 자살폭탄 테러단으로 지목된 팔레스타인 청년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슷한 주제로 귀결되는 이들의 고민을 비교해보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있어 또 하나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테러와 폭력의 무모함을 일깨운다 !
폭력성을 고발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에는 피가 난무하는 자극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전쟁과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들 중에서 핏빛이 보이지 않는 영화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천국을 향하여>는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깔끔하고 조용한 영상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라는 민감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테러와 폭력의 무모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잔잔한 전개 속에서 오히려 그 감동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팔레스타인, 한국인으로써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
2천년 전에 이 영토의 주인이었다는 이스라엘에 떠밀리듯 2천년 동안 살아왔던 곳에서 쫓겨나 국가를 잃은 팔레스타인 난민들. 이스라엘은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사적 감시와 고립장벽의 건설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역시도 이름만 ‘자치지구’나 ‘자치정부’ 일 뿐 여전히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일제 점령기에 국가와 주권을 잃었던, 그리고 강대국들에 자치권을 빼앗겼던 과거가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 팔레스타인을 멀게만 느낄 수 없는 이유이다.
About Production
여전히 총격과 폭탄으로 얼룩진 지옥과도 같은 그 곳, ‘나불루스’에서 감행한 촬영
“… 그들은 떠났지만 저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영화보다 중요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거의 파멸 지경에 달했고,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수배자 체포를 위해 도시를 침범하고 새벽에 탱크가 굴러다니며 총격이 끊이지 않는 지역, ‘나불루스’
<천국을 향하여>팀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군 사이에서 조심스레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폭탄 테러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으로 인해 그들 중 한 분파에 의해 지역 담당 매니저 Hassan이 납치되고, 당장 ‘나불루스’를 떠나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같은 날, 자동차 가까이로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이 있었으며 유럽스텝 6명에 대한 무장괴한들로부터 재차 협박이 계속되기까지 했다. 결국 그 6명의 유럽 스텝이 떠나고 촬영은 난항에 부딪혔다.
그 곳에 남아야 할지 떠나야 할지 계속되는 딜레마 속에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지역기자와 외신기자들은 지역담당 매니저인 Hassan의 납치사실을 전세계로 보도하려고 했다. 이로 인한 더 위험한 상황을 피하고자 보도중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내 적대파가 촬영팀이 ‘미국인/스페인 음모단’이라는 글귀가 적힌 팜플렛을 유포하면서 결국 이들은 법외추방자가 되었다.
말 그대로 전쟁터와 같았던 촬영 현장…
“… 영화 소재의 출처성과 작업 진행을 위해 나불루스에서의 촬영을 계속하고자 했으나, 그 곳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가능한 한 실제와 가깝게 묘사되어야 하고, 영화가 진짜와 같은 모습 및 감정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데 따른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트장에서 겨우 300미터 떨어진 광산이 폭파하였고, 전날 밤 촬영했던 바로 그 곳에는 세 명의 청년이 죽어있기도 했다. 이에 ‘수하’역의 여배우 루브나 아자발은 충격으로 기절하기까지 했다. 바로 전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오가던 곳이 폭탄으로 폐허가 되고 어쩌면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절망으로 가득 찬 전쟁터와도 같은 촬영 현장. 결국 ‘나불루스’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처럼 나불루스에서의 촬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곳에서의 촬영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
He said…
“<천국을 향하여>는 우리의 생각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영화다, 또한 그 자극으로 말미암아 우리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희망적인 시선을 가지고 열린 토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다. 그것이 ‘나불루스’에 뛰어들어 <천국을 향하여>를 만든 목적이다. “
이 영화는 단순히 가까운 장래의 실제 이슈에 대한 의미있는 논의를 공개하는데 의의가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청신한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성공하길 바란다.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가 삶의 획득을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베를린에서 올 초에 이 영화가 상영된 이래, 많은 이야기꺼리와 반박들이 영화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영화의 사상으로부터 나왔다.
어떤 상황의 무게감과 복잡성들이 영화에 모두 보여지기는 불가능하다. 어떤 진영도 도덕적 입장을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삶을 택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은 우리가 도덕이라 부를 수 있는 것 밖에 있다. 우리가 더 큰 대화창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의미있는 무언가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불루스에서 우리의 삶을 내던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테러집단으로 낙인찍혀 있는 팔레스타인 청년의 시선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테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정작 총쏘는 것이나 폭탄 투척과 같은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전쟁과 폭력, 테러의 무모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테러가 나오면 대부분 악의 이름으로 나왔고,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당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테러범'들이 왜 그 테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그 테러가 사실은 무모한 행동이며 그와는 다른 방식의 투쟁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테러범'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전쟁의 일환이며, 전투기나 탱크가 없기 때문에 하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이것이 성과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면 그저 휴머니즘 영화일 뿐이겠지만, 영화는 더 나아가 테러를 저지르게 하거나 테러가 무모한 행동임을 입증시키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상기시킨다. 테러보다 테러저지의 명분으로 자행되는 이스라엘의 폭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이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至殺人也 罪益厚於竊其桃李 殺一人謂之不義
今至大爲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謂之義
此可謂知義與不義之別乎 (非攻)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그것을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묵자가 소염편에서 한 말이다.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보면서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게 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테러든, 전쟁이든 이를 수단으로 무엇을 달성하려 해서는 안된다. 내가 '정의의 전쟁'이라는 개념에 대해 반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배우들은 처음 보고 듣는 이들이다만, 그들의 연출이나 연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팔레스타인 청년, 자이드와 할레드라면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이성적으로는 할레드의 선택이 맞다고 보는데, 자이드가 걸어간 길도 이해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남은 사람들에게 순교자 또는 영웅으로 받들여지겠지만, 그게 그들이 원하는 삶이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지옥같은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보다 알라신의 곁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인 죽음이 천국이었으리라. 그러한 선택의 상황에 부딪히지 않은, 아니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내가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41527
줄거리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두 명의 팔레스타인 청년.
신의 진리를 쫓아 자신의 몸을 불사르려던 그들에게
진정한 천국은 과연 어디일까…?
이스라엘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그들의 압제와 차별정책, 절대적 빈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젊은 청년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자신의 온몸을 산화시켜 이스라엘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뿐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자이드’와 ‘할레드’도 어느 날 저항군 조직의 부름을 받고, 기꺼이 “순교자”의 소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막상 가슴에 폭탄 띠를 두르고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로 향하던 두 청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이드를 사랑하는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여성 ‘수하’가 그들의 계획을 눈치채게 되는데..
지옥 같은 현실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것보다는, 영웅적인 죽음을 택해 천국으로 가고자 했던 그들. 그러나 과연 끊임없이 죽이고 죽고, 보복에 보복을 거듭하는 이 저항방식이 그들이 원하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인가, 그들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 그들을 주저하게 만든다.
삶의 마지막이 될 48시간, 그들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Hot Issue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상영되지 못하는 <천국을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는 이스라엘 정부의 영화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이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이고 아랍어 영화라는 점에서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대부분의 대형 개봉관에서 상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 전세계 60여 개국에서 상영되고 있거나 앞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실패, 그 진실은 ?
얼마 전 진행되었던 제78회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천국을 향하여>는 노미네이트 되었을 당시 유대인들의 반발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으며 심지어는 유대인 로비스트들이 <천국을 향하여>의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수상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도 로이터 통신을 통해 전해진 바 있다.
스필버그의 <뮌헨>에 이은, 그러나 그와는 다른…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뮌헨>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폭력, 테러에 대한 부분을 문제 삼는다. 과연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피의 보복이 진정으로 원하는 최선의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바라봤던 <뮌헨>과 달리, <천국을 향하여>는 자살폭탄 테러단으로 지목된 팔레스타인 청년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슷한 주제로 귀결되는 이들의 고민을 비교해보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있어 또 하나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테러와 폭력의 무모함을 일깨운다 !
폭력성을 고발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에는 피가 난무하는 자극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전쟁과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들 중에서 핏빛이 보이지 않는 영화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천국을 향하여>는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깔끔하고 조용한 영상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라는 민감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테러와 폭력의 무모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잔잔한 전개 속에서 오히려 그 감동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팔레스타인, 한국인으로써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
2천년 전에 이 영토의 주인이었다는 이스라엘에 떠밀리듯 2천년 동안 살아왔던 곳에서 쫓겨나 국가를 잃은 팔레스타인 난민들. 이스라엘은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사적 감시와 고립장벽의 건설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역시도 이름만 ‘자치지구’나 ‘자치정부’ 일 뿐 여전히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일제 점령기에 국가와 주권을 잃었던, 그리고 강대국들에 자치권을 빼앗겼던 과거가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 팔레스타인을 멀게만 느낄 수 없는 이유이다.
About Production
여전히 총격과 폭탄으로 얼룩진 지옥과도 같은 그 곳, ‘나불루스’에서 감행한 촬영
“… 그들은 떠났지만 저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영화보다 중요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거의 파멸 지경에 달했고,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수배자 체포를 위해 도시를 침범하고 새벽에 탱크가 굴러다니며 총격이 끊이지 않는 지역, ‘나불루스’
<천국을 향하여>팀은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군 사이에서 조심스레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폭탄 테러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으로 인해 그들 중 한 분파에 의해 지역 담당 매니저 Hassan이 납치되고, 당장 ‘나불루스’를 떠나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같은 날, 자동차 가까이로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이 있었으며 유럽스텝 6명에 대한 무장괴한들로부터 재차 협박이 계속되기까지 했다. 결국 그 6명의 유럽 스텝이 떠나고 촬영은 난항에 부딪혔다.
그 곳에 남아야 할지 떠나야 할지 계속되는 딜레마 속에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지역기자와 외신기자들은 지역담당 매니저인 Hassan의 납치사실을 전세계로 보도하려고 했다. 이로 인한 더 위험한 상황을 피하고자 보도중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내 적대파가 촬영팀이 ‘미국인/스페인 음모단’이라는 글귀가 적힌 팜플렛을 유포하면서 결국 이들은 법외추방자가 되었다.
말 그대로 전쟁터와 같았던 촬영 현장…
“… 영화 소재의 출처성과 작업 진행을 위해 나불루스에서의 촬영을 계속하고자 했으나, 그 곳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가능한 한 실제와 가깝게 묘사되어야 하고, 영화가 진짜와 같은 모습 및 감정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데 따른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트장에서 겨우 300미터 떨어진 광산이 폭파하였고, 전날 밤 촬영했던 바로 그 곳에는 세 명의 청년이 죽어있기도 했다. 이에 ‘수하’역의 여배우 루브나 아자발은 충격으로 기절하기까지 했다. 바로 전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오가던 곳이 폭탄으로 폐허가 되고 어쩌면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절망으로 가득 찬 전쟁터와도 같은 촬영 현장. 결국 ‘나불루스’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처럼 나불루스에서의 촬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곳에서의 촬영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
He said…
“<천국을 향하여>는 우리의 생각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영화다, 또한 그 자극으로 말미암아 우리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희망적인 시선을 가지고 열린 토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다. 그것이 ‘나불루스’에 뛰어들어 <천국을 향하여>를 만든 목적이다. “
이 영화는 단순히 가까운 장래의 실제 이슈에 대한 의미있는 논의를 공개하는데 의의가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청신한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성공하길 바란다.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가 삶의 획득을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베를린에서 올 초에 이 영화가 상영된 이래, 많은 이야기꺼리와 반박들이 영화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영화의 사상으로부터 나왔다.
어떤 상황의 무게감과 복잡성들이 영화에 모두 보여지기는 불가능하다. 어떤 진영도 도덕적 입장을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삶을 택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은 우리가 도덕이라 부를 수 있는 것 밖에 있다. 우리가 더 큰 대화창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의미있는 무언가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불루스에서 우리의 삶을 내던질 수 없었을 것이다.
hongsili 2009/03/09 15:03
TV에서 이런 영화를 해주기도 하는군요! 저는 미국에 있을 동안 극장에서 봤는데, 정말 심장 터져 죽는 줄 알았어요.
새벽길 2009/03/09 16:15
TV에서 가끔은 괜찮은 영화를 방영해줄 때가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