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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9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외딴방
  2. 2011/04/30
    백석의 고방을 감상하며
    외딴방
  3. 2011/04/29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외딴방
  4. 2011/04/29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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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1/04/28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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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1/04/22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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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1/04/22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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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1/04/22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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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1/04/21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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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1/04/21
    습작 - 열아홉의 그녀 4
    외딴방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그녀를 보내서는 안되었다.

진은 빗장뼈처럼 걸리는 그녀의 호흡을 느꼈다. 허리께에 머무는 그녀의 흐느낌과 함께.

 

 

"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구 !"

이수는 반드시 해명을 하여 누명을 벗겠다는 듯 변명을 계속했다.

진은 한숨이 나왔다. 화를 내다가 큰 소리도 나오게는 되었으나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수가 부러 방 안에 있으면서 집에 아무도 없는 척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러든 저러든 그녀가 사실 그렇게까지 놀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 나두 조심스러워서 천천히 기척을 내려고 한 거라구..."

이수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사뭇 애원조다. 하기야 제가 멀대같이 키만 컸지, 조숙한 그녀에게 대면 초딩이나 다름없을 텐데 언감생심...치한 취급을 받는 것이 제가 더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

" 누가 그렇게 놀라 소리지를 줄 알았냐구, 내가 뭘 어쨌다구, 그냥 마루로 나가면서 발소리 내도 못 들은 것 같기에 인사할라구..."

진은 그래도 그냥 말로 하지, 어깨에 손은 왜 올리냐구! 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로 내어놓는게 더 이상하다.

" 그래, 알았어. "

그냥 서서 쳐다보고 있는 이수.

" 괜찮대? "

" 그래, 혼자 딴 생각하다가 깜짝 놀란 것 뿐이라구. 너 때문 아니라구, 몇 번이나 얘기하더라. "

그래도 쳐다보는 이수, 망설이듯 하더니 결국.

" 무슨 생각을 하면 그렇게 놀랄 수 있어? "

하기야....진은 저도 황당했겠지 싶긴 하다. 단어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그 비명 소리는 그냥 외마디, 놀람의 방출이 아니었다. 최대한 크게 지르는, 길게 빼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늦은 귀가길의 구석진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덮쳐드는 사내의 팔에 갇히기 직전, 입을 틀어막히리라는 예감 속에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위급함을 알리는 비명이었다. 대문 앞에 오기 전에 귀에 꽂히는 그 소리가 그녀의 것임을 직감하며, 열쇠를 돌려 대문을 따며 이걸 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확 스쳐지나갔었던 진은 순식간에 뛰어오른 현관 앞에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당장 눈에 들어온 그녀의 움추린 어깨.  떨고 있는 손과 터져나오는 울음소리와 그 뒤에서 망연한 표정으로 두 손 쳐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굳어진 이수와 눈이 마주치자 당장 울기라도 할 것처럼 누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동생을 보면서는, 심장이 멈추는 듯 했었으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며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정말 괜찮대?"

이수는 얼마 전까지 누이와 그녀 사이를 걱정하며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이맛살 찌푸리며 말을 아끼던 것과는 딴판이다.

" 응. "

하지만, 그녀는 진이 와서 말해 주기 전에 이미 눈으로 이수를 확인하였으면서도 터져나온 울음을 주체하지 못 하였다. 가슴의 떨림이 멈춰지고 손을 꼭 부여잡고 놓지 않고 있음에도 그녀는 통곡하듯 울음을 참지 못 했고 방에 혼자 있게 하면서 차를 가져다 주어서도 입으로는 괜찮다 하면서 눈으로는 차고 넘치기만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한심하다 하였다. 그리고 자기연민이라고 중얼거렸다.

" 근데, 왜 그렇게 오래 울었대? 원래 그렇게 눈물이 많아? "

이수는 남학교를 다니면서는 여자의 얌전함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하더니, 누이는 제쳐두고 그녀가 여성스럽다 여겨지는 가 보다.

" 감정선이 약해서 그래. 원래 소설이나 만화책 보면서도 잘 울어. "

" 그래? 뭐, 드라마 보다가도 아줌마들이 운다고는...근데, 그렇게 길게 우나? 한참이나 훌쩍훌쩍, 집에 갈 때도 보니깐..."

" 원래 그래!  라임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울면서 읽었대. 테르미도른가 뭔가 하는 만화도 보고 또 보면서도 자꾸 눈물이 난다고. 그 얘기 하면서도 생각이 나는지 또 울고. "

이 자식이 뭘 자꾸 물어보구...진은 그녀를 다른 누군가가 들여다본다는 게 좋지 않다. 부러 길게 설명을 해 주었더니 그것도 짜증난다. 그녀를 또 누군가가 자세히 알게 되는 것도...별로군.

이수는 그래? 그런 성격이군. 하면서 뭐를 납득했다는 건지 물러나면서 누이를 한번 흘낏 건너다 본다.

" 왜? "

피곤함을 느끼면서 진은 동생을 쳐다봤다.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는데. 자꾸만 괜찮다고 혼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빨리, 혼자가 되고 싶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밀쳐졌다는 느낌.

" 아까...바래다 준다고 나갔을 때...현관 앞에 이게 떨어져 있더라구. "

이수는 슬쩍 주머니에서 봉지째 꾸짓꾸짓해진 무언가를 식탁 위로 내려놓고 휙 고개 돌리고 등을 보이며 제 방으로 사라진다.

진은 아! 하고 속으로 외치면서 얼른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였다. 젠장...이것 때문에.

그녀를 대문 안에 먼저 밀어넣고 진이 왔던 길을 돌아가서 약국에 들러 사 온 것.

애인을 꼬실 양이면 준비성이 철저해야지, 사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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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고방을 감상하며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집난이같이 송구떡

이 오래도록 남어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

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알밤을 밝고 싸

리꼬치에 두부 산적을 꿰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

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끼

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고방 즉 광이라는 공간에 놓여있는 사물들인 질동이에 남아있는 송구떡, 오지항아리 속의 찹쌀탁주, 나무발쿠지에 아주 많이 걸려있는 짚신들, 그리고 화자가 숨어있는 쌀독들을 나열하는데 그 사물들 각각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송구떡을 집난이(출가한 딸)을 비유하는데 다른 귀한 먹거리가 많은 고방 안에서 송구떡이 인기가 없어 오래 남아있듯이, 친정에 다니러 와 있는 집난이가 갈 줄 모르고 하냥 머물러있지만 집난이의 친정집을 상징하는 듯한 질동이 속에 남아있다는 표현을 통해 특별한 일이 아닌, 평범한 풍속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질동이보다는 훨 좋은 그릇인 오지항아리의 찹쌀탁주, 이를 통해 출가한 딸 뿐만 아니라 아직 분가하지 않은 장성한 아들인 삼촌도 찹쌀로 빚은 귀한 막걸리를 집안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좋아하며 먹을 수 있었음을, 즉 평안도 이북 지방에서 먹을꺼리가 귀할 수 있으나 비교적 풍족한 집안임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어린 화자가 사춘과 함께 막걸리를 채어 먹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어찌보면 아이들이 광에 몰래 들어가 술을 훔쳐먹었다 혼날 수도 있지만, 그저 집안에서는 삼촌의 좋아하는 것을 가로채어 먹은 것뿐으로 웃어넘기는 일이 되는, 여유로움을 엿볼 수 있다.

 

제삿날이면~의 구에서는 귀가 먹으실 때까지 장수하신 할아버지가 나오는데,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분주함 속에서 아이들이 알밤을 까고 싸리꼬치에 산적을 꿰는 등 함께 일을 하는 모습과 맛있는 먹거리들에 모여드는 아이들을 파리떼같다. 라고 직유하고 또 할아버지가 그러지 말라고 내어둘르는 손을 곰의 발 같다라고 직유하고 있다. 여기서도 제사와 같은 큰 일을 치루는 중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정겨움과 특히 곰으로 은유되는 할아버지의 강건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손이 곰의 발과 같으니 이북지방에서 젊은 시절부터 농사와 함께 사냥 등을 하며 가정과 마을을 꾸려온 장정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삼아 걸어놓은 짚신이 마치 소신과도 같다라고 비유되는 것에서도 보여진다. 소신이란 소에게 일을 시킬 때 신기는 짚신이니 무척 촘촘하고도 질기게 만들어질 것인데, 할아버지의 곰발같은 손으로 10개를 의미하는 한둑도 아니고 여러둑이, 즉 둑둑이라는 것처럼 아주 많이 걸리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쇠짚신같은 짚신 뿐만 아니라 고방 구석의 나무말쿠지에는 유용한 다른 것들도 쟁여져 있음을 걸리어도 있었다하는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다.

옛말이 사는~에서는 고방이라는 공간이 의인화된 옛이야기가 살고있는 곳으로 상정된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 혹은 고방 속의 사물들을 통해 상징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살고 있다고 의인화되는데 이는 고방이라는 공간 속에 놓여진 사물들 각각이 집난이, 삼촌, 짚신을 삼은 할아버지의 이야기, 이야기되어진다는 것 자체가 시간적으로 과거의 사건임을 의미하는데, 동시에 고방 속 쌀독 뒤에 앉아있는 화자의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리하여 옛말은 고방 속에 살고 있다라고 의인화되는 힘을 얻고 있다.

나아가 이 옛말 즉 옛이야기는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들었을 옛이야기로서 민중문화 속에서 구전되어온 이야기들이며, 이 옛말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것은 민중의 삶 자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성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이 컴컴한 고방은 화자에게 아늑한 공간이며 낮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즐기고, 끼니때나 되어서야 어른들이 찾고 있지만 그 조차도 무시하고 홀로 아늑한 행복감 속에 있다. 그것도 쌀독 뒤에서. 그 쌀독에 쌀이 없거나 바닥이 보이는 상황이 아님은 전편을 통해 흐르는 정겨움 속의 여유로움, 그 저변의 풍족함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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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진은 열 일곱이었다. 제가 12월 생이고 그녀가 8월 생이니...2년하고도 4개월...뒤에 태어난 셈이다. 흠...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진은 동생이 학교에서 동급생들에게, 그러나 나이로는 1년 하고도 몇 개월씩 차이나는 여드름 덕지덕지한 뚱보들을 내려다보며 씹듯이 뱉어내던 말을 거울 속의 저를 보면서 하고 있었다.

이수가 키가 훌쩍 커 버린 2학년 이후 사춘기에 내몰린 남자아이들은 패를 짓거나 혹은 은둔하면서 성적 호기심을 다 채우지 못 한 채, 저 보다 더 키가 큰 놈의 나이를 시비삼지 못 했고 못 하면서 코가 큰 놈은 거시기도 크다더라. 하는 말을 떠올리며 밥그릇 수는 적은데 어찌 그게 다 코로 갔나. 하면서 이수의 매부리코를 흘끔거렸다.

오히려 그 이수하고 나란히 서면 동급생처럼 보이는 게 그녀였는데.

진은 두 살 차이가 뭐 대수라고.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하였지만 그녀가 주민등록증 나오지 않았느냐고 지나가듯 물었을 때는 못 들은 척하며  넘겼다. 그녀도 재차 묻거나 하지 않았는데, 아마...제가 일찌기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달랠까봐 두려웠던 듯. 진은 나야말로 두렵다. 없는 걸 보자 하면 어쩔까 싶어서. 2학년 내내 교실에서는 가끔 주민등록증을 보이며 몇 달 언니네 동생이네 하는 동급생들의 수다가 끊일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귀를 파고드는...그 놈의 나이타령. 진은 속으로 곱씹었다. 그럼...내가 니를 언니라 부르리...하는 대사를 혼자 치면서.

언니라 부르며 안을 수는 없지 않은가...아마 그보다, 그녀가 결코 안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저보다 동생에게. 한 살 차이로도 억수로 고뇌하는 그녀인데. 그래서 진은 더욱, 실제 나이같은게 무슨 소용이냐. 학령기 이후 교육기간이 얼마인데, 이미 사회화되는 만큼 성장의 속도는 비슷할 것이다...닥쳐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진은 그녀를 껴안았던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두번 째부터는 벌써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흠칫 놀랐었다. 뭐, 나중에는 찬탄해 마지 않았으나. 그녀의 흥분과 강도, 지속성 뭐...재발성? 아니 반복성? 까지 진은 그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사실 솔직히 거울 속에서 자신 외에 듣는 이 없으니까 말하는 거지만, 진은 그녀에게서 거의 배우는 수준이었고 간신히 티 안 나게 따라해 보며 느끼는 상태였다. 물론 겪어보니 장난 아니게 좋았지만. 뭐...그렇게 하는 거구나 싶기도 했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았냐 하면 전혀. 진은 정말 열심히. 하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녀의 성감대 찾기에, 그리고 발현시켜주는데 온힘과 정성을 바쳤다. 물론...빨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제가 먼저였지만 엄지...하나에 그렇게 허리까지 출렁일 줄은 몰랐다....다음 순간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 부딪껴 올 줄도.

진은 그런데, 대체 뭐가 부족했던가. 하는 고민에 잠을 못 이뤘다. 그녀는 왜 싸돌아다니나. 왜 고민이 많나. 왜 좋을 때 그냥 푹 빠지지 못 하고 늘 반쯤 정신이 딴데 가 있나...왜 조금만 내버려두면 좌절모드가 되어 뭔가를 결정짓지 못 해 고심에 찬 사람처럼. 마치 햄릿이라도 된 듯 번뇌하다가 황당한 결정을 내리는가...진은 그녀가 또래보다...는 아니라도 여느 예비 고 3처럼 입시에 몰두하지 못 하는 것도, 대학을 가벼이 여기면서 또 사회인이 되는 것에 대해선 말할 수 없이 무겁게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국어선생으로부터 빌려보는 여타의 사회과학 서적들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그녀가 끼고 있던 책들, 작은 거인인가 8억인의 나라인가 그런 것들이 엄마의 책장에도 꽂혀있었다. 순...운동권 책들이었다. 알고보니. 그녀가 학교의 민주화 뭔가 하는데에 섞여들었으면 아예 입시를 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운동할라구 대학을 갔을 지도. 아니면 아예 공장으로 직행했을려나. 나중에 보니 고등학생 운동권이라는 것도 있었더라니...

진은 요컨대 제가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면서 어쩔 수 없이 화가 나고 대책이 안 섰다. 그리고 천추의 한이다 싶은 것이. 그녀가 고백을 하던 그 겨울에 바로 대답을 했으면. 그랬으면 우린 즐겁게 고교시절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녀는 그 소위 철학적인 짝궁이나 보나마나 운동권이 틀림없는 노처녀 국어선생이나 뭐 기타등등에 별로...휩쓸리지 않았을까? ... 대학을 들어가고 그녀가 데모를 하러 가던 길에 마주쳤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동창생이 말하길, 넌 운동할 것 같았어. 했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그 동창생이 중학시절의 아는 얼굴인지 고교시절인지, 솔직히 그녀는 너무 희미해서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지만 진은 그 동창생의 이름을 듣자 바로 기억이 났다. 그녀와 2학년 때 한 반이었던, 그리고 진과는 3학년 때 한 반이었던 그 동창생은 중학시절, 운동장을 돌면서 체력장 연습을  하다가 문득 저쪽 모둠을 바라보면서, 저 애, 너 좋아하나 봐. 작년에 맨날 창에 붙어서 너네반 체육하는 거 보고있더니, 지금도 네 쪽만 쳐다보쟎아. 하였었다. 그때 진이 뭐라 했던가. 씨익 웃으며 내가 워낙 한 인기 하쟎아. 했었다. 왜 기억이 생생할까. 얘들 속에서 그저 한 인기 하는 거에 맞춰 나이스하게 살았지만, 사실 뒤통수에 꽂히는 그녀의 시선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애가 나를 틈만 나면 쳐다보네. 하면서 휙 고개 돌리면 어느 틈에 딴데 쳐다보고 있는...여시같은 기집애. 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너무 이쁜가. 했었던가...진은 츱. 하고 거울 속의 자신을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흘겨봤다.

" 이 애를 어떻게 꼬시지..."

절로 혼잣말이 나온다. 누가 조언 좀 해 줬으면. 연애초보자들은 다 어디가서 상담을 하나. 상담을 하면 반드시 사실대로 밝히고 도움을 구해야지. 실은 제가...두 살 연상의 여자를 사귀는 데요. 그 여자가 방년 열 아홉이라, 은근짜루다 아주 색기도 장난 아닌데다...뭔 고민은 또 그리 많은지...제가 아직 갓 열일곱이라 뭘 좀 모르거든요. 세상도 모르고 남의 사정 헤아릴 줄도 모르고 사실 알아도 미성년자니 돈도 못 버니깐 도와줄 수도 없지만, 그래서 울 엄마도 지금 직장 다니느라 고생이지만, 아 뭐 부모님이나 가정문제 고민하는 건 아니고...까놓고 말하면 일단 잠자리 문제가 젤루 큽니다. 나한테 푹 빠지면 그녀가 딴 생각 안 하구 의지해 줄 것 같은데. 나이 많아 봤자, 어차피 고등학교 졸업하는 건 똑같아요. 혹시 재수 없어 재수라도 재수좋게 하게 되면, 금상첨화인데...예측컨대 대학생 되는 것도 같은 시기에 될 꺼구요. 보시다시피 전 남자도 아니니까 군대가서  뭐 사회진출이 더 늦어진다거나 하는 핸디캡도 없어여...그러니깐, 그녀를 먹여살리는데도 별 하자 없고....근데 그녀가 문제죠. 까탈스러워서는 경제적이던 뭐든 의존하는 거 댑따 싫어해요. 여성성이라는 게 싫대나 뭐래나...제 2의 성이라는 어느 프랑스 아줌마의 책이 끼친 영향이 대단한 거 같애요. 거기다 마가렛 미드인가 하는 여자가 뭔 원숭이 연구하면서 인류의 결혼제도가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는 둥. 저는 손톱 길이보다 더 두꺼운 책은 잘 못 읽어서, 뭐 발췌 읽기 하듯...도 아니고 딱 한 장 밖에 안 봤지만 대충 떠들어본 다른 장 들의 내용은 필시 그녀에게 매우 독립적이거나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휴...물론 제가 그녀를 남성적 입장에서 소유하고 싶다는 건 아니구요...하지만 그녀가 저렇게 고민하면서, 부모님과의 불화를 기성세대 전체와의 대적으로 몰고 가면서 현실을 부정, 거부하는 것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변강쇠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그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코드에 맞춘다고 맞췄지만 늘 한 발 앞서나가는 그녀 덕분에 진은 인식하기 이전에 행동을 해야했다. 입맞추려나 하면 빨아야 하고, 이제 감도 올라갔다 싶으면 허리 운동하느라 세빠질 지경이니...무아지경으로 헛손질하고 있는  자기 앞에서 그녀가...푸욱 적셔오는데 원...진은 자신이 오르가즘이 늦은게 문제이다. 하는 생각을 하며 2년의 성숙도가 이렇게 차이 나나 하고 의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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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열 아홉살이었던 해의 겨울.

그녀는 어지간히도 힘들었던가.

조울증 환자처럼 기분을 자주 바꿨다.

" 아빠가 대학을 가지 않으려거든 취직을 하라고. 아님 시집을 가던가. "

그녀는 음울하게 말했다. 그간 듣기로 그녀의 아버지는 말을 가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깊이 생각하고 하는 것도. 하지만 그녀는 말 실수 속에 무의식적인 소망이 담긴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자처럼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지하게 생각한 듯, 고졸의 자격으로 취업을 하는 건 별문제가 아니나, 저의 친구 중엔 상고를 다니는 이가 있으니.

" 사회에 나가는 게 무서워. 나는 아무것도 정립하지 못 했는데. "

물론 시집을 간다는 건 더 황당하다. 참...

진은 말을 잊은 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 저건...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같은 걸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은 그 국어선생님의 탓이다. 하는 생각을 진은 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소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긴 했으나, 보다 더 문학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물론 진이 그녀를 먼 눈으로 보고 있었던 중학시절에는 더우기나. 3년 내내 저만을 바라보면서 말 한 마디 못 붙이다 겨우 쵸컬릿 상자 하나를 건네기 위해 겨울 밤거리를 건너오던 그녀가 아니던가. 감성에 젖어 짝궁과 숱한 편지를 쓰며 밤을 지새다가 그 짝궁이 이과를 선택하자 저도 그래야 하나 하고 오래 고민하던 그녀였다. 저에게서 화이트데이의 꽃다발을 받고 당황하며 얼굴 붉히던,  미소 한 번 손길 한 번에 표정 바꾸며 그러면서도 마음 안 열고 오래 애먹이며 새초름하던 그녀였는데. 진은 한숨이 나왔다.

처음 안아보았던 여름 이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손을 꼽을 만하다. 물론 그 적은 회수의 넓은 간격 만큼이나 안을 때마다 장족의 발전을 보여주며...아니 생각지 못했던 부면에서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그녀를 안다보니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츱...진은 성질이 날 것 같았다. 그 국어 선생 때문이다.

그녀가 자주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것은. 제가 전화하고 찾아가고 다음 약속 미리 잡고 하면서도 그 사이로는 연락 한 줄 없이 한 주고 두 주고 그냥 흘려보내며 침잠하던 것은.

생각해 보니 시월에는 아예 한 번도 못 만났다. 진이 혼자 열 받아서 연락 안 했더니, 이게 끝까지 전화 없는 것이...이러다간 그냥 인연 끊길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곁을 흘려 보낸 이가 한 둘...이다. 저까지 셋이 될 듯. 정 없어 그렇지는 않은 것이 그녀는 맘에 담았던 친구, 그 소수의 친구를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인데. 진은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만 하는 대상이었던 것을 자각하자 요 몇 개월 얼굴 맞대고 또 몸도 맞대었다 한들, 그녀에게 추억 속의 존재로 전락하기는 정말...몇 날밤을 공들여 써내린 장문의 편지를 보내지도 않고 서랍 속에 묵히는 그녀에게 있어...어느날 쓰레기통으로 내다버리는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하긴...

진은 혼자 침울한 그녀를 앞에 두고 공감을 표한다는 듯, 말없이 혼자 골똘하다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아, 상담을 시작하지 못 하고 있는 내담자를 기다리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진은 달을 넘겨 다시 만난 그녀가 먼저 안겨 오고, 그 안겨 오던 밤이 떠오르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미소를 수습하기가 난감하다. 슬쩍 고개를 푹 숙여 같이 심각한 척.

" 아무래도 독서실을 끊어야겠어. "

별로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은 듯, 말 없는 진의 앞에서 그녀는 혼자 생각에 빠지고 있다.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 할텐데. 하는 듯.

기계적으로 그런 추측을 하며, 진은 그러나 국어선생에 대한 증오...까지는 아니라도 미움 내지는 불만과 뒤섞인 상념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녀의 육감적이었던 모습, 가녀린 허리를 두 손 안에 부여잡자 스스로 팔을 올리며 옷을 벗던, 그러면서 진에게도 옷을 벗으라고 꼬박꼬박 강제하던 그 진지한 표정의 얼굴이 떠올라 불쑥 아랫배가 짜르르 해 온다.  그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던 것이...

" 뭐? 독서실? "

진은 신호가 늦게 가는 기계식 전화를 받았다는 듯, 한참 뜨는 말대답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 응. 하는데. 그래, 뭐 그녀야 기본 자세가 나는 게으른 나무늘보요 하는 식이니. 허나 진은 말대답 늦게 하면서 그녀가 혼자 마음을 다져먹으며 올 겨울엔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고 나름 생활계획을 다 세우는 것에 침묵으로 동조한 셈이 되었다.

" 독서실 가면 언제 올라구? "

" 아이...뭐 들었어. 수험공부하는 얘들은 그냥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다 한다니깐. 넌 예능계라 안 가 봤겠지만 독서실 총무가 이불 보관도 해 주고, 소등도 신경 써 주고. "

" ...춥지 않을까. 넌 추위 많이 타쟎아. "

진은 할 말이 없어 생각나는 대로 주워붙였다.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라니...총무가 어쩌고...이 얘가 정말...

" 실내인데, 뭐. 그보다 아빠가...허락해 주실지. "

그녀는 정말로, 자기는 집에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한다. 지금까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야 벼락치기 공부로 때워왔지만 입시를 정말로 통과하여 대학을 가겠다면 이렇게는 안될꺼라구. 쪽팔리게 후기 같은데 갈 수는 없고. 아빠는 재수같은 건 없다고 미리 말하고 있는데. 하면서.

" 아빤, 내가 공부 잘 하고 똑똑한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잘났으니까 말대답도 꼬박꼬박 하면서 바락바락 대든다고. "

그녀는 잠깐 띠웠다가 이어 말했다.

" 후기 같은데 가면 등록금 아깝다고 하실꺼야. "

오빠는 삼수까지 시켰지만...딸자식에게 그렇게 투자할 순 없다고. 시집가면 그만인데, 무얼. 하는 말을 귀에 담고 있는 그녀는 결심이 확고한 듯하다.

" 친구들도 다 끊고 공부만 하려구. 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그녀는 수학 땜에. 하였다. 그렇게 걱정해도 1년 뒤 그녀의 수학점수는 한 자리 수였다. 국영수 비중이 압도적인 학력고사에서 수학점수를 그리 받고 전기 간 애는 그녀 밖에 없을 듯.

그런데, 뭐하러 독서실에 처박혀 겨울 삼동을 다 보내냐구!

한숨을 쉬며 불길해 했던 것처럼 그 겨울, 진은 그녀를 제대로...보긴 했으나 안지는 못 했다. 젠장...

그녀는 불쑥 전화를 해 와서는 집 근처 어디라는 둥, 배고프니까 컵라면 먹자는 둥, 공부하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하면서 음료수 하나만 사 달라면서 왔다가 사 주면 홀짝 먹고는 발길 돌려 총총히 사라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 한 술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독서실 갔다고 그녀의 엄마는 탄식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자정이 되도록 기다려도 그녀에게서 전화했었냐며 전화해 오는 일은 없고.

그래서, 그녀가 독서실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 두 달을 보내면서 공부를 열씸히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독서실에서도 친구끼리 소근대는 것에 귀를 쫑긋거렸고, 이불 덮어주며 징징거리는 애들의 시선을 느끼며 혼자 책상에 엎드려 있었으며, 낮이나 밤이나 참고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면서 지겨워져도, 허리가 아파도,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말 붙여 함께 할 동무가 없어 외로움만 새겼다. 그래선가 어째선가 밤거리, 반쯤 문닫은 가게 앞이나 골목 어귀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새로 표정을 만든 듯 웃는 얼굴임에도 하얗게 떠 보였고,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처럼 어색했으며 고개 돌리며 안녕. 하면서는 이내 침울함이 점령할 듯 짙게 그늘이 드리우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땐가는 독서실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차림새로 하염없이 뚝방을 향해 인적없는 차로변, 좁고 길다랗기만 인도를 따라 걷다가 네거리의 신호등을 기다려 건너더니 도로 턴 하여 언덕 위로 이어지는 인도를 걸어올라가기도 하였다. 한 밤에. 그 모습을 간판의 불을 끈 제과점 안에서 이수와 함께 빵을 먹으며 지켜보면서 진은 그제서야 그녀가...저를 만나고 사귄다 생각하고 나아가 연애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지난 1년 동안에도 혼자 산책하기를 멈추지 않았음을 알았다.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외로워하던 것에서도,슬픔을 내성화하던 것에서도 그녀를 덜어내올 수 없었다는 걸 진은 확인하였다. 옆에서 이수가 혀를 차며.

" 저 누나는 왜 저렇게 청승맞어? 저번에 놀러와서 떠드는 거 보니, 웃으면 귀엽고 이쁜데. "

흘낏 진을 쳐다본다.

" 잘 좀 해 주지? 쫌만 친절해도 디게 좋아하던데, 누나랑 친한 것 같더만 그렇지도 않은 가..."

말 없이 표정 굳어진 채 풀릴 줄 모르고 있는 진의 얼굴을 보면서 이수는 얼버무렸다.

" 아니 그런가...집에 무슨 일이 있나 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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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13

고요히 어둠이 점령하고 있는 골목 안, 저 끝에서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는 이수의 모습이 보인다. 가방을 어깨 위로 둘러 맨. 스포츠형 머리의 얼굴은 멀쑥하나 표정이나 몸짓은 아직 어릿스러운 소년, 매부리코 때문에 나이가 들어보인다. 집 앞까지 못 와서 전신주 옆에 서 있는 누나를 보고 발걸음을 멈춘다. 놀라는 표정이 느릿한 이수는 어딘가 그녀를 닮은 듯도.

" 뭐야? "

감정 없이 물어보려 하나 쉽지 않다는 듯 애먹은 말투.

" 미안..."

진은 동생을 바라보며 담담히, 하지만 정말 미안하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 좀 이따 들어와라. "

이수는 왜? 하고 물을 듯 잠깐 쳐다보았다. 시선을 마주치며. 피하지도 어색함도 없는 누나의 얼굴이 다소 들떠있음에, 그러나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 뭔가를 떠올린 듯, 곧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 ...알았어. "

묻지도, 탓하지도 않고 이수는 발길을 돌렸다. 바로 나오는 골목 모퉁이로 꺽어들며 가능한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 주겠다는 듯.

잠깐 그대로 서 있다가 조용한 골목길, 버스에서 내려 집을 찾아드는 행인들이 느는 것을 보며 진은 집안으로 들어왔다. 고즈넉히 마당도, 거실도, 식탁 주위도 그리고 자신의 방문도 잠든 듯 하다. 그녀, 침대 속에 파묻힐 듯 누운 채 잠들어있다. 피로가 이마에 떠 있다. 조그마한 얼굴에서 가장 비중이 큰 넓은 이마, 앞머리를 반쯤 내리고 다니느라 눈에 띄지 않았으나 약간 짱구다. 실핏줄이 비쳐보이는 눈꺼풀, 힘없이 감겨져 있고 자그마한 코, 작은 입술, 거뭇하니 부르터 있어 더 붉어 보이는.

진은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만져보았다. 부르튼 주위를 둘러 입술 끝으로. 미끄러트리며 턱선을 따라 가 보며. 그녀가 흠칠. 하며 눈꺼플을 움직인다. 시야에 들어오는 손, 그 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들며. 작은 입술을 달짝이며.

" 몇 시야..."

" 아직 괜찮아. 8시 밖에 안  되었어. "

그녀,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만 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 나 갈께. "

" 괜찮다니깐. 동생은 늦을 꺼라구 전화 왔어. "

그녀, 그래? 하더니 침대 위에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 티를 다시 입혀 놓았지만 브래지어는 하지 않고 있는 그녀, 스퀘어 네크라인 속으로 숨어드는 쇄골을 보고 있는 진은 그녀가 아쉽다. 가지 않았으면.

" 같이 저녁 먹자. "

그녀는 시계를 쳐다보며 글쎄. 한다.

" 같이 밥 먹고, 같이 저녁 시간을 보내며. "

그녀는 무슨 말인가 싶어 진을 쳐다본다. 집에 가야겠다하는 생각을 굳히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진은 말을 먹고 가만히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그녀를 한길 건너 바래다 주고 저의 집과 그녀의 집 중간쯤이라 생각되는 놀이터 앞에서 혼자 가겠다는 그녀를 쉬이 보내주고 돌아오면서 마음이 다져진다.

" 혜정아, 나는... "

혼자 어두운 채 인적 끊어진 밤길을 걸으며 진은 다짐하듯 스스로에게 말로 내어 놓는다.

" 너와 한 집에서 살고 싶다. 이리 보내지 않고, 네게 다른 공간, 다른 접촉, 다른 생각을 하게 두고 싶지 않다. "

진은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자신을 생각하며, 자신의 손길과 말 속 에서 행복한 미소를 떠올린다는 것을. 그녀는 점점 더 말을 많이 하고 점점 더 속을 내어보이며 조금씩이나마 제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몸을 만지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처럼 내어놓는 면이 넓어질 수록 그녀의 웃음은 편해지고 또 생각은 창의성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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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9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가 다시 밀어 닫으며 꾸욱 눌렀다, 라푼쩰의 성 문을 폐쇄하듯.

진은 입술에 묻은 뭐라도 닦는 것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돌아서다가 마루 건너, 제 방문을 열고 나오는 이수와 마주쳤다. 비는 그친 듯 했으나 밤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데 겉옷을 대충 꿰어 입으며 가방을 끌듯이 옆구리에 걸고 젖은 운동화를 그냥 꿰어신는다.

" 다 저녁에 어딜 가. "

대답은 커녕 돌아보지도 않고 성난 듯 홱 현관문을 밀어젖히고, 몸을 빼면서 툭 던지듯 말한다.

" 더 늦기 전에 집에나 ! ...데려다 주던가. "

신경질적으로 열어제꼈던 현관문을 손끝으로 떨구며 슬쩍 돌아보는 이수의 얼굴은 못 마땅하다는 듯 잔뜩 찌푸러져 있었으나, 눈길은 진의 방문 쪽을 스치듯 흝고 갔다. 

맞대거리라도 할 듯 현관 앞으로 따라 나왔던 진은 하지만 그냥 마루끝에 걸터 앉은 채 속울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가슴에 한 쪽 손을 얹고. 음. 그녀가...근데, 저 자식이...

머리속에선 뭔가 상황을 좀 수습하여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되돌려야할텐데. 하고 고민이랍시고 떠오르지만. 진은 입가에서 툭툭 떨어지는 미소를 수습하는 게 더 어려웠다.  그녀를 다 안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자신의 속을 다 알게 된 것 같아 한껏 시원스러웠다. 이런 거였군. 하는 생각, 이런 느낌이군. 하면서 저의 사춘기도 이젠 졸업을 하게 되었다하는 맘에 마냥 기꺼웠다. 동생 뿐아니라 아이들, 여고이던 그녀의 남녀공학이던 십대의 청춘들이 애써 곁눈질하고 인내하고 숨고 싶어하며 또 좌충우돌하기도 하면서 겪고 있는 성과 사랑, 신비와 의혹, 불안과 자만, 이제 자신은 그런 혼란에서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진은 모든 것이 좋았고 밝게 느껴졌으며 그녀 또한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말로 안 한다고 그걸 모르리. 그 얼굴을 보면서. 그 몸짓에 함께 휘감기면서. 그녀의 감정이 피부 위로 새겨지는데, 그녀의 욕망이 데일 것처럼 스며오는데. 자신에게 있어선 아련하고 몽롱하며 부정확했던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구체화되었다. 분명해졌고 또 정직해졌다. 그녀는 그 얼마나 용맹스러운가. 눈으로 말하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 아..."

진은 욕실에서 나오며 아뿔싸. 하였다. 그녀는 현관의 안쪽 문을 열어둔 채 소리없이 빠져나갔다. 침대 위를 다소곳이 정리해 둔 채. 시트를...빼 갔다.  부러 장 문을 열어 새로 패드를 내어 깔아두는 그녀의 손길이 눈에 보이는 듯. 책상 근처를 살피다 식탁 위에 라면들을 얌전히 내어놓고는 그 슈퍼용 비닐봉지에 힘들게 시트를 접어 넣고는 누가 볼세라.

" 그걸...싸 들고 가냐...이 여자가 정말..."

이 애가 그걸 어떻게 세탁하겠나 싶어서? 아님 다른 뭔가가 아까운 듯. 음..츳. 하면서 진은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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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7

" 이름. "

그녀는 새로 하이얗게 티셔츠를 갈아입고, 커서 헐렁한 바지를 구겨 입은 채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젖은 머리가 수건 위에서 가지런히 놓여진 것이 손가락으로 애써 빗어내린 듯. 빗물에 씻긴 말갛고 하얀 얼굴, 입술 끝이 분홍빛으로 찢겨져 있다.

" 차 마셔. 둥글레차야. "

" 이름, 넌 이 진이고 동생은 윤 이수야? "

" 응, 나만 성 바꾸고 동생은 아직. 할아버지가 싫어하시니까 아마 갠 그대로 갈꺼야. "

언제부터인가 동생도 저도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게 되었고, 같은 부모 아래 다른 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진은 그렇다고 부모의 이혼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고 싶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외부인들의 시선이나 동정에 대해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부쩍 혼자 만의 시간과 생각이 많아지고 있던 진이었기에.

" 흐응. 그렇구나. "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더 묻지 않았다. 엄마의 뜻도, 할아버지의 생각도 알겠다는 듯. 그보다 동생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느냐면서 제 자신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 우산 빌려주려고 불렀대. 우리집 가는 건 줄 알았었다면서. "

" 으응... "

" 어디 가는 길이었어? "

진은 뜸을 두고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 그냥, 산책. 비가 오길래. 시원할 것 같애서. 걷다 보니 너무 많이 나와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

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더 캐어서 무엇 하리. 저리 상처받은 얼굴로, 저렇게 울 것같은 눈으로, 입술을 숨기고 싶어 달짝이며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그녀에게.

두어번 접어올린 바짓단 아래로 가로 잘려진 종아리, 티없이 하이얀 피부에 도드라진 복사뼈, 짧은 발등 위로도 붉그레하니 상채기가 있다. 생긴 지 얼마 안되는, 무언가에 주욱 긁힌 듯한 자국. 젠장...이건 뭐 아동학대센터에 신고할 수도 없고, 뭐 이딴 경우가...싶은 진은 커다란 머그컵을 두 손으로 부여쥐고 있는 그녀가 추운 듯, 입술을 꼬옥 붙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그 커다란 상가 건물의 2층 어딘가에 숨어있을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엄마가 끄질려 나와 다시 손찌검을 당하고 있는건 아닌가 걱정스러운 걸까. 내리 뜬 두 눈이 촛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하게. 도망나온 자신의 비겁을 자책하는 듯.

" 추우면 이불 쓰고 좀 누워 있어. 난 피아노 연습할 게 있는데. 낼모레 면접을 봐야 해서. "

" 응. 그래, 너 할 일 해. 난 조금만 있다가 갈께. "

" 아니, 그냥 쉬고 있으라구. 천천히. "

별 말이 없는 그녀를 두고 방을 나왔다. 흐음. 차라리 교실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수업시간이 더 편안하다던 그녀는 불안한 저희 집의 제 방이던, 남의 집의 남의 방이던 안락하게 한 숨 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허나, 예민하게 곤두서는 신경보다 잠이 부족한 채 함부로 넘어뜨려졌던 그녀의 몸은 쉬고 싶어 어쩌지 못 하겠다는 듯, 이내 침대 속으로 기어들듯 누여졌다. 동그마니 움추린 채, 얇은 눈꺼풀을 내리덮었으나 파르라니 떨고 있는 그녀, 얕은 잠 속에서 허우적대는 듯.

그녀의 누운 침대를 손잡이 돌려 스르륵 문 열어보고 확인하면서 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한 발을 문지방 위에 걸은 채. 끼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뒤에서 나지 않았으면.

휙 돌아본 마루 건너 이수가 서 있었다. 굳었던 이마에 조금씩 인상을 팍 쓰기 시작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저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도로 문 닫고 식탁 앞으로 오니 이수도 마주 걸어와 의자를 내어 앉는다. 누이도 앉으라는 듯.

" 나도 차 좀 줘. "

진은 네가 타 마셔. 라는 말이 머리에는 떠 올랐으나 입은 꾹 다문 채 찻주전자를 가스불에 올렸다. 엄마가 출근하기 시작한 이후, 진이 먹고 있는 상 위에 제 손으로 밥 한 그릇 더 떠 와서 후다닥 먹어치우고는 빈 밥그릇 개수대로 숨기면서 자리를 뜰 지언정 누이에게 식사시중 들어달란 적 없다고 말하던 이수였다. 끓은 물 찻잔에 부어 둥글레 티백 넣어 가져다 줄 때까지 식탁 앞에 자리보전하고 있던 이수는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킨다.

" 왜? "

" 뭘? "

진은 싱거운 놈. 하는 표정으로 털썩 자리에 앉았다. 제 앞엔 반 남은 물컵 만이 놓여있는데.

" 차 마셔. "

" 됐어. "

" 그럼 냉수라도 마셔. "

" 뭐? "

네가 또 시비를 걸 양이면 상대해 주겠다는 태세로 자세를 고쳐 앉는 진에게 억양의 강세 없이 말한다, 이수는.

" 물도 씹어먹어야 한대. "

싸울 생각 없다는 듯, 긴장 없이 이어말하는 이수.

" 씹어 먹으라구. 서른 번씩. 그게 건강에 좋대. "

진은 댓거리하기 귀찮다는 듯, 가만 있다가 물컵 들어 한 번에 들이켰다. 입 안에 넣고 가만 있으니 조금씩 목구멍을 흘러내려가는 물줄기가 느껴온다.

이수는 그냥 쳐다보며 차를 홀짝 거린다. 뜨거워서라기 보다, 오래 앉아 있겠다는 듯. 피아노 좀 쳐 보지? 하더니 진의 방문을 한번 흘낏 하면서 조용한 걸루다. 하고 뒤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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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6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장대같이 굵게 쏟아지는.

맞으면 아플 것 같았다. 저는 아니라도. 함께 비를 맞고 있던 동생 이수는 아니라도. 그렇게 작은 어깨와 작은 발을 가진 그녀는. 여름이라도 추울 것같은 반팔 티셔츠에 어울리지 않는 체크무늬 조끼를 걸치고 기장 긴 티셔츠 아래로 역시 체크무늬의 플리츠 스커트를 휘감고있는 그녀는 맨발에 굽낮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발등 위로 흙알갱이가 묻은 걸 떨어내고 싶은 듯, 그녀는 장대비가 내리는 처마밖으로 한 발을 슬쩍 내밀었다 얼른 집어넣었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수는 제가 얼마나 더 크냐는 듯 그녀의 어깨 위에서 턱을 한참 높게 치켜들고 한길 건너만 응시하고 있다.

빗길에도 홱 지나가는 버스와 뒤미처 따르는 자가용과 택시들 위로 진을 발견하자 턱을 옆으로 기울이며 눈짓을 하는 이수는 니 친구 꼴 좀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현관을 들어서기를 거부했다. 괜찮아.라는 말만 연발하며. 우산만 빌려주라며. 집에 가야 돼.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 감기 걸린다니까. 빨리 들어와. 집엔 나중에 천천히 가구. 한낮인데 왜 그래. "

말하면서 진은 흘낏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먹장구름이 낮게 내려앉은데다 천둥까지 칠 기세다. 번쩍.

그녀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입술을 딱 붙이고 있었으나 순간 부르르 떨리며 이빨까지 부딪히기 시작했다. 물 먹은 테가 잘 안 나는 조끼 안, 하얀 티셔츠가 몸에 딱 달라붙은 채 주르륵 흐르는 물방울을 밑단까지 안 가서도 후루룩 떨어뜨리고 있는 그녀, 오한이 나는 듯 했다.

손목을 잡아 끌다시피 하여 집안으로 들어왔다. 젠장...헨젤이 쥐어주는 뼈다귀도 이처럼 가늘지는 않으리, 뼈 모양을 본떠낼 것 같은 그 피부는 어린시절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떼어 손 안에 쥐었던 때처럼 차갑게 미끌거렸다. 마룻바닥에 물 떨어지는 것을 수습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 제 방 안으로 넣고 커다란 수건을 가져다 머리에서부터 씌워 주었다. 서랍에서 새로 산 티셔츠와 예전에 입던 반바지를 한참 뒤적거려 찾아내어 침대 위로 던져주고 주전자에 물 끊여 따뜻한 차를 타오겠다. 말하고 방을 나왔다. 그녀에게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주기 위해.

" 어디서 만났어? "

이수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물어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이수는 바지 허리춤을 얼른 올리며 인상을 팍 쓴다.

" 노크 ! "

" 알았어. 근데 어디서 만났어? "

" 바로 거기지, 어디야. 횡단 보도 앞에 서 있길래, 우리집 가려나 했더니 우산도 안 받고 완전 생쥐꼴이 되어갖곤 저쪽 네거리로 가지 뭐야. 거긴 뚝방길 밖에 없는데. "

" 그래서? "

" 뭘 그래서. 그럼, 그냥 가라 그러구 냅둬? 뚝방 공사한다고 다 헤쳐놔갖구 비오면 미끄러워서 위험한거 몰라? 안 그래도 산책로 폐쇄된 뒤로 깡패들만 돌아다니는데 거길 왜 가? 이 비를 다 맞으면서. 누나 친구, 좀 이상한 거 아냐? "

 하면서 이수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 이 자식이! 말 조심 안 해 . "

하고 말하는 진의 목소리는 바깥쪽을 돌아보면서 잦아들었다.

" 어디 가냐 그래도 말도 없고 보고도 못 본 척 하구 그냥 막 가더라구. 그 꼴을 해 갖군, 내가 아니라도 네거리에 서 있던 경찰이 잡으러 올 태세였다구. "

" 경찰이 왜? "

이수는  한심하다는 듯 누나를 쳐다보았다.

" 신발 짝짝이로 신은 거 못 봤어? 머리는 산발에, 입술은 터져서 피 흘리고.  흙탕물 뒤집어쓴 채 고개 푹 숙이고 뚝방길로 올라가는데, 그게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품이지, 정상이냐구. "

그리고 이수는 이어서 중얼거렸다. 쫄딱 젖어서 젖탱이, 방탱이 흔들고 가는데...

" 야, 임마 ! "

빽 소리치는 진에게 손을 내저으며 알았어, 누가 뭐래? 하고 일찌감치 항복한다.

" 내가 붙잡아 두지 않았으면 어느 깡패같은 놈들이 따라붙었을 지 모른다는 얘기야. 그래도 돼? "

" 아, 그래, 암튼 잘 했다. "

그녀가 방에서 나올까 싶어 얼른 나가려는 진의 뒤에서 한마디 더 해보는 이수.

" 그러면 안 되겠으면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

" 뭐? "

" 애인 구해줬는데, 고맙지 않냐? 아직 따 먹지도 못 했는데... "

" 야 ! "

그예 진은 동생의 멱살을 잡았다.

" 지가 찔리니까, 흥분하고 그래. 아니면 말지, 왜? "

" 너..."

진은 멱살 잡았던 손을 놓고 조용히 말했다.

" 너, 진짜 말 조심해라. 거실엔 아예 나오지도 마. "

" 누나야말로, 조심하라구. 방에만 있지 말구..."

쾅 닫고 나가는 진의 남은 그림자에 대고 마저 말하는 이수.

" 아주...사고 치기 딱 좋은 분위기라구.  그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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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5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는 의자를 돌려놓고 창 앞에 앉아 있다. 타인의 책상을 살펴보고 있지 않았다는 듯? 창문을 조금 열어 둔 것을 보니 거리를 향해 있는 동생의 방과 달리 마당을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듯.

" 딸기 먹어. "

그녀는 응. 하고 간단히 답했지만 성겨하는 표정이다. 무척. 왜? 딸기 땜에?

거실의 한 쪽 벽에 놓인 피아노를 보고서도 그녀는 좋은 피아노네. 하였다. 윤기나는 밝은 갈색의 피아노는 진이 어렸을 때 엄마가 사 주신 것이었다. 비싼 건 줄은 알았지만 뭘 보고 좋다고 하는 건지 진은 몰랐다. 식탁 앞을 지나 진이 제 방으로 들어가자 하였을 때도 침대도 있네. 하였다. 별로 좋은 침대는 아닌데? 그녀는 창문에 커텐 대신 블라인드가 걸려있는 것에도 주의를 집중했다. 커텐 치렁이는 게 귀찮아서. 하였더니. 응, 아니. 가정집에서 보는 건 처음이어서. 하였다. 그녀 앞에 보여 보니 어쩐지 우리 집이 부자인 것처럼 느껴지는군. 하는 진이었다.  

" 난 내 방을 갖게 된지 얼마 안 되어서. 별로 어떻게 꾸며야 할 지 모르겠더라구. "

남매였기 때문에 진에게 자기 방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어져 있었다. 물론, 남동생이 태어난 뒤 집안 형편이 좋아졌다는 조건이 기저에 있긴 하였으나. 그녀 또한 남매들 중의 딸이었을텐데. 진은 들어가보진 않았으나 그녀의 집을 알고 있었다. 어느 저녁에 헤어지면서 집 앞까지 바래다 준다 하였더니 시장이 보일 때 쯤 되어서 저기 보이는 상가건물의 2층이라 하면서 엄마아빠가 가게 앞에 나와계실지도 모르니 그만 안녕하자 하였다, 그녀가. 제가 몰래 사귀는 보이프렌드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나 싶었지만 그녀는 부모님에게 무슨 말이든 길게 설명하는게 귀찮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빠는 무슨 일이든 꼬치꼬치 캐어 물으시니 저의 친구들은 모다 학을 뗀다고. 굳이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러면서 이층의 연이어 있는 창문들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저기가 제 방이라 하였다. 그래. 하고 들어가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계속 서 있어 보니 아니나다를까, 창문들 중 하나에서 커텐이 살짝 걷히면서 미소를 지어보이는 얼굴이 나타난다. 손을 흔들며. 똑같은 모양의 창문들에 걸린 커텐은 모두 똑같이 뭔가 나뭇가지같은 무늬가 있는 연노랑색이었다.  

" 좋겠다. 이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방이 있으니. 마당도 있고. "

" 자주 놀러와. 우리 집은 식구가 적어서 거의 비어있다 시피 하니까. "

그녀, 흠칫 놀라며 쳐다본다. 진은 왜? 하면서 마주 보았으나 곧 밖에서 문소리가  난 데 이어 마루 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녀석들이란...꼭 제 존재를 온 집안에 알리며 들어오곤 한다. 몸무게 좀 더 나가서 그런 건 아닐게다. 사춘기도 늦게 맞고 있는 주제에 키만 컸지 얼굴은 애 같은 녀석이.

" 웬일로 ! 동생이 일찍 왔네. "

하면서 진은 마루로 나갔다.

" 누가 왔어? "

동생은 식탁 위로 가방을 내려 놓으며 현관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 웬일이야. 일찍도 다 오고. "

" 누가 왔냐구? 여자지? "

" 그럼, 내가 남자애를 집에 오라 했겠냐? "

" 누난, 그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뭘. 요즘엔 아침운동하면서 도장 애들하고 안 어울려? "

문을 열고 뒤따라나온 그녀는 인사를 해야 하나. 하는 듯 어색한 표정,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오다 말고 섰다.

" 내 동생이야. 이수. 이름이 윤 이수야. "

" 안녕하세요. "

아...놔...깍듯하기도 하네, 이 아가씨가.

" 네에...안녕하세요. "

이수는 저도 같이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식탁 위에 올렸던 가방을 도로 줏어들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쓱 한 번 돌아보면서.

뒤통수로 쳐다보듯, 눈을 사시로 뜨고 귀를 쫑긋거리던 그녀는 문 닫는 소리를 듣고서야 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 아, 배 고픈 것 같다. 빵 구울까? "

" 응. "

토스트에도 토스트기계에도 관심없는 듯한 그녀. 빤히 쳐다보면서 말한다.

" 몇 학년이야? "

" 중 2.  키만 컸지, 나이는 더 어려. 학교 일찍 들어가서. "

" 대따 잘 생겼네... 그럼 너랑 몇 살 차이야? 네 살? "

" 음...그렇지. "

진은 말을 먹었다. 그녀가 잘 생겼다고, 그것도 대따. 라고 말하는 것이 우스워선지, 아님 웃기지도 않아선지 알 수 없었다. 나이 차이를 굳이 묻는 것에도 순간 헷갈리고 있었다. 아, 세 살 차인데. 저도 학교를 일찍 들어갔으니. 근데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녀는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보통보다 한 살이 더 많았으니. 큰일날 뻔 했네. 진은 입안에 침이 말랐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는 식빵을 맛으로라기 보다 갓 구워낸 바삭한 질감으로 맛있게 먹고 갔다. 진이 잼을 더 바를 꺼냐고 물었으나 아니라면서. 단 걸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듯. 바래다 준다 했으나 어둡지도 않은데. 하면서 동생방을 흘낏 건너다 보며 그냥 가겠다며.

음...진은 뭔가 동생 때문에 제대로 안되었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났다. 빵 잘라 담았던 접시를 덜컹거리며 개수대에 넣어두는데 기척도 없이 이수가 나와있었다.

" 씻어 두라고. 엄마 와서 저녁 차릴 때 귀찮쟎아. "

식빵 먹으면서 뭘 접시까지. 하더니 식탁 앞에 앉아 마저 중얼거린다.

" 버터 나이프에 포크까지. 아주 공주님이시구만. "

" 뭐라 그러냐, 너. "

" 걔 뭐야? 소꿉장난 해? 고등학생들끼리? "

" 야, 너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너하고 나이차가 몇 인데. "

" 얼씨구. 누나야말로 나하고 네살이나 차이나냐? 두살 반밖에 안되면서, 뭘 그렇게 늙은 척을 하고 싶어 해? 왜, 그 여자애가 한 살 어리다구 깔볼까봐 그래? "

" 그런 애 아니거든. 누가 다 저같은 상황인 줄 알아. "

인상 팍 쓰면서 내가 무슨 상황 ! 하면서 빽 소리를 지른다. 자식, 혼자 찔리기는.

나야말로 찔리네. 하는 진은 음, 두 살 차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생일이 몇 월인가. 담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2년하고 몇 개월이 더 나는 건 아니겠지...설마. 순진하게 기대하는 열 일곱의 진, 그러나 열 아홉의 그녀가 잔머리를 굴리는 만큼 얼마나 더 성숙할 지에 대해선 감도 못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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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아홉의 그녀 4

" 본관 출입문이 커다랗고 두터운 유리로 되어있는데..."

하면서 그녀는 웃음을 흘린다. 점심시간에 부러 나가서 보니 정말 깨지고 없더라며. 또 쿡쿡 웃는다. 웃겨서라기엔 그 얼굴이 너무나 정에 겨웁다. 딸아이가 사고 친게 너무 귀엽다는 듯? 아니면 좋아하는 아이돌이 개그를 하는게 너무 사랑스러웠다는 듯.

" 얼마나 빨리 뛰어갔는지 유리창을 그냥 통과하고도 하나도 다치지 않았대. "

그 말을 하면서는 조금 걱정도 되었다는 듯 살짝 미간을 굳힌다.

" 믿기 어려운데. 그 두꺼운 유리문을 통과했다고? "

진은 지금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티비 프로그램 얘기를 하는 거냐는 듯, 중국 오지의 어느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건을 오래 된 신문기사를 증거로 들이댄들 그걸 어찌 다 믿겠냐는 투로 말했다. 사건에 중심을 두면서.

" 그래? 그런가? "

하는 그녀, 사건의 진실 유무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는 옆반의 여자애가 더 중요한 듯한 그녀의 표정. 짧은 고수머리에 마른 체형, 역시나 키가 크고  그늘 없이 밝고 쾌활한 성격이라는 옆반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그녀. 남녀공학인 고등학교에서 그녀는 같은 써클의 남자애도, 잘 생긴 상급생 오빠도 아닌 옆반 여자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한 번도 말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냥 지나치며 봤겠지. 복도에서나 운동장에서.

진은 또렷하게 의식하지는 못 했지만 이건 일종의 데자뷰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훔쳐보기를 하듯 눈길 꽂고 있다. 중학시절, 한 번도 같은 반인 적이 없었던  키가 크고 성격 활달한 어느 여자애를 줄곧 쳐다봤던 것처럼. 자신이 아닌 주변의 친구들과 큰 목소리로 말 주고 받으며 휘적휘적 내어달리던, 항상 미소를 흘리고 다니던. 적당히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왜냐하면 가끔 운동장에서 체육시간에 피구나 발야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늘 가볍고도 우아하게 콤파스를 놀리며 뛰어다니고 있으니. 던져오는 공을 받아 자연스럽게 튕기기도 하면서 제비처럼 허리를 쭉 펴고 던져 올리기도 하는 것을 운동장의 다른 구석지에서, 아이들의 등 뒤에서 어색하니 성겨 선 채로 바라보고는 했을 테니.

" 다 먹었으면 이제 뭐할까? "

진은 속이 틀어지는 걸 느끼며 그녀의 수다를 끊고 나섰다. 잠시 좋아하는 팥빙수를 느긋하게 먹으며 긴장을 풀고 있었던 그녀는 상념이 끊어지는 것에 채 적응을 못 하고 시선을 잃었다. 금방 이제 뭘 해야 하나하는 고민에 빠지기에 쉽지 않은 듯. 얼굴 굳어지는 그녀를 보며 진은 자신이 사실은 냉정한 성격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얘들이 친구 만나서 다들 뭘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지. 하는 생각을 그녀는 하고 있는 듯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하고 수다 떨다가 아쉬운듯 시계를 쳐다보며 교정의 벤치에서 일어나거나 친구네 집 거실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는 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뭔가 볼일이나 할 일이 있어야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편했기에 기껏해야 숙제나 가사 준비물을 사러 가거나 아니면 같이 시험공부를 한다라고나 해야 친구와의 약속을 잡을 수 있었던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집에서 혹은 거리에서 보내곤 했었다.

" 오늘 피아노 렛슨 취소되었는데, 넌 뭐해? 집에 있으면 나올래? 너네 집이랑 우리 집 중간에 분식점 있지? 거기 팥빙수 시작했더라. "

불쑥 전화를 해 온 진에게 응. 그래. 하고 간단한 답변으로 약속을 잡은 그녀는 분식점으로 넘어오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만 해도 얼떠름한 표정이었다. 통화하고 30분도 안 되어 나온 그녀. 학교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듯, 하얀 블라우스에 플리이츠 스커트와 그와 같은 패턴의 조끼, 갈색 단화 위의 발목 위로 반접혀진 가로선이 참 단정하다. 벌써 초여름, 반팔에 짧은 스커트의 여자들은 학교 근처에서도 쉬이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은 멋을 안 부려도 편안한 티셔츠나 청바지를 즐겨 입고 있었다. 마치 중세 수도원의 견습수녀를 보고 있는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하며 진은 자신이 입고 있는 청색의 체크 남방과 블랙 진을 잠깐 내려다 봤다. 운동화, 나이키를 신고 있었다. 흠...동생 이수와 같이 골라왔던 쇼핑품목이었지만 저 애는 횡단 보도 맞은 편에서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한 손을 들어 귀엽게 웃어보이긴 했으나 어색한 품이. 촛점없는 시선으로 그냥 건너다 보는 듯 하지만  아. 폼 나네.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학교에서 수다하는 여자애들의  오늘의 가장 큰 화제꺼리였던 사건을 옮기면서 시종 옆에서 줏어들은 이야기인 듯, 간접화법으로 두리뭉실 얘기하면서 정작 주인공이었던 여자애를 묘사하는 데서는 구체적인 걸 보니. 그 외모며 스타일이며 행동거지가 기실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보이쉬하며 멀대같고 덜렁덜렁 대는 것이.

" 아직 한낮인데 집에 가서 영화 볼까? 비디오 빌려서. "

"  응? 그. 글쎄. "

완전 당황하는 그녀.

" 집에 누구 있는데? "

비디오 보자 해서? 집에 가는게?

" 없어. 엄마는 일 나가셨고. 동생은 맨날 늦게 들어오는데. "

미간 굳히고 있는 그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무도 없는 집에. 친구네 집인데. 좋다고 벌떡 일어나 놀러가자 해야 하는게 여자친구들 사이의 정석인데.

" 응. 그래. 비디오 가게 어디 있는데? "

말을 하고 있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표정이다.

" 여기서 가다 보면 있어. 시장 끄트머리 쯤에. "

안다는 듯한 표정. 흠. 진은 조금...재미가 동한다.

조금 뒤미처 따라오는 것이 처음 가는 친구집이니 그러하다는 듯의 제스츄어지만 그녀는 모퉁이를 꺽을 지점에서 전혀 망설임이 없다. 저의 집 앞이 시장인데, 옆 동네 시장길을 어찌 이리 잘 아누. 하는 생각이 드는 진. 혼자 재미지고 있다.

" 과자랑 음료수 좀 사 갈까? "

" 별로 괜찮은데. "

" 집에 식빵 밖에 없는데. "

" 식빵? 잼도? "

" 응. "

" 맛있겠다. 식빵에 잼 발라 먹자. "

흐음. 토스트 같은 걸 좋아하시는 군. 맨 달기만 하고 맛도 없구만. 서양사람들의 패스트푸드 같은 걸. 하고 진은 생각했지만 식탁 위에 놓인 2단 짜리 토스트기를 보자 그녀는 어머, 예쁘다. 한다. 아, 그래. 모양새로 먹는 구나. 하고 눈치 채는 진이었다. 엄마가 상차림을 귀찮아 하며 아침, 저녁으로 때우는 걸 보면서는 안쓰러웠는데.

마당의 작은 화단을 보면서도 손질 안된 장미목 몇 그루 있는 것을 보면서도 함박 웃음을 짓던 그녀. 낮은 계단을 몇 개 올라 현관을 들어서면서도 옆으로 이어진 베란다의 빈 공간에 눈길을 준다. 전형적인 단층의 단독주택. 그녀는 지붕이 세모꼴이니 그렇게 경사진 천정이 있는 다락이 있을게 아니냐며 벽면을 휘이 둘러본다.

" 없는데? 다락. "

" 그래? 이상하네. 단독주택들은 모두 있는데. "

초록색 지붕 아래 동그란 창도 있던데. 하는 그녀. 진은 자기도 그걸 밖에서 봐서 알지만 본래 천정 높았던 거실에 빛이 너무 드는게 싫었다던가, 낮게 천정을 다시 치면서 안으로 숨었을 꺼라고 말해 주었다. 한번도 거실의 천정에 대해 생각해 본적 없었지만 지금 지붕과 집의 모양새를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하, 완전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구만. 하는 생각을 하며 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집 앞까진 뻘쭘하게 따라오던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놀라움과 미세한 흥분까지 나타내자 진은 저도 따라서 기분이 흔들흔들 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단화를 벗고 얌전히 마루로 올라서며 흘낏 뒤돌아 현관 바닥에 신발들이 가지런한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도 가슴이 꾸욱 눌러지는 듯 했다. 흰색, 반접은 양말, 자그만한 발이 사뿐히 마룻장을 밟는다. 아, 발...진짜 작다.

운동화보다 단화가 더 작아보이기는 했으나 벗고 보아도 제 발은 발가락도 길어 여자치곤 왕발이라 할 만한데, 이 애는 거의 전족의 중국 여인들 수준이군. 몸이 가벼워 달리기를 잘 했나. 하고 생각하는 진. 중학시절, 400계주를 할 때 제 앞에서 뛰던 그 애가 훌쩍 거리를 띄우고 멀어지던 것을 떠올렸다. 순 악바리라니깐. 그런 생각을 그때에도 했었는데. 지금도 체력장에서는 1등급이라던가. 몹시 뚱뚱했던 학년톱이 시기의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기에 함께 시선을 주었었는데 그런 식이니 공부를 잘 하는 애들도, 못 하는 애들도 그녀를 가까이 하기를 꺼렸던 것 같다. 뭐, 말수라도 많고 좀 편한 표정을 지었으면 괜찮았을텐데. 진은 그러나 혼자 있던 그녀가 왠지 더 기껍게 느껴진다. 지금, 자신이 그녀와 함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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