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데 비가 쏟아졌다.
지하철역까지 버스로 네 정거장,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가까운 가게로 뛰어가 문 앞에서 젖은 가방과 옷을 터는데 한 분이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세요?'
네, 웃으면서 대답하고 보니 이분, 한쪽 눈은 충혈되었고 눈 밑으로 그늘이 짙었다.
'갑자기 비가 와서 피하셨나 보다'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계속 말을 건네면서 내 눈을 바라봤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버스가 안오네요, 그런데 무슨?
그제야 언뜻 눈빛이 흔들리더니 자동차열쇠로 주차장을 가리켰다.
'딸 아이 데리러 지하철역 가는 길이예요, 같은 방향이면 태워드리려구요'
낯선 사람의 차는 타지 않는데 비 탓이었는지, 그분의 너무 피곤해보이는 얼굴 탓이었는지, 나도 모르게 운전석 옆에 올라 앉았다.
'이 근처에서 일하시나 봐요?'
네, 오늘부터 일하게 됐어요, 대답을 채 마치기도 전에 손바닥 안으로 명함 한 장이 쑥 들어왔다.
'저는 화장품 회사 홍보원이예요, 방문판매도 하구요, 마사지도 해드려요. 사무실에 여자 손님들 오시면 이거 좀...'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브랜드였다.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분은 무슨 말을 덧붙일 듯 말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시동을 걸었다. 그냥 뛰어가볼 걸 그랬나, 싶을만큼 지하철역은 가까왔다.
덕분에 금방 도착했네요, 태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차 문을 닫기 전 한번 더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 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고, 처음 다가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절박한 마음을 담은 채 내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고맙습니다, 말 걸어주셔서.
계단을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걸고 싶을 때, 걸어야만 할 때
저는 아무도 찾지 못했고
아마 지금도 찾지 못할 것만 같거든요.
캐 나다에 오기 전 서울에서 만났다면, 아니 서울로 가기도 전 고향 도시에서 만났다면, 그런 일을 겪을 때 내 표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 멀고도 낯선 도시에서 아무 것도 추측할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보면 내 얼굴이 어떨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한국인이세요?' 라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조금은 알기 때문에 그 말을 건네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피하지 않을 뿐이지, 피하고 싶은 마음까지 숨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분의 차 안이나 옆얼굴을 훔쳐볼 생각도 못하고 앞만 바라보면서 제발 내 얼굴에 아무 것도 묻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무슨 말이건 다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딸 아이 만나 무사히 귀가했기를
데리러 갈 딸이...존재하기를
비는 더 거세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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