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기획안, 전체구성안, 촬영구성안, 편집구성안, 대본...
<선택은 없다>는 유난히 갈등도 많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5개월 동안 내가 작성한 문서량은 A4 용지로 300장을 넘어선다
그러나 내가 공들인 시간의 흔적은
완성된 다큐멘터리에 성우의 목소리로만 남아있다
아주 오랜만에 충분히 감정이입을 해서 작성한 나레이션이었지만
엄마가 되어본 적 없는 나로선 부끄러운 대목이 많다
작년 10월에 완성해서 올해 2월에 KBS <열린채널>에 방영되었고
지난 2년간 방영했던 모든 영상물 중에서
우수작으로 선정한 6작품 안에 들어갔다고 한다
방송사를 떠나고 나니 방송프로그램으로 상을 받네,
씁쓸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고 묘한 기분...

아래는 대본에서 인터뷰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본문이다
--------------------------------------------------



[나레이션]

선택은 없다-일과 양육 (한국여성민우회 제작, 이혜란 연출)

[1]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와 내 시간을 이끌어 가는 건 이제 내 아이다

가끔 삐걱거리는 몸뚱이처럼
내 마음도 집안에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분주하지만 어쩐지 외롭고
익숙해졌지만 어딘가 어색한 하루하루,
엄마라는 존재로 서서히 적응하는 동안
둘째를 가졌다

아이를 낳기 전 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시간의 주인은 나였다
남편과 같이 일하던 시절 내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둘째가 태어나면 또 저만큼 멀어질 세상
세상의 엄마들은 지금 행복할까

[2]

저녁 7시, 옆자리로 자꾸만 눈길이 간다
부장님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고
마음은 벌써 문턱을 넘어서는데

몇 걸음만 늦어도 아이는 전화를 하고
보고 싶어? 그래 나도 보고 싶어
안쓰런 얼굴 품어주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

돌아와도 쉴 틈은 없다
내 손길이 닿기를 기다리는 건
아이도 집안일도 마찬가지...

아빠한테 갈래, 아이는 칭얼거리고
오늘도 남편은 야근 중
종일 헤어졌다 만나도 고단한 우리
나도 가끔은 등을 돌리고 싶다

나쁜 꿈이라도 꾼 것일까
오늘따라 잠투정이 유난하다
차가 붕 가버려, 친구도 붕 가버려
늦기 전에 유치원 가자

잘하고 있나? 거울 속의 내가 묻고
조금만 참자, 거울 밖의 내가 답하고
어제와 같은 아침
씁쓸한 마음 자물쇠로 채워놓고
일하는 엄마는 집을 나선다

[3]

막내와 함께 나서는 아침
그 작은 손 종일 손바닥에 맴돌고

아이 셋을 이끌고 혼자 서울에 온 지 3년
둘째 낳고도 미싱을 잡았던 나
낯선 이 곳에서 간병인이 되었다

남의 아픔을 돌보다 보면
내 아픔도 덜어진다지만
구청에서 지원받는 생계비로는
네 식구 살림이 빠듯하다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오는 둘째
아침에 미리 해둔 밥 한 그릇 볶아 먹고
술래잡기하듯 골목길로 나선다
막내가 돌아올 시간
집까지 데려오는 건 날마다 언니 몫이다

책가방도 숙제도 던져 놓은 채
만화영화 보느라 허기를 잊었던 아이들
엄마 발소리에 달려나오면 해가 저문다

오늘도 찌개 하나로 둘러앉은 저녁상
잘 먹어서 고마워, 잘 커줘서 고마워...
방 한 칸에 넷이 누우면 밤이 깊었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저희들끼리 크는 아이들...
2004/03/30 07:33 2004/03/30 07:3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창작과비평사'에서 일하는 후배의 요청으로 썼던 글, 벌써 5년전이다.

 (아래 글을 이 블로그에 옮긴 건 2007년)

 

 

 

주관과 객관 , 과거와 현재의 충돌이 발굴한 "진실"  

 - 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진출작 「먼지, 사북을 묻다」

 

                                                                              나루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은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우리가 기억하건 못하건 그 사건은 시대에 따라 명패를 바꿔 달며 어두운 입구를 열어둔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보일 듯하던 진실은 다가갈수록 다시 저만치 물러나곤 한다. 언제 무너져 질식할지 모르지만 쉬지 않고 장애물을 폭파하며 진실에 다가가는 그 작업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등을 돌린 '독립영화'로 세상에 선보이는 것은 더 외롭고 고단할 것이다.
 


서울독립영화제 홈페이지



  감독이 더듬어간 궤적을 바라보며 '객관적 사실'이라는 나침반과 '감동'이라는 불빛을 동시에 기대할 관객, 같이 손잡고 걸어갈 '우리 편'을 기대할 사건 관련자들, '작가정신'과 '진정성'으로 그려낸 피땀 어린 지도를 기대하며 스크린 앞에 모일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다보면 감독의 어깨는 한없이 무거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메라는 너무나 제한적인 도구이며 편집한 화면은 애초의 기획의도를 배반하게 마련이다. 감독의 오감을 통해 걸러진 것들을 담아내는 게 영화라는 걸 잘 알면서도 '진실'에 관한 다양한 요구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다큐멘터리'다.

◁「경계도시」장면

  오는 12월 20일(금) 개막할 '서울독립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는 지난해 27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한국독립단편영화제'의 새로운 이름이며 과거 영화진흥공사가 주관하던 '금관영화제'의 맥을 발전적으로 이어온 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극 실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독립영화의 모든 장르를 단편경쟁(25분 이하), 중편경쟁(60분 미만), 장편경쟁(60분 이상) 부문으로 나누어 각 장르간 경쟁 방식을 도입하고 있어 국내에서 유일한 '경쟁 독립영화제'로 불리고 있다)가 총 40편의 본선 진출작을 확정하고 올해의 슬로건이 '충돌'임을 발표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모든 낡은 것들과 충돌을 시도한다. 그 충돌은 관습적인 상업영화들과의 충돌이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적 사회의 흐름과의 충돌이다. 또한 독립영화 내부의 낡은 경향과의 충돌이다.(홈페이지에서 발췌)" 본선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경계도시」(홍형숙 2002, 80분) 「그들만의 월드컵」(최진성 2002, 60분) 「먼지, 사북을 묻다」(이미영 2002, 85분)라는 세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가 눈길을 끈다. 이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작품은 올해 인권영화상을 수상했고 '인디포럼 2002'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던 「먼지, 사북을 묻다」이다.

「그들만의 월드컵」장면 ▷


   이미영 감독이 5년 동안 탄광촌에 거주하며 전작 「먼지의 집」 (1999,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초청,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 신진다큐멘터리 감독상 수상, 스위스 프리버그 영화제 초청)을 발표했다는 것과 올해 들어 두번째 작품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긴장했다. 15년 전에 일어난 어떤 사건(87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투쟁)을 취재한답시고 2년을 흘려보낸 내게 이 영화는 부끄러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먼지, 사북을 묻다」는 1980년 4월에 일어났던 '사북항쟁'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사북항쟁은 강원도 사북에 있는 동원탄좌에서 일어난 노동쟁의 사건이다. 임금인상투쟁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당시 그 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맞선 노동자이자 지역주민인 피해자들의 투쟁과 성폭력 사건까지 다양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건이다. 영화는 풍부한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자리를 바꾸며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사북지역의 사건 전개과정을 고스란히 거슬러올라간다.

  감독은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감독의 목소리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지도, 결론을 향해 조급하게 앞서 가지도 않고, 과거와 현재를 굽어보는 위치에서 군림하지도 않는다. 극히 사적인 감상을 털어놓기도 하고, 거리를 둔 채 현장을 관찰하기도 하며,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등장인물의 입장에 동화되기도 한다. 목소리는 자료화면과 재연, 인터뷰와 독백을 넘나들며 서로 충돌하고 조금씩 다른 색깔을 입혀 '사북항쟁'을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이런 특징은 80년대 이후 정치적 사건을 다룬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구별되며 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돋보이게 하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먼지, 사북을 묻다」장면



  군인과 경찰의 고문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혀낸 점, 분노한 노조원들이 저지른 '어용노조지부장 부인 집단린치 사건'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던 점은, 관련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당시 상황을 바라본 감독의 '주관적' 시점이 빛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당시 고문에 가담했던 자들의 권위적이고 오만한 현재 모습을 집요하게 추적해서 드러내고,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의 행렬 속에서 한 증언자를 찾기 위해 무전기를 받아드는 장면은 압권이다.

  반면에 투쟁을 결의하는 노조원들의 목소리를 재연 더빙한 장면은 어딘가 어색하고, 촬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전달하는 대목은 그 솔직함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다소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동시에 갖게 한다. 또한 당시 경찰이 자행한 '성고문'에 관해 충분한 심증과 확신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진술을 얻지 못함으로써 숙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아직도 성폭력 피해자의 발언을 포용하지 않는 시대의 한계는 물론, 피해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선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한 감독의 한계도 엿볼 수 있다. 당신들의 행동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광주항쟁'이나 '부마항쟁', '제주 4ㆍ3 항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했던 '사북항쟁'을 끈기 있게 채굴,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정치적으로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의 출발점이자 80년대 노동운동의 첫걸음이었음에도 '불순분자의 난동'이라고 기록한 역사 왜곡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영화다. 이 작품으로 인해 관객들은 다시금 한국 인권의 현주소를 확인할 것이며, 과거의 '경력'을 수시로 들이밀어 관련된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까지 규정하는 권력의 폭력성에 몸을 떨 것이다.

  관찰자와 대상, 사실과 기록, 과거와 현재, 자아와 또 다른 자아가 서로 경계를 허물며 충돌했다가 멀어지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하는 이 작품을 통해 '다큐멘터리'가 가진 또 다른 매력을 발굴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창비 웹매거진/2002/12]

※ 창비 웹매거진 내용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창작과비평사 양측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 그런데,  창비측의 동의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나루, 2007, 10, 22)

 

 

2002/12/22 07:24 2002/12/22 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