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5/10/21 17:18

최근 '영유아기 보육에서의 권력과 정서'에 대한 원서의 내용을 아는 모임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3세이하 아이들의 생활 경험을 살펴보고, 그 안에 발생하는 문제적 경험들, 일상에 미시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권력, 그 권력과 결합되어 있는 정서를 적어놓았다.

 

그중 이번에 내가 번역을 맡은 부분이 [정서]라는 장 중에서 '소외된 노동으로써의 보육'인데 한마디로 끔찍.

 

실제 나 역시 정서노동자로써의 보육노동자 입장에서
애정 충만한 정서에 대한 요구와
정서적 중립의 역할을 잘 수행하라는 전문성에 대한 요구
사이에서 매분매초 갈등했던 것 같다.
게다가 동시 다발적 사건사고와 아이들의 요구사항에 묻혀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감정의 격양을 느낀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이러한 정서 왜곡 상태를 참지 못하지만 아이들에게 쏟을 순 없으니 정서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일정 시간 지나면 아동과의 상호작용에서 나 자신도 무심하고 기계적인 대응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정서적 교감이 없는 돌봄, 이 정도 되면 어린이집은 소외가 계속 전이되면서 다양한 폭력의 피해자가 밀집된 느낌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정서노동자에게 있어서 정서노동의 한계시간이란 건 경력이나 능력, 또는 노동조건의 향상 등과는 관련 없는 게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그 날 모임에서 자신이 아동과 정서적 교감 및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신참이냐 베테랑이냐에 관계없이, 1일 4시간에서 30분까지 다양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보육노동자는 아동과의 정서 교류를 중단하고 정서를 철회시킨 상태에서 기계적 대응 내지는 무대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아동과 있는 것보다 보육 준비활동을 하거나 심지어 청소, 사무 등의 잡무를 선호하는 사람도 다수이다.

보육노동자 1인에게 1일 4시간 초과의 아동 직접 돌봄을 수행하는 것은 양자간 인격 파괴 행위가 아닌가 싶다.
어여 1반 2교대, 3교대제를 실현시켜야 할텐데...

 

내 번역은 나도 못 믿겠으니, 조만간 여력이 되면 원본 타이핑을....(할 수 있을까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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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Power and Emotion in Infant-Toddler Day Care]
저자 Robin Lynn Leavitt
출판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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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 Child care as Alienated Labor (p 63~66)
소외된 노동으로써의 보육

 

여기서 설명하는 보육노동자의 돌봄은 소외된 노동을 의미한다(Marx, 1844/1983).
소외된 노동은 (day care center를 포함해서) 사회적 합의로 인해 도출된 우선 순위가 정해지면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이로 인해 노동을 함에 있어서 해당노동자는 자기 노동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고, 만족감과 행복한 삶을 상실하게 되며, 이런 경우엔 사회적 명예 역시 부족하다. 보육노동자는 종종 해당 프로그램 운영상의 결정 과정에서 제외된다. 예를 들어 영아를 새로운 방으로 이동시킬 때나 아동 대 교사비율을 조정할 때 등의 결정 과정에서 제외당하는 것이다. 보육노동자의 업무는 그들에게 부과되는 실제적인 압박에 저항하려는 시도를 통해 부분적이나마 서서히 발전해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보육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동안 지속적이고도 예측 불가능한 아이들의 요구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통제력이 감소하고 자신만의 자율성이 손실됨을 느끼게 된다.

보육노동자는 무력함, 무의미함, 고립, 자기소외라는 형태의 소외감을 경험한다. 보육은 미국에서 낮은 임금의 직업이다(Modigliani, 1986). 보육노동자의 일상은 고역스러운 절차의 과제로 채워져 있다. 이를 테면 기저귀를 교체하고, 급간식을 하는 등의 활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보육노동자의 물리적 행복에 영향을 주는 직업적 위험요소는 거의 보고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를 자주 안아줌으로써 무리하게 되고 전염성 질병에 노출하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우는 행위는 두통이 나타나고 위장이 뒤집히는 등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Reynolds, 1990). 거기에 감정적 철회(틀어박히기)까지... 보육노동자는 1,2명의 성인과 함께 일하지만, 통상 성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주의를 요구한다. 보육노동자들은 아이들 사이의 분쟁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요구들이 일상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제도적 자원의 부족뿐 아니라 돌봄 수행에 있어서 해결 곤란한 상황들을 더욱 악화시킨다.
소외는 결핍과 소원함(or 이간, 불화)이다(Schwalbe,1986). 이는 소원한 상태를 말한다(Goffman,1987). 소외된 정서노동으로써의 아동 보육은 보육노동자와 아동의 정서 인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보육노동자가 아동의 행동, 정서적 표현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반응하는데 실패하는 한, 그리고 아동과의 상호 동등한 관계의 형성을 이루지 못하는 한, 아이들 내부의 아이들만의 모습 또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한, 보육노동자의 “피로한 노동”은 소외되고 소외시키게 된다. 보육노동자의 소외는 아동에게 전이되고, 아동은 소외된 보육노동자의 노동 속에서 그들의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2명의 보육노동자가 4명의 영아와 함께 마루에 앉아있었다. 또 한명의 아이 Alan(생후 7개월)은 그들 위로 기어오르며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었는데, 한 보육노동자가 그에게 말했다. “안돼, 무게 많이 나가서 싫어. 뚱보, 비켜!”. 그리곤 "Martha(다른 보육노동자)에게 가봐라“라고 말했다. Alan이 Marth를 바라보자, Martha는 ”안~돼, 난 안돼, 거기 있어“라고 말했다. Alan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리고나서 첫 번째 보육노동자가 그를 아기 놀이 울타리 안에 옮겨놓고는 ”여기서 놀아, Alan"이라고 말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Alan은 아기놀이 울타리 밖으로 기어오르려했으나 보육노동자가 Alan에게 호통을 치자 그만두었다.

 

보육노동자가 Brad(생후 6개월)에게 점심 우유병을 주고 있었다. Brad는 작은 탁자 위에 있는 영아용 의자에 앉아있었고, 보육노동자는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우유병을 든 채 앉아있었다. Brad는 우유를 천천히 마시고 있었고, 모빌이 매달려 있는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보육노동자는 반복적으로 Brad의 입에 우유병을 넣었다 뺐다, 앞으로 뒤로 움직였다. 그리곤 “자, Brad, 세상에 아니 이 방에 아기가 너 하나 뿐인 줄 아니?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먹어.”

위와 같은 현장의 모습을 통해 소외된 정서 노동으로써 보육은 보육노동자가 아동을 적개심을 품은(또는 부적절한) 대상으로써 맞닥뜨리면서 악의에 차고(또는 부적절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의 현장이 된다. 보육노동자가 느끼는 소원함, 소외, 적개심은 -아동을 통제하고 처벌하고 무시하는- 부정적 권력의 습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이번 장의 구석구석에 인용된 현장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우리가 애를 잡는 건 아니잖아.
   저리 가줄래? 그거 꺼. 듣기 싫다.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조용히 해!
   누가 나 좀 여기서 내보내줘!       <------------- 오, 공감 백배
   난 ~~거 싫어... 저리 가!  

 

정서적으로 소외된 보육노동자가 보이는 모습은 부모에게 제공하기 위해 보육프로그램 리플렛에 등장하는 사진과는 대조적으로 아이러니하고 적나라하다. 이런 리플렛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문구들을 살펴봐라. 애정 넘치는 돌봄의 신화를 조장하고 있다.

 

   돌보는 성인들...
   따뜻하고 신뢰감있는 분위기...
   매일의 일과는 아이들을 기르는데 초점을 맞춰 수행되고 있다...
   아이들은 안전하고 애정넘치는...
   따뜻하고 아이를 기르는 분위기...
   돌보는 자는 모든 아이들과 성실하고 참된 상호작용을 한다...
   우리는 배움이 놀이라고 확신한다...
   따뜻하고 애정 넘치고 안전한 환경...  

 

엄마 수준까지의 사랑이란 건 팔기 좋은 상품이고, 종일 보육은 어떤 면에서 우리들의 문화 속에 굳건히 지키고 싶은 인간 감정을 상업화시킨 또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Hochschild, 1983). 보육 노동은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경험 중 소외되고 자기 파괴적인 정서적 현장의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Denzin, 1984). 무제한적으로 주어지는, 풍요로운 사랑의 신화는 몰락했다. 영아보육은 친밀감이 드는 잘 알고 있는 세상에서 낯선 자로 가득 찬 잘 모르는 세상으로의 이동을 포함한다(Loseke & Cahill).

 

보육노동자가 아이를 매우 사랑하는 엄마처럼 되어야 한다는 이상향과는 관계없이 이윤 창출을 위한 업무 형태가 그들을 종사자로 변형시키고 엄마라는 존재와 구분짓게 만든다(Loseke, 1989).

 

종사자로써의 보육노동자는 비슷한 연령의 많은 아기들을 책임져야 하고, 행동반경이 한 곳으로 제한된다. 그들은 관련 없는 다른 보육노동자와 자신의 일을 공유하고, 운영책임자와 부모, 지자체 감사 등 법적 책임을 가진 대상에게 설명할 의무를 지닌다. 보육노동자가 애정어린 돌봄을 제공한다는 생각은 동시에 그들이 정서적 중립의 역할로 이해하게 되는 “전문가”로써의 기대와 모순된다. Sheldon White(1983)는 보육노동자가 “아동의 정서적 삶에 들어가야 함을 거절하고 있고 ...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지는 오히려 보육노동자가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은 예측, 측정 불가능한데다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방식을 취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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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1 17:18 2005/10/2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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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유 2005/10/22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척 공감이 가는 내용이네요. 저도 조카들 하고 가끔씩(?일년에 두 번 명절 때^^) 놀아 주는데, 두 시간 정도 지나면 진이 다 빠져 버립니다. 근데 세 시간 넘어가면 조카들이 미운 오리 새끼가 되더라고요. 어쨌든 보육 교육은 개별 부모의 손을 떠나서 사회화, 공공화(시장화, 상품화가 아닌)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노동자를 새롭게 생산하는 진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2. jineeya 2005/10/24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재유/공감 감사(^^)/ 뭔가 낱개로 알던 것들을 누군가는 연구로 만들어 정리하고 있었다는 게 나름 고마울 때가 많슴다.

  3. 이재유 2005/10/25 1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의사소통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 동지의 글에서 많이 배우고 있슴다^^ 고맙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