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20C초라하니 한 100년쯤 전,
설치 미술의 원조격인 다다이스트 쿠르트 쉬비터스가 'Merzbau'(Merz's Room)라는 설치작업을 하였다는데...
21C 상당 최근,
이 이름을 본 따 설치와 영상매체가 어느덧 주류가 된 현대미술의 모습을 관조해보는 전시회에 다녀오다.
19C, 사진기앞에서 미술의 진정한 의미를 번민하던 화가들이 있었다면,
21C, 뉴미디어 시대 각종 technology 의 표현력과 확장성 앞에 경악해마지않을 화가들은 좀더 다른 차원의 고민이 배가되었으리라.
그들이 보고 있는 미술의 풍경, 사회의 풍경, 세상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데비한의 [생각하는 비너스]
왠지 '비너스'라는 이미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당당히 선 것이 아니라 쭈그려 앉은 비너스.
여성성의 대명사인 '비너스'가 남성미와 지성미를 두루 갖춘 '생각하는 사람'의 오마주를 어설프게 뒤집어 썼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당혹감이란,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에 잘도 길들여진 우리의 머리 속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과도 같다.
문경원의 [passage:cityscape - Seoul & Pyongyang]
두 개의 스크린에 비친 서울과 평양, 두 도시의 풍경. 그러나 어느새 두 스크린을 관통하며 다니는 차들이 생겨나고 차가 지나다닐때마다 화면은 총 천연색으로 덧칠되어진다.
결국 사라지는 구분들, 심지어 나중엔 어느 쪽이 어느 도시였는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정진아의 [분예기]
수많은 예쁜 똥들.^^
대체로 두번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아야 할 것을 다시 돌아보고 미소짓게 만드는 작품이다.
화장실에 갔더니 온통 '똥'마크가~
이희명의 [변형식물시리즈]는
사람의 신체들을 하나씩 분절해서 심어놓은 화분 모양을 하고 있다.
귀동냥해서 들은 바로는, 작가는 특히 여성이 갖는 육체에 대한 두려움과 낯설음을 표현한거라고.
조은경의 [emptiness]는
여성용품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투명한 속옷 전시대에 화려한 분위기의 여자 속옷들이 걸려있다.
속옷들은 모두 여성의 그것들이며,
실제 몸을 따뜻하게, 몸을 보호하는 기능보다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대상화된 여성이 이 사회에 존재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것들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이민호의 [휴대용 풍경 : 우리가 사는 이곳]은
꽤 알기 쉬운 주제를 가지고 있다.
벽에 걸린 스크린 속에선 공장 굴뚝에서 끊임없이 매연이 뿜어져나오고, 그 아래 작고 검은 상자안에는 하얀 꼿들이 가득하다.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추모의 꽃들.
김지윤의 [Red Applause]
전시관이 옛 벨기에영사관 건물이었던 관계로 고풍스러운 벽난로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작가는 벽난로 안에 연극 무대를 마친 후 박수 갈채받는 배우들의 장면만 모아 영상을 비췄다. 마치 작은 사람들이 펼치는 작은 연극 무대에 온 기분이다.
데비한은 비너스를 가지고 한 작품이 꽤 많은데, [미의 조건II]의 경우 입술, 코, 바라보는 각도, 눈 등이 서로 다른 비너스 두상들을 살펴볼 수 있다.
과연 美의 조건은 무엇일까? 美에 조건이 있긴 한 걸까?
이배경의 [Video Chapel]
벽면 하나 가득 넘실대는 파도가 세로로 조각난 영상프레임에 담겨있다.
내가 발을 움직이면 바닥에 붙은 센서를 통해 화면이 변형된다.
아주아주 예전, 광주비엔날레에서 천정과 바닥에 거울이 붙어 무한한 공간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작품도 만약 사방에 설치되었다면 격정적인 바다 속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데비한의 [적자생존시리즈]는 수술대 오르기 바로 직전과 같이 비너스 얼굴에 성형수술 시 사용하는 싸인펜 자국이 그려져있다.
최수앙의 [The Test Mice]는
햄스터 키울 때 쓰는 아크릴 통 안에 톱밥이 잔뜩 깔려있는데,
그 안에 있는 건 인간의 형상에 쥐의 꼬리를 한 것들이다.
어떤 것은 아픈 듯 축 늘어져있고, 어떤 것은 밖을 향해 외치고 있다.
한효석의 [불평등의 균형]과 [Uncanny]도 최수앙의 작품과 비슷한데,
인간 얼굴에 돼지몸, 배가 갈려 곧 죽을 듯 한 모습이라던가, 살코기로 구성된 인간의 얼굴을 표현한 것 등이 그러하다.
한효석은 [인간은 생각해야 한다는 저주를 받았다.]는 작품에서,
거대한 목석 위에 앞뒤로 얼굴인 사람의 목을 걸어놓았는데,
이러한 모습- 특히 동물과 치환된 모습-을 통해
인간은 죽음, 죽임, 존재에 대해 사고해야한다는 점에서 과연 저주를 받았다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게 만드는 한효석과 최수앙의 작품은 다소 끔찍하지만,
바로 우리들이 매일 저지르는 일들이다.
* 사진 출처
데비한 그림 출처
http://www.debbiehan.net/
http://cafe24.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43X5&fldid=3wq7&contentval=000Uzzzzzzzzzzzzzzzzzzzzzzzzzz&nenc=RP5gYe6kqIPO7ggBUQLz_Q00&dataid=1921&fenc=Zx.nje4_rX50&docid=CDe1Hf4D
이희명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wpffldlsej/70006530706
http://blog.naver.com/11track/90011621456
정진아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bodmin422/120015723259
*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안타깝게도) 17일까지 있었다.
연장할 지 않할 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가봤는데 아담, 깔끔.
한참 내린 눈에 즉석해서 생긴 눈사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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