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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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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입되어 있는 모임의 게시판에 가시나무님이 올린 글을 보고 생각나서 예전에 네이버블로그에 올려두었던 글을 퍼다 올린다. 노래 파일도 있으니 사연과 함께 들어보시길... 물론 이 노래를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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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2006/02/14 18:07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에서 하하하쏭님이 올려주신 글 중에서 다시 퍼왔습니다. 찾아보니 산하님이 "늙은 대공계 형사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하종강의 노동과 꿈에 올려주신 글이네요. 쩝...
 
글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노래는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는 노래입니다. 복음송 느낌이 들어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노래인데, 노래에 얽힌 사연을 듣고 나서 여기에 노래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연 중에 나오는 조모라는 서울법대 학생은 아마 서울대 물리학과에 적을 두었던 조정식 열사가 아닌가 합니다. 그 분이 그렇게 위장취업 중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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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선배들은 물론이거니와 얼치기였던 저보다 열심히 살았던 동기나 후배들은 ‘대공계’ 형사들하고의 인연이 한 자락 걸쳐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대공계 형사라면 어려서 열심히 보던 드라마 ‘추적’이나 ‘113 수사본부’에서 영웅적으로 그려졌던 형사들 외엔 별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학교 앞에서 등굣길의 저를 날카롭게 검문하고 가방에서 나온 조국통일 머리띠를 들고서는 일장 훈계를 했던 사람도 대공계일 것이고, 가끔 학교 앞에서 선배들이 ‘저게 오 형사야.’라고 일러주던 반백의 신사도 학교를 담당했던 형사였겠지만,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들의 취조를 받거나 혹여 제가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큰 인물’이었던 적은 다행히도 (불행히도?) 없었습니다.
 
그렇듯 순진한 민간인(?)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선량한(?) 시민으로 살고 있는 제가 과거의 이 ‘대공’ 형사들을 경향 각지로 찾아다니며 면접할 일이 있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얘기입니다만 요즘은 아예 ‘대공계’ 또는 ‘대공과’라는 이름이 아예 사라졌더군요. 즉 보안과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디다. 제가 만난 형사들 가운데 인천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년퇴직을 1년 앞둔 형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과 하루 종일 서울과 인천을 쏘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었지요. 고 박종철씨의 죽음을 덮으려 했던 박모 치안감이 얼마나 유능한(?) 간첩 잡이 전문가였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문에 가담했던 조 아무개라는 사람은 대구에서 날고 기는 대공형사였는데 서울로 스카우트(?)된 지 몇 달만에 신세를 조져 버려서 인생만사 새옹지마의 실례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졌던 86년 5월 3일의 인천의 생생한 기억들..... 이른바 한때 ‘적의 심장부’(?)에서 활동하던 늙은 수사관의 회고를 듣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아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범인 문 아무개가 지금 뭐하고 사는지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끌러도 풀어도 다하지 않을 것 같은 베테랑 대공 형사의 이야기 보따리 끝에 제가 툭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간첩 잡아 보셨어요?”
“....... 심문은 해 봤죠.”
“아니 수십 년 동안 많이 잡으셨을 거 같은데.”
“학생들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이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분의 짤막한 말, “학생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에서 다양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거나 불려서 늘어놓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대적했던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연민을 지닌 듯 보인다는 것.
 
제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젤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과연 그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왕년에 박노해를 길렀노라 기염을 토하다가 지금은 참말이지 보면 토 나올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김 아무개 의원님이나 인천에서 오래 생활했을 노회찬 의원이나 그 외 지금은 쟁쟁한 기라성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옛날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적지않이 기대를 하기도 했지요.
“하나 있네요. 그런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 조.... 뭐였는데 서울대 79인가 80인가, 아니 훨씬 더 아래일 수도 있고.....”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조 아무개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인천의 어느 공단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암약(!)하다가 공장주의 신고로 결국 이 형사님한테 덜미가 잡혔답니다. 어쩌면 지금 제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지 않는 이 형사님도 당시엔 저승사자같이 무서운 몰골로 그 학생 앞에 섰을 수도 있겠고 맛 좀 보라고 고춧가루 그득 탄 물을 코에 들이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소름이 돋았습니다. 한 개인의 인간성 따위는 처참하게 망가지는 시대의 첨병들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기억 나시죠?”
“밥을 주니까,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요?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걸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그리구요?”
“말도 없는 놈이었어요.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었어. 주변 조사해 보니까 뭐 의식화같은 걸 시도하지도 못했더구만. 그렇게 수줍어했대.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더라고. 위장 취업이라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사람들하고 사와리가 좋아야 뭐 하는 거 아니우. 그런데 녀석은 영 아니더라고. ”
“그리구요?”
“잡혀 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 그런데 걔는 진짜 말 한 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더라고. 좀 말을 시켜도 한 마디도 안해. 마치 벙어리처럼.”
 
단지 그 이유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싱겁다 싶었습니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사람이 형사 인생 수십 년에 제일 큰 기억으로 남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요. 서울 법대를 나왔다니 그래도 고시라도 봤을 것이고 어느 동네에선가 인권 변호사 쯤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지금은 뭘 하는지 아시냐면서 심드렁하게 물었을 때 형사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죽었어요.”
“네?”
“집행 유예로 나왔거든. 그런데 다른 공장에 또 갔다는 건 들었어요. 어느 날 부평역 앞에서 녀석을 우연히 만났지. 그래 역 앞에서 한 1시간 동안 붙잡고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 너 제발 이렇게 살지 말아라. 녀석은 강원도 태백인가가 고향이었어. 아버지는 광부였고. 그 아버지가 얘가 서울 법대 갈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 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 거야. 막장 인생에서 용 난 거 아냐. 그런데 그런 자식을 내 손으로 잡아 넣었고, 또 그런 일을 한다고 하니까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요. 빌었다니까. 걔한테..... 나중에 너 잘 된 뒤에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되는 거니까,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구요. ”
 
그 만남이 있은 지 달포가 지났을 때 형사님은 동료가 전하는 조 모 학생의 비보를 들었습니다. 위장 취업 중이던 공장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 깜박 졸았고 그예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 차갑고 무거운 기계의 금속성 밑에서 그 젊은 피를 쏟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형사님은 그때 자기가 강원도 태백의 고인의 아버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봐요. 태백에서 서울 법대 간다고 했을 때 그 아버지 얼마나 좋아했겠어. 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걸...... 그런데 그 아이가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었다......”
 
그분의 한숨 섞인 회고에 함께 어깨를 늘어뜨리며 지금 살았더라면 그래도 좋은 세월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하고 한 마디를 덧붙이자 그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걔는 그런 깜냥도 없었을 거예요. 그럴 놈이면 그 추운 날 길거리에서 자기 잡아넣은 형사 얘기를 1시간 동안이나 듣고 있겠어? 뿌리치거나 그냥 가버리면 되지....... 지금도 궁금해. 걔가 내 얘기를 듣고 있었던 이유가....... 겁나서 그랬던 건 분명히 아니고......”
 
조 모 학생은 그 30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렇다고 형사에게 대들거나 무시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형사의 훈계성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지요. “차라리 이 독재자의 개새끼야 뭐 이런 욕이나 하고 가 버렸으면” 그렇게 맘에 아리지도 않았을 텐데 며칠을 라면으로만 때운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은 붓고 손목은 말라버린 채 그는 한 형사의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 준 뒤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지요.
 
지금 어렵사리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신 분의 항소이유서의 한 구절, “가장 온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냈던 시대를 살았던, 정년퇴직을 앞둔 전 대공계 현 보안과 형사는 자신이 잡아 넣었던 한 젊은이, 밥 먹기 전 세 번 팔을 뻗으며 뭔가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강원도 출신 젊은이의 짧았던 젊음을 토로하며 여러 번의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한숨에 실린 듯 멍하니 있다 보니 궁금해지는 게 있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신 건 없네요? 또 기억나는 건?”
“그렇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하고...... 유치장에서 걔가 부른 노래가 있었는데.... 시끄러운 투쟁가 뭐 그런 건 아니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였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요?”
“그 노래는 걔가 죽은 뒤에 나왔지. 하여간 뭐 그런 노래였어.”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손톱을 깨끗이 깎아 준 김에 기타를 잡고 뚱땅거리다가 문득 형사가 채 기억해 내지 못했던 고인의 노래가 머릿 속에 들어섰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는 노래였던 것 같습니다. C 코드로 시작하는 그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실로 오랜만에 읊조리면서 저는 근 20년 전 인천 한 공장의 기계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한 사람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불렀을지 모르는 노래를 1,2,3절까지 다 불러 보았습니다. 원래 1,2절은 찬송가였습니다만 3절은 고인과 비슷한 삶을 선택한 누군가가 덧붙였다고 했지요.
 
그 후렴구입니다.... “너와 나 함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으며...... 죽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장로교 청년회 1집 - 이 세상 사는 동안
   
민청년 - 이 세상 사는 동안(현장녹음)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욱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받을 상처들
이 몸이 묻힌 후에 다 잊혀지리니

이 길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보다 더욱 귀한 건 자유를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장로교 청년회 선교사업회 1집
 
장청 테이프 1집이 발간 된 것은 85년의 일이다. 85년 여름 감리교 청년회 산하 노래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내겐 정말로 바쁜 봄을 보냈었다. 4월에 명동성당 천주교 청년회 문화팀과 감리교 청년회 문화선교위원회의 명동성당 성모마당에서의 연합공연, 그리고 6월말에는 류관순 기념관에서 기독교 교회협의회 (NCC) 가 주최하는 국제적 행사의 일환으로 교회협의회 가입교단인 기독교 장로회, 예수교 장로회, 감리교단 청년 문화단체들의 연합공연이 있었다. 공연의 구성단계와 대본 작업부터 마지막 공연이 올라가는 작업까지 정말 많은 작업들이 이어졌고, 힘겨우면서도 보람있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당시에 NCC 가입교단 중에서는 감리교 청년회에만 노래팀이 있었다. 기독교 장로회 (이하 기장), 예수교 장로회 (이하 예장) 에는 70년대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을 자랑하는 탈춤 (민속극) 팀들이 있었지만, 노래팀은 전무했었다. 따라서 음악과 탈춤이 한데 어우러지는 공연형식에서 음악적 작업의 몫은 다 우리에게 주어졌었다. 이렇게 다른 교단의 청년회 선배들을 알게 된 인연으로 공연 후 여름 언젠가 내게 연락이 왔다. 예장 청년회에서 노래팀을 새로 구성하려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따라서 주도적으로 노래팀 구성작업을 하고 있던 서울대 81학번 동기인 주현신이라는 친구를 이 때 만나게 된다. 전교조 음악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었던 주현신 바로 그 친구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는.
 
예장팀의 구성은 새문안교회 청년회, 영락교회 청년회, 서울대 기독교 학생회 출신들.. 그리고 영등포 산업 선교회 (성문밖교회) 활동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기존의 노래팀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나 음악적 감성에 조금 더 빨리 접근하려는 조급함이 있었다. 따라서 당장의 85년 여름 공연을 위한 인적 수혈을 필요로 했다. 서울대 메아리 출신의 82학번 이현관 (이후 새벽 활동 - '먼 훗날', '백두에서 한라까지'등을 작곡), 82학번 정용호 등을 권고하여 합류시켰던 기억이 있다.
 
이 테이프는 85년 장로교 청년회 전국연합회 (이하 장청) 여름대회에서 공연한 실황 테이프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장청 노래팀 멤버 중에 외국어대학교 방송국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음향 효과나 녹음등을 깨끗하게 해 낼 수 있었다고 듣고 있다. 그리고 교회 성가대에서 다져진 기본기를 가진 친구들과 대학 노래킴 출신들의 합류과 음악적으론 매끄러운 조화를 이루어내었다고 보여진다. 장청은 이후 2집 테이프를 내었지만, 구성원의 이질성을 조직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서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이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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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19:44 2009/11/24 19:44

3 Comments (+add yours?)

  1. 포카 2009/11/24 22:13

    .....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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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앙겔부처 2009/11/25 13:57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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